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9화
이위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백리서의 얼굴에는 당황이 스쳤다.
“안 돼, 아직은……!”
파아아아앗―!
게이트가 환하게 비산했다. 데아는 재빠르게 게이트 안으로 도망쳤다.
여례아는 잠잠해진 다음에 차근차근 망가뜨려야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은은 몰락시킬 것이다.
―맞아. 자기가 다시 인간 세상에 발을 디딜 날이 온다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을 거야.
경배의 속삭임과 함께 망가진 도시의 모습이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 직전에.
“데아야!”
“……?”
하영주가 불쑥 들어와 손을 잡았다. 하영주의 얼굴에 새겨진 건 죄책감이었다.
“어디 가? 너 혼자 못 보내!”
“이것들은 또 뭐야?!”
이위로가 당황하든 말든 인간들은 더 들어왔다.
“으아악! 영주 누나, 이거 뭐예요!!”
하영주에게 끌려온 가윗이었다. 가윗은 데아를 보더니 시선을 피하고 속삭였다.
“그, 잘 생각해 봤는데 예에전에… 제가 누나한테 심한 말을 한 것 같…….”
“이런 재밌는 일에는 제가 빠지면 섭하죠. 같이 가요.”
“길드장님?!”
권도언은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자, 팔찌 하나씩 받으세요.”
“세, 세, 세상에!”
가윗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데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백리서도 따라 들어왔다.
“같이 가, 그럼.”
하영주와 가윗, 권도언과 백리서까지 게이트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위로의 짜증 섞인 한탄이 가까이서 들려왔다.
“별 인간들이 나대고 난리야!”
이위로의 뺨에 순식간에 위협적인 비늘이 돋았다. 그리고 번쩍, 빛이 시야를 가렸다. 게이트가 닫혔다. 모든 것의 점멸이었다.
데아는 정신을 잃었다.
◈ ◈ ◈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감옥 안이었다.
―저거 인간 맞아? 물속에서 어떻게 숨을 쉬는데?
―둔갑한 인어일 수도 있지, 뭐. 그런데 그게 상관있나? 금지된 구역 안에서 발견됐다는 게 중요하지, 뭐.
―하아아아… 칸나니아 님에게는 어떻게 보고해야 하나.
데아는 입을 다물었다. 철창 너머 보이는 교도관들의 하반신이 이상했다.
‘물고기 꼬리……?’
그리고 깨달았다.
여긴 인어 제국의 감옥 안이었다.
‘제기랄, 진짜 돌아버리겠네.’
◈ ◈ ◈
최초의 인어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뭐야……. 우리가 실패했다고?
―…응.
그들이 하고 있던 실험. 그건 연금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곳의 연구원들은 모두 광인이었고, 나는 그들이 창조해 낸 작은 세포였다. 모든 것을 삼킴으로써 그것의 몸을 차지하며 변화하며 진화하는 생물체. 그건 고대의 용감한 연구자들의 꿈이었다.
모두가 나에게 기대를 걸었다. 사람들의 손톱보다 작은 이상한 물질. 최초의 나는 다리가 여섯 개였다.
―틀렸어. 버려! 이건 그냥 기생 생물일 뿐이야! 기생충이라고!
―하, 하지만 이 기생 생물은 바로 뇌에 파고들어 가서…….
―틀렸어! 버리라고!!
그러나 실험은 실패했다. 실험체는 바다에 버려졌다. 수많은 인간들은 등을 돌렸다.
나를 버렸어, 나를 버렸어. 나에겐 자아가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버렸어.
나는 실패하지 않았어요. 나는…….
덥석!
나는 작은 물고기에게 먹혔다. 그게 처음이었다. 나는 그것의 혈류를 거슬렀다. 곧장 그것의 식도를 기어가다가 위로 달라붙었다. 본능이었다.
그래, 나는 실패하지 않았어. 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어. 나는 작은 여섯 개의 다리를 움직여 물고기의 두개골을 뚫고 위로 기어갔다. 더, 더 위로.
그렇게 나는 뇌에 닿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스며든다. 모든 정보가 쏟아진다. 나는 침식하는 배에서 잠을 청하는 자살자의 심정이 되어 휴식을 취했다. 스며든다. 또다시 끌어당긴다.
나는 눈을 떴다. 내 시야 안에는 눈을 희번덕거리는 어류가 있었다. 탁한 지느러미와 눈.
나는 놀라 버둥거렸다. 어류도 버둥거렸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버려진 유리에 비춰진 내 모습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나를 먹은 물고기의 뇌를 장악했다. 나는 물고기가 되었다.
나는 바닷속에 있었다. 그래, 나는 성공했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나는 힘차게 헤엄쳤다. 지느러미가 힘 있게 물살을 헤쳤다.
그렇게 나는 또 먹혔다. 나보다 큰 물고기에게. 나는 그것의 식도를 뚫고 또 거슬러 올라갔다. 고통이 밀려왔지만 괜찮았다. 그리고 또 뇌에 정착했다. 눈을 감았다 떴다. 나는 또 힘차게 헤엄치기 시작했다.
내가 뇌에 발을 디디면 그것들의 자아는 죽고 말아.
그러나 죄책감은 없었다. 나는 살아남고 싶었으므로. 나에겐 아직 그 정도의 지능이 없었으므로.
그 후로도 수없이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먹히면 그것의 뇌에 침투해 몸을 빼앗았다. 그리고 또 먹히면 또 그것의 뇌에 올라가 매달렸다. 내 본질은 뇌였으므로. 뇌만 멀쩡하다면 나는 죽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수천 번을 먹혔다. 식도를 뚫고 올라가 뇌에 머리를 박는 일이 계속되었다. 지치지 않았다. 이건 내 본능이었으므로. 작은 미생물의 숙명이었으므로.
텅 빈 기계처럼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뿐이었다. 나는 계속 먹혔고, 행동했다.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가 될 때까지.
나는 거대한 이빨이 달린 물고기에게 먹혔다. 물고기의 이름은 알지 못했다. 그것의 피부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이빨은 모든 피식자를 갈기갈기 찢을 수 있을 만큼 강했다. 비늘은 없었고, 눈은 움푹 튀어나와 모든 사냥감을 탐색했다. 그건 무시무시한 악력과 꼬리 힘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강한 물고기가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아무에게도 잡아먹히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그렇게 권태로운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머리 위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나무 조각들이 떠밀려 왔다. 값비싸 보이는 보석들도 내 앞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난파선이 추락했다.
나는 해류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아, 안 돼! 죽기 싫어!’
나는 다시 거슬러 올랐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내 눈앞에 인간이 있었다.
‘인간!’
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벌렸다. 한입 거리였다.
몸이 이상해!
인간을 삼킨 상어는 몸에 이상을 느꼈다. 그건 신호였다. 몸이, 몸의 일부가 변하고 있었다.
‘내가 달라지고 있어!’
상어는 호기심을 배웠다. 난파선은 많았다. 작은 호기심은 인간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상어에게는 팔이 생겼다.
‘더 줘!’
더 먹어 치웠다. 배에서 추락한 해적들의 시신을 마음껏 들이켰다. 상어의 눈이 쑥 들어갔다. 더 먹어 치웠다. 살 조각과 뼈를 아그작아그작 씹어 넘겼다.
상어에게는 어깨가 생겼다. 인간의 뇌와 장기가 생겼다. 시간이 더 지났다. 상어에게는 머리카락이 자라났다.
‘내, 내 모습이 지금 어떻지?’
상어는 수면 밖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놀랍게도 숨이 쉬어졌다. 그리고 비명 소리가 들렸다.
“괴, 괴물이다!!”
괴물. 그게 내 이름인가?
상어는 자신의 이름을 깨우쳤다. 그러나 어느 날, 해변의 인간들은 상어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인어가 나타났다!”
최초의 인어. 태초가 된 기생 생물은 입을 벌렸다. 먹는 족족 그건 기생 생물의 것이 되었다. 인간의 우수한 지능, 성대, 시야, 장기. 짐승의 체력, 이빨. 어류의 유연함.
기생 생물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기생 생물은 입을 벌렸다. 바다를 삼켰다. 파도와 해류, 물결. 바다에 스며든 모든 생명력과 마력까지 모조리.
그렇게 기생 생물은 바다가 되었다. 마력이 되었다. 기적은 어렵지 않았다.
◈ ◈ ◈
―주군?
나는 꿈에서 깼다.
‘옛날의 꿈이군.’
나는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푹푹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요?
―어, 어어. 미안해. 트리야. 잠시 내가 잠에 든 모양이야.
―피곤하면 그냥 주무세요. 제가 노래를 불러 드릴게요.
―노래를?
―네.
그리고 녹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아이는 잔잔한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종종 불러 주었던 노래였다.
그걸 다 기억하고 있다니, 기특하기도 하지.
―거친 파도의 소리가 너의 악몽을 가려 줄 거야.
―그날만큼은 꿈 없이 휴식하길 바라. 너희들의 다정한 요람이 곁에 있으니.
아이는 해초를 엮어 만든 머리장식을 나에게 건넸다. 나는 고개를 숙여 장식을 썼다.
―나는 아직 모르겠어요. 수면에 잠기는 태양의 파편. 눈부심에 찡그린 눈가의 주름. 확대된 세상이 당신을 향해 비산하죠.
―노래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트리야.
―정말요?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아이는 내 하얀 비늘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그럼. 두 번째 인어가 태어나도 네 노래에는 찬사를 보낼 거야.
트리야가 뚝 노래를 멈췄다.
―두 번째 말이죠.
―그래. 두 번째로 태어날 인어……. 아, 사실 이름도 정해 놨단다. 바로 릴…….
―이름을 벌써요?
―아무렴. 태어났는데 이름조차 받지 못하면 얼마나 슬프겠어?
나는 인자하게 웃었다. 그리고 트리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너무 경계하지 마. 내가 너에게 주는 사랑은 적어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새로운 인어가 생겨도 싫어하지 말아. 우리 동족의 수는 너무나도 적고 위태롭기에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하거든.
―그래도 조금 싫어요. 나는 영원히 둘이고만 싶은데…….
―대신 나는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게. 항상 그랬지만… 나는 너에게 해를 끼치는 것들을 모두 없애 줄 수 있어. 나는 너를 가장 사랑하니까. 그래, 예를 들면.
나는 부드럽게 트리야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제 너에게 돌을 던졌던 인간들을 전부 죽여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