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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52화 (52/223)

※ 052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는 그대로야.”

그 시간 옆방 객실 안, 노트북을 켠 백리서가 소파에 푹 눌러앉아 다리를 꼬았다. 하품을 하며 관자놀이 위로 손가락을 꾹꾹 누르자 화상 통화 너머로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미쳤다고 이데아를 넘기겠어? 여기에 투자한 게 몇인데.

서류를 넘기던 권도언이 어이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조소했다.

―이데아. 만 20세. AB형. 부모님이 사업에 실패하고 집안 형편이 급속도로 안 좋아짐. 주변인들 말을 들어보면 단란한 4인 가정이었다는 것 같고, 교우관계도 나쁘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자퇴를 했네. 이건 아마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 그랬던 것 같고. 1남 1녀의 막내. 가족들은 실종… 사실상 사망 추정. 6년 전 강원도 해일의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고, 그 후에 갇힌 병동 안에서 검정고시를 봤음……. 그리고.

서류를 단조롭게 훑은 권도언이 그것을 툭, 앞에 던지듯 놓았다.

―인어들에게 잡히면 이 모든 던전 사태가 종식되는 열쇠. 맞지?

“맞아.”

―뉴스 봤어. 지금 한국은 난리가 났는데, 혹시 들었어?

“아니.”

―인간들 잔인해. 6년 전의 생존자 영상이랑 사진을 복구해서 마구 배포하더라고. 그래 봤자 엉망이라 지금 이데아를 봐도 동일 인물이라 생각하긴 어려울 수준이긴 하지만……. 아무튼 실시간 검색어가 온통 그 얘기야. 6년 전 인어를 봤다는 애를 당장 게이트 안으로 던져라, 말아라……. 참나. 어제까지만 해도 인어의 등장을 예고했던 선구자니, 생존자니 했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말과 달리 권도언은 그다지 유감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뉴스에서 동영상 봤어.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비늘의, 사람 말을 하는 인어. 이데아가 말한 6년 전의 ‘붉은 인어’와 동일 인물일까?

백리서는 고개를 저었다.

“동일 인물이라면 데아를 못 알아볼 리가 없지.”

―그래. 이상한 구석이 그거야. 못 알아본 거.

노트북 속의 권도언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가 그랬잖아. 던전 안에 붉은 머리카락과 비늘을 가진 인어들이 바글바글하게 있었다고. 그렇게 ‘붉은 인어’들이 많았는데 정말 이데아를 못 알아봤을까? 인어들은 위계질서가 있고,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고지능 생물이야. 계획을 짤 수 있다고. 그런 생물들이 하필 이때 게이트 밖에 나와서 선전포고를 했어.

“오호, 그래서?

―내 가설이야. 그들은 이데아가 6년 전의 생존자라는 걸 진작에 눈치챘어.

“오… 생각 좋네. 그렇다면…….”

백리서가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탁상 위의 커피가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탁자 위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딱 멈췄다.

“인어들이… 데아를 모른 척했구나. 데아가 6년 전의 생존자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음에도 그 1세대 인어의 명령으로 그 수하들이 이데아를 묵인했어. 그리고 굳이 게이트 밖으로 나와 인간들 사이에 불안감을 조성했지. 하지만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백리서가 식은 커피를 드르륵 밖으로 밀었다.

“…그렇군. 인어들은 데아가 사람들에게 불신을 품길 바라고 있어.”

―맞아.

화면 속에서 발소리가 터벅터벅 들리더니 이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가져온 권도언의 모습이 불쑥 튀어나왔다.

―불신. 인간의 편에서 싸우는 이데아에게 의심과 갈등을 심어 두고 결국 지친 먹잇감이 제 발로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어. 그들에게 물건은 알 바가 아니야. 그들의 목적은 이데아가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는 것. 물론 이데아가 모두를 위해 이타적 희생을 한다는 아름다운 선택지도 있지만… 그건 그다지 어울리지 않네.

커피 잔을 입으로 기울인 권도언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출렁거렸다.

―목적이 물건이었으면 재빨리 던전 안에서 이데아를 납치하고 고문하며 물건의 행방을 물었어야지. 지금처럼 떠나간 연인의 퇴로를 다 끊어 놓고 다시 나에게 돌아오길 기다리는 폭력적이고 멍청한 전 애인처럼 굴 게 아니라.

“…폭력적이고 멍청한……. 그래. 그리고 그때 만약 인어들이 데아를 납치했다면, 데아는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제 발로 걸어간다면…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겠지.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

“인어들의 목적은 물건이 아니라 이데아의 고립. 맞는 말이야.”

―정리됐네.

권도언은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백리서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데아는 지금 어때?

“혼란스러워했는데, 지금은 자. 일단 인어에게 넘기지 않겠다고 안심을 시켜 두긴 했는데 마음이 안정됐는지는 모르겠네.”

―그거면 됐어. 더 달래 줘. 이 위험하고 삭막한 사회에서 이데아가 다른 곳으로 갈 엄두를 못 낼 만큼 유일하고 다정한 숨구멍이 되어 드려야지. 인어 던전이 종식되면 이 얼마나 큰 자본의 비극인데.

그때 권도언이 눈동자를 도륵 굴렸다.

―그런데 언제 귀국한다고?

“내일. 원래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조금 빨리 가야겠어.”

―아하. 실험실에 손님맞이 꽃단장을 해놔야겠네?

말을 들은 백리서가 숨김없이 비웃었다.

“아직도 이데아가 인어라고 의심해? 꽃단장이 된 건 실험실이 아니라 네 머릿속 아니야? 정수리에 침이라도 꽂아 봐.”

―너무하시네. 그냥 확인 절차야. 이데아는 인어가 아니라는 확증을 받아서 좋고, 나는 이데아 씨를 의심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고. 뭐, 그런 거지.

“퍽이나.”

그때 권도언의 탁자 위에서 휴대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가뿐하게 휴대폰을 집어 올린 권도언이 사정없이 인상을 구겼다.

―노인네들이 또.

“그래. 이만 통화 끊어. 잔소리는 너 혼자서만 듣고.”

―뭐… 그래.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데아에게 확실히 물어봐 줘. 던전 안에 계속 들어갈 건가, 말 것인가. 개인적인 심정으로는 당분간은 몸을 좀 사리게 하고 싶은데.

“그대로 전달해 줄게. 그럼 끊어.”

뚝!

화상 통화가 종료되었습니다.

글자가 화면 가득히 떴다. 넓은 객실 안에 순식간에 적막이 차올랐다. 백리서는 오래 생각에 잠겼다.

◈          ◈          ◈

고층의 통유리 너머로 현란하게 빛나는 야경이 비쳤다. 한 손에는 와인 잔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리모컨을 든 인영이 어둠 속에 우뚝 굳어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티브이 뉴스가 있었다.

―속보입니다. 공략이 완료된 미국 뉴욕의 던전에서 언어를 구사하는 인어가 나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젯밤 아홉 시경, 이 인어는 자신을 1세대 인어라고 소개했고…….

하얀 원형으로 빛나는 ‘창’과 그 사이를 침범하는 움, 그리고 그가 언급하는 내용들이 앵커의 음성을 통해 전해졌다.

―지금은 해당 던전이 사라졌지만, 던전을 담당하고 있던 거대 길드 JJ는…….

므아나는 뉴스 화면의 한 부분에서 정지 버튼을 눌렀다. 거대한 화면이 딱 멈추자 므아나는 마치 낮은 수면을 유영하듯 우아하게 걸어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점퍼를 뒤집어쓴 이데아를 스치듯 찍은 장면이었다. 흔들렸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므아나의 입꼬리에 오묘한 미소가 걸렸다. 천천히 등을 돌린 그는 숨을 느리게 내뱉고는 손가락을 휘둘렀다.

파아악!!

“아, 아!”

그러자 어둠뿐이었던 실내 속에서 누군가 몸을 움켜잡고 뒹굴었다.

“아, 왜 능력을 아군한테 써? 제발! 진짜 아파!”

“제법 재밌는 일을 했어, 움. 네 잘난 예언 능력을 통해 벌인 일인가? 나이를 그렇게 처먹고도 땡깡을 부리던 어릴 적과 달라진 게 없군.”

움. 그가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붉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실실 웃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감이야. 므아나. 뭐, 미안한 척이라도 해줄까요? 하지만 그전에 솔직하게 말해 봐.”

“뭐를.”

“좋은 계획이잖아?”

므아나의 표정에 비웃음이 묻었다.

“그래, 좋은 계획이지.”

“그렇지?”

므아나가 느린 걸음으로 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안타깝다는 듯이 움의 뺨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감싸더니 덜컥, 그대로 손에 힘을 주었다. 움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으, 흐, 잠…….”

“아주 잘했어.”

움이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므아나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움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주제도 넘었어.”

“크윽!”

바동거리던 움이 거칠게 므아나의 손을 퍼억, 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뭐가!”

“그냥 기분이 나빠.”

“아니, 뭔…….”

“상처입어서 그런가.”

움이 입을 딱 다물었다. 므아나의 눈이 서늘하게 휘었다.

“네가 감히.”

“참나, 진짜 지랄도 정도껏……. 므아나, 너한테는 더 잘된 거 아닌가?”

“그렇지. 나에게도 잘됐고, 그깟 권속 하나 지키기 위해 무리수를 던진 너에게도 잘됐고.”

“…넌 권속을 두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움이 팔짱을 꼈다가 이내 풀었다. 그리고 또 팔짱을 꼈다가 손가락을 빠르게 타다닥 두드렸다.

“…아니다. 아니야...”

그러곤 괜히 뺨을 괜히 문질렀다. 움이 므아나의 손에 들린 와인 잔을 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웬 와인이야? 술은 써서 싫다며?”

“커피가 더 써서.”

“그거나 그거나. 뭐, 할 얘기 다 했어요? 그러면 갑니다, 전! 야, 가자!”

움이 몸을 휙 돌리자 어둠 속에서 나온 또 다른 인영이 므아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작은 체구의 사람이었다.

“어… 언니. 나는 움 언니 데리러 온 거고, 이번 사태에 관련이 아예 없어. 이건 다 움 언니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나는 그냥 움 언니의 셔틀로 이용된 죄밖에…….”

“미쳤냐, 이게!”

일곱 번째 인어는 어직 어린 티가 나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는 움의 손을 능숙하게 피하며 서둘러 허공의 틈을 만들었다.

“그럼 이만!”

“아니, 야, 야! 밀어 넣지 마!”

“아, 쫌 빨리 들어가……! 나 므아나 언니 저럴 때는 좀 무섭단 말이야!”

“나는 안 무섭냐?”

“그럼 므아나 언니, 안녕! 다음에 또 봐!”

발랄한 음성과 함께 틈이 닫혔다. 므아나는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켰다.

“…….”

지금쯤이면 둘 다 제자리로 돌아갔을 것이다. 움은 길드 여파에 있는 예언자로, 일곱째는 또 다른 위장 신분으로.

―또 인어 연구센터 MBL은 이번 사건을…….

인간들의 뉴스에 사건이 퍼졌다. 인어들의 ‘물건’을 가져간 6년 전 생존자의 존재는 널리널리 세계와 ‘창’을 넘어서 정보상들에게 퍼졌을 것이다.

트리야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아니, 이미 알았을지도.

“트리야. 트리야……. 그 폭군이 가지고 있는 욕구 하나가 분명…….”

므아나는 밑동밖에 남지 않은 고목처럼 웃었다.

“인정 욕구였던가…….”

사실 그 물건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6년 전의 생존자가 삼켰으니까.

그리고 제국에 있는 트리야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6년 전의 생존자가 그 물건을 먹어서…….

그가 되었다는 걸.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트리야는 우리의 목표가 누군지 알아챘다. 곧 수많은 암살자가 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본인이 직접 올 수도 있겠지.

던전 밖에서도, 안에서도 제국의 군대와 폭군, 모두가 이데아, 샤샤를 노리겠지. 트리야는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

하지만 실패하겠지.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트리야는 그가 아니었다.

그는 유일하고, 아무도 그를 대체할 수 없어.

므아나는 품 안에서 원형의 구슬을 꺼냈다. 신비로운 힘이 감도는 매끄러운 구슬. 그건 인어의 마석이었다.

조용히 마석을 내려다보던 그는 탁, 티브이를 껐다. 므아나의 얼굴 안으로 순식간에 어둠이 들이닥쳤다.

이 모든 것은 태초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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