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0화
“…….”
데아는 오늘도 꿈을 잘 기억해 내지 못했다.
뭔 개꿈이지? 잊자, 잊어.
―어? 저 인간 눈뜬 것 같은데?
데아는 서둘러 눈을 도로 감았다. 그리고 곧바로 드르릉 쿠우, 코를 골았다. 물론 물속이라 잘 되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다.
―자고 있잖아? 아니, 그나저나 인간이 맞냐니까? 인간이 어떻게 숨을 쉬어?
―그건 그래. 둔갑한 인어일 수도 있지. 어떤 주군 아래 3세대인지는 몰라도 주군이 꽤나 골머리 좀 썩이겠어. 멋대로 인간 다리를 만들다니. 요즘 애들이 그렇게 말을 안 듣는다며? 넌 어때?
―야, 말도 마. 내 동생도 딱 저 나이대인데 진짜 머리에 꿀밤을 천 번 먹여 주고 싶을 지경이야. 말은 어찌나 안 듣는지!
흠. 어딜 가나 동생이 말 안 듣는 건 똑같나 보군.
데아가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잠에서 깬 척을 할 수 있나 고민하는 사이, 교도관들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저 인간 혼자 있었어?
―그럴 리가. 너 소식 못 들었어?
그럼 그렇지!
데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위로의 손을 잡고 게이트를 넘어온 사람은 저 혼자가 아니었다.
잠깐, 그 애들도 여기 있나? 그러면…….
―남성체 인간 둘, 여성체 한 명이 더 있었어. 그런데 검은 옷을 입은 인간 남성체 놈이 갑자기 우리를 보더니 피라냐를 본 죽음의 칼잡이처럼 칼을 휘둘러대지 뭐야?
―뭐어?
―인간들 왜 그렇게 흉포해? 그놈이 같이 있던 동료 둘을 죽이고 사라졌어! 미친놈이야. 잡히는 즉시 심장에 칼을 박아버려야지.
음, 권도언은 안전하게 탈출한 것 같았다.
―나머지 어린 남성체 하나랑 여성체는 따로따로 감옥에 구금해 놨어. 아직 기절 중이고.
어린 남성체 인간 하나는 아마 가윗일 확률이 높았다. 권도언을 만나면 따질 게 하나 더 늘었다. 어떻게 된 게 길드장이라는 인간이 길드원을 내버려 두고 홀로 떠날 수 있는지 머리털을 뽑……. 아니다. 이제 권도언과는 조금 어색했다.
‘그런데 여성체 인간이 왜 한 명뿐이지?’
백리서와 하영주가 게이트 밖을 넘었으니 둘이어야 할 텐데……. 이위로는 도망간 걸까? 누구 한 명은 이위로를 따라갔을까? 아니면 그대로 물살에 휩쓸려서…….
최악의 가정이 눈을 떴다. 데아는 섬뜩한 예감을 애써 모른 척했다.
‘에, 에이. 다 살아 있을 거야. 감옥에 일단 둘이나 있잖아? 우선 다 안전하겠지.’
그리고 가윗이 물속에 있는 감옥에 갇혀서도 숨을 쉴 수 있는 이유는 권도언이 준 팔찌 아이템 덕분일 거고. 여기 들어오자마자 모두에게 배부하는 걸 봤으니까. 그러니까 우선 이 점은 안심하고…….
안심하고…….
“미친! 그거 유효 시간 한두 시간뿐인데!!”
―허억!!
―뭐야! 인간이 눈을 떴어!
데아는 머리카락을 뒤집어쓴 채 철창으로 휘청휘청 다가와 실성한 듯이 탕탕, 벽을 쳤다. 교도관들의 얼굴에 공포가 들이닥쳤다.
“몇, 몇 시간 지났어!”
―귀신이다!!
“내가 잡혀 온 지 몇 시간 지났냐고!!”
―살려 줘!
데아가 철창 너머로 손을 쑥 뻗어 교도관의 멱살을 잡자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물고기 꼬리를 하반신에 단 인어들이 철봉을 들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죄인을 포박해!
“아, 아니, 사람 말 좀.”
―이, 인간의 말을 하잖아? 인간 맞잖아!
“그럼 내가 인어로 보이냐?”
―조용.
그때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짧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겨 매끈한 이마를 드러낸 남자 인어였다. 그가 나타나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기리안 님!
―태초를 위하여.
―태초를 위하여!
‘태초… 뭐? 그게 뭐야?’
설마 인사말인가. 충성, 뭐 그런?
데아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 남자 인어가 데아를 보더니 우뚝 걸음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나를 여기까지 부를 일인가? 겨우 금지 구역에서 발견한 인간 하나가 날뛰는 걸로?
―죄, 죄송합니다.
―됐고, 인간의 얼굴이나 보자고.
어두운 피부, 완벽하게 정리된 회색 머리카락, 반듯한 콧대와 큰 눈.
‘잘생겼네. 영주 언니가 보면 좋아하겠어.’
―…뭐지, 저 인간은?
데아와 남자 인어가 서로를 보고 처음 한 생각이었다.
―…….
―기리안 님?
기리안이라 불린 남자 인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의 눈동자는 정확히 데아에게 향해 있었다. 물속을 부유하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 하얀 피부, 음영이 진 긴 눈매,
그가 120년 동안 찾아다니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기리안 님?
그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왜 그대는 인간으로 태어났는가!’
―기리안 님?
더군다나 저 인간은 감옥에 갇혀 있음에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분명 평범한 가문의 인간은 아닐 터였다.
데아의 기본 표정이 무표정임을 모르는 인어의 착각이었다.
1공대 소속 간부 기리안의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졌다. 그 벼락의 이름은 사랑의 큐피드였다. 그의 머릿속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시 물어볼게. 내가 여기 들어온 지 몇 시간 지났지?”
그토록 찾아다녔던 이상형이 물었다. 대답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지만 애써 감췄다. 하지만 그래도 1공대 간부라는 직위가 가진 무게가 있기에 기리안은 최대한 목을 뒤로 빼며 근엄하게 말했다.
―하루가 지났다.
“뭐? 미친, 제기랄!”
제 이상형은 욕을 해도 매력적이었다.
아, 설마 동료들을 걱정하는 걸까.
그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다. 안 그래도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와 함께 잡혀 온 인간들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해 주지. 그들은 다른 층의 감옥 안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잡혀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홀로 몸을 뒤틀더니 기절하더군.
데아는 숨을 들이켰다.
팔찌의 유효 시간이 다 끝난 거야.
―인간이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버렸기에 일어난 실수였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그들은 지상 감옥으로 빠르게 이송시켰다. 아직 정신을 차렸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지만, 죽진 않았으니 곧 깨어나겠지.
그렇다면 한숨 돌렸다. 데아는 안심하며 주저앉았다.
―그런데 그대는 왜 여전히 물속에서 숨을 쉬고 있지?
“나는 좀 특별해서.”
―그렇군.
역시 범상치 않은 인간이야…….
중얼거리는 인어의 말소리가 들렸다.
―기리안 님, 여기서 시간을 끄시면 안 됩니다! 인간이라면 지상으로 돌려보내야 하지만, 이 인간은 감히 제국의 금지된 구역까지 침입한 자라고요!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서둘러 참수하셔야 합니다! 다른 백성들이 보기 전에 서둘러 쓱싹 하셔야 한다고요!
―히, 히히, 맞아요. 요즘 인간의 다리뼈가 그렇게 인기라는데, 몰래 팔아버리고 저희끼리 나누죠. 히히, 이게 웬 횡재라냐.
데아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인간 대우 왜 이래?’
큰일 났다. 인간인 걸 들키면 안 돼. 하지만 이미 인간인 걸 모두가 알…….
그때 데아의 머리를 스친 건 한 줄기 기적이었다.
맙소사 그 생각을 왜 안 하고 있었지?
‘상태 창!’
[인어화(S) : 나는 그대의 본질. 그대의 자유는 하얗다.]
권도언의 실험실을 탈출할 때 습득했던 새로운 스킬, 인어화.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은 없었지만 써보지 않아도 알 법한 스킬명.
‘인어화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스킬이 생긴 건 정말 놀라웠지만, 한편으론 물속에서 숨도 쉬는 판에 그렇게 놀라울 건 또 뭐 있을까 싶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지만 데아는 무시했다.
‘됐어. 어차피 얼굴 팔려서 당분간은 인간 도시로는 못 돌아가.’
“잠깐, 내가 특별한 건 맞지만 나는 나를 인간이라 한 적이 없어.”
―응? 하지만 방금은…….
“난 인어야.”
―뭣?
일단 인어라고 둘러대자. 우선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리고 지상 감옥의 위치를 물어물어 가윗과 하영주를 구출하고 튀는 거야!
이건 도박이자 사기였다. 데아는 이 한 패에 모든 돈을 걸었다.
표정은 오만하게,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을 번거롭게 만든 건 미안해. 길을 헤매다가 해류에 휩쓸려서 정신을 잃었는데 거기였어. 같이 떨어진 인간들은 내 친구들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전엔 인간이라고 했잖아!
“농… 농담이었어.”
크흡, 안 돼. 말 더듬지 마, 이데아.
데아는 표정 관리를 위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간수들과 기리안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지 못했다.
―네, 네 말은… 네가 인어라고?
“그래. 증거를 보여 줘?”
간수들은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아는 곧바로 스킬을 시전했다.
[인어화(S) : 나는 그대의 본질. 그대의 자유는 하얗다.]
다리 쪽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런 멋진 스킬을 멋없게 우중충한 감옥 구석에서 최초로 시연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그랬지만 어쩔 수 없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기리안의 눈이 커졌다. 누가 차가운 단도로 척추를 긁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어때?”
스스로를 인어라고 한 인간은 증거를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모든 이의 시선 속에서 변화했다. 두 다리가 하나로 붙었고, 지느러미가 펼쳐졌다. 어두운 물갈퀴와 아가미, 그리고 늘어진 귀와 검게 변화한 흰자. 주변의 해류가 빙글빙글 헤엄쳤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우아해……!’
그는 홀린 듯이 넋을 놓았다. 살아가며 무수한 인어들의 인간 둔갑 과정을 보았지만 이번만큼 시선을 뺏긴 적은 처음이었다. 보아하니 주변의 모든 간수들도 비슷했다.
그들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유연하게 감옥 바닥을 꼬리로 쓸었고, 비늘을 불빛 아래 당당히 내보였다. 어둠의 장막 같은 지느러미가 몸과 팔에 감겼다. 머리카락도, 비늘도, 꼬리도, 물갈퀴도, 그 모든 것이 검었다. 오직 옷 밖으로 보이는 피부만이 하얗게 빛났다.
가끔 수면 밖의 밤하늘을 바라보면 별이 박힌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건 하늘이 아니었다. 적어도 인어들에게는 영원히 갈 수 없는 바다였다. 그렇기에 숨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높은 곳에 홀로 매달린 바다. 그걸 지켜보는 눈에 반짝이는 가루를 박아 주는…….
그런 바다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정확히는 그런 바다를 통째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어두운 별빛 무리의 비늘이었다.
이렇게 검고 찬란한 비늘을 가진 인어가 있던가?
―…말도 안 돼!
“증거를 보였잖아. 어서 날 풀어 줘. 속죄할게.”
간수들이 주춤거리더니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데아는 그제야 뭐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기리안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표정이 딱딱했다.
―정말 그대가 인어가 맞는다면.
잠깐, 설마 저거.
―그대는 어떻게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나?
아차.
데아는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 까먹고 있었어!’
“1세대와 2세대의 차이가 있어?”
“당연하지. 1세대만이 인간의 언어를 쓸 줄 아는 걸?”
예전에 피파에게 전해 들었던 내용이 뇌리를 스쳤다.
“아… 잠깐.”
데아는 눈치를 봤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
감옥 내부에 정적이 맴돌았다. 데아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젠장, 설마 나를 1세대 인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그거 아니지? 아냐, 그렇게 말해서라도 여길 탈출할 수 있다면 이득이니까 일단 우겨버릴……!
―그럴 리가. 1세대 인어는 여덟 명뿐이야!
심지어 1세대 인어는 여덟 명뿐이란다. 데아는 속으로 이마를 퍽퍽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