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6화
“2공대가… 실패?”
나른하게 왕좌에 앉은 녹색 인영이 옅은 미소를 품고 휘어졌다. 실상을 모르는 인어가 본다면 그 고혹적인 자태와 아름다움에 넋을 놓았을 광경이었다.
“통솔자는?”
―지, 지금 돌아오고 있습니다.
“군대를 잘 통솔하지 못해 왕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를 물어야겠군.”
간부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소수 정예 기사들만 있는 1공대와 달리 2공대의 간부들은 노예나 용병, 혹은 범죄자들 출신으로, 온갖 잡일에 뛰어들어 갖가지 사건 사고를 내곤 하는 공대였다. 당연히 고르고 골라 구성한 1공대만큼 강하지도 않았고, 실패도 많았다.
―하, 한 번의 기회라도 주신다면…….
문제는, 실패할 때마다 무자비한 제왕 트리야가 모든 2공대 간부를 죽이고 새롭게 인재를 등용해 빈자리를 채웠다는 거다. 그렇기에 2공대는 언제나 경험 부족상태였고, 당연히 발전할 수 없었다.
“기회?”
아득한 옥좌에 앉아 있는 트리야는 비웃었다.
“가능성이 있는 자들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법이지.”
얄짤없다는 소리였다.
간부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오늘 또 성문 앞에 상어 떼가 드글거리겠군.
“왕이시어.”
주춤주춤 간부들이 알현실을 나서려던 그때, 누군가 트리야를 불렀다.
뾰로통한 표정의 도라안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게, 그, 어제 데려온 그… 인어 도대체 뭡니까?”
“뭐가.”
“검은 비늘의 인어요……! 인어는 맞는 것 같은데 아홉 번째 1세대라니, 말이 되는 소립니까?”
트리야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그 애가 수상한가?”
“당연하죠.”
“그렇다면 죽여.”
“…네?”
트리야는 옥좌의 장식을 손가락으로 타닥타닥 두드렸다. 하얀 얼굴에 떠오른 건 무료함이었다. 결국 죽이지 못할 미래를 아는 지루함.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면 죽여야지.”
“…….”
“네 마음대로 하도록 해, 도라안.”
◈ ◈ ◈
“아 망했네.”
여덟 번째 막다른 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데아는 망했다. 아니, 길을 잃었다.
“애들, 언제 찾아가지…….”
시간으로만 따지자면 두 시간은 훌쩍 지난 것 같았다.
몰래 탈출한 스스로를 아는지라 데아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 여파 길드보다 크고 이상하게 생긴 왕궁의 복도를 돌아다니는 인어들을 피해 걸었다.
숨을 죽인 채 조용히 몰래몰래 움직이고 있다곤 해도 왕궁이다 보니 중간중간 시종 인어로 보이는 이들과 눈이 마주칠 때도 있었다. 데아는 그 순간 꼼짝없이 다시 잡혀서 가둬지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들은 데아의 머리색과 눈, 비늘을 보고는 고개를 숙인 채 후다닥 자리를 피하는 게 아닌가.
데아는 직감했다. 내 소문이 개뼈다귀처럼 나있구나!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여덟 번째 막다른 길을 마주한 데아는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왕궁의 복도를 활보했다.
그런 데아를 마주한 인어들의 반응은 총 세 종류로 나뉘었다. 자신을 보고 피하는 인어와 멀리서 쑥덕거리는 인어 그리고 다가오는 인어.
―저 인어가 그 인어라지……?
―그 아홉 번째 1세대 인어 말이야……!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파악했다. 데아는 벽에 머리를 박았다.
―하핫……. 여기서 고귀하신 분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홉 번째 1세대 인어라는 소문 때문일까. 가끔은 누가 봐도 높은 귀족이라고 생각될 인어가 거드름을 피우며 다가오기도 했다.
―성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저는 나리아나라고 합니다. 위대하신 제왕님의 충신이지요.
창문을 박차고 ‘내 소문 왜 이따위냐아아―!’ 소리 지르려던 찰나였다. 이름을 묻는 질문에 데아는 문득 멈칫했다.
‘내 이름, 내 이름…….’
“샤샤.”
―샤샤 님이시군요! 정말로 완벽한 이름입니다. 철차가 그렇게 통일성을 그리며 이어지다니……. 발음되는 어감도 매우 유려하군요. 왕족다운 이름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미사여구와 감탄사가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혹시 이곳을 나갈 출구가 어디 있는지 아시…….”
존대를 쓰려다가 말았다. 내가 왕족이라 착각하고 있다 이거지.
“출구의 위치를 아느냐?”
한껏 턱을 들어 올려 오만하게 물었다. 정답이었다. 상대 귀족 인어는 이상한 점 하나 못 느끼고 손바닥을 샤샤샥 비볐다. 데아가 자신을 선택해 준 것에 대해 오히려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침입자를 막기 위해 워낙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어야죠. 길을 잃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자자, 여기…….
말을 잇던 귀족 인어가 무언가 손짓하니 그를 중심으로 비슷하게 생긴 인어들이 하나둘 우후죽순으로 튀어나왔다. 거대하고, 푸짐한 몸집들. 그들이 동시에 알랑방구를 뀌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데아는 조금 쫄았다.
“뭐, 뭐야?”
그들은 일렬로 줄지어 데아를 호위했다. 그들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
―자, 비켜라! 위대하신 아홉 번째 1세대 인어 샤샤 님께서 길을 나가신다!
―그래! 비켜라 천것들아! 이분이 누구신지 아느냐? 바로! 태초님의 직계 권속 샤샤 님이시다!
엄마야…….
쥐구멍이 없다면 뚫으면 될 일. 데아는 등을 떠밀려 질질 나아가면서도 구멍 뚫기 좋은 벽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보았다. 저 멀리, 섬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작은 얼굴을.
‘귀, 귀신?’
영화 <주○>에 나온 것 비슷한 어린 남성체 인어였다.
그리고 데아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자잔……?”
맙소사, 자잔 맞잖아!
빠져나가고 싶은 상황 속에 마주친 익숙한 인물에 데아가 조용히 아는 척을 했다. 그래, 이 쪽팔림의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구명줄이 저기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나도… 반갑기도 했다.
데아를 본 자잔의 낯이 야차처럼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지금 이 귀족 인어들의 사이에 끼어 장원 급제 행차를 하는 데아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뭐, 뭐, 자잔?
―자잔이라고?
데아의 기쁜 목소리에 인어들이 우뚝 굳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불타오르던 자잔의 표정이 이제는 창백해져 있었다.
데아는 서둘러 인어들의 사이에서 빠져나가 자잔에게 다가갔다.
―너, 너, 너, 너, 이게 뭔…….
“어, 전보다는 키가 조금 자랐네? 잘 먹고 있는 거지?”
―그대가, 네가…….
“세상에 너무 반갑다! 그때는 잘 들어갔어? 아직도 맞고 다니는 건 아니고?”
자잔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네가, 네가 아홉 번째 1세대 인어라고? 네가?
아.
데아는 황급히 자잔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이곳을 뚫어져라 보는 인어들로부터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당연히 아니지……. 이거 인어화라고, S급 스킬이야. 그런데 아무도 몰라……. 아, 딱 한 인어는 안다.”
―스킬? 스킬이라고……? 나 말고 또 누가 아는데!
“퍼블리.”
―퍼블리?
일단 아는 이름이 그것밖에 없었으므로, 그 이름을 말했다. 그런데 자잔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 자식이……?
퍼블리라면, 1공대 소속의 숫기 없고 맹한 그림자 이름이잖아? 유일하게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오히려 뒤에서 불쌍하다는 듯이 해초 다과를 던져 준 인어라서 기억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자였나? 그렇게 안 봤는데…….
“아무튼, 살려 줘. 퍼블리가 도와주긴 했는데, 수상한 구석도 너무 많고, 나는 지상 감옥에 갇혀 있는 동료들을 구해야 하거든. 여길 몰래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길 좀 안내해 줄래?”
자잔은 그제야 허허로이 웃었다. 모든 사태를 이해한 자의 초연한 미소였다.
데아는 자잔의 속도 모르고 해맑게 마주 미소했다. 그 둘을 바라보는 인어들이 다급하게 쑥덕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그랬군…….’
이 망충한 인간은 또 오해에 오해를 받고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모양이었다. 좋아, 이해 끝!
“빨리 안내해 줘. 나한테 호위를 붙여 준다고 했는데, 그 호위가 오기 전에 여길 탈출해야 해.”
뚜둑, 뚝.
자잔이 가볍게 어깨와 손을 풀었다. 그리고 이를 갈았다. 안 좋은 예감을 느낀 데아가 퍼드득 물러섰지만 이미 늦었다. 자잔이 온화하게 웃었다. 이마에 핏줄이 비죽 돋았다.
―내가 호위야.
“…….”
데아가 그대로 등을 돌려 달아나려던 순간이었다.
―지금 도망쳐도 결국 잡힐 텐데?
맞는 말이었다. 데아는 이곳의 길도 몰랐다.
―자, 그러면 우선 장단에 맞춰 봐야지.
자잔은 과장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샤샤 님, 우선 방으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자잔은 정중한 말투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눈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데아는 뒷머리를 긁으며 수긍했다.
첫 번째 탈출이 허사로 돌아갔다.
◈ ◈ ◈
“그래.”
방으로 돌아가는 길, 데아와 자잔은 도란도란 지난 일을 서로 이야기하며 복도를 걸었다.
“어, 퍼블리!”
자신이 갈기갈기 찢어 놓은 미역 문이 있는 방에 다다르자,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퍼블리’가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퍼블리…라고?
당황한 자잔이 되물었지만 데아는 듣지 못했다.
“일찍 왔군.”
“어… 당연하지.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문이 다 찢겨 있길래. 탈출을 감행한 줄 알고 잡으러 갈까 고민했지.”
하여튼 눈치는 진짜 빠른 빌어먹을 인어…….
데아는 양손을 등 뒤로 숨기고선 살짝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냥… 창문도 없는 방에 갇혀 있기엔 답답해서. 산책이나 할까 싶었어.”
“이런, 말을 하지 그랬어. 답답하단 이유로 방문이 이렇게 만들 재주가 있는지 알았다면 더 쾌적한 방에 안내하는 건데. 자… 어쩔까? 문이 이렇게 되어 이 방은 더 이상 못 쓰는데.”
슈퍼 미역을 뜯은 게 내 탓이냐? 밀실에 처음부터 가둔 네가 잘못이지. 데아가 속으로 씨근거린 참이었다.
흠칫, 자잔의 주변 온도가 뚝뚝 떨어졌다. 허무함, 반가움, 기쁨 그리고 분노로 점철된 무거운 공기였다.
자잔은 ‘퍼블리’를 비참하게 쳐다보았다. 그에 반해 ‘퍼블리’는 자잔을 인식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럼 갈까. 새로운 방을 안내해 주도록 하지.”
키가 큰 ‘퍼블리’가 자연스럽게 데아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나아갔다. 자잔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수 미터 뒤에서 천천히 따라왔다.
‘뭐지? 이 불편한 기류는?’
휘적휘적 움직이는 꼬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등 뒤가 따가웠다.
데아의 뒤에서 자잔이 특유의 야차 같은 표정으로 데아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