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8화
버티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백리서의 중얼거림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정확했다. 자신은 어느 측면에서는 이미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퍽!
“아!”
누군가와 거칠게 부딪친 건 그 순간이었다. 여파 길드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6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코너를 꺾은 순간, 데아는 대비하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턱!
“괜찮으십니까?”
아니, 넘어질 뻔했다. 데아는 아슬아슬하게 뒤로 자빠지려던 자신의 팔을 붙잡은 거구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짧게 자른 회색 머리카락, 우주에 흰색 물감을 섞은 듯한 오묘한 색의 은빛 눈동자 속에 자신의 당황한 모습이 비춰졌다.
가끔 각성하면 체모와 눈동자 색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도 그런 경우인 것 같았다. 데아는 어색하게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일어섰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
“아…….”
데아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가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난 것처럼 당황했다. 그제야 데아는 남자를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해 냈다.
몇 달 전, 카페에서 하영주가 나가는 이 남자를 보고 존잘이라며 환호성을 질렀었다. 맞아, 그랬다. 그 남자였다. 여기서 또 만날 줄은 몰랐는데.
크게 떠진 데아의 눈을 뭐라 해석했는지 몰라도, 커다란 조각칼로 조소한 것 같은 시원한 이목구비와 듬직하고 크고 굵은 어깨, 그리고 2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몸을 가진 남자가 데아를 향해 미간을 좁혔다.
“다치셨…습니까?”
“아, 아니요. 멀쩡해요. 뛰어온 제가 앞을 못 본 탓인걸요. 그럼 안녕히 가세…….”
“아, 잠깐만요! 그렇다면… 뭐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뒤돌아 뛰어가려던 데아의 등이 멈췄다. 다단계이거나, 사이비이거나, 아니면…….
“여파 길드가 어느 쪽인지 아십니까?”
길을 물어보는 선량한 시민이거나.
데아는 눈에 띄게 안도하며 다시 남자를 마주했다. 여파 길드는 여기서 가까웠다.
“그… 이쪽 길로 나가서 저쪽으로 돌아선 다음에 나오는 편의점 맞은편 두 번째 건물이에요.”
“아…….”
남자는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길을 알려 준 사람의 성의를 봐서 대충 알아들었다는 척을 해주겠다는 듯, 애써 고개를 끄덕이는 제스처를 취했다.
“알겠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리고 남자는 반대편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분명 처음에 내가 손으로 가리키기까지 해줬는데?
“아니, 그쪽 아니라 이쪽이요!”
“아, 착각했군요.”
그리고 남자는 옳은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느닷없이 길을 꺾어 왼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아니, 거기선 직진이래도.
데아는 비어 있는 남자의 두 손을 확인했다. 핸드폰은 쥐어져 있지 않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왜 핸드폰 지도를 사용하지 않는 건지 의문이었지만, 그건 한 달 전의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상념은 집어넣기로 했다.
이 사람… 엄청난 길치군.
“…그냥 저랑 같이 가실래요? 저도 지금 여파 길드 가고 있는 중인데.”
남자가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고개를 돌렸다. 눈썹이 짙고 음영이 진한 얼굴이라서 그런가, 무표정이 소름 끼치게 잘 어울렸다. 그런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는 그가 데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건조한 얼굴에 약간의 난처함이 보이는 것 같다고, 데아는 생각했다.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 ◈ ◈
내향성 인간들의 대화는 삭막하다. 그리고 지금, 데아는 그 말에 여실히 공감하고 있었다.
뭐라도 얘기를 해야 하는 걸까.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앞장서 걸어가다가 잘 따라오나 흘끗 고개만 돌려 존재 확인만 해주면 되는 걸까.
“아…….”
심지어 횡단보도의 불이 바로 앞에서 붉게 변해버렸다.
차라리 걷는 게 편하지, 정적 속에서 기다리기란…….
“여파 길드원이신가 봅니다.”
큽, 어색함에 몸부림치던 데아는 고개를 번쩍 들어 남자를 마주했다. 침묵 속에서 괴롭다는 생각을 한 건 데아뿐이라는 듯이 그는 여전히 평온하게 무뚝뚝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네. 공격 스킬이 없어 공략 팀에는 끼지 못하지만… 훈련 보조를 맡고 있어요.”
“멋지네요. 원래 사냥개의 훈련사가 가장 고된 직업이니까요.”
데아의 표정이 미약하게 굳었다. 이 사람, 헌터를 사냥개라 불렀다.
“사냥개보다는 편하죠. 그래도 인간인걸요.”
“본인의 능력을 조절하지 못하는 헌터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나름이죠. 그 능력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게 훈련장과 보조의 역할인걸요. 그리고 대부분의 헌터들은 훈련에 아주 잘 따라줘요.”
항상 훈련을 하다가 엎어지는 데아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던 훈련장이 들었다면 말 하나는 청산유수라며 팔팔 뛸 말이었다.
그러자 남자의 눈썹이 살풋 기울어졌다.
“제 말이 실례가 됐나요?”
쓸데없이 눈치는 좋았다. 그러나 데아는 고개를 저었다.
화제를, 화제를 돌리자.
“그나저나… 여파 길드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사람이요? 길드원이면 방문증 있어야 하는데, 연락은 하셨어요?”
“연락은 한참 전에 했는데… 길을 잃어서 약속 시간에 늦었습니다.”
“저런, 1층 방문 데스크에 가시면 바로 조회 가능하시니까 꼭 확인하시고요.”
횡단보도에 다시 초록불이 들어왔다. 데아는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방문객이라고 하면 바로 위층에서 연락 올 텐데, 누구를 만나시려는 거예요?”
“연옥 님이라고…….”
“아, 예언자님?”
데아는 목소리를 확 낮췄다.
생각해 보니까 예언자님을 잊고 있었다. 그분이 해준 말이나 예언들, 뉴욕 길드에 가면 붉은 인어를 만날 수 있다고 했던 모든 말들이 맞았는데도 잊고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지인이세요?”
“어… 예, 지인입니다.”
“헉…….”
데아는 자세를 바로 하곤 남자의 그림자 안에서 성큼 한 발자국 벗어나며 손을 활짝 펼쳤다.
“바로 저 편의점만 넘어가면 됩니다!”
“네. 아, 혹시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십니까? 길도 안내해 주시고 감사한데, 뭐라도 사드리고 싶어서…….”
“아뇨,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저 예언자님께 제 말만 잘 해주시면 됩니다. 길을 가다 만난 헌터가 참 친절하고 정중하게 길 안내를 해주었다고요.”
“…….”
“제 이름은 이데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갑작스러운 통성명에 남자가 적응이 안 된다는 듯 데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입술을 움직였다.
“헤타.”
그가 뱉은 건 짧고 둔탁한 음성이었다.
“헤타요? 아, 그럼 성은…….”
“…그냥 헤타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아하, 외국분이셨구나. 한국말 잘 하시네.”
어쩐지 얼굴이 좀 서구적이더라니.
데아는 머리를 긁적이다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니지. 헌터명일 수도 있다.
본명을 밝히기 꺼려하는 헌터들은 의외로 많았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범죄나 음지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도 의외로 그런 직업군과… 꽤… 어울리나?
데아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혹시 각성자세요?”
“…….”
곤란해하는 표정을 보며 데아는 자신의 직감이 맞았음을 예감했다.
젠장, 괜한 걸 물어봤다. 자신의 임무는 길을 안내해 주는 게 다일 텐데, 왜 더한 걸 물어서는.
“그냥 물어봤어요. 흔하게 방어나 돌격 스킬 가진 헌터들이 그렇더라고요. 체격도 크시고, 딱 봐도 뭔가 각성자 같아서요. 신경 쓰지 마세요.”
“…….”
“하하, 그럼 가실까요.”
제기랄, 차라리 어색한 게 더 낫지.
데아는 서둘러 여파 길드 쪽으로 걸음을 바삐 옮겼다. 이 대화의 종결을 위해서는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리고 데아는 마침내 드러난 여파 길드의 입구 쪽을 가리키며 웃었다.
“저기 문 보이시죠? 들어가시면 됩니다.”
“같이 안 들어가십니까?”
“네. 저는…….”
근처 편의점에서 블루레모네이드로 목이라도 축여야 할 것 같았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요.”
“아, 네. 그럼. 감사했습니다.”
헤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데아도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닥이고, 외진 곳에 있는 편의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데아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검은 차량 한 대를 마주했다.
드르륵, 문이 옆으로 열리고 어둠 속에서 두 쌍의 손아귀가 튀어나왔다.
‘어어, 어?’
자신의 팔을 잡고 너무나도 가볍게, 종이컵을 뽑아내듯이 훌쩍 들어 올려 안으로 인도하는 딱딱한 손길에 데아는 저도 모르게 차에 탑승하고 말았다. 상황을 뇌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
차량의 문이 거칠게 닫혔다.
홀로 남은 헤타는 멍하니 데아를 태우고 떠나간 차량을 응시했다.
‘이게 바로 피파 누님이 말씀하시던… 인간들의 스카우트 문화인가?’
여덟 번째로 태어난 마지막 1세대 인어, 막내 ‘헤타’는 아련하게 데아가 사라진 장소를 바라보았다. 인간에 관심이 많은, 같은 ‘중립’ 피파글랜은 종종 그에게 인간들의 문화에 대해 설명하고는 했는데, 그중 하나가 헤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너 뭐 하냐?”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한 검은색 머리를 한 어린 3세대 인어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는 노인은 분명 자신이 만나러 온 세 번째 1세대 인어 ‘움’이었다.
“움 누님, 오랜만입니다.”
“그래. 오랜만, 헤타. 그리고 여기서는 연옥이야. 누님이라고 부르지도 마. 여기서 네가 나를 누나로 불렀다간 무슨 소문이 날지도 모르거든.”
그리고 움은 낄낄 웃었다. 헤타의 이름을 들은 근처 3세대 인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건 말건 움은 매사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 너 혼자 있냐? 네가 하도 늦어서 나와 봤는데……. 다른 헌터 한 명 더 있지 않았어? 이데아 말이야.”
“아, 있었습니다. 그분은…….”
헤타는 몸을 돌려 이데아를 태운 차량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가셨습니다.”
“뭐?”
“가셨다고요.”
“아니, 잠깐. 어디를?”
“저도 모릅니다. 갑자기 검은색 자동차가 나타나 그를 태우고 사라지더군요. 그분도 꽤나 당황스러워 보였는데, 확실히 한국이라는 인간 나라의 문화는 꽤나 거친 면이 많았으니 이번 일도 납득이 가능했습니다.”
“뭘 납득을 했다는……. 야…….”
“하지만 저는 이것을 압니다. 피파 누님에게 배웠습니다. 스카우트, 또는 부킹이라고, 상호 동의하에 상대의 손을 잡고 데려가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하는 그런…….”
“야, 야야.”
“네?”
“납치잖아.”
“네?”
“납치당했다고!”
헤타의 곧게 그어진 눈매가 당혹감을 품고 흔들렸다.
“그럴 리가요. 그 누가 이런 대낮에 납치 시도를 한단 말입니까? 자고로 납치란, 으슥한 새벽에, 주변에 기척이 없는 걸 확인하고 신중에 신중을 가해 상대방의 아가미를 틀어막고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킨 뒤 끌고 가는 것이 정법입니다.”
“아이고, 이 새끼…….”
“물론 그분도 조금 어리둥절해하시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발로 자동차에 탑승하셨는걸요.”
“이 착하고 모자란 새끼가…….”
움이 하나로 쪽진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침음을 삼켰다.
어쩌지?
눈치 없이 덩치만 크고 순박해 빠진 주제에 인간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르는 미련한 인어가 뭔가 큰 사건에 휘말린 것 같았다.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샤샤 헌터의 납치라니. 말도 안 되게 허무하게 일어난 납치라니!
유일한 목격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아닌 인어였다. 그리고 자신에겐 이 물정 모르는 인어를 구제해 줄 의무가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자신을 만나러 온 거였으니.
“내, 내가 길드에 연락을 하고 이데아 헌터가 납치당했다고 신고를 하마. 그러니 헤타, 너는 서둘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설사 나중에 목격자 증언이 필요하다고 해도 최소한의 정보만 전달하고 최대한 깊게 관여되는 걸 피해서…….”
“뭐라고요? 데아가 납치요?”
움의 말이 뚝 끊겼다. 등줄기가 차갑게 식었다. 뒤를 돌아보자 지나가며 한두 번 본 여파의 공략 1팀 헌터 두 명이 그곳에 서있었다.
“데아, 데아가 내 카드를 안 주고 가서… 그거 받으려고 뒤따라왔는데…….”
하영주가 황당한 표정으로 예언자 연옥과 그를 부축하고 있는 손녀, 그리고 건장한 존잘남 헤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 잘생긴 남자를 또 마주한 기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데, 데아가 납치를……. 하긴, 요즘 세상이 흉흉하니까, 아니 세상에…….”
“미, 미, 미친! 목격자는요?! 저 두 분이세요? 세상에! 누나! 제가 길드장님 불러올게요!”
“어, 어. 빨리 길드장님과 공격대장님께 알려! 이 근방 CCTV 다 돌리게! 나는 이분들이랑 같이 있을 테니까!”
움과 헤타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상황이 예상대로 크고 위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빨리 모셔 와!!”
한국 서울에 번뜩이는 하늘의 눈에 잡힌 이상 퇴로는 없었다. 헤타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뱉으며 침착함을 유지했다.
‘피파, 피파글랜 누님이 말해 준 인간들의 문화가 또 뭐가 있었지. 듣자하니 길드 여파의 길드장은 인어 실험으로도 유명한 자던데, 그런 자에게 인어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