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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93화 (93/223)

※ 093화

“카, 칸나니아. 봤어? 그 눈…….”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재판소 안, 도라안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다.

“무슨 눈 말이지?”

“아니, 시치미 떼지 마. 너도 봤잖아. 그 붉은 눈!”

오로지 1세대 인어들만 알고 있는 그 붉은 눈. 섬뜩하리만큼 강하고 잔혹한 눈. 더 이상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눈.

“심해의 눈 말이야!”

“심해의 눈이라니, 잘못 본 거겠지.”

“아냐, 틀림없어. 그 붉은 눈을 내가 기억 못 할 것 같아?”

“잘 모르겠군.”

“이……!”

자식이……! 도라안이 손톱을 까드득 깨물었다.

“아냐, 확실해. 그건 심해의 눈이야. 아홉 번째 인어라는 저자에게 어떻게 저 힘이 간 거지?”

“망상이 지나치군.”

“지나치다니? 내가? 아니, 나는 냉철한 거야. 현실적인 거라고! 맙소사, 태초의 힘이 대물림될 리가 있나?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휘익―! 거대한 거창이 한 바퀴 휘둘러지더니 도라안의 목을 겨누었다. 칸나니아의 얼굴이 차가웠다.

“말조심.”

“…….”

“‘그분’의 시체 잔해를 수거한 건 우리 모두야. 알잖아? 죽은 자가 어떻게 돌아온단 말이지?”

도라안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목을 문질렀다. 앙칼지게 올라간 두 눈이 칸나니아를 노려봤다.

“내 목에 흠집 하나라도 생겨 봐.”

“변절자가 되고 싶나? 제왕을 의심하는 발언을 삼가도록.”

“누가 의심했대? 나는 그냥, 그냥…….”

도라안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짧게 친 파란 앞머리가 물결에 쓸려 우수수 흩어졌다.

“그냥, 놀랐을 뿐이야…….”

“이해해. 재판소 안에서의 소란이 많았으니까. 이만 들어가 쉬도록.”

칸나니아는 등을 돌려 가버렸다.

홀로 남은 도라안은 가만히 멈춰서 텅 빈 복도를 응시했다.

“그래, 잘못 본 거겠지. 너무 오래전 일이라 헷갈렸을 뿐이야…….”

◈          ◈          ◈

그곳은 어둑했다.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아, 괜히 찾아왔다.

“그거 참 유감이야. 틀림없이 너는 그 재판을 즐거워 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데아는 뿌옇게 허공을 채운 푸른 피의 한가운데에서 눈을 감았다. 검은 결정을 깎아 만든 고귀한 옥좌에 앉은 ‘퍼블리’… 아니, 트리야는 우아하게 턱을 괴고 웃었다. 과연 정신이 홀릴 만한 외모였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나?”

자잔을 빼오기 위해 물어물어 제왕의 알현실로 찾아간 것까지는 좋았다. 아니, 좋지 않았나?

그 문을 열자마자 훅― 후각을 매운 건 피비린내였다.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시체는 없었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피가 스며들어 간 얇디얇은 칼날을 암석에 키이익 가는 무뚝뚝한 표정의 간부들, 벽에 등을 대고 우뚝 서서 굳어 있는 또 다른 간부들, 덜덜 떨며 트리야의 눈치를 보는 수많은 시종들.

이미 시체는 치워졌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치워졌다.

“누가 죽은 거야?”

“아무도.”

트리야는 느리게 미소 지었다.

“난 아무도.”

그래 네가 안 죽이고 남을 시켜 죽였겠지. 이 미치광이 폭군아.

거무죽죽한 낯으로 트리야의 근처에 서있는 칸나니아와 도라안.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받고 선 나.

이 순간이 지독한 연극 같았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퍼블리’.”

데아는 일부러 그를 퍼블리라 불렀다. 트리야의 눈이 휘었다.

“네가 지금 나에게 할 말이야 뻔하지. 거기에 대한 내 대답 또한 정해져 있고. 예쁜아, 돌아가.”

사람 놀리냐?

“이런, 장난이었는데 안 웃네. 그러면 어쩌지……. 그래, 원인을 제공한 자들에게 너무 얕은 형벌을 줬어.”

트리야가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베르헴과 그 일당들이 질질 끌려왔다.

―사, 살려 주세요!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서쪽 구역을 토벌하러 가야 했을 저 인어들이 왜 여기로 끌려오는 거지?’

데아와 베르헴의 눈이 마주쳤다. 예전의 뻔뻔함은 온데간데없는 베르헴이 동아줄을 잡듯 데아에게 꿈틀꿈틀 기어 왔다.

―부디 자비를!

“죽여라.”

연극은 장편이었다. 출구가 보이질 않는데, 러닝 타임이 너무 길어서 관객을 질리게 만들었다.

―끄아아아악―!!

―제발, 제발……! 흐윽!

피가 다시 훅―!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끔찍한 피비린내가 데아의 비늘에 달라붙었다.

학살은 짧았다. 베르헴의 비명이 뚝 멈췄다. 시체가 끌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데아는 눈도 못 깜빡이고 굳었다.

“아직인가?”

트리야가 천천히 옥좌 아래로 내려왔다. 지옥에서 우아하게 걸어 올라온 사탄처럼, 매혹적인 미소를 지은 폭군이 물결치는 검은 베일을 드리우며 데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긋나긋하게 데아의 어깨로 팔을 감았다.

주변 모든 인어들이 숨을 들이켰다. 데아의 몸도 뻣뻣하게 굳었다. 이상하지만 호의적이었던 ‘퍼블리’와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이게 아마 본모습이겠지.’

“네가 이 제국에 실망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단단히 비틀린 모양이야. 그렇지?”

서늘한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실망 안 했어.”

물론 거짓말을 했지만.

“여전히 착하기도 하지.”

선의의 거짓말은 그만두라는 다정한 회유가 돌아왔다.

짧은 시간, 트리야는 데아가 제국을 향해 품은 반감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래서 뭐가 잘못되었던 건지 고민을 해봤지.”

휘익― 트리야가 등을 돌렸다. 드리워져 있던 긴 베일 또한 회전했다.

“재판이 그토록 별로였던 모양이야.”

“…….”

“소식은 들었어. 그러나 칸나니아는 애석하게도 내 충실한 가신이라 함부로 목숨을 거둘 수는 없어. 난 적어도 동족끼리는 친하게 지내자는 주의라. 그러니―”

‘무슨 말을 하려고?’

이제 도라안의 얼굴은 완벽하게 겁에 질려 있었다. 트리야가 칸나니아를 향해 손짓했다.

“판결을 내린 재판관의 오른쪽 손목을 선물로 내리지.”

뭐?

다른 인어들도 충격을 받고 저들끼리 눈길을 교환해 댔다. 수많은 시간동안 동고동락했던 충실한 가신 칸나니아보다 굴러온 돌인 내가 더 귀애받는 사실에 경악한 것 같았다.

인어들의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가는 모습이야 뻔했다. 트리야는 이걸 의도했을 거고.

하지만 문제는 내가 원치 않는다는 거다.

“아니, 아니. 필요 없어. 난 그냥 자잔의 사형 판결을 철회해 달라는 말을 하러 왔어.”

“저런. 미안하지만 그 1공대 간부가 저지른 죄명은 반역죄고, 반역죄의 처벌은 엄중하지. 재판은 다시 열리지 않는다.”

“우연히 나왔어. 책을 펼쳤는데, 뚝 떨어졌다고. 반역죄로 자잔을 처벌하기 전에 먼저 그 책에 돌을 끼워 놓은 인어를 찾아서 처벌해!”

“물론 그럴 거야.”

트리야의 하얀 손가락 사이에는 옅은 녹색의 물갈퀴가 달려 있었다. 마치 옅은 면사포를 덧댄 것처럼 반짝거리는 손가락이 데아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괜히 울컥했다.

“자잔을 향해 내린 사형이 정당한 거라면, 왜 재판관의 손을 자르는데?”

“네가 화가 났으니까.”

트리야의 음성은 지나치게 낮고 차분해서,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칸나니아. 잘라.”

“네.”

무도하고 잔인한 폭군, 잔혹하고 차가운 제국의 군주.

과연 그랬다. 단순히 귀로 들었을 때와 눈으로 확인하는 건 차원이 달랐다. 왜 저 시종들이 죽을 듯한 표정으로 덜덜 떠는지, 왜 백성들이 간부만 보면 몸을 사리며 피하는지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이런 나라라서, 이런 제국이라서.

‘젠장, 트리야가 내가 동생이 아니라는 걸 알면 두 동강 내서 죽여버리는 거 아니야?’

썩둑!

칸나니아는 스스로의 손목을 잘라 냈다. 주저는 없었다.

“!!”

알현실 안의 모든 인어가 동요했다. 그럼에도 티를 내면 안 되는지, 자리를 박차고 달아난 인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억지로 참착함을 지켰다.

‘이 제국은 뭐가 도대체… 왜 이래?’

데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저 멀리서 도라안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코를 막는 모습이 다 보였다. 푸른 피가 훅― 퍼졌다.

‘인어의 재생력은 인간보다 우월해서 그래, 손 정도야 다시 자라겠지. 그러니까 저렇게 선뜻 자를 수 있는 거겠지. 아는 데도.’

“…손은 필요 없어. 자잔이나 풀어 줘.”

나는 내 앞으로 직접 손을 가져오는 칸나니아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칸나니아의 입술이 비참함으로 덜덜 떨렸다.

“저런, 안 된다고 해도.”

“당신의 권속이잖아.”

그건 금기였다. 고통으로 미간을 찌푸리던 칸나니아도, 코를 막던 도라안도, 다른 간부들과 시종들도 일순 표정을 잃고 고개를 들어 데아를 쳐다보았다. 전혀 동요하지 않은 건 트리야뿐이었다.

“아하, 이름이 그거였나……. 그런데, 그래서?”

재판의 결과를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는 이유로 손목을 잘린 칸나니아, 원인이 되었기에 참변을 당한 베르헴과 그 일당,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자잔, 공포 속에서 오열하는 제국의 인어들, 희망이 없는 제국…….

그중에 오직 나만 특별 대우를 받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제국의 절대자인 당신은 나를 어디까지 봐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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