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5화
이 끝나지 않는 괴롭힘은 자잔이 데아를 만나고 돌아온 날부터 더 극에 달했다.
―어쭈, 몸이 자랐다고 뻐기네?
자잔이 성장한 신체를 보며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래 봤자 15세 소년의 몸이었다. 장성한 성인에 비해서는 한참 모자랐다. 그러나 인어들은 그것만으로도 자잔을 더 심하게 시기하기 시작했다.
‘못생긴 놈들이…….’
―혼자 제국 밖으로 나갔다가 역도들한테 처맞고 돌아왔다며? 넌 1공대의 수치야. 알아?
―왜 밖으로 나간 건지. 길을 잃은 건 아닐 테고, 밖으로 나가면 뭐라도 될 줄 알았어?
‘주군, 주군, 트리야 님…….’
수적으로 밀려 결국 1공대 동료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자잔이 코를 문지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상당한 시간 동안 사태를 방관하던 자들이 괴롭힘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이제는 조금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뒤늦게 서로를 말려 상황은 어느 정도 진정된 상태였다. 끓어오른 흥분이 잦아들고, 소강상태에 접어든 그 순간, 자잔은 속으로 애타게 주군을 찾았다.
트리야 님, 저는 왜 몸이 자랄 수 없나요?
왜 나에겐 당신의 애정을 주지 않나요…….
그때 불현듯 자잔의 뇌리에 스쳐 지나간 건 한 사람이었다. ‘창’을 통해 침입한 강력한 인간 헌터. 발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던 그의 소중한 주군 트리야와 닮은 인간. 식량을 나눠 주고 웃음을 보여 주던 유일한…….
‘샤샤.’
자잔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애는 잘 돌아갔을까? 어쩌면 내 몸이 자란 것과 관련이 있을까?’
―버려진 권속이 아직도 여기에 있어!
―저리… 가!
자잔은 마른기침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익! 상대를 밀치자 외마디 비명을 지른 인어가 저 멀리 밀려나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쓰러졌다.
―자, 자잔 네가!
―저게!
자잔의 몸은 조금 자랐지만, 힘은 비약적으로 강해졌다.
일방적으로 괴롭힘당하던 자잔의 작은 반항에 인어들이 싸움을 시작했다. 주변 기물이 우수수 쓰러졌다. 자잔은 자신을 향해 물리적인 폭력과 욕설이 날라 왔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몸도 다 안 자란 남성체한테 진심으로 시비 거는 너희들은 어떻고. 너희들은 인간보다도 약하고 간사해. 알아? 한 번만 더 입을 털었다간 꼬리를 잘라내서 비늘을 머리에 꽂아버릴 거야.
험악한 고성이 터졌지만 자잔은 뻐근한 팔을 주무르며 다시 주먹을 날렸다. 비약적으로 강해진 힘으로 휘두른 주먹이 쫑알대는 인어에게 명중했다. 푸른 피가 묻어난 치아가 둥둥 떠다녔다.
―꺼져!
자잔의 작은 등이 비틀거렸다.
샤샤. 무척이나 그가 보고 싶었다.
그때 상사가 들어와 탁자 위로 올라갔다.
―자자, 제군들에게 알린다. 어어……? 싸우냐? 진정해!
씩씩대며 싸우던 간부들이 자리에 앉았다.
―호위를 하나 구할 거야.
―호위요?
―호위?
―그래. 소식은 다 들었지? 아홉 번째 1세대 인어님.
자리에 모인 모든 인어가 입을 다물었다.
그 아홉 번째 1세대 인어에 대해서는 자잔도 들은 바가 있었다. 트리야가 유일하게 미소 짓고, 트리야가 직접 이끌어 왕궁까지 데려간 그…….
―…….
질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분의 호위다. 잘할 수 있는 인어? 대신 조건이 있어. 사담을 나누지 않을 것, 하루에 한 번 그분의 행보를 하나하나 기록해 보고할 것. 뭐, 건강이 안 좋으신 분이라니까 제왕께서도 살피시는 거지.
간부들이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귀족의 호위는 꽤나 매력적인 기회이지만 트리야 제왕이 총애하는 1세대 인어의 호위라니. 실수라도 했다간 곧장 목이 날아갈 게 아닌가?
모두가 꺼려하던 그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자잔이었다.
―제가 호위로 지원하겠습니다.
부러움을 애써 억누르며 지원했다. 상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위치를 설명했다.
호위에 대한 설명을 숙지한 자잔이 문을 닫고 나서는 순간이었다.
위이이이이이이이잉―!
군사 지역 전체에 경보가 울린 건 그때였다.
아웅다웅 입을 털던 인어들도, 무시하고 나가던 자잔도 일시에 헤엄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제국 경계 안으로 인간 침입. 제국 경계 안으로 인간 침입. 마력이 느껴지는 한 명의 인간이 제국의 경계 안으로 침입했다. 위치는 동쪽 감옥의 지상 구역. 긴급 지원을 요청한다. 침입자들을 우선 주시하고, 마을로 내려가려는 기미가 보이면 전에 반드시 처리하라. 경우에 따라 사살도 허용한다.
―뭐야? 뭐야?
―해당 건은 2공대에게 연락을 넣겠다. 할 일들 해!
‘창’이 열리고 인간들이 넘어오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자잔은 심드렁하게 아홉 번째 1세대 인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았다. 갈기갈기 찢긴 미역과 텅 빈 방.
‘이 모든 책임은 호위에게로 가는데!’
―이, 이 젠장……!
자잔의 손이 발발 떨렸다. 이가 빠득 갈렸다.
제왕의 사랑을 받으면 감개무량하며 얌전히 있을 것이지 감히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을 보면 곧장 손톱으로 갈겨 주마!
◈ ◈ ◈
“이 벽은 뭐야?”
한편, 권도언은 가뿐히 투명한 벽을 넘었다.
게이트 밖으로 이데아를 쫓아 따라 온 건 좋았는데, 거대한 빛이 번쩍 하더니 정신을 잃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정신을 잃은 건 또 오랜만인데…….”
눈떠 보니 외딴 무인도에 홀로 있었다. 왜인지 고립된 기분마저 드는 걸 보니, 배구공에 사람 눈코입이라도 그려야 할 성 싶었다.
하지만 권도언은 훌륭한 21세기 대한민국의 스킬 깡패였다. 그깟 무인도는 3초 만에 바람을 타고 탈출했다. 28년 동안 무인도에 살았던 로빈슨이 보았더라면 충격에 혼절했을 법한 풍경이었다.
“여어기쯤 있을 것 같은데.”
권도언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초코바를 오물오물하며 흩어진 헌터의 마력을 쫓았다. 이동 스크롤로 돌아가더라도 길드장 체면이 있지, 혼자 돌아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지금이다.
권도언은 투명한 벽을 보며 확신했다. 가윗과 영영. 이곳에 그들의 마력이 모여 있었다. 이 벽 안쪽에 있군.
찾고 있던 이들의 흔적을 따라 벽을 넘은 순간이었다. 권도언은 철창에 갇혀 도시락을 우걱우걱 먹고 있는 영장류를 발견했다.
‘아니, 평범한 영장류가 아니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어! 길드장님!!”
“우와악! 길드장님이다!!”
권도언은 미간을 짚고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저기 있는 원숭이들이 인간 말을 한 것 같았는데, 환청인가?
“길드장니임―! 저희예요! 구해 주러 오셨군요! 저 가윗이요! 저희 좀 꺼내 주세요! 여기 저희 힘으로도 안 열려요!!”
“맞아요. 길드장님! 저희 인어한테 납치당했다가 여기 가둬졌어요! 그런데 왜 혼자 때깔이 그렇게 좋으세요? 그래도 반가워요, 길드장님! 저희 좀 꺼내 주세요!”
원숭이들이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권도언은 동굴 가운데에 있는 철창에 갇혀 우끼끼 소리 지르는 길드원들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과연… 저게 사람의 몰골이란 말인가?’
―잡았다 인간!
―저놈이 우리 지역을 침범한 놈이군!
그때, 지상으로 투입된 2공대의 간부들이 창을 권도언의 등에 툭툭 찌르며 으르렁거렸다. 당연하게도, 권도언은 인어들의 말을 듣지 못했다.
‘뭐야?’
“으아악! 길드장님 뒤에 인어, 인어!!”
“조심하세요 제발!!”
빙글, 권도언이 무미건조한 눈으로 두 손을 들어 올린 다음 몸을 돌려 인어들을 마주했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떴다. 인어들이 그 박력에 찔끔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그래 봤자 인간! 동료들을 구하러 왔군, 하하! 그러나 당장 여길 나가지 않으면……!
“하나 둘, 셋, 넷… 열, 열하나, 열둘. 끝인가?”
―이, 인간이 뭐라는 거야?
“내 길드원들을 구하려면 여기 인어들을 다 해치워야 한다는 거로군.”
―저 인간이 무, 무슨 말을……!
“그런데 열두 명밖에 되지 않다니, 애석하네.”
그 말을 끝으로 권도언은 몸을 날려 눈앞의 인어의 얼굴을 걷어찼다. 깽판의 시작이었다.
물론 그 깽판은 쉽게 끝났다.
사태는 빨리 정리되었다. 권도언은 툭툭 쓰러진 인어들을 걷어차고 열쇠를 그 품에서 찾아 철창을 열었다.
“으흐으윽, 길드장님! 저희를 구하러 오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혼자세요? 데아랑 릴림 공격대장님도 같이 게이트 안에 들어왔는데…….”
우끼끼 원숭이들이 권도언을 향해 달려들었다.
“잠깐.”
“네?”
권도언은 이상한 악취가 나는 원숭이들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뒤에 손가락을 까딱였다.
“흐아악!”
강하게 부는 바람은 두 사람을 공중에 띄어 올린 뒤 그대로 바다 속으로 입수시켰다.
“어푸푸, 길드장님!”
“어풉, 프흡, 권도언 길드장님! 아!!”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지만 악취와 더러움은 이전보다 훨씬 나아진 가윗과 하영지를 보며 권도언이 환하게 웃었다.
“미안해요. 조금 더러워서.”
“와…….”
가윗은 그 정도였나 팔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하영주는 차게 식은 표정이었다.
“이제 어떡하죠? 데아 누나랑 공격대장님을 찾아야 하는데!”
“두 헌터는 길드로 돌아가세요.”
권도언은 스킬을 써 훌쩍 두 헌터를 들어 올린 다음 처음에 자신이 눈을 떴던 무인도에 데려다 놓았다.
“릴림이랑 데아 씨는 제가 데려갈 테니까.”
이데아 씨가 과연 돌아가고 싶어 할지는 미지수지만.
이어지는 말은 삼켰다.
“아, 아뇨. 저희도 나설게요!”
“네?”
“맞아요. 아무리 길드장님이 강하시다고 해도, 여긴 인어들의 구역인 던전 안이잖아요. 혼자서 어떻게 다 하시려고!”
“음 그럼…….”
가윗과 영영. 이 둘의 고집은 여파 안에서도 유명했다. 권도언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쉽게 결정을 꺾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제가 올게요. 그리고, 그 팔찌 가지고 있죠?”
팔찌는 게이트에 들어온 직후에 나누어 준 수중 호흡 아이템이었다.
“아… 이거죠? 네.”
“가지고 있으세요. 그리고 여기 이동 스크롤.”
권도언에게는 길드장답게 이동 스크롤은 여유분도 있었다.
“여기는 인어들이 안 오더라고요. 아마 영역이 아닌 거겠죠? 그러니까 이 무인도에 계세요. 그리고 명심하세요. 포기하고 먼저 돌아간다고 해도 아무도 탓하지 않아요.”
고집이 쟁쟁하지만 두 헌터는 지친 기색이 만연했다. 더군다나 둘의 능력은 수중 전에 특화된 재질도 아니었다.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꼭 둘을 데리고 돌아오세요.”
“맞아요. 저 인벤토리 안에 30일 치 냉동 도시락 있어요.”
권도언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바람을 밟고 높게 뛰어올랐다.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자 어디… 이데아의 마력을 찾아 떠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