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1화
띵.
권도언은 엘리베이터 너머, 등을 기대고 서있는 백리서를 응시했다.
“날 기다렸어?”
백리서가 몸을 일으켰다.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는 두 눈이 서늘했다.
“데아는?”
“저 밑에 잘 있어. 당분간 혼자 둬야 할 것 같지만.”
“그래. 그런데…….”
턱, 백리서가 권도언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자신의 앞에 쭉 내뻗어진 다리를 본 권도언이 헛웃음을 뱉었다.
“이건 뭐야. 나 물 떨어지는 거 안 보여? 저리 가.”
“이상하단 말이지.”
“뭐가?”
“들어갈 때랑 나올 때랑 너무 다른 게.”
권도언은 무시하고 백리서를 지나쳤다. 백리서의 시선이 물끄러미 그의 등을 훑었다.
“데아를 실험할 의향이 전혀 없구나, 너?”
우뚝, 권도언의 발걸음이 멈췄다. 짜증스러운 눈길이 그 뒤를 이었다.
“백리서, 자꾸 나에 대해 다 안다는 듯이 지껄이는 걸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보호 차원이야?”
백리서가 조용히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차갑게 흔들리는 직사각형의 작은 전자기기 안 기사에는 누군가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이데아를 보호해?”
“헛소리를.”
“계약서를 봤어.”
백리서가 미안하다고 곧바로 사과했다.
“볼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봐야 할 것 같아서 봤어.”
이건 또 무슨 헛소리…….
백리서가 말하는 계약서는 뻔했다. 예전에 이데아와 권도언 사이에 비밀리에 진행한 계약이었다. 네가 6년 전 생존자라는 걸 유출하지 않는 대신, 너 또한 내 실험실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계약서.
그러나 실험실의 존재는 이미 퍼져버렸다. 남은 건 이데아가 6년 전 생존자라는 사실뿐인데…….
탁, 권도언이 백리서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그 안의 기사는 며칠 전부터 떠들썩하게 퍼지고 있던 지라시의 일부였다. 6년 전 생존자의 현재 모습이라는 사진 한 장.
그건 이데아였다.
“…이게 이렇게나 빨리 퍼졌나?”
“아는 거 아니었어?”
“알았지. 알았는데…….”
권도언이 천장을 응시했다. 화를 눌러 담는 것에는 얼마나 많은 인내의 시간이 필요한 걸까. 하나, 둘, 셋, 틀렸다. 머리가 하나도 진정되지 않았다.
“여기은 짓이야. 그 정신 나간 새끼가 퍼뜨렸어.”
심지어 교묘하게 그 사진의 주인공이 ‘샤샤’라는 건 감춰 퍼뜨렸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6년 전 생존자의 현재 모습을 알았지만, 그가 헌터 샤샤라는 건 몰랐다. 그리고 이게 의도하는 건…….
“여례아가 우리와 교섭을 시도하고 있어.”
네가 여례아의 회생에 힘쓰지 않으면 아직 퍼지지 않은 정보마저 전부 다 발설하겠다는 협박이었다. 물론 권도언은 그런 애들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용건이 뭐야?”
“안 솔깃해?”
“뭘? 빙빙 돌리지 말고 용건을 말해.”
백리서가 팔짱을 꼈다.
“여례아가 원하는 바는 명확해. 길드의 기사회생. S급 던전의 출현을 숨기고, 헛소문을 퍼뜨려 여파의 명예를 훼손했으며…….”
“알아, 알아. 그래서 여례아는 막대한 손해 배상 청구와 더불어 땅에 떨어진 명예를 얻게 되었지. 알아. 그래서 뭐?”
“이데아가 죽었다고 발표해. 그리고 숨겨. 그러면 간편하잖아? 넌 마음 놓고 이데아를 실험할 수 있게 되고, 목표를 잃은 인어들은 방황하다 사라지겠지. 여기은의 협박도 더는 먹히지 않겠고.”
백리서와 권도언의 시야가 맞물렸다.
“이데아를 의심하고, 가두고, 동시에 해부하고 싶어 했잖아. 지금이 적기 아니야? 왜 망설이는 거지?”
평소의 백리서와 달랐다. 백리서는 명백하게 그를 떠보고 있었다. 그리고 권도언은 그가 말하는 바가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적기이긴 하지.”
맨얼굴로 세상에 나올 수 없는 몸이 된 이데아를 당당하게 가두고, 나가면 안 된다 각인시키고, 세상이 이데아의 얼굴을 잊을 때까지 계속 실험실에 두고 생활한다. 어차피 이데아는 실종 상태였으니 그 기간이 더 길어져 봤자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어차피 계약은 해지되었으니 걸릴 건 없었다.
하지만…….
권도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리서가 알 만하다는 듯이 비죽 웃었다.
“그래, 보호해. 잘 해봐.”
백리서는 탁, 도로 자신의 휴대폰을 쥐어 들고 등을 돌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권도언은 백리서가 납치당하고 실종된 이데아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크게 노력했는지 알고 있었다.
“…속을 알 수가 없네.”
◈ ◈ ◈
헤타와 같이 있던 데아가 보란 듯이 납치당하고 난 직후, 여례아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백리서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023길드의 길드장, 차현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백리서는 차현을 쥐 잡듯 추궁했다.
자리에 있던 수많은 헌터들이 백리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능력을 쓰며 외부에 지원을 요청해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때의 백리서는 차현의 멱살을 들어 올려 그를 겁박했다. 그야말로 거대한 힘이었다.
“너는 여례아의 숨겨진 실험실의 위치를 알고 있지?”
“컥, 커흑!”
“당장 불어.”
그리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인간답지 않은 살기. 언제나 위에서 상황을 관조하던 고등생물이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는 현실에 기가 차 웃는 것 같았다.
“나, 나는 몰라.”
“아니, 당신은 알아.”
퍼억!
차현이 곤봉으로 백리서의 팔을 내리쳤다. 그 틈을 타 곧바로 빠져나와 바닥을 굴렀고, 멀찍이 떨어져 서로를 경계했다.
‘뭐지? 이 괴물 같은 힘은…….’
차현이 목을 만지며 숨을 헐떡이자 백리서가 다시 성큼 다가와 물었다.
“그래, 말을 할 수 없다면 돕기라도 해.”
본래 백리서와 차현의 관계는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차현은 충격 어린 표정으로 백리서를 응시했다.
“당신은 여례아가 무슨 짓을 꾸밀지 알고 있었잖아. 그렇지?”
그 음험한 여기은이 타인을 안 꼬드겼을 리 없다.
물론 그의 생각은 맞았다. 차현은 여기은이 누구를 납치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도저히 그 무도덕성을 참을 수 없어 뛰쳐나온 것도 자신 아니던가.
“제발, 차현. 샤샤가 죽지 않게 도와줘.”
백리서는 차현의 죄책감을 이용했다. 차현은 고민했고, 동시에 두려워했으며.
“…좋아.”
동시에 납득했다. 백리서의 살기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카인. 이리 와.”
“네!”
카인은 023 소속의 헌터로, 특정 인물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여기은이 순순히 자신을 추적할 수 있게 둘 리가 없어.”
“추적하는 건 여기은이 아니야.”
“그럼?”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헤타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고용한 프리 헌터 헤타. 저 남자지.”
차분해진 백리서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어조로 한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지금부터 여례아의 프리 헌터로 잠입할 거야.”
그리고 상황이 이루어졌다. 잠입은 성공적이었고, 카인은 그를 효과적으로 추적했으며, 숨겨졌던 던전의 위치까지 곧바로 까발려졌다.
“내가 할 일이 또 있나?”
“당연하지. 간단해. 단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던전에 모인 저들을 당황시켜.”
“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빠르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여례아의 적인 여파가 아니라, 중립이었던 023의 이름으로 해당 던전의 위치를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려.”
“…….”
“모든 일이 이미 다른 제3자의 입을 통해 고발되었다고 믿을 만큼 정확하고 신속하게.”
백리서는 정말이지 적으로 두고 싶지 않은 헌터였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던 차현이 상념에 잠겼다.
차현은 헌터로 각성해 아픔을 극복한 폭력의 피해자였으며, 방관자였다. 아니, 과연 극복했던가?
“샤샤는 고립당해 매장당한 환자였지.”
“…….”
“헌터로 각성해 그나마 구덩이 속에서 기어 나올 수 있었어. 자, 차현. 선택해.”
폭력의 방관자로 남을 건지, 고발자로 남을 건지.
그 말이 기폭제였다. 차현은 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신호탄이 발사됐다.
모든 것이 끝나고, 차현은 권도언의 두 팔 위에 안겨 나온 이데아를 볼 수 있었다.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고요하게 홀로 잠들어 있던, 가장 강한 헌터. 샤샤.
“돌아간다.”
차현은 도망치듯 길드로 돌아갔다.
◈ ◈ ◈
“윌로.”
“응, 언니.”
움, 연옥은 가만히 손짓하며 눈앞의 인어를 불렀다. 일곱 번째 인어 윌로가 가만히 그에게 다가왔다.
“왜 불렀어? 표정은 또 왜 그래?”
“큰일이야.”
유우라가 사라졌어.
움의 말에도 윌로는 긴 머리를 다시 틀어 올려 묶으며 고개를 갸웃 숙였다.
“그게 왜? 어디 나갔나 보지.”
“이 인간 세상에서? 말도 못하는 인어 하나가?”
“괜찮아. 우리는 바다로 향하는 본능이 있으니까 언젠가는 찾아지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움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매를 꾹 눌렀다. 피로함이 가득 쌓여 있는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우리가 지금 가장 걱정해야 하는 건…….”
순간 이동이 가능한 유일한 일곱 번째 1세대 인어, 윌로. 그가 탁, 머리 고무줄을 끝까지 묶었다. 잔머리를 빼내는 손끝이 둥글했다.
“데아 언니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야.”
움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아, 이데아는 알까? 지금 저의 곁에 정체를 감춘 인어가 정말 많다는 걸.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분명 충격에 빠져 시름시름 앓을 것이다.
움의 눈에 자조적인 탄식이 가득 찼다. 그걸 모르는지 아는지 윌로는 다리를 동동 흔들며 짜증스럽게 눈을 부라렸다. 둥그런 이마에 팍 주름이 갔다.
“권도언이 분명 데려간 거야. 미친놈. 그 새끼 처음부터 눈깔이 이상했어.”
곧바로 입이 걸걸해졌다. 움이 상체를 기울였다. 윌로는 이제 손톱을 아그작아그작 물어뜯고 있었다. 손톱 사이의 살이 갈라지고 지익, 살점이 뜯어졌다.
“너 피.”
“아.”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움이 인상을 풀었다.
“깜짝 놀랐네.”
“왜, 푸른 피가 떨어질까 겁났어?”
윌로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이 한탄으로 변한 건 한순간이었지만.
“지금은 인간 모습이니까 당연하지. 왜 그렇게 놀라? 놀라긴.”
“그래, 그래. 미안해.”
“므아나 언니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안심할 수가 없어. 그 미친놈이 데아 언니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하지?”
우리가 어떻게 그를 속이고, 그를 지켰는데.
우리가 어떤 심정으로 그를 기만했는데.
윌로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눈에 실핏줄이 터지자 움이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내가 나설 차례야.”
“…뭐?”
“지금 데아 언니가 갇혔어. 그 빌어먹을 실험실이라는 곳에. 하급 인어들이 우글우글 노예처럼 결박되어 가둬져 있다는 그곳에!”
“…….”
‘잠깐, 이게 이렇게 풀리나?’
움이 숨을 죽였다.
“어떻게 그가 그런 열약한 장소에 갇혀 있을 수 있어? 아, 안 돼. 구하러 가야 해.”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윌로가 두 손으로 양 뺨을 찰싹 두드렸다.
“데아 언니는 갇혀 있어. 그래. 왜 가뒀냐고 물으면 보호 차원이라 대답할지도 몰라. 데아 언니가 6년 전 생존자이기 때문에 억울하게 갇혀 실험을 당해도…….”
그 사람은 도망칠 곳이 없네.
“움 언니. 정말 이게 언니가 원하던 거야?”
그 사람이 인간계에서 고립당하면 우리에게로 올 거라 생각했어?
윌로가 물었지만 움은 대답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미래를 내다보는 초월의 눈을 가진 세 번째 인어는 언제나 그렇듯이 부정도 긍정도 아닌 표정을 걸치고 자신을 쳐다보곤 했다. 헐떡이던 숨이 점차 가라앉았다.
“그전부터 생각해 봤어.”
중립인 헤타를 제외하고 인간 세상에 나와 있는 세 명의 1세대 인어 중 정체가 드러나도 가장 리스크가 적은 인어가 누구일까?
“나야. 맞지?”
움은 잠입이 쉬운 예언자 ‘연옥’으로 활동 중이었고, 므아나는 인간계에 그 누구보다 깊숙이 침투해 있었으니까.
“나밖에 없어. 맞지?”
우리들의 태초를 구하기 위해서 내가 가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