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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54화 (54/223)

※ 054화

던전 안의 인어가 소포를 보낸 경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데아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꽃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평범한 꽃인 것 같았지만…….

“하얀 장미네? 이쁘다.”

“오래 두면 벌레가 꼬일 수도 있지만, 관리만 잘 해두면 보기 아름다울 겁니다. 그러고 보니 하얀 장미의 꽃말이 순수, 결백, 그리고…….”

데아는 가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숭배.”

“맞아요. 숭배. 어? 샤샤 헌터, 알고 계셨네요?”

“그… 들어본 것 같아서요.”

“그렇죠. 대중적인 꽃말이니까요.”

던전 안에서 자신을 공격한 인어 중에서는 베이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인어도 상당수 있었다. 올리아라는 인어도 그중에 하나고.

그리고 그들과 머리카락과 비늘 색이 같은 피파글렌은 아마 그들의 ‘주군’일 확률이 높겠지.

‘이상한 인어…….’

데아는 꽃을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다른 선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듯한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검은색 함이 데아의 손에 들리자 동료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잘 다듬은 진주의 단면 같은 표면에 매끄러운 촉감. 틀림없는 귀중품이었다.

단순히 검어 보이다가도 빛의 방향에 따라 다채로운 색으로 빛나기도 하고, 태양에 반사된 밤바다의 표면과 닮아 있는 작은 함.

데아는 조심스럽게 한 손으로 들어서 잠금 장치를 딸깍 열었다. 그러자 뚜껑이 천천히 열렸다.

띠롱, 띵. 따롱.

그 안에 들어있던 건 선율이었다. 잔잔한 음이 훈련장 전체를 메웠다.

“오르골이네!”

음이 신기하다며 웅성거리는 길드원 틈에서 데아는 문든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잔잔하다가도 격정적이고, 고요하고 편안하지만 동시에 공허하다.

풍랑이 몰아치는 밤바다 속에서 주인을 잃고 수면을 떠도는 가느다란 등불 같은 노래.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데아는 몹시 외로워졌다. 비바람이 자신의 몸을 뚫고 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자장가이며 장송곡이기도 한 이 음을.

나는 이 음을 분명…….

탁!

풍랑이 멈췄다. 데아의 세상에 적막이 찾아왔다.

오르골의 뚜껑을 닫은 건 백리서였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나 했는데…….”

그가 서늘한 눈으로 주위를 훑자 기웃거리던 길드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재빠르게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홀로 남은 데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기숙사로 올라가. 선물 받은 거 축하하고.”

“…네.”

내가 방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백리서의 손에 이끌려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에도 데아는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누가 보낸 거지?”

오르골이 든 상자에 붙어 있을 정보나 카드를 꼼꼼히 찾아봐도 보낸 사람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데아는 조금 허망해진 기분으로 꽃과 오르골을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          ◈          ◈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예요! 먼저 저희가 가서 쳐야 한다~ 이거죠. 권도언 그 새끼가 비밀리에 연구실을 만든 걸 모르고 계시지는 않을 겁니다. 인어와 던전에 대해 연구하는 MBL와 별개로 만든 연구소죠. 이대로라면 우리가 명성이나 정보력에서 져요. 그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놈이 대한민국의 실권을 잡고 쥐락펴락할 겁니다. 그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에요. 그리고 남은 두 길드를 서서히 압박하겠죠.”

여기은. 헌터명 여례. 여례아의 길드장이자 원거리 마법 계열 S급 헌터인 여자가 비스듬히 소파에 등을 묻었다.

차현은 코웃음을 쳤다. 낡은 전등이 삐걱이는 작은 밀실에 모인 사람은 총 세 명이었다.

길드장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음을 확인한 또 다른 남자가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을 이었다. 가슴팍에 달린 ‘여례아’ 글씨가 선명했다.

“최초의 게이트 클리어와 여섯 개 던전 동시 출몰 사건, 그리고 뉴욕 던전 클리어의 모든 명성을 여파가 들고 갔다 이겁니다. 이대로면 안 됩니다. 한국에 있는 대표적인 세 개의 길드! 하면 첫째가 여례아고, 둘째가 023이고, 셋째가 여파였는데 순위가 뒤집히지 않았습니까?”

“하하.”

“흐음, 그래서?”

“여례아, 023, 이 두 길드가 힘을 합쳐 여파 길드를 고립시키는 건 어떻습니까? 모든 던전 선임권부터 아이템 독점권, 헌터 선발권에 공략 우선권을 저희가 선점하자고요. 차현 길드장님이 수락만 해주신다면 상부에는 저희가 전달하겠습니다. 저희 길드장님께서는 동의하셨습니다.”

“여기은, 정말이야?”

“나쁠 건 없지 않아? 권도언은 그냥 호기심 많은 괴짜일 뿐이야. 그 새끼는 수족만 살살 잘라 주면 스스로 무너지게 돼있어.”

차현이 의자 팔걸이에 손톱을 타닥타닥 두드렸다.

“너무 만만하게 보는 거 아니야? 권도언이 어리긴 해도 멍청하진 않아. 스스로도 무척이나 강하지. 그리고 더군다나 수족을 잘라 낸다니. 누구를?”

“대표적인 인물 몇. 차현, 너도 알잖아?”

“아하, 릴림과 샤샤? 제정신이야? 릴림의 본모습을 네가 아직 못 봤구나? 더군다나 샤샤라니, 지금 국내 최고가를 자랑하는 샤샤를 어떻게 잘라 낼 건데? 죽이기라도 하게? 실패하거나 발각되기라도 하면 그 리스크는 다 너와 네 길드에게 돌아가. 너무 위험해.”

“뭐, 그 정도 모험은 해봐야지.”

차현이 곧바로 표정을 굳히고 화보처럼 앉아 있는 여자를 향해 눈살을 구겼다.

“그 둘을 네가 어떤 수로? 설사 죽인다 해도 뭐, 당장 인어가 창궐하는 시대에 주요 전력 둘을 죽이면 나머지는? 네가 인어를 처리하게? 네가 강한 건 알지만 자만하지는 마.”

“누가 죽인대? 그리고 릴림은 후보에서 제외했어. 릴림은 장벽이 너무 높거든. 하지만…….”

여기은이 남자를 향해 눈짓을 했다. 그러자 남자가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 든 건 수십 장의 사진이었다.

“이 사진을 우선 보시죠.”

남자가 건넨 사진 안에는 다양한 시간대의 한 사람이 찍혀 있었다. 점퍼를 정수리부터 뒤집어쓴 사진, 편의점에서 음료를 고르고 있는 사진, 누군가의 뒤에 몸을 숨긴 사진…….

수북하게 쌓인 사진은 많았지만.

“어? 잠깐만.”

차현은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사진을 골라내었다. 처참하게 으깨진 거대한 인어 위에 물이 회오리치는 창을 들고 굳건하게 선 작은 인영이 찍혀 있었다.

“멀어서 얼굴은 잘 안 보이는데, 이거 설마…….”

여기은이 웃었다.

“그게 가장 구하기 어려웠던 사진이야. 어떤 파파라치가 찍었다는군.”

“아아, 그게 말입니다. 워낙 주위 경계가 삼엄해서…….”

“잠시만, 이 애는…….”

차현이 등받이에서 상체를 들어 올렸다. 사진을 집어 들고 살피는 차현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이데아?”

“헌터명은 샤샤죠.”

“무슨, 말도 안 돼! 이 애가 샤샤라고? 얜 B급 헌터야!”

“위장이죠.”

“…….”

할 말을 잃은 차현을 바라보며 여기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턱을 괴었다. 그의 밝은 머리카락이 전등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빛났다.

“기억나? 저번에 여파 건물 안에서 만난 그 안내원. 어리바리해서 뭔가 싶었는데 이상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깊이가 꽤 있더라고? 혹시 몰라 뒤를 캤는데 대어가 낚였지.”

“…….”

“그것도 모르는 그 멍청한 남자 헌터는 보란 듯이 병을 깼다며 그 샤샤의 이마를 툭툭 쳤고 말이야. 그 뒷이야기가 궁금한데 어디 들을 수는 있으려나,”

“포션병을 깨뜨린 건 너였구나.”

여기은은 잠시 침묵했다. 머지않아 한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지만.

“뭐 마려운 돼지마냥 여파한테 진상하러 가는 게 배알 꼴려서 장난 좀 쳐봤어.”

“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차현, 내가 더한 정보를 캐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어느 구간부터 막혀 있더라고. 분명 여파의 짓이겠지. 그래서인가 조금 꿉꿉한 냄새도 나고… 캐물어야 할 것도 있는 것 같고. 파고들면 여파의 귀한 정보나 치부를 알게 될지도 모르지.”

“…납치라도 하겠다 이거야?”

“동의하지 않겠다면 나가도 돼.”

여기은이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문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하지만 넌 이런 모험을 좋아하잖아?”

“웃기지 마. 무슨 근거로?”

“너 혼자 착한 사람인 척 굴지 마, 차현. 네 치부는 내가 잘 알고 있어.”

“…….”

차현은 자신의 핸드백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살짝 잡힌 눈가의 주름에 비웃음이 걸렸다.

“내 치부라……. 뭔?”

“전 남편을 죽였잖아?”

여기은의 대답에 기다렸다는 듯 차현이 웃었다. 소리 높여 웃는 소리가 밀실에 가득 찼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자 여기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치부인가?”

이윽고 차현이 웃음을 거두고 싸늘한 눈으로 여기은을 내려다보았다.

“말해 봐, 여기은. 가정 폭력범을 죽인 게 내 치부의 전부인가? 네 정보력으로 찾은 게 고작 그거 하나야? 나는 굉장히 도덕적인 사람이었군그래.”

“너…….”

“닥쳐. 내가 말하고 있잖아. 네 대가리도 쏴서 날려버리기 전에 처신 잘 해. 감히 무고한 사람을 납치 살해하려는 네 헛짓거리와 내 정당방위를 동일 선상에 두지 말고.”

“…….”

“그리고 나는 적어도 대표자의 책임 정도는 가지고 있거든. 돌아올 위험 요소가 뻔한데 무책임하게 일부터 벌이는 너와는 다르게.”

끼익, 차현이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바깥은 어두웠다. 차현이 고개를 돌렸다.

“네가 죽일 게 여파의 길드원이 아닌 내 길드원이었다면 나는 네 목부터 부러뜨렸을 거야.”

“…….”

“너도 생각 잘 해. 지금 있었던 일은 못 들은 일로 쳐줄 테니.”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여기은의 하관이 으드득 다물렸다. 남자가 여기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저, 길드장님. 어떻게 할까요?”

“진행시켜.”

“네?”

퍼억!!

남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남자의 뺨을 주먹으로 내려친 여기은의 근처로 흉흉한 마력이 타닥, 탁, 튀어 올랐다.

“두 번 말해야 하나?”

“아, 아닙니다!”

남자가 서둘러 문 밖으로 나갔다. 차현이 그리 내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다. 하지만…….

여기은이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차현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여파와 더불어 처참하게 무너진 자신의 길드를 두 손에 쥐고 처절하게 흐느끼겠지.

그러니 우선 해야 할 일은…….

가장 주목을 받는 여파의 별을 고꾸라뜨리는 것.

여기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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