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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84화 (84/223)

※ 084화

그날, 유리는 수월하게 암살에 성공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간부들을 피해 푸른 피를 흩뿌리고 돌아오는 길. 빛 하나 들지 않는 제국의 정경을 바라보며 유리는 한탄했다.

죽여도 죽여도 트리야의 편에 붙은 변절자들은 끊임없이 늘어난다.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지긋지긋한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지? 우리의 제국은 언제쯤 빛을 볼 수 있지?’

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하얀 거대한 비늘과 꼬리를 가진 이 제국의 진정한 통치자, ‘태초’의 모습을 말이다.

‘태초’가 죽었다니, 그건 헛소문이었다. 지금은 금기된 서적에 따르면, 태초는 ‘죽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때를 기다려야 한다. 므아나 님과 윌로 님 그리고 움 님이 태초를 모시기 위해 여행을 떠난 지금, 남아 있는 혁명군은 남은 변절자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며 때를 기다려야…….

―아! 벽보를 붙이자!

벽보. 백성들을 선동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유리는 씩 웃었다.

◈          ◈          ◈

그다음 날, 새로운 소문으로 제국이 떠들썩했다.

마을마다 벽보가 붙었다. 내용은 이와 같았다.

[태초는 돌아온다!]

눈부신 순백의 비늘을 가진 위대한 군주는 죽지 않았다.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돌아온다.

태초임을 나타내는 바다의 벼락을 손에 들고 트리야를 심판하기 위해 돌아온다.

그 벼락 한 번이면 바다는 둘로 쪼개지고, 모든 생명은 죽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해일이 일어나 세상을 잠기게 하고, 모든 난파선들을 삼키고, 건물을 무너뜨리니 이보다 강한 인어가 세상에 더 어디 있단 말인가?

태초는 바다에 실존하는 태양이다. 그가 이 세상에 도래할 때, 우리는 살아 있는 하얀 태양을 마주할 것이다.

―혁명군 일동

“여기 제국에는 신기한 소문이 많이 도나 봐.”

데아는 벽보를 돌돌 말았다.

“트리야? 여기 제왕 이름이 트리야인가 보지. 그런데 뭔가 익숙한데…….”

“들은 적이 있나?”

“트리야가 당신의 시체를 가져갔어.”

이위로가 한 말이 왜 하필 지금.

“…제왕이잖아? 내가 들은 바로는 인어 제국의 제왕은 인간들을 엄청 싫어하면서 좋아하는 척 위선을 떠는 자라는데, 과연 폭군은 맞는가 보지. 백성들이 거리에 이런 글을 붙이는 거 보면.”

아침에 붙여져 많은 백성들을 혼란으로 이끌었던 벽보는 전부 회수된 지 오래였다.

데아는 어제, 자신을 왕궁으로 이끌어 준 인어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미처 회수하지 못한 벽보 한 장을 발견해 막 읽은 참이었다.

“태초가 돌아온다라…….”

데아는 이전에도 ‘태초’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전대 왕 ‘태초’가 인간들의 손에 죽었어.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게이트를 만들어 내서 인간들의 세상에 침범하고 인어를 풀어놓음으로써 인간계를 멸망으로 이끌려 하는 거야. 그러니 속지 마! 저들은 이용만 하다가 쓸모를 다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널 버릴 거야.

예전에 자잔이 했던 말이었지. 그때는 뭔가 싶었는데…….

“100년 전에 죽었었나 봐? 안 그래도 여기 충성 같은 인사말이 ‘태초를 위하여’였는데……. 이 제국의 초대 황제쯤 되나 보네. 그런데 다시 돌아온다는 건 뭐지. 죽었다 살아났나?”

여기도 세력 다툼이 엄청 심하구나. 혁명군이 있는 걸 봐서는 폭군에 대한 불만도 있는 것 같고.

“더 이동할 건가?”

“아냐, 괜찮아.”

데아가 제 옆의 인어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나저나 내 동료들을 풀어 준다고 해서 고마워. 안 그래도 인간이라는 걸 어떻게 밝히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걱정 덜었어. 물론 다른 인어한테는 말하지 마. 나는 다리뼈 뽑히기 싫으니까. 인어 중에도 착한 인어가 있구나?”

밖에 자신의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하나도 모르는 데아가 해사하게 미소했다. 트리야의 녹색 눈동자에 데아의 얼굴이 비쳤다.

“네가 보기에 내가 착하다면, 그건 착한 거겠지.”

근처를 지나가던 시종들과 간부들의 움직임이 뻣뻣해졌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지만 데아는 눈치 채지 못했다.

“응.”

지난밤, 데아는 자신의 말을 무뚝뚝하지만 묵묵히 다 들어 주는 인어에게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친절하게 고민 상담을 해주다니 (트리야는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다)

사실 데아가 이토록 편하게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이유에는 기이한 이끌림도 한몫했다. 상대 인어의 하얀 얼굴과 녹색 머리카락이 뭔가 익숙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데아는 저도 모르게 상대를 붙잡고 밤새 하소연을 했다. 그 덕분에 현재 친밀감은 꽤나 높아져 있었다.

“그런데 이름이……? 나는 그냥 샤샤라고 부르면 되는데,”

“나는…….”

인어, 트리야가 데아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미소했다. 근처 인어들이 미소를 보고 충격으로 뒤로 넘어가든 말든 상관없다는 미소였다.

“퍼블리라고 불러.”

졸지에 이름을 빼앗긴 퍼블리가 들으면 비명을 질렀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퍼블리는 현재 자리에 없었다.

“아하, 퍼블리구나. 퍼블리. 신분이 높아보여서 그런데, 부탁 하나 좀 들어주라.”

“뭐지?”

“절대로 이 트리야라는 제왕? 폭군? 아무튼 이 사람한테 내가 인간이라는 거 말하지 마. 절대로. 알겠지?”

“흐음…….”

왜 뜸을 들이는가. 네가 착하긴 해도 그렇게 사람을 애태우면 머리에 경배를 박아버릴 거니까, 빨리 말해.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데아의 눈이 희번덕 빛났다.

“여기 왕이 그렇게 포악하고 잔인하다며. 그리고 인간의 다리뼈도 비싸고……. 동료들을 인간세계로 보내고, 나는 알아서 외딴 곳에 정착해 조용히 살 테니까 그때까지만.”

입을 다물어 주기 바란다.

물론 뒤에 이어지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알아들었는지 ‘퍼블리’가 잔잔하게 웃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래 이걸로 됐다.

이 빌어먹을 인어 제국에 고이 안겨 온 게 어제다.

속으로 육두문자를 미친 듯이 날리며 포옹을 거부하는 고양이처럼 빠져나가려던 데아에게 동료를 운운하며 자리에 잡아 둔 건 녹색 눈동자의 저 인어, ‘퍼블리’였다.

“여분 방에 머물도록 하거라. 호위를 붙여 줄 테니 얌전하게 있고.”

“응, 고마워.”

‘퍼블리’는 데아를 미역으로 만든 침대와 붕붕 뜬 해먹이 있는 고급스러운 방에 둔 채 문을 닫고 나갔다.

완전히 문이 닫힐 때까지 조용히 손을 흔들던 데아는 문이 닫히자마자 우뚝 손을 멈췄다.

데아의 붕붕 뜬 동네 바보 같은 미소가 싹 사라졌다.

“…와 진짜 수상해.”

처음 보는 인간에게 ‘우호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나 잘해 준다고? 데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수상할 정도로 어색했던 주변 시종 인어들의 움직임, 가공할 만큼의 힘, 1세대 인어 도라안이 ‘누나’라고 부른 점, 생면부지의 인간에게 번듯한 방을 내주고 호위까지 제공할 만한 권력.

이 모든 경황이 한 가지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국의 왕 혹은 그에 준하는 무언가이거나…….”

이쯤 되면 ‘퍼블리’라는 이름도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쩌면 가명일 수도 있겠지.

데아는 서둘러 방을 둘러보았다. 뚫린 창문이 없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직감했다.

‘역시 내 예감이 맞군!’

곧 온다는 호위는 아마 호위가 아닌 감시병일 것이다. 감시병이 오기 전에 이곳의 탈출로를 확보해야 했다.

‘동료를 풀어 준다고? 탈출도 못 하게 완전한 밀실에 나를 가둬 둔 인어가 무슨 호의!’

스륵, 슥―

데아는 빼꼼 미역 문을 밀기도 하고, 당기기도 했다. 그러나 열리지 않았다. 무얼 해도 아무런 소용없었다.

뭘 먹였는지 통통하게 부풀어 보통 악력으로는 뜯어 낼 수도, 찢을 수도 없는 최강의 미역이었다.

“워, 무슨 미역이……!”

결국 데아는 인벤토리 안에서 단도를 꺼내 쓱 그었다. 하지만 수십 차례의 시도 모두 실패했다.

데아는 섬뜩한 밤의 망나니처럼 미역을 노려보았다.

“바다의 경배.”

[바다의 경배(SS): 머리끝까지 물에 젖은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은 강력한 죽음입니다.]

최강의 미역도 마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처참하게 뜯어진 미역을 뒤로하고, 데아는 무작정 밖으로 향했다.

◈          ◈          ◈

와르르르르르―

자잔은 자신의 자리 위에 엎어진 성게들을 주섬주섬 치웠다. 또다. 이런 괴롭힘은 일상이었다.

―이런, 이번에도 성게야?

―야, 자잔! 잘 치워!

대답해 줄 가치도 없었다. 자잔은 괴롭힘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시기, 질투,

비록 버려졌지만, 가장 강한 인어인 트리야의 유일한 권속이라는 출신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본인들은 힘들게 들어온 1공대이건만, 그들과 달리 제왕의 종속이라는 이유로 간부의 자리를 단숨에 꿰찬 자신을 향한 열등감.

1공대는 자신의 주군 트리야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만 모이는 왕국 제일의 군사 집단이었다.

그러나 그런 위치에 있음에도 주군이 싫어하는 권속이라니. 폭력을 행사해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근사한 구덩이가 아닌가. 그게 그들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자잔은 성게를 주섬주섬 들고 일어나, 방금 전까지 낄낄 웃던 인어의 머리 위로 한번에 던져버렸다.

―이 미친 새끼가!

―어, 자잔 힘들지? 내가 같이 치워 줄게.

익숙하고 유치한 괴롭힘을 덤덤히 받고 있던 자잔에게 한 간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가 자잔의 등과 옆구리, 아가미 쪽을 토닥여 주려던 순간이었다.

뿌드득!

―아악!

―저, 저게!

자잔은 다가온 인어의 팔을 그대로 꺾어버렸다.

―심해 생물의 독이로군.

독을 손에 묻히고 격려해 주는 척, 아가미에 손을 데려하다니.

―저 새끼가!

―자잔!

자신의 편은 없었다. 내부도, 외부도. 온통 자신의 적뿐이었다.

하다못해 자신을 1공대에 넣은 칸나니아 또한 자신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는 자잔이 1공대에 입단한 순간 모든 의무를 다했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자잔을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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