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2화
그것의 조각! 시종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근처를 담당하는 시종은 그대들이지. 그렇다면 다시 묻도록 하겠어.”
누가 그것을 빼돌렸나?
‘그것’은 시체였다. 시종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100년 전에 죽은 ‘태초’의 시신의 조각을 트리야 제왕이 빼돌려 자기만의 방에 감춰 두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누군가는 미쳤다며 속으로 욕했고, 누군가는 충격을 받고 왕궁을 이탈했다.
난자당해 흔적조차 남지 못한 ‘태초’의 시신의 일부. 트리야는 그것을 유리관에 가두고 소중히 보관했다.
오로지 트리야만 볼 수 있는 곳에 장식되듯 보관된 시체의 일부는 홀로 하얗게 빛났다. 근처를 관리하는 극소수의 시종들 외에, 아무도 그것에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시체 조각이 사라졌다니!
―‘그, 그것’이 사라졌다뇨……!
“아무래도 그대들은 모르는 일인 것 같군.”
―저, 저희들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군…….
“뭐… 그러지. 그대들의 제왕은 너그러우니.”
그러나 말과 다르게, 트리야는 손을 휙 휘둘렀다.
―커흑……!
―크악……!
트리야의 작은 손짓 하나에 해류가 변했다. 사방에 있던 물이 홀에 있는 모든 시종들의 목을 조르고 아가미를 막았다. 수십 명이 넘는 시종들의 낯이 파랗게 변하고 얼굴이 부풀어 올랐다.
제왕은 물을 다룬다. 그는 고작 손가락 하나로 모든 시종들의 목숨을 거둘 수 있었다.
트리야는 제 아래서 질식하는 인어들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고고한 석상처럼 서있는 제왕의 간부도 마찬가지였다.
“말해.”
시종들이 눈을 검게 까뒤집기 전이었다. 가장 앞에 나와 있던 시종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제, 크흡, 컥! 제가 봤……!
그 순간 모든 압력이 풀렸다. 갑작스럽게 해방된 인어들이 거칠게 호흡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하, 하지만, 쿨럭! 제가 봤을 때는 이미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열린 문틈으로 하얀 빛무리가 흘러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 순식간이라서 그때는 잘못 본 걸로만 알았는데!
“흘러갔다?”
트리야의 눈이 흥미를 담고 반짝이며 가느스름하게 휘었다. 권태와 지루만 가득했던 제왕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제왕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남아 있는 시종들은 살았다는 표정으로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흘러갔다니…….”
굳어 있던 폭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잔혹한 미소였다.
“도라안은?”
―도라안 님은 현재 외출하셨습니다.
폭군이 손을 올리자 뒤의 간부들이 검고 고급스러운 천을 그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윤택이 도는 천이 발광석 아래에서 위엄을 품고 빛났다.
“액자를 별장에 되돌려 놓으러 갔나?”
―그…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1공대 기리안 님이 왕궁에 오셨는데,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함께 외출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재미있는 얘기를 주워듣고 멋대로 따라갔나 보군.”
도라안, 푸른 비늘을 가진 다섯 번째 1세대 인어이자 칸나니아와 함께 트리야의 편에 붙은 친왕파 인어.
트리야는 변덕스럽고 표독스러운 동족을 그 나름대로 아꼈다. 포악한 성질머리를 감당해 줄 수 있을 만큼. 반짝거리는 보석과 지상의 물건들을 무단으로 수집하는 것을 눈감아 줄 만큼. 약속을 어기고 홀로 자리를 이탈해도 허용해 줄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라…….”
폭군의 옆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간부는 몰래 조용히 침을 삼켰다. 제왕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어떤 것에 흥미를 느끼신 걸까?
“어디로 향했지?”
―동쪽의 감옥입니다.
트리야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간부들이 천에 달려 있던 후드를 덮어 주었다.
“잠시 잠행을 하지.”
트리야는 홀로 밖으로 향했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무수한 기사, 간부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태초를 위하여!
―태초를 위하여!
제왕의 잠행을 방해하지 말라. 그건 영원불변의 법칙이었다.
우수한 1공대의 간부 몇 명만이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동쪽의 감옥으로 향하는 제왕의 뒤를 따랐다.
―후, 후우…….
―살았다…….
남아 있는 시종들과 귀족들은 자신의 목을 만지작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이, 이정도로 끝난 게 정말 다행이오.
―정말이지… 생각보다는 무난하게 넘어가서 다행이지.
백 년이 넘도록 폭군이 각별히 아꼈던, 아니, 거의 광적으로 지켰던 시체의 조각이 사라졌다.
‘분노한 폭군이 모두를 죽일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예상했다. 시종과 그곳을 지켰던 간부,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러나 살아남았다. 물론, 시체가 두 구나 생겼지만, 평소의 제왕의 성정을 고려하면 이건 아주 온화한 처사였다.
―심정의 변화가 있으신 건가?
―그거야 아무도 모르지…….
열린 문틈으로 넘실넘실 흘러갔던 하얀 빛 무리. 그것에 해답이 있을까?
시종은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 ◈ ◈
그 시각, 데아는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
도라안과 데아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도라안이 히죽 웃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데아의 검은 진주 같은 비늘과 얼굴을 죽 훑었다.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지. 너 인간의 말을 한다며?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봐.”
‘이런 망할!’
데아는 짧은 시간동안 치열하게 생각했다.
여기서 경배를 꺼내서 모두를 무찌르고 도망간다면 성공 확률은? 분명히 추격대가 붙을 텐데, 모두를 따돌리고 내가 안전하게 지상으로 올라가 가윗과 영주 언니를 구출해 낼 확률은?
사실 생각하고 있을 시간도 아까웠다. 지금도 영주 언니는 갇혀 있다. 리서 언니도 행방이 묘연했다. 나는 여기서 평생을 인어인 척, 물속에서도 숨을 쉬며 살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은 아니었다.
‘인어는 인간에게 위험해.’
인간의 다리뼈가 비싸게 팔리는 제국에서 인간의 대우가 좋을 리가.
‘그렇다면 정면 돌파는 위험해. 하지만…….’
주변을 포위하는 인어의 수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행동해야만 했다.
“바다의 경배.”
[바다의 경배(SS): 머리끝까지 물에 젖은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은 강력한 죽음입니다.]
“어? 뭐야, 정말로 말을 하잖…….”
도라안은 입을 딱 다물었다. 주변을 포위하던 인어들의 표정도 우뚝 굳었다. 물의 흐름이, 달라졌다.
“말도 안 돼…….”
도라안은 드물게 당황했다. 눈앞의 기이한 검은 비늘의 인어의 손으로 바다의 흐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위대한 생명과 그것의 마력이 휘몰아치며 길쭉한 창을 만들어 냈다.
‘창?’
도라안이 묘한 기시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그나저나…….’
“해류를 조종할 수 있는 건 제왕뿐이야.”
도라안의 눈이 탁해졌다.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삿된 것이 감히 제왕의 경계를 침범해?”
도라안뿐만 아니었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모든 인어가 혼란스러워 하며 데아를 향해 곤봉을 겨누었다.
물을 다룰 수 있는 인어가 제왕 말고도 또 있었다니? 이게 뭐지?
“무슨 헛소리, 제왕이 누군데?”
데아의 손에서 창이 한 바퀴 돌았다. 거대한 물살이 인어들을 덮쳤다.
“이건 내 고유 스킬이야!”
최대치 출력의 바다의 경배를 휘두르는 그때, 그와 반하는 거대한 힘이 충돌했다.
◈ ◈ ◈
퍼블리는 제왕을 수호하는 1공대 소속 간부였다. 그의 역할은 바로 그림자.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잠행을 떠난 제왕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았다.
―오늘도 똑같은 길로 가시려나…….
제왕의 잠행에는 몇 가지 법칙이 있었다.
첫 번째, 절대로 그를 아는 척하지 말 것.
트리야는 왕궁이 아닌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거나, 인사를 취하는 걸 매우 싫어했다. 아마 잠행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런 거겠지.
때문에 트리야의 얼굴을 아는 귀족들이 길에서 우연히 제왕을 마주쳐도 속으로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목은 꼿꼿하게 들고 있어야 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 숨 막히는 상황을 겪은 귀족들은 하나같이 뒤에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여기서 고개를 숙여버리면 왕궁에 돌아가 참살당하고, 그렇다고 대수롭지 않게 행동하기에는 제왕의 망토에 붙은 피 냄새가 너무 지독한데…….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어휴 그 심정 이해하지…….
제왕의 그림자 퍼블리는 마음 깊이 귀족들의 속사정에 공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제왕의 법칙 두 번째, 누군가 제왕을 노리는 사건이 일어났다면 제왕이 나서기 전에 그림자들이 처리할 것.
그 때문에 퍼블리는 눈을 번쩍 뜨고 제왕 주변을 경계했다.
안 그래도 이곳은 혁명군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동쪽 마을의 거리다. 하루살이 같은 누군가가 제왕에게 달려들면 그림자가 서둘러 막아야 했다.
물론 제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가소롭게 상대를 능욕하겠지만, 어찌 되었거나 고귀한 손에 직접 더러운 혁명군의 피를 묻히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세 번째, 그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힘을 꺼내 썼다면 절대로, 절대로. 제왕을 돕지 않을 것. 이건 그림자를 포함한 모든 인어에게 당부하는 말이었다.
제왕이 누군가를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상대의 수명은 그 순간 이미 끝났다. 제왕은 누군가를 방해하는 것만큼이나, 방해받는 것도 싫어했고, 특히나 저가 잡은 사냥감을 빼앗기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거참 까다롭고 어렵네…….’
그러나 익숙해졌다. 익숙해져야 했다. 그게 이 제왕이 독재하는 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한참 퍼블리가 제왕의 그림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지켜야 할 수칙들을 되새기던 그때였다.
―어!
유유자적하게 동쪽 감옥을 향해 나아가던 제왕이 사라졌다.
퍼블리를 포함한 그림자들이 놀라 자신들이 있어야 할 위치도 잊고 튀어나와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제왕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어, 어디 가셨지?
―이런 적은 처음 아닌가? 도대체 어디를……!
―서, 선배님! 찾았습니다!
퍼블리는 동쪽 감옥에서 제왕을 발견하고 헐레벌떡 선배 그림자들에게 상황을 알렸다.
―그, 그런데 제, 제왕께서 직접 힘을 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