※ 094화
“자잔의 주군이 당신이라 들었어.”
“모르는 인어가 없는 사실이지.”
“그리고 권속인 자잔을 버렸다고 들었고.”
저 멀리 인어들이 우왕좌왕하는 꼴이 다 보였다. 겁을 상실했냐는 듯이 데아를 쳐다보는 눈초리가 사나웠다.
물론 데아는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알고 있는 건 단편적인 사실뿐이었다.
“뭐… 그래. 물론 100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야생 동물의 법칙이라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가 쉬워진다. 약한 새끼는 버리고 가는 것은 성체의 본능일 뿐, 나쁜 게 아니다.
하지만 조금의 눈길이라도 주지 그랬어. 자잔은 당신의 시선만으로도 기뻐했는데. 그래, 이것도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렇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작은 자비 정도는 베풀 수 있잖아. 제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량을 베풀어 줘. 당신이라면 어려운 거 아니잖아. 차라리 추방을 시키거나 노동을 시켜.”
이러면 내가 주워갈 수도 있는데!
“사형만은 피해 줘.”
창대와 돌부리에 걸려 있던 불어터진 살코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자잔이 된다고? 강하게 요구하는 데아의 시선이 점차 떨려 왔다.
기필코, 기필코 막아야 했다. 어쩌면 무력을 써서라도. 자잔의 의견을 묵살해서라도.
“지상에 피는 꽃과 태양을 아나?”
“어?”
트리야가 마치 시를 읊듯 속삭였다.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충성스러운 개와 주인은?”
“…….”
“주군과 권속의 관계는 딱 그 정도야. 맹목적이지만, 일방적이지.”
트리야가 톡, 손가락으로 데아의 코를 가볍게 쳤다.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너는 익숙하지 않아 잘 모를지도 모르겠군. 세상의 모든 권속은 원래 그래. 모두가 주군을 갈망하지. 그건 본능이야. 그러나 주군은 달라.”
트리야가 손을 까딱이자 알현실 안의 모든 눅눅한 천과 베일이 휙―! 걷어졌다. 발광석이 강하게 빛을 흩뿌리고, 흐리게 물속을 떠다니던 푸른 피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그들은 권속을 신경 쓰지 않지. 주군이 권속에게 베푸는 건 사랑이 아니야.”
“…….”
“모든 것의 최초부터 그래 왔지. 내력이 이런 걸… 뭐 어쩌겠나?”
말에 쐐기를 박듯, 트리야는 비웃었다.
시종과 간부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모든 것을 정돈하고, 새롭게 알현실을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 있는 메시지는 하나였다.
축객령.
그리고 아득한 환청이 들려왔다.
―이게 당신의 사랑인가요? 오직 죄책감만을 안겨 주는 이게? 이러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나요?
―세상이 멸망해도, 모든 인어가 죽어도 괜찮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왜… 언제나 안전하질 못하지?
―당신은 나를 배신했어.
아, 데아는 눈을 더 빠르게 깜빡였다. 뭐지, 이 목소리는? 꿈에서 들은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심해를 닮은 녹색 머리카락, 오열하는 익숙한 얼굴, 익숙한 목소리, 옆에서 인어를 위로하는 또 다른 인어, 얕은 해변가의 비극.
안 돼, 트리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내 기억이 맞나?’
데아는 문이 닫히는 알현실 밖으로 다정하게 쫓겨났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결정했다.
오늘,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혁명군에 가서 유리를 만날 것이다.
◈ ◈ ◈
“야, 야, 너!”
트리야의 알현실을 나오고, 방에 들려 간단한 짐을 쌌다. 그리고 왕궁 밖으로 휘적휘적 가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데아를 불렀다.
조금 수척해진 도라안이었다.
익숙하게 재수 없는 말투, 화려한 장식을 찰랑거리는 눈부시게 잘생기고 아름다운 인어는 분명 도라안이었다. 그의 뒤에 서있던 기리안이 데아를 보고 어쩔 줄 몰라하더니 이내 얼굴을 붉히고 푹 고개를 숙였다.
“왜 불러.”
“왜 불러―? 하여튼 저 건방진 말투는……!”
그러나 도라안은 이내 평정심을 되찾더니 한 번 고개를 까딱했다.
“됐고, 지금 당장 내 방으로 가자고― 같이 갈 곳이 있어. 영광인지 알아. 내가 직접 안내해 줄 거니까. 네가 나와 같은 제왕님의 최측근이라 봐주는지 알아!”
“거절. 나 바빠. 갈 곳 있어.”
“뭐, 뭐?”
도라안이 펄펄 뛰었지만 데아는 사뿐히 무시하고 후다닥 달려 나갔다.
“너 후회할 거라니까?!”
“아 됐어. 다음에 갈게!”
도라안은 얼굴만 봐줄 만한 어린애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는 유아였다. 너무 오냐오냐 커서 세상의 험함을 모르는 높은 탑 속의 왕자님.
그런 어린이를 상대하는 시간에 혁명군에 가 정보를 얻어 내는 편이 좋지.
◈ ◈ ◈
그렇게 데아는 몰래 망토를 거꾸로 뒤집어쓰고, 길을 일부러 빙글빙글 돌며 혁명군 본부에 입성했다.
―오랜만이야.
유리가 데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잘 왔어. 안 그래도 ‘오래된 인어’들이 오셨거든. 너도 같이 가자. 어쩌면 왕궁의 특급 정보나, 동굴을 넘어 지상으로 나가는 방법을 얻을지도 몰라.
정보라니.
“설마 태초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어?”
―태초? 아, 너 태초님에게도 관심이 있었니! 세상에! 하도 제국에서 탄압을 해서 이제 연구가들은 씨가 마른 줄 알았는데 남아 있었다니! 당연하지! 그 누구보다 태초님을 잘 아는 건 ‘오래된 인어’인걸?
나이스 타이밍.
좋은 때에 도착했다. 데아는 유리를 따라 혁명군 마을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두 명의 인어가 있었다.
“어?”
그런데 그중 한 명은 이미 알고 있는 인어였다. 얼굴이 와장창 구겨졌다.
‘피파글랜!’
“힘들 때, 우리를 찾아와. 결국 넌 오게 될 거야.”
마지막으로 싸우고 헤어질 때 피파글랜이 속삭인 말이 떠오른 건 왜일까?
‘왜겠어, 정말 내가 내 발로 찾아 왔으니까!’
“세상에. 반가운 얼굴이네.”
데아를 본, 정확히는 잔뜩 찌푸린 데아의 얼굴을 본 피파글랜이 반갑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자잔이 말한 바에 따르면 ‘피파글랜’은 중립 인어다. 그런데 혁명군에 있다니. 역시 중립은 위장인가.
“안녕. 오랜만이지?”
―아는 인어입니까?
오랜만이긴. 네가 나를 전기 구이로 만들려고 작정을 했을 때로부터 1주일도 지나지 않았어!
“그럼. 저번에 내가 대련을 시켜 줬지.”
잘 살펴보니 저번에 데아가 꿰뚫은 팔과 꼬리가 원상복구 되어 있었다.
인어의 회복은 빠르다더니, 정말인가. 아쉽군.
―역시나! 데아의 목소리도 피파글랜 님이 바꿔 주셨나요?
“그럼 그럼.”
혼자 호들갑을 떤 유리가 심히 불경한 눈으로 피파글랜을 노려보는 데아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뒤통수를 잡고 억지로 힘을 줘 눌렀다. 헉, 혀를 씹었다.
“야, 놔라 아,”
―죄송해요. 피파글랜 님. 얘가 아직 뭘 몰라서……. 똑똑하고 강한데 아직 예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검문소를 터뜨리는 배짱을 가진 인어니까 잘 봐주세요.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피파글랜 님을 만날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서 뭣 하는 거야?
데아는 눈으로 욕했다.
―피파글랜 님은 1세대 인어님이시란 말이야……! 1세대 인어가 누군지는 알아? 바로 ‘태초’의 직계 권속이지!
“어… 어…….”
―그 ‘태초’의 힘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분들이란 말이야. 예의를 지켜!
그 대단하신 분에게 눈을 뒤집고 달려들어 팔다리를 하나씩 꿰뚫고 그의 머리카락까지 썩둑 잘라버린 전적이 있던 데아는 대꾸 없이 눈만 굴렸다.
―그런데 피파글랜 님, 머리카락이 짧아지셨네요? 그것도 잘 어울리세요!
“아, 며칠 전에 고양이가 갉아버렸지 뭐야.”
―네? 고양이라면, 그 육지의 짐승이요? 세상에, 어쩌다가!
피파글랜이 데아를 보며 여유롭게 웃었다. 이렇게 꼽을 준다 이거지?
데아가 어떻게 받아쳐야 망신을 잘 줄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피파의 옆에서 고요하게 앉아 있던 또 붉은 머리카락의 다른 인어가 설풋 웃었다.
―닮았네요.
닮았다니, 뭐가? 내가? 피파글랜이랑?
처음 붉은 머리카락을 보고 움찔했던 데아는 인어를 꾸준히 노려보면서 경계하던 참이었다.
―일단 앉도록 하죠. 이름이 데아라고 했죠? 저는 알레이시라고 합니다. 편하게 알레라고 불러 주세요.
알레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음에도, 데아가 그동안 봐 왔던 붉은 머리카락 인어들과 조금 달랐다. 그는 부드러운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
데아는 고민하다가 손을 맞잡았다. 온화하고 선량한 눈매, 부드러운 미소. 분명 다 생김새는 다른데, 그의 다정한 인상이 옛적에 죽은 데아의 혈육 이데로를 닮아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그와 닮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됐어. 칼리안만 죽이면 돼. 이 인어는 지금은 아군이다.’
“…데아라고 불러. 이데아.”
―네, 데아 님. 제 머리색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움 님의 권속, 2세대 인어입니다.
아, 권속은 주군의 머리색을 물려받는구나.
―저희의 역사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재미가 없으실 테지만, 중요하니 꼭 들어 주세요.
지독한 설명충의 낌새가 보였기에 데아는 서둘러 끊어 냈다.
“그거 설마 트리야와 므아나가 싸워서 전쟁이 일어나고, 세 명의 인어는 제국 밖으로 나갔다는 이야기인가요?”
―그, 그걸 어떻게…….
“이미 다 알아보고 왔어요. 잘 압니다, 알아요.”
―맞아. 데아는 수틀린다고 검문소도 부수고 왕궁까지 잠입한 인어인데 왜 모른다고 생각한 거야?
알레는 ‘그것도 그렇네요.’하고 웃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됐고, 본론부터 꺼내지. 인어는 약해지고 있다.”
데아는 피파글랜을 쳐다봤다.
‘뭐?’
“인어는 마력에 의존하는 집단이지. 그런 우리가 약해지고 있다는 건 마력 자체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증거야. 더군다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트리야는 그 마력을 한껏 소비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더군. 이해할 수는 없지만…….”
“…….”
“그렇기에 반드시 ‘진짜’ 태초가 돌아와야 해. 태초는 그 존재가 곧 마력의 근원이니까. 이대로 트리야가 계속 집권해 있다간 인어는 하나둘 죽어 소멸될 거야.”
좋은 소식이군. 데아가 씩 웃자 피파글랜이 눈썹을 들썩였다.
“하지만 태초는 죽, 아니… 돌아가셨다며.”
말을 마치자 퍽, 탁자 아래서 유리가 꼬리로 데아의 꼬리를 쳤다. 그리고 빠르게 속삭였다.―
―너 미쳤니……? 어서 피파글랜 님에게 예우를 갖춰! 존대는 어디에 버렸어?
“…요.”
그 눈동자가 희번덕 빛나서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설마, 안 죽어? 정말로?”
―하하, 요즘은 관련된 서적이 전부 금서가 되었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죠.
“맞아. 태초는 죽지 않는단다.”
죽지 않는다니. 진시황이 알면 뛰어나올 소리였다.
“물론 완벽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그분은 돌아가시지 않았어. 단지 자신을 잃고 빙글빙글 헤엄치고 있을 뿐이지.”
피파글랜의 옅은 빛깔의 눈이 데아를 똑바로 투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