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0화
이걸 소득이라고 봐야 할까? 누가 왜 글자를 새겨 여기 끼워 놨는지, 누구에게 이 돌을 전해 주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초에 대해 알아보는 건 금기라고 하니까 누가 비밀리에 흔적을 남긴 걸 수도.
―이런 불경한 변절자의 글이라니…….
그런데 자잔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 맞다 얘 독재 국가의 충실한 군인이지.
―이건 내가 압수하겠어.
데아는 민중의 노래를 더 크게 흥얼거렸다.
―이게 누구야?
그때 누군가 비아냥거렸다. 천에 코를 박고 책을 넘기던 데아도, 옆에서 어질러진 책을 원래 자리로 꽂아 넣던 자잔도 우뚝 굳었다.
다섯 명의 인어들이 시시덕거리며 앞에 서있었다. 뭐야 저 전형적인 악당 자세는. 하나같이 가오리를 닮은 인어들은 솔직히 다섯 명이 아니라 다섯 마리라고 칭해도 될 듯싶었다.
그중 가장 앞에 서있는 건 펑퍼짐한 인상의 인어였는데, 그 인어의 한쪽 손은 칭칭 말려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깁스 같았다.
자잔이 인상을 팩 구겼다. 손에 독을 묻히고 자신의 아가미를 두드리려고 했던 그놈이다.
―꺼져.
―내 팔이 보이지? 그깟 장난 하나 쳤다고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은 너를 잊을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그가 느물거리며 자잔에게로 다가왔다. 데아는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똑같이 만들어 줘야 내 성이 풀릴 것 같지 뭐야?
오… 손을 뚝뚝 꺾는 모습이 참으로 수산 시장에서 올라온 아귀 같은걸?
―여기서 아예 꼬리를 짓밟아 버리겠어, 애들아! 이 재수 없는 버려진 권속 새끼 얼굴 기억해, 1공대 간부라고 해도 이 자식에게는 예의를 안 지켜도 되니까!
―네!
‘미친, 미친놈들아 여기 도서관이야……!’
비록 한국에서도 도서관에 가본 적이 손에 꼽는 데아였지만,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기본 에티켓은 알고 있었다. 당연하다. 기본이니까!
―뭐야……?
―싸움인가 봐, 왜 하필 도서관에서…….
―쉿, 간부들의 싸움이야. 1공대, 2공대 다 있어. 우린 끼어들면 안 돼.
―아, 잘못 걸렸네…….
데아는 아무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잔과의 의리를 지켜 자리를 뜨진 않았지만 기웃거리며 이곳을 보는 인어들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너무 많았다.
‘아 쪽팔려…….’
―흥, 그래서 저 뒤의 패거리들을 끌고 온 거냐? 혼자 오지 왜? 자신은 없나?
―저 맹랑한 것이……. 버려진 권속 주제에 1공대 간부자리까지 올라와서 뵈는 게 없나? 내가 네 선배야!
‘여기서도 텃세는 있구나!’
―네 건방진 행동은 선을 넘었어. 애들아! 이 자식 꼬리를 아예 부러뜨려!
상대의 수가 너무 많았다. 더군다나 자잔은 외양 15세의 소년일 뿐이었다. 성인 다섯 명이 작은 어린아이를 다굴 하려고 달려드는 모습에 데아는 기함을 금치 못했다.
‘저 도른 감수성!’
순간이었다. 소란을 만류하기 위해 튀어나간 데아도, 곧장 반격하기 위해 곤봉을 뽑아내던 자잔도, 자잔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던 가오리도, 뒤에서 자신만만하게 몸을 풀던 따까리들도 이 상황만은 예측하지 못했다.
퍼억―!
데아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피는 안 났지만 입술이 터지며 부어올랐다. 머리가 웅웅 울리고 통증이 확 덮쳤다. 데아의 정상적인 눈깔도 휙 돌아갔다. 이성이 휘발됐다.
‘날 쳐……?’
―이, 인, 아니 샤샤……!
“바다의 경배.”
―야, 야!!
쿠카아아앙―!!
그날, 도서관 입구 쪽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소식이 트리야의 귀에 들어간 건 폭발이 일어난 직후였다.
◈ ◈ ◈
퍼블리는 오늘도 힘겨운 공무원의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펜 대신 곤봉을 들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대신 반역 종자들을 두드린다는 게 조금 달랐지만. 어쨌든 그는 나라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었다.
―도서관에 폭발이 일어났다.
퍼블리와 그의 동료 링과 함께 현장으로 출동했다.
―저는 제왕의 그림자라고요. 왜 제가 왕궁 밖의 사건에 투입됩니까?
―지상 감옥 소식 들었지? 한 인간 남자가 2공대 애들 작신작신 두드려 패고 튄 거! 지금 그 인간 남자 찾는다고 인력 부족 사태라서 그래. 놀고 있는 네가 다녀 와!
이게 바로 퍼블리가 도서관 정문에 와서 혀를 차고 있는 사연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똑똑한 제국의 미래들은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고, 지나가던 백성들 또한 기웃기웃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건의 중앙에 있는 건…….
―저, 저 건방진 인어! 처음 보는 얼굴인 걸 보니까 출신도 연고도 없는 것 같은데, 주제를 모르고 1공대 간부에게 기어올라? 온몸의 뼈를 부러뜨려 주마!
평소 걸걸한 인성으로 소문이 자자한 1공대 간부 동료, 베르헴이었다. 그는 부상을 당했는지 꼬리 일부가 너덜거렸다.
―뭐야……? 싸움?
―간부님들이 싸움을 하시나 봐!
―위험해, 구경하지 말고 가! 괜한 불똥 튀려면 어쩌려고…….
―목소리 낮춰! 끌려가고 싶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구경꾼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퍼블리는 이마를 짚었다.
―저, 저 새끼 언젠가 일 칠 줄 알았지.
―와, 이거 상부에 어떻게 보고해야 하지?
동료 링도 사태를 지켜보다가 혀를 찼다.
―뭐! 구경하는 건 재밌지만!
그리고 링은 주섬주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팝콘… 아니, 간식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베르헴, 지지 마! 1공대 간부의 저력을 보여 줘라!
그러더니 신나게 소리를 질렀다. 퍼블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퍼블리, 너무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 사태 다 진정되면 수습만 하자고. 이런 싸움 구경이 얼마나 드문데?
이 제국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가…….
더군다나 그가 상대하고 있는 인어는 검은 비늘을 가진 낯선 인어였다.
누구지? 어려 보이는데 꼬리가 굉장히 눈에 띄게 아름답네. 그냥 백성인가? 그렇다면 베르헴은 무고한 백성에게 화를 내는 양아치 인어가 되는 것인가?
―와, 저 검은 비늘 인어 봐. 잘 싸우나 봐. 베르헴이 저렇게 다친 건 처음 보는데.
―어? 저기 자잔이 있어!
―아~ 그 버려진 권속?
퍼블리의 눈에 희망이 반짝였다. 저 안에 연류된 간부가 더 있다니! 협력을 받아 내면 이 초유의 사태를 더 빨리 진정시킬 수 있겠지!
―어이! 자잔!
그러나 자잔은 떨리는 눈동자로 덥썩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이 그렁그렁했다.
―샤샤……. 나를… 감싸 준 거야……?
‘말이 안 통하는군!’
―링, 이럴 때가 아니야. 1공대의 명예가 땅으로 수직 낙하 하고 있다고! 어서 말려야…….
―워후! 그래, 잘 싸운다! 날려라! 죽여라!
‘이 새끼!’
결국 퍼블리는 홀로 나서기로 했다.
홀로 사태를 진정시키자고 결심한 퍼블리가 곤봉을 뽑아 들고 난입하려던 순간이었다. 베르헴의 상대가 갑자기 강력해 보이는 창을 생성해 베르헴에게 겨누었다.
‘어, 뭐야 저건? 저 무기 어디서 봤는데…….’
동쪽 감옥에서 본 그 무기잖아? 퍼블리의 뇌가 휙휙 돌아갔다. 트리야 제왕이 손수 모셔 간 그 인어도 똑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설마…….’
난감함에 송골송골 맺혔던 식은땀이 기어코 파블리의 등을 타고 줄줄 흐르고 있는데, 때마침 자잔이 검은 비늘의 인어 앞을 막아섰다. 그래 밥값을 해라 자잔!
―여기까지 해, 베르헴. 지금 이분이 누군지 알고 이런 추태를 보이는 건가?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데아는 골목대장마냥 휘날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큼, 흠, 헛기침을 하며 창을 수거했다. 생각해 보니까 나 아홉 번째 1세대 인어라는 콘셉트였지. 여기서 망나니처럼 굴 뻔했네.
품위를 지키기에는 이미 늦었지만 데아는 뻔뻔하게 오만한 표정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래.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아는 건가?”
‘퍼블리’의 행동에는 수상한 점이 많았다. 기품 넘치는 외모, 우아한 동작, 하대가 익숙한 말투…….
감이 왔다. ‘퍼블리’는 어마어마하게 신분이 높다. 1공대 간부는 손가락 하나로 바를 만큼!
―누, 누가 있는데?
―잠깐만요, 베르헴 님! 지금 저, 저 인어… 다른 방식으로 말을 하고 있잖아요!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까…….
베르헴과 그의 뒤에 서있던 2공대 간부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아는 마저 말을 이었다.
“내 뒤에는 ‘퍼블리’가 있다고!”
퍼블리가 있다고… 퍼블리가 있다고… 퍼블리가…….
툭, 링은 씹어 먹던 간식을 놓쳤다. 베르헴도, 그 뒤의 인어들도 정지했다. 자잔도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시끄러웠던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니, 그 이름은……!
―너, 너… 뭘 하고 다닌 거야?
모두의 시선이 퍼블리에게 꽂혔다.
―나, 나, 나는 아무것도…….
―저, 저 새끼!
베르헴이 배를 잡고 크게 웃어 제꼈다.
―고작 퍼블리? 나는 또 도라안 님이나 칸나니아 님이라도 말할 줄 알았는데, 고작 저 퍼블리? 지금 나랑 장난하나는 거냐!
‘어? 이게 아닌가?’
데아는 베르헴이 손가락질 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망충하게 생긴 동글동글한 인어와 시선이 마주쳤다. 사색이 된 걸 보니 저쪽이 ‘진짜’ 퍼블리인 듯싶었다.
“아하, 역시 가명이었군.”
의문 해소!
아, 이게 아니라.
“방금은 장난이었어.”
자잔이 눈을 흘겼지만 모른 척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알잖아. 나는 보통 인어가 아니라는 걸.”
인간계에서 구르고, 또 인어 제국 안에서도 굴러다니며 는 건 뻔뻔함이었다. 자신감이 없다면 무조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나아가라. 상대가 ‘어? 그런가?’ 할 때까지!
그리고 데아의 전략은 먹혀들었다. 구경꾼들을 시작으로 웅성거림이 커져 갔다.
―베, 베르헴 님, 저 인어, 성대로 직접 말을 하잖…….
―닥쳐! 나보고 저걸 믿으라는 건가?
그가 고개를 휙휙 돌리며 다시 곤봉을 데아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다시 공격했다.
“이크―”
[심해의 눈(A): 당신은 승리할 것입니다.]
[타고난 몰이꾼(A): 인어의 주목을 받는 동안, 속도가 +60 증가합니다.]
심해의 눈이 발동하자 베르헴의 약점이 보였다. 그리고 데아는 드물게 당황했다.
약점의 위치가… 인간 남성의 역린과 비슷한 부위 아닌가?
‘아 양심이 너무 아픈데……. 정말 저길 찔러도 되는 걸까?’
내가 멀쩡한 인어의 생식 기능을 막아버리는 건 아닐까?
그러나 지금은 위급 상황이었다. 데아는 가볍게 창을 생성해서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한 바퀴를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