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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89화 (89/223)

※ 089화

데아는 순간 샤샤라고 답할 뻔했다. 그러나 이내 작은 돌을 주워 쓱쓱 바닥에 썼다.

데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래. 데아야 반가워.

데아는 유리의 안내를 따라 천천히 마을을 둘러보았다.

―너는 밖에도 지낼 곳이 있는 것 같으니까 아침이 되면 나랑 같이 밖에 나가자. 사실 혁명군에 들어와도 엄청 진중한 임무를 맡는 건 아니야. 나 같은 베테랑 정도가 임무를 받지.

“…….”

―그럼 먼저 인사를 드리러 갈까? 네가 혁명군에 들어온 이상, 마력의 맹세를 해야 해.

‘마력의 맹세?’

그래, 어쩐지 너무 선뜻하게 본거지를 보여 준다 싶었는데, 역시 제약이 있는 걸까. 의심받지 않으려면 뭔지 잘 모르겠는 그 ‘마력의 맹세’를 해야 했다.

―따라와.

“…….”

―어… 오늘은 아무도 안 계시네.

두 개의 둥근 마석이 둥실 떠올랐다. 데아는 그곳에 고개를 숙였다.

―나는 명예로운 혁명의 일원이 되어 위와 같은 수칙을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끄덕끄덕.

―나는 본부의 위치를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이며, 배신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태초를 위해 충성을 바치며, 트리야의 몰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다.

그리고 쭉 관련 사항들이 이어졌다. 요약하지만, ‘배신하면 죽는다’였다.

‘거짓말을 하라는 조항은 없으니까 다행인건가…….’

―위와 같은 사항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즉시 꼬리가 괴사해 고통스럽게 숨이 끊어질 것이다. 모든 사항을 이해했다면 자신의 비늘 하나를 떼어 마석에 흡수시켜라.

데아는 울며 겨자 먹기로 비늘을 하나 뽑아냈다. 다리털을 뭉텅이로 뽑은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아 미친. 진짜 개아프네……!’

―오, 너 꼬리를 이제야 자세히 봤는데……. 정말 예쁘다. 색도 오묘해서 마음에 들어.

익숙한 칭찬이로군. 데아는 코를 쓱 훑었다. 그렇게 맹세가 완료되었다.

데아는 유리에게 자신이 왕궁에서 일하는 시종 중 하나라고 거짓말을 치고는 밖으로 나왔다. 아침을 알리는 발광석이 환하게 빛났다.

―우리는 불규칙적으로 모임을 가져. 그때는 꼭 참석해야 해. 이걸 줄게.

‘소라……?’

―‘통신 소라’야. 거기에 네 비늘 일부를 흡수시켰어. 너에게 각인된 통신 소라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 그 소라를 통해 모임의 날짜와 시간을 알려 줄 거야. 그리고 그 소라 위로 네 마력을 불어넣으면 나에게 연락을 넣을 수 있어. 다만 아무도 없을 때 말을 남기고, 연락을 확인하도록 해.

‘마력을 담은 건가? 통신이 된다니, 신기했다.’

이제 돌아갈 때였다. 데아는 자연스럽게 인벤토리 안에 통신 소라를 숨겼다.

―아, 저 쪽으로는 가지 마.

“?”

갑자기 유리가 길을 꺾어 뭔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흉측한 몰골의 무언가가 높은 창대와 곳곳에 설치된 돌부리에 걸려 있었다.

‘저게 뭐지?’

―처형 장소야.

데아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보지 마. 물론 질리게 봐왔겠지만……. 아주 끔찍하지.

저 불어터진 이상한 살코기에는 듬성듬성 머리카락과 비늘이 붙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끔찍했다. 과연, 독재 국가구나.

데아는 고개를 돌렸고, 그쪽을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다 왔다. 나는 이쪽으로 갈 거야. 너는 저리로 가.

끄덕끄덕

―참, 이거 먹으면서 가. 선물.

그건 사탕처럼 동글동글한 결정이었다.

◈          ◈          ◈

유리와 헤어진 데아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창문을 통해 왕궁 방 안에 훌쩍 들어갔…….

―샤샤.

“우아악!”

자잔이 퀭한 눈으로 데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습을 보아하니 한숨도 못 잔 것 같았다.

“어… 자잔, 안녕? 좋은 아침이야.”

찔리는 게 많았으므로 데아는 일단 손을 모았다. 자잔의 눈꼬리가 화난 야생의 삵처럼 올라갔다. 젠장.

데아는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그래, 예상하지 않았는가. 자잔이 빈 방을 보고 펄펄 뛸 것쯤은 예상했다. 그러니까…….

“자, 자잔 사탕 먹을래?”

인정한다. 하나도 진정하지 못했다. 데아는 유리와 헤어질 때 받았던 단맛이 나는 결정을 내밀었다. 하지만 자잔은 싫어하는 걸 받은 고양이처럼 사탕을 타악! 앞발, 아니 손으로 쳐냈다.

―내가 어린애인 줄 알아?!

싫으면 말로 하지 왜 쳐내고 난리야……. 데아는 자잔이 거부한 사탕을 맛나게 홀랑 먹었다.

“맞아. 자잔, 여기 도서관 같은 곳이 있어?”

―도서관?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을 말하는가 본데, 당연히 있지. 가고 싶어?

“응.”

―지금?

“음… 아니. 나 몇 시간만 자고 갈게. 안내해 줘.”

조금이라도 빨리 정보를 모으고 싶었지만, 일단 너무 피곤했으므로 한숨 푹 자고 가기로 했다.

◈          ◈          ◈

―이게 당신의 사랑인가요? 오직 죄책감만을 안겨 주는 이게? 이러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나요?

이번의 나는 몇 남지 않은 의식체로서 존재했다. 익숙한 얼굴이 바닥을 긁어모으며 분노에 차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인어의 손아귀 안에는 떨어져나가 옅은 빛을 흘리는 하얀 비늘만이 존재했다.

하얀 비늘.

그건 시체였다.

―세상이 멸망해도, 모든 인어가 죽어도 괜찮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왜… 언제나 안전하질 못하지?

녹색 눈이 광기에 번들거렸다.

―당신은 나를 배신했어.

◈          ◈          ◈

몇 시간 뒤, 데아는 혼자 빠져나가지 않기, 큰 소리를 내지 않기, 무심코 인어를 공격하지 않기, 기물을 파손하지 않기 등의 조건을 줄줄이 맹세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도서관에 가는 목표는 하나. ‘태초’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것.

“그, 저기 자잔. ‘태초’에 대해서 잘 알아?”

우뚝, 자잔이 헤엄을 멈췄다. 휙 돌아보는 얼굴이 서늘했다.

―그걸 왜 물어?

“아니, 그냥. 내가 이곳저곳 다녀 봤는데 ‘태초’라는 말을 많이 들어 봐서.”

―태초에 대한 사항은 금기다. 관련 서적 또한 금서야. 목이 떨어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입조심하는 게 좋아.

‘워…….’

더한 확신이 생겼다.

‘태초’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

―그리고 그런 걸로 말 걸지 마. 사적인 대화는 금지되어 있어.

“빡빡하긴…….”

목이 떨어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조심하라고 했지만, 데아는 한 귀로 흘렸다.

데아가 머무는 곳에서부터 도서관은 빠르게 도착했지만, 필히 왕궁 밖으로 나와야 했다.

―신분은?

―1공대 소속 간부 자잔이다.

게다가 도서관에 들어가려면 신분 확인이 필요했다.

“뭐야, 모두가 이용하는 공간이 아닌 건가?”

―당연하지. 책은 사치품이야. 일반 백성은 이곳에 발도 못 디뎌.

이런 더러운 신분제 같으니라고…….

그곳은 5층 정도 높이의 천장이 훤하게 뚫려 있는 거대한 탑이었다. 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나선형으로 휘어진 책장이 무수하게 달려 있었다.

“무거워…….”

데아는 훌쩍 올라가 오래되어 보이는 책을 모조리 체크했다.

데아의 등장에 그를 알아본 소수의 인어들은 곧장 긴장하며 등을 폈지만 못 알아보는 인어들은 느긋하게 돌의자에 몸을 끼우고 책을 넘겼다.

“그래도 나를 알아보는 인어는 몇 없네?”

자잔은 자의식 과잉 환자를 보는 눈으로 데아를 쳐다보았다.

―왕궁이라면 네 모습을 본 인어들이 많으니까 대부분의 인어들이 너를 알지만, 여긴 왕궁 밖이잖아. 기껏해야 세력이 낮은 귀족이거나, 그 귀족의 권속들이야.

“아하, 그렇구나. 그런데 권속? 그게 정확히 뭐였더라, 전에 들은 적이 있었는데.”

―하…….

어디부터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며 자잔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데아는 빠르게 인어들의 역사와 기본 지식을 습득했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자잔이 우다다 설명해 준 덕분이었다.

주군과 권속의 관계, 그리고 하급 인어가 퇴출된 이유, 죽고 없는 태초를 찾겠다고 제국을 배신하고 떠난 세 명의 1세대 인어, 그리고 ‘태초’와 관련된 지식은 모조리 금서가 되었다는 사실까지.

“넌 제왕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

데아는 자잔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묻어나오는 애정을 느꼈다.

―그야 당연하지. 나는 그분의 하나뿐인 권속이야. 나에게는 오직 그분뿐이지.

하지만 버려진 권속이라며…….

데아는 말을 삼켰다.

“그런데 이만하면 언론 통제 아니야? 와 역시 독재 국가. 여기도 장난 아니구나…….”

―쉿, 너… 이 제국을 모욕하지 마. 네가 어디 가서 말실수할까 봐 말해 주는 것뿐이니까.

예민하긴.

데아는 책을 거칠게 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무슨 노래야?

―있어. 인간 세상에 유명한 노래.

―좋네.

하고 자잔은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민중의 노래였다.

‘군부의 충실한 간부를 기만하는 맛이 좋군.’

데아는 책을 펼쳤다. 이곳의 책은 전부 돌이거나, 마력석의 힘이 깃들어 돌돌 말린 질긴 천이었다.

“『위대하신 제왕님의 일대기』… 이건 아니고, 『영웅의 놀라운 여행 : 어린 인어 필독서』… 이것도 아니고, 『파스프스의 신묘한 정어리 요리』이건 또 뭐야?”

―너 글을 읽을 수 있어?

“그야 당연…….”

잠깐, 인어 세계에서 한글을 쓸 리가 없잖아?

“이, 읽히네?”

―그 스킬이 알아서 적용시켜 준 모양이지. 유용하네.

자잔은 픽 웃고 넘어갔지만 데아는 혼란스럽게 글자를 넘겼다. 정말 읽히네? 스킬 덕분인가? 신기한데?

데아는 책을 더 뽑아 들었다. 그러나 볼만한 책은 없었다. 그때 무심코 펼친 『멋진 해파리의 여행』 책 아래로 작고 납작한 돌이 툭 떨어졌다.

“이게 뭐야?”

―뭔데?

음각으로 글씨가 새겨져 있는 작고 납작한 돌. 그 안에 새겨져 있는 글씨는…….

태초의 고목 안에는 오직 태초만이 들어갈 수 있어.

아, 그놈의 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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