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5화
똑, 또옥.
“누님.”
헤타가 동굴의 벽을 딱딱 두드리며 의원 안으로 들어섰다. 가만히 응고되던 유리병 안을 지켜보던 피파가 비죽 웃었다.
“인간 세상 일로 정신없는 줄 알았더니.”
“끝까지 저를 공격하려는 성가신 인간 남자가 있었지만… 따돌리고 돌아왔습니다.”
“잘 왔어.”
“그나저나 저에게 엉뚱한 상식을 알려 주셨습니다.”
“뭘?”
“부킹이 아니라 납치 아닙니까.”
피파가 어이없는 눈으로 헤타를 흘겼다. 저의 막내 남동생은 간혹 이렇게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군다. 그것도 귀엽지만.
“그건 뭡니까?”
피파가 완벽하게 응고된 유리잔을 흔들었다. 유리병의 색이 검은색으로, 하얀색으로 바뀌길 반복하다가 이내 하얀색으로 고정되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검은색 머리카락이었다.
“응. 비늘 색을 알아봤어.”
“비늘 색이라면…….”
헤타가 굳은 얼굴로 유리병을 돌아봤다.
“그 머리카락의 주인은 누굽니까?”
“누구겠어.”
“그자에게 언제 머리카락까지 얻어 오셨습니까?”
“그럴 때가 있었지.”
피파는 예전에 던전 안에 들어온 이데아의 머리카락 일부를 썩둑 잘랐던 때를 회상했다. 전리품을 손에 쥐고 돌아온 피파는 즉시 실험에 착수했고, 신체 일부 속에 스며들어 간 마력을 읽어 내는 데 성공했다.
딸깍!
피파가 유리병을 열자 안에 응고되었던 물체가 구슬이 되어 둥둥 떠올랐다.
“비늘…….”
구슬은 인어의 비늘 형태로 변했다. 시리도록 하얀 눈의 색깔이었다.
“모든 인어를 통틀어 이렇게 티 없는 하얀색의 비늘을 가진 인어는…….”
“한 명이었죠.”
정적이 내려앉았다.
“오로지 한 명.”
지금은 죽어 없을 한 명.
그동안 치열하게 추론해 낸 가설이 진실이 되었다. 헤타는 서둘러 동굴 밖으로 나왔다. 피파가 문을 닫고 따라갔다.
“어디 가니?”
“인간 세계에서 그자가 이상한 남자에게 끌려갔습니다. 분명 그 실험실과 관련이 있을 테니까 트리야 누님이 손을 쓰기 전에 먼저 구해 내야…….”
그러나 헤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눈앞에 눈부신 빛의 ‘창’이 생성된 까닭이었다.
“……!”
그 즉시 엄청난 강도의 해류가 발생했다.
콰과과과과―!!
“…누가 창을 수면 아래 만들었지? 누, 누님입니까?”
“난 아냐. 더군다나 이 마력은…….”
윌로……?
두 세계를 완전히 이어 주는 창은 수면 속에 만들지 않는 것이 법칙이었다. 왜냐하면 인어 세계의 무수한 바닷물이 고스란히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와, 저 너머에 있는 세계에 물난리가 났겠는걸.”
끊임없이 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바닷물과, 그 여파로 거칠게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피파가 바위를 잡아 몸을 지탱했다.
“이 근처에 주민들이 없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휩쓸려 넘어갈 뻔했어.”
“그나저나 윌로가 이런 곳에 게이트를 생성했다니…….”
헤타는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창의 이곳저곳을 관찰하던 피파글랜의 눈동자가 날 선 흥미를 담고 빛났다.
“인간 세계는 난리가 났겠어. 내 집 앞에서 생성된 게이트니까… SS급 정도로 측정됐을 텐데, 우리 윌로는 대담하기도 하지. 인간 흉내가 지루했나?”
“윌로가 급하게 이런 게이트를 생성시킬 정도로 위급한 상황인 걸까요?”
“글쎄, 시선을 끌기에는 확실한 방법이겠어. 이대로라면 인간들은 절대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을 테고, 바닷물은 끊임없이 나올 테니까 해결 방안이 없……. 응?”
그때 해류가 서서히 멈춰갔다. 게이트는 그대로였다.
“누가 건너편에 방벽을 세웠네?”
피파가 픽 웃으며 창을 느리게 더듬었다.
“모래인가?”
겉보기로는 그냥 모래로 된 방벽을 쌓은 것뿐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미세한 마력이 얼기설기 엮여 있었다.
“과연. 이대로라면 나가지도 못하겠는데.”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어떡하긴. 우리 귀여운 동생 말 들어줘야지.”
이 던전의 보스 인어로 아무래도 내가 나오길 원하는 것 같으니까.
피파는 기다렸다.
“이 대충 만든 모래의 방벽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 ◈ ◈
―거친 파도의 소리가 너의 악몽을 가려 줄 거야.
―그날만큼은 꿈 없이 휴식하길 바라. 너희들의 다정한 요람이 곁에 있으니.
모든 하급 인어는 이 노래를 알고 있었다. 저의 찬란한 바다님. 우리들의 유일한 제왕이 종종 흥얼거렸던 자장가였다.
노래는 총 두 가지였다. 제왕이 아이들을 향해 속삭이는 앞의 노래가 끝나면 이어 다른 멜로디가 시작되곤 했다. 그건 그를 향해 보내는 아이들의 답가였다.
―나는 아직 모르겠어요. 수면에 잠기는 태양의 파편. 눈부심에 찡그린 눈가의 주름. 확대된 세상이 당신을 향해 비산하죠.
―파도의 일렁거림은 그의 지느러미야. 수면 아래로 내려오는 햇빛은 그의 비늘을 비추고, 깊고 무거운 심해의 정적은 그의 머리카락을 수놓지. 맞아. 그는 바다를 닮았거든.
―우리는 모두 죽으면 바다로 돌아가. 바다로 돌아가 그를 도와…….
―그를 도와 희생할 거야. 그를 향해 머리를 맞대고 눈을 감을 거야.
“세상에……!”
“피해, 어서!”
권도언의 실험실에 갇힌 모든 하급 인어는 마지막 순간, 그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건 뇌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던 마지막 기억이었다. 끝의 끝까지 아껴 두었다가 마지막 순간 퍼져 나온 추억이었다.
그 누구도 잊지 못한 추억이었다…….
“이데아 씨!”
권도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위로와 하영주, 그리고 이데아는 고개를 돌려 실험실 내부로 들어온 권도언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슴까지 차오른 물로 인해 흠뻑 젖은 채였다.
“어서 나오세요!”
그가 소리쳤다. 그리고 그 순간, 권도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뇌가 터져 죽은 인어들의 수많은 시체가 물 위에 둥둥 떠있었는데, 그 인어들의 머리는 모두 한곳을 향해 있었다.
“…….”
태양을 향해 꽃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제가 묻힐 곳을 알고 찾아오는 짐승처럼, 죽음의 순간 제가 머리를 두고 죽을 곳을 아는 인어처럼.
“왜…….”
인어의 머릿속에 심어 두었던 건 뇌를 태우는 폭발 칩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이데아를 향해 머리를 두고 둥둥 떠버린 인어들의 시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야속함이었다.
데아는 하영주의 손을 뿌리치고 천천히 헤엄치며 나아갔다. 손끝에 인어의 머리가 닿았다.
“어…….”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들어 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자기야.
그때 바다의 경배가 말을 걸었다. 드물게 침착한 어조였다.
―그거 먹어, 데아야.
‘뭐?’
데아의 손에 잡힌 건 인어에게서 나온 마석이었다. 작은 원형의 마석. 그것은 다른 인어에게서도 굴러 떨어졌다. 하나, 둘, 아슬아슬하게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괴물들의 마석이 데아에게 떠내려왔다.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냥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언제나 이 순간을 바라 왔다는 듯이 데아는 행동했다.
등 뒤에 권도언이, 하영주가, 그리고 이위로가 있다는 사실은 어느새 망각한 채였다. 데아는 몸을 수그리고 마석을 하나 삼켰다.
하나.
“데, 데아야. 너 뭐 먹어!”
“이데아 씨.”
둘, 셋.
―거친 파도의 소리가 너의 악몽을 가려 줄 거야.
―그날만큼은 꿈 없이 휴식하길 바라. 너희들의 다정한 요람이 곁에 있으니.
노래가 들려왔다. 그건 귀가 아닌 머리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였다.
넷, 다섯.
“이데아 씨, 이리 오세요. 이곳은 위험합니다.”
“데아야, 물이 차오르고 있어. 우리 나가야 해!”
여섯.
그리고 상태 창이 떠올랐다.
[상태 창]
[등급 : N]
이데아―헌터명 : 사샤
마력 : 21(+53)
체력 : 20(+12)
생명력 : 30(+12)
속도 : 21(+12)
―획득한 스킬―
[물속의 발자취(A) : 물속에서 제약 없이 빠른 행동력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심해의 눈(A) : 당신은 승리할 것입니다.]
[타고난 몰이꾼(A) : 인어의 주목을 받는 동안 속도가 +60 증가합니다.]
[바다의 경배(S) : 머리끝까지 물에 젖은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은 강력한 죽음입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서(S) : 이건 유폐된 자들의 목소리이다.]
―미획득 스킬―
[○○○](??)
[우리의 ○○○ ○○○](?)
[○○○ ○○○ ○○](??)
미획득 스킬 중 하나가 빛나기 시작했다.
[○○○](??)
비어 있던 부분이 하얗게 지워지더니 이내 새로운 스킬이 써졌다.
[조건 충족]
[미습득 스킬 획득 조건 충족]
[스킬, 인어화(S) 습득 성공!]
[바다의 경배(S)가 놀라 창을 떨어뜨립니다.]
[새롭게 돌아온 스킬이 나른하게 눈을 뜹니다.]
[인어화(S) : 나는 그대의 본질. 그대의 자유는 하얗다.]
인어화.
새로운 스킬의 이름에 데아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인어화라니…….’
나는 그대의 본질. 그대의 자유는 하얗다.
스킬 설명은 언제나 그렇듯이 불친절했지만 데아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 스킬의 기능을 전부 알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저 스킬을 사용하지는 마. 자기가 곤란해질 거야.
경배였다.
그리고 이어서 상태 창 메시지가 떠올랐다.
[바다의 경배(S) : 머리끝까지 물에 젖은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은 강력한 죽음입니다.]
바다의 경배에 대한 메시지였다.
[당신의 마력이 부족합니다!]
[당신의 기억이 부족합니다!]
[○신의 바다는 ○직 ○○○○○!]
―자기야, 마저 마석을 삼켜.
일곱.
데아가 일곱 번째 마석을 삼킨 순간이었다. 휙, 몸이 돌아갔다. 권도언이 다급하게 데아를 끌어안고는 출구로 이끌었다. 저 멀리 있는 하영주는 권도언에게 받은 은색 팔찌를 끼고 있었다. 이로써 여기 모인 전원은 안전하다.
“길드장님, 알다시피…….”
데아가 나는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
권도언의 악력이 강해졌다가 이내 풀어졌다. 그는 확실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왜?’
데아는 다른 손으로 마석을 먹었다.
여덟.
[축하합니다!]
[마석의 섭취량이 증가했습니다.]
[당신의 ○○가 중간 이상에 도달했습니다.]
[바다의 경배(S)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스킬 시전자를 보호하기 위해 스킬, 바다의 경배가 몸을 웅크립니다.]
[15% 구현 완료]
[35% 구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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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구현 완료]
46%.
처음 15%와 비교하면 엄청난 수치였다.
[바다의 경배(SS) : 머리끝까지 물에 젖은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은 강력한 죽음입니다.]
‘어?’
데아는 멍하게 눈을 크게 떴다.
‘SS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