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3화
제왕은 웃지 않는다. 미소하지 않는다. 부드럽게 타인을 부르지 않는다. 누군가의 머리를 쓰다듬지 않는다.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의 망령이 덕지덕지 기워진 왕궁은 그야말로 거대한 묘에 가까웠다. 그곳에 사는 제왕은 혹독한 심해의 군주였고, 모두가 두려워할 폭군이었다.
트리야는 대련하지 않는다. 단지 학살할 뿐이다.
그러나 그날, 퍼블리는 머릿속의 상식이 와장창 깨지는 경험을 맛보았다. 눈앞의 현실이 머릿속의 견고한 법칙에 어퍼컷을 날렸다. 퍼블리는 무너졌다.
―세, 세상에…….
퍼블리뿐이 아니었다. 미아를 잃어버린 부모처럼 다급하게 동쪽 감옥을 향해 헤엄쳐 간 그림자들은 모두 공포에 떨며 무너졌다.
제왕이, 제왕이, 힘을 썼다. 그런데…….
―막히다니……!
공격이, 막혔다.
아니.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공격이 막힌 게 아니라 파훼된 거였다. 폭군 트리야 제왕이 공격이 아닌 방어를 한 것이다.
콰과과과과―!
비슷한 압력의 힘이 만나 공중분해되었다. 그 반동으로 근처에 있던 인어들이 침수된 허수아비처럼 속수무책으로 넘어졌다.
“무슨……!”
상상도 못한 그 상황 데아도 당황했다.
46%가 구현된 바다의 경배를 이렇게 정확하게 방어를 하다니? 나름의 SS급 스킬의 강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데아의 작은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뭐야, 누구야?”
방금 그건 절호의 한 방이었다. 이 모든 인어들을 한 번에 무찌르고 지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출력을 최대로 잡고 휘두른 ‘바다의 경배’였다.
그런데, 그 최대의 한 방을 검은색 칙칙한 망토를 두르고 뛰어든 어느 인어가 막아 냈다.
“크흑!”
데아가 뒤로 밀려났다. 주변의 인어들이 황급하게 일어섰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이상했다.
대부분의 인어들은 망토를 쓴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눈치를 보면서도, 그쪽을 향해 연신 눈동자를 굴리면서도, 애써 아는 척하지 않는 모습이 기이했다. 뭐지?
‘신분이 높은 인어인가?’
―저, 저 인어 좀 봐. 인간의 말을 쓴다던데, 정말이었군.
―방금 들었나? 인간처럼 성대로 말을 하잖아……?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이오? 더군다나 아까 전의 그 힘은 뭐지?
―도라안 님이 뒤로 가신 거 보면 모르나? 1세대 인어와 맞먹는 힘이야!
인어들이 데아를 보고 쑥덕거렸다. 데아의 머리가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공격은 불발되었다. 그러나 한시가 급한 지금, 바로 다음 공격으로 넘어가야했다.
46%가 구현된 바다의 경배는 미약하지만 바다까지 조종하는 힘을 가졌지.
“다시……!”
데아는 다시 창을 생성해 휘둘렀다. 데아의 의지를 따라 물살이 변했다. 인어들이 소리를 지르며 물러났다. 그러나 상대편의 인어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유롭게 또 공격을 막아 냈다.
“이게!”
그러나 그건 눈속임이었다.
‘인어화 해제!’
데아는 빠르게 헤엄칠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장점이 없는 인어화를 빠르게 풀고 해류를 밟고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돌로 만들어진 건물 위로 착지해 팔과 다리로 몸을 고정시켰다. 스킬 해제는 이것을 위해서였다.
“여기에 분명히 틈이…….”
아까 봐두었던 건물 사이의 틈. 그곳에 몸을 욱여넣고 다시 창을 생성했다.
저 멀리 추격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바다의 경, 윽!”
콰아아아―!
“?”
―으아악!
―감옥이 무너진다!!
데아는 해류를 조종해 건물을 무너뜨려 추격대의 발목을 잡고, 그 반동으로 지상으로 뛰어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망토를 뒤집어 쓴 인어가 데아의 계획을 선수 쳤다. 그 인어가 먼저 데아가 있는 건물을 가격해 터뜨린 것이다.
“안녕.”
망토를 쓴 인어가 데아에게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웃음기를 담고 휘어진 눈은 녹색이었다.
그 어두운 녹색 눈동자와 마주한 데아는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내 계획을 읽었나? 어떻게?’
[인어화(S): 나는 그대의 본질. 그대의 자유는 하얗다.]
데아는 다시 스킬을 쓰고 다른 곳으로 몸을 돌렸다.
머지않아 녹색 눈동자를 가진 그 인어에게 잡혔지만.
“헉!”
“어딜.”
데아는 순식간에 허리를 잡혀 인어의 옆구리에 달랑 매달렸다. 이, 이게 뭐지? 데아가 저항하려던 순간, 그 인어가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죽고 싶다면 더 날뛰어도 좋아.”
목덜미가 섬뜩해졌다.
“나, 내 동료들을 구출하면 난 여길 조용히 나갈 거야. 난 인간이거든. 그러니까 풀어 줘!”
데아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동료들?”
“지상 감옥에 있다고…….”
“아.”
데아를 내려다보는 인어, 트리야의 후드가 벗겨졌다.
“내가 그들을 구해 주지.”
“뭐…….”
정말?
“대신.”
그 창백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데아는 일순 숨 쉬는 것도 잊고 바라보았다. 오만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이런 귀여운 반항은 관두도록 해.”
트리야가 데아의 머리를 토닥이며 웃었다. 데아는 그 미모에 놀라움을 느꼈지만 아래 인어들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내, 내가 드디어 죽을 때가 된 건가?
―맙소사, 드디어 제국이 멸망하나 봐……!
―이, 이 인어가?! 참수당하고 싶어?
제왕은 웃지 않는다. 미소하지 않는다. 다정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머리를 쓰다듬지 않는다.
퍼블리의 턱이 벌어졌다. 방금 그 모든 공식이 깨졌다.
‘저, 저 검은 비늘의 인어가 도대체 누구길래?’
“폐, 아니, 누, 누나! 거기 말고 여기로 오세요!”
폭발의 잔해를 피하던 도라안이 ‘페하!’라고 외치려다가 잠행 법칙을 떠올리고 호칭을 바꿔 트리야를 불렀다. 말하고서도 어색해 숨어버리고 싶은 호칭이었다.
물론 트리야는 들리는 척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인사하거라, 도라안.”
“어, 어……?”
푸른 머리카락의 잘생긴 인어가 순간 벙찐 얼굴을 했다. 어딘가 고장 난 듯 삐걱이는 그와 데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라안은 눈으로 욕을 하며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제왕이 하라면 해야지, 뭐 어쩌겠는가.
“몇 없는 동족끼리는 친하게 지내야지.”
잔혹한 폭군, 트리야가 온화하게 웃었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도라안이 경악에 질린 얼굴을 했지만 트리야는 그대로 등을 돌려 데아를 왕국까지 데려갔다.
“뭐, 폐, 아니, 누나?”
아까 전, 트리야와 데아는 모종의 거래를 했다.
“네 동료들은 무사히 탈출시켜 주도록 하지. 단, 왕궁까지 순순히 온다면 말이야,”
“뭘 믿고? 보아하니 신분은 높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의 제왕보다는 아닐 것 아냐.”
“…타당한 지적이군. 하지만 나는 인간을 아끼는 몇 안 되는 인어라서. 나를 믿지 못하면, 그 어떤 인어를 믿을 수 있겠어?”
눈빛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튼.
사실 별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그래, 일단 동료들을 탈출시키는 게 우선이니까…….
그렇게 데아는 아가리를 벌린 왕궁에, 많은 영광이 탄생하고 사그라든 하얀 왕궁에 입성했다.
그리고 왕궁에 발을 디딘 데아는 또다시 느꼈다.
‘어, 또 기시감…….’
지금 데아의 옆구리를 잡은 인어를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기시감이, 거대하고 웅장한 왕궁을 보면서도 들었다.
‘착각이겠지.’
◈ ◈ ◈
당시 상황을 지켜본 눈들은 많았고, 소문은 꼬리보다 빨랐다.
모두가 경악해 혀를 놀렸다. 독재 정치로 병들었던 인어 제국에 새롭고 충격적인 소식이라니!
―검은 비늘을 가진 인어가 있는데, 그 인어가 인간의 말을 하더라니까요? 그런데, 세상에, 제왕님이 그 인어에게 ‘동족’이라고 했다고요!
―뭐요? 동족이라니!
트리야가 각별히 아끼는 ‘동족’이라니, 트리야는 꽤나 오만한 인어이기에 그가 동족이라 일컫는 종류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새로운 1세대 인어가 나타났다고!
제왕과 같은 1세대 인어!
―1세대 인어는 여덟 명뿐이야! 그런데 아홉 번째 1세대 인어가 나타났다는 건가?
―그렇다니까! 안 그러고서야 제왕이 직접 두 손으로 안아 왕궁으로 데려갔을 리가 없잖소!
―아냐, 그건 같은 1세대 인어님이라도 그렇게는 안 해! 아마 꽤나 오래전부터 귀애했던 마지막 동족인 거겠지!
―설마 몸이 약한가?
―옛날부터 몸이 약해 멀리 요양을 가있던 아홉 번째 인어인가?
―그럴듯하군! 그래서 제국에 늦게 나타난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도라안 님은 그 검은 비늘의 인어를 처음 보는 듯이 행동했다고…….
―검은 비늘? 나는 남색 비늘이라고 들었는데?
―나는 초록색 비늘이라고 들었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아? 도라안 님은 그 인어를 처음 보듯이 행동했잖아? 소식을 들은 칸나니아 님의 소식도 궁금한데…….
―아, 역시 그건가! 너무 지나치게 아껴서 같은 1세대들도 몰랐던 막내였던 거요! 알에서 부화하자마자 약한 몸으로 태어난 마지막 동족을 안타깝게 여긴 제왕은 아무도 모르게 먼 곳에 요양시킨 거지!
―그리고, 그리고?
―하지만 갇혀 있는 생활이 어디 행복하겠어? 지루함에 몸부림치던 아홉 번째 인어님은 탈출을 감행하게 되고, 길을 잃어 돌고 돌다가 수상한 인어라고 오인받아 감옥에 갇힌 거지. 그리고 거기서도 탈출하기 위해 저항하다가… 소식을 들은 제왕께서 와 그를 구출한다!
―완벽한 개연성이야!
수십 명의 인어들이 기립 박수를 치며 이야기꾼에게 찬사를 보냈다.
왁자지껄한 저녁의 주점, 박수를 받은 이야기꾼은 어깨를 으쓱으쓱 들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모두가 응고된 해초 구슬과 응축된 정어리 회를 집어먹으며 소란을 피웠다.
―아홉 번째 1세대 인어라…….
그 구석, 검은 후드를 푹 뒤집어쓴 두 명의 인어가 표정을 굳혔다.
―저게 사실이라면 꽤나 큰일이야. 1세대 인어라면 강하겠지. 보아하니 트리야에게 붙은 것 같고……. 유리, 어쩌지?
―어떡하긴. 일단 첩자를 통해 사실 관계를 조사해 보고, 사실이라면, 건강을 완벽하게 회복하기 전에 죽여야지.
유리라고 불린 인어가 쓱 후드를 들어 올려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을 살핀 유리의 선명한 분홍색 눈동자가 냉철히 빛났다.
―우리 혁명군에 도움이 될 인어는 절대 아닌 것 같으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두 인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점의 밖으로 향했다.
곧 밤이 되고, 뿔피리가 울릴 시간이었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독재. 그 공포 정치의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피를 뿌리며 죽어 갔던가.
―후, 다 왔다.
꼬물꼬물한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수십 갈래로 나뉜 굴이 나왔다. 그 여러 갈래 중 위쪽 굴로 올라가면 어두컴컴한 혁명군의 본부가 나왔다.
유리는 다섯 겹이나 되는 미역을 걷어 내고 돌문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위이잉― 마력이 흘러나와 회로를 적셨다.
드르르륵,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그 소리에 안에 있던 혁명군 인어들이 고개를 빼꼼 들었다.
―유리, 제이제이, 왔어?
―응. 소식 들었지?
―그 아홉 번째 인어? 당연하지. 얼마나 유명한데.
―빌어먹을 트리야……. 새로운 아군을 숨겨 놨을 줄이야…….
빠드득, 유리가 이를 갈았다. 바로 옆에 있던 또 다른 인어, 제이제이 또한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므아나 님… 어서 태초를 모시고 제국으로 돌아와 주세요.
그러자 모두가 기도문처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대들의 백성이 구원을 기다립니다. 저희 혁명군이 힘을 보탤 테니, 어서 오셔서 폭군의 목을 자르고 제국을 살려 주세요.
우리의 혁명군은 100년 전부터 존재했다. 모두가 주목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때를 기다렸다.
―오늘밤이야.
모두의 시선이 유리에게 꽂혔다.
―오늘밤, 첩자와 접촉하고 간부 메켄을 죽인다.
―누, 누가 하게?
―당연히 내가 해.
유리는 암살자 복장으로 갈아입고 복면을 썼다.
―다녀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