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2화
시끄러웠던 재판소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모든 인어가 데아를 바라보았다. 데아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인어를 향한 적의를 읽고 주인의 의지에 호응하여 자동으로 실현된 스킬이었다.
붉은 점이 우수수 칸나니아의 오른쪽 귀 밑으로 몰려들었다.
데아의 붉어진 눈동자를 바라본 도라안이 헛숨을 들이키고, 칸나니아가 눈을 부릅떴지만 데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제가, 제가 도서관에서 책을 펼쳤는데 그 돌이 뚝 떨어졌습니다. 위험한 물건이라 판단한 자잔이 즉시 압류했고요. 이정도면 설명이 되었을까요?”
“증거는?”
“증인이 있죠. 바로 저요!”
“불충분하다.”
“말에 모순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그렇게 따지면 자잔이 해당 물건을 은닉했다는 증거도 어디에도 없습니다.”
“재판관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가?”
“네. 변론을 신청합니다.”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반박하는 데아의 모습에 주변 인어들이 모조리 겁에 질렸다. 겁에 질린 인어들 중 가장 떨고 있는 이는 자잔이었다.
‘저, 저, 인어가 감히 누구에게 대들고 있는 거야?’
제왕의 애정을 받는 아홉 번째 1세대 인어라지만 결국은 막내. 그 어떤 직위도 권력도 없는 인어였다. 가지고 있는 건 고작 고귀한 핏줄일 뿐이다.
힘과 신분이 지배하는 이 제국에서 제왕 트리야 다음의 제일가는 권력자인 칸나니아는 그야말로 움직이는 무력 그 자체였다. 같은 1세대 인어인 도라안조차 칸나니아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장성한 인어 셋이 들어야 간신히 들 수 있는 거창을 한손으로 손쉽게 다루는 전사, 칸나니아의 판결에 불복종하다니. 한술 더 떠 네 판결은 틀렸다고 주장하다니!
‘믿을 구석이 있는 건가? 설마… 제왕 트리야?’
그러나 제왕 트리야가 그동안 동고동락했던 칸나니아보다 저 새로운 인어를 더 아낄까?
물론 데아에게는 믿을 구석이 있었다. 바로 인벤토리 안에서 예쁘게 잠들어 있는 이동 스크롤이었다.
오래전에 권도언의 연구실에 잡혀간 이후, 데아는 조건에 있던 ‘특혜’를 운운하며 기어코 권도언에게서 세 장의 중급 이동 스크롤과 한 장의 상급 이동 스크롤까지 갈취했다.
이곳이 아무리 큰 제국이라지만 결국은 던전 안. 게이트 밖으로 나오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세계지.
인간 세상을 피해 던전 안으로 대피한 때가 오래되지 않았지만, 결국 위기에 봉착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참으로 간사했다.
물론 인간 세상에 가도 딱히 갈 곳은 없기에 최대한 뒤로 미뤄 두고 싶지만… 어쩔 수 없잖아?
‘여차하면 창으로 재판관의 오른쪽 귀 아래를 가격하고 자잔만 데리고 튄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칸나니아가 긴 한숨을 뱉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끌고 가라.”
“아, 이, 생선 하반신이……!”
생선 하반신?
모든 인어가 데아를 향해 미쳤냐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경배야!”
[바다의 경배(SS): 머리끝까지 물에 젖은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은 강력한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시야를 거두는 눈부신 해류의 창을 보았다.
―크으윽!
―아악!
재판소 한가운데가 움푹 뚫려 휘몰아쳤다. 거대한 파도의 기둥이 생성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안에서 고고히 떠오르는 건, 수만 가지 마력을 두른 삼지창이었다.
그 삼지창을 든 아홉 번째 1세대 인어가 자잔을 끌고 가던 모든 간부들을 쓰러뜨리고 가볍게 내려앉았다. 순식간이었다.
“이상하단 말이지. 왜 나에겐 판결을 내리지 않아?”
칸나니아의 눈썹이 움찔 경련했다.
“너희도 알고 있는 거지. 내 특혜를 봐주는 인어가 누구인지를.”
나는 몰랐는데.
‘퍼블리’는 강하다. ‘퍼블리’는 신분이 높다. ‘퍼블리’는 가명을 쓴다. 진짜 이름을 말하는 순간 그의 정체를 꿰뚫게 될 정도로 ‘퍼블리’는 유명하며, 신중하다.
“내 특혜를 봐주는 자가, 나에게는 형을 내리지 말라고 했나?”
―칸나니아는 제국의 이인자야. 제왕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어.
도서관에서 자잔이 했던 말이었다. 그 칸나니아조차 나에게 판결을 내리지 못하게 막을 사람. 이상하게 우호적이었던 단 한명의 인어,
재앙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퍼블리’.
이만큼 떠먹여 주는데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건 등신이었다.
“이 제국의 제왕, 트리야를 만나게 해줘.”
모든 인어가 술렁였다. 충격과 공포, 경악과 소름이 장내를 지배했다.
어떤 인어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덜덜 떨었고, 어떤 인어는 눈을 홉뜨며 몸을 숨기기 위해 발악했다. 그러나 칸나니아는 고요하게 데아를 노려보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정답이군. 데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냐, 내가 직접 만나러 갈게. 사실 어제도 만나고 왔거든.”
건방진, 칸나니아가 사납게 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데아는 쐐기를 박았다.
“내 방문 앞에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데?”
◈ ◈ ◈
데아는 재판소에서 홀로 나왔다.
그 후로 칸나니아는 ‘제왕은 시간이 없으니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라는 말과 함께 그러나 나는 다를 수 있으니 직접 찾아가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꽤나 무례한 말을 던졌는데 분노로 활활 타올라 데아를 노려본 것 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걸 보면, 정말로 이 제국 안에서 데아의 위치가 참 기묘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자잔은 그곳을 빠져나오지 않았다.
“사형은 면했으니 다행인가…….”
판결은 보류되었다.
사실 그냥 다 부수고 자잔만 빼돌리기 위해 자잔의 손을 잡았는데 자잔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이건 제왕과 제국의 뜻이야. 나는 그 뜻에 따르겠어.
빌어먹도록 융통성 없는 독재의 간부. 넌 사형당해도 싸. 내가 이렇게 힘써 줬는데, 뭐?
하지만 동시에 이해도 됐다. 인간 세상에서 살다 온 자신과 다르게 자잔은 이곳에서 나고 자라고 생활했다. 섣불리 다른 곳으로 가자고하면 꺼려지겠지.
‘본토에 뼈를 묻는 용사도 아니고…….’
그래도 며칠의 시간은 벌었다. 덕분에 자잔의 사형은 유예되었다. 그동안 자잔은 면회도 되는 감옥 안에서 얌전히 생활할 거였다. 사식 넣어 줘야지.
‘제왕 트리야와 어떻게 잘 협상해서 자잔을 빼오면 되겠지. 안 되면… 자잔을 기절시키고 들춰 메고 오자.’
데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퍼블리’… 아니, 트리야를 만나기 위해 왕궁으로 갔다.
인적이 드문 복도를 네 번째 빙빙 돌고 있던 참이었다.
웅, 웅, 웅―
어디선가 작은 진동이 울려 데아는 황급히 안쪽 주머니를 확인했다. 진동의 출처는 길게 너울거리는 망토 안에 넣어둔 통신 소라였다.
‘혁명군 통신 소라!’
혁명군을 왜 생각을 못 했지? 혁명군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자잔만 빼돌릴 수 있을 텐데! 데아가 통신 소라 안에 마력을 주입하자 유리의 음성이 작게 흘러나왔다. 통화가 아닌, 저장된 음성 메시지였다.
―안녕 데아. 왕궁 안에 우리가 넣어 둔 첩자가 있어. 그가 곧 너와 접촉할 거야. 암호는 ‘하늘이 붉다는 건, 참 좋은 거죠.’ 서로를 인지하고, 정보를 공유하도록 해.
하늘이 붉다니. 여기서 하늘이 어디서 보인다고.
―그리고 소식 들었는데, 칸나니아에게 대들었다며? 벙어리가 아니었다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하지만 넌 나름의 생각이 있던 거겠지? 넌 전말 용감해. 최고야. 대단해. 앞으로 좋은 소식 기대할게. 그리고 또 다른 소식도 들었는데… 네가 벙어리가 아니고, 아홉 번째 1세대 인어라는 소식이었지.
데아는 숨을 죽였다.
―놀라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니?
뭐?
―그렇게 위장을 해서 트리야에게 접근하다니! 트리야에게 숨겨진 마지막 동족을 위장하다니! 우리는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나, 나도 몰랐어…….
―아, 물론, 원래 있던 마지막 동족은 틀림없이 죽였겠지? 위장의 기본이지. 아무튼 이렇게 대담하고도 우아한 침입이라니. 위험 부담이 굉장히 크지만, 효과는 확실하지. 너의 그 혁명 정신을 본받아야겠어. 어떤 마력석의 회로를 연구하고 계산했길래 그런 1세대 인어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지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오면 꼭꼭 알려 줘야 해? 어쩐지, 갑자기 나타난 강자라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이 애는 의심을 할 줄 모르는 건가?
―그리고 설마 나를 의심하지 않는 건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얘는 독심술이 있나?
―걱정하지 마. 넌 이미 검문소를 터뜨렸고, 혁명군의 맹세를 했어. 트리야가 같은 1세대에게도 얼마나 잔인한 인어인데! 네가 혁명군에 잠입한 첩자였다면 그 두 가지는 절대로 안 했겠지. 그리고 맹세를 한 순간 네가 심장이 터져 죽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너에게 적의는 없었다는 게 증명된 셈이야. 안심해. 그래도 미리 말해 주지 그랬어. 첩자에게 이 얘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리고 유리의 음성은 곧 끊어졌다. 다시 품 안에 소라를 넣고 한숨 돌리고 있을 때였다.
톡톡, 누가 데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야.”
―안녕, 위대하신 1세대 인어님.
―넌 왜 거길 가……! 아, 태초를 위하여! 위대하신 왕족을 뵙습니다. 저는 퍼, 퍼블리라고 합니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건 아까 봤던 1공대 간부 링, 그리고 저 멀리서 허겁지겁 뛰어오다가 데아를 보고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한 건 이름을 도용당했던 퍼블리였다.
―이 애가 궁금한 게 있다고 해서요. 여쭈어봐도 될까요?
―내가 언제 궁금하다고 했어……! 제발 한 귀로 넘겨주세요. 제발요.
―아까 ‘퍼블리’의 이름은 왜 말하신 거예요?
링은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이 혼자 연신 히죽거렸다. 아까 그 소란 속에서 뻔뻔하게 팝콘을 씹고 있던 놈에게 대답해 주고 싶진 않았지만, 저기서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낑낑거리는 퍼블리를 보니 모른 척하기도 좀 뭐했다.
“제왕 트리야가 가명으로 ‘퍼블리’의 이름을 썼어. 다 속은 셈이지.”
그러니까 신상 도용으로 신고나 하시길.
―제, 제왕님께서 제, 이름을……!
그러나 퍼블리는 제 이름이 트리야에게 불린 적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감격한 것 같았다.
―내, 내 이름을 알고 계셨어!
데아는 저도 모르게 질린 표정을 했다. 그건 링도 마찬가지였다. 링은 질린 표정을 넘어 조금 더 본질적인, 환멸이 어린 표정……?
‘어?’
그러나 링은 데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좀 전의 표정을 싹 지우고 싱글 미소 지었다.
―퍼블리, 너 보고서 전달해야 하지 않아?
―아 맞다!
그럼, 퍼블리는 데아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쏜살같이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데아는 링과 둘만 남았다.
―이해해 주세요. 저 녀석이 제왕님이라면 사족을 못 써서.
―이 제국에선 모두가 그런 것 같던데.
―하하, 물론 그렇죠. 이 제국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하니까요.
묘한 말이었다. 데아는 가만히 옆으로 와 창틀에 팔꿈치를 기대는 링을 가늘게 쳐다보았다.
―오래 요양하신 아홉 번째 1세대 인어님은 모르실 수 있지만, 원래 이 제국의 모든 인어들은 수면 위와 수면 아래의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했답니다. 지금은 거대한 동굴 아래 제국이 가라앉아 있지만 원래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데아의 대답이 없어도, 링은 말을 이었다.
―대외상으로는 동굴은 변질된 하급 인어들의 무분별한 공격을 막고, 약한 인간들이 제국까지 멋모르고 내려온다는 걸 방지하기 위해 위대하신 제―왕님이 창조하셨다고 영웅서에 나와 있죠. 하지만 거짓말이에요. 이건 전쟁의 잔해예요. 대지를 다루는 두 번째 1세대 인어 므아나와 물을 다루는 트리야 간의 전쟁! 상상이나 가시나요?
100년 전, 태초가 죽고 일어난 두 인어의 전쟁까지는 자잔이 말해 준 바와 똑같았다. 그러나 동굴의 원인은 상상도 못했다. 두 번째 인어 므아나와 제왕 트리야의 전쟁이었다니. 므아나, 그 인어도 어마어마하게 강한 걸까? 피파글랜만큼?
―동굴을 만든 건 므아나 님의 작품이에요. 원래는 태양이 드리우는 곳에 제국이 있었죠.
그런데 얘는 왜 이걸 나에게 말해 주는 거지?
“그런데 왜 므아나는 동굴을 만든 거야?”
―뻔하죠. ‘태초’가 죽고 변질된 제국이라니. 두 번 다시 지상의 태양을 보지 말라는 어마무시한 저주죠.
“그 전쟁의 장면을… 봤어?”
―제가요? 어휴, 말도 마요. 그 전쟁에 끼어들은 1세대 이하의 인어들은 몸이 부서져서 다 죽었어요. 저는 목숨이 귀해서 숨어 있었죠. 구경도 못 했어요. 하지만 그 광경을 직접 보신 1세대 인어님이 말하신 정보니까 확실해요.
“아하…….”
―저 동굴은 태초가 아니면 뚫지 못할 거라는 소문이 자자해요. 새로 태어났거나, 오랫동안 단절되어 살았던 인어들 말고는 다 알죠. 죽고 싶지 않아 쉬쉬하고 있지만.
“그런데, 나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오랜 서적 안에는 이런 말이 있거든요.
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 줌의 태양도 들지 않는 아득한 심해, 링의 치아만 하얗게 빛났다.
―아침이 지나고 태양이 뜨는 한낮을 스치는 시간이면, 태초의 비늘이 아름답게 물들었다고. 마치 가을 나무에 열리는 무성한 잎처럼 황홀한 색이라죠?
“…….”
―드높은 하늘이 무르익는 때, 그 하늘에 비친 바다의 색도 덩달아 붉게 달아오르는 때, 당연히 그 안의 인어들은 따뜻한 빛깔을 눈으로 확인하며 그 속에서 헤엄치곤 했죠.
링은 먼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아득한 노을 속에서 물살을 가르는 추억 속에 그가 있었다.
―광활한 황혼을 헤엄치는 기분이라니,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리고 링이 환하게 웃었다. 데아의 모든 속내를 투영하며,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해맑게.
―하늘이 붉다는 건, 참 좋은 거죠.
첩자들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