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0화
<릴림!>
―이것들이, 이게 무슨…….
그건 아리아와 다른 JJ의 길드원도 마찬가지였다.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곤봉을 뽑아낸 아리아는 곧장 백리서의 뒤를 따라 인어를 학살했다.
촤악!!
“……!!”
흉측한 이빨을 벌리며 달려드는 인어들에게 팔을 베였지만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아리아는 한쪽 발을 대지에 대고, 무게 축을 기울여 빙 한 바퀴를 돌아 다리를 쳐올렸다. 푸른 피를 뱉은 인어가 턱을 맞고 쓰러졌다.
쿠구구구…….
그때 저 멀리서 소리를 내며 흙먼지가 몰려들었다.
습한 바다의 구석에 흙먼지가 휘몰아쳐 오자 많은 인어들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아리아만은 표정을 굳히며 곧장 데아를 부축해 옆구리에 끼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뭐라 뭐라 영어로 소리치자 옆에 대기하고 있던 JJ의 길드원이 빠르게 한국어로 통역했다.
“릴림 헌터의 능력이에요. 모래 바람. 평범한 모래가 아닌 마력을 담은 모래가 이곳에 비처럼 쏟아질 겁니다. 아군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규모가 큰 스킬인 만큼 저희도 여길 피해야 해요! 게이트 쪽으로 달려가죠.”
“네, 네! 알았어요!”
과연 백리서는 노란 눈을 더한 황금색으로 빛내며 허공에 손짓을 하고 있었다.
저 멀리 돌풍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모래가 현실 같지 않았다. 아마, 여기에 도착하기 전부터 계속 위치를 봐왔던 걸까…….
데아는 인어의 목을 때려 부러뜨려버리는 아리아의 팔뚝에 성난 것처럼 솟아오른 근육과, 푸른 피를 질질 흘리며 반 불구가 된 인어들의 시체 위에 고대의 석상처럼 우뚝 선 백리서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S급들은 대단하네요. 저희 길드장님도 대단하시지만, 릴림 헌터도 엄청나요. S급 헌터 중에서도 손에 꼽게 강한 헌터라고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규모의 인어들을 한순간에 쓸어버리다니……!”
데아도 수긍했다.
‘역시 S급은 다른 걸까…….’
자신의 등급은 N이었다. 표면적으로는 B라고 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2세대 인어 한 마리도 때려잡지 못했다. 기껏해야 하급 인어를 몇 마리 죽이고, 스스로 배를 드러낸 인어의 숨을 끊고…….
아직 약했다. 데아는 숨을 들이쉬며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지금 이 시점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짜악!!
“괘, 괜찮으세요?”
―인간, 왜 그래?
데아는 뺨을 강하게 쳐서 상념을 쫓아냈다. 정신을 차려 보자 벌써 모래바람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백리서와 아리아 쪽의 인어들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참이었다. 인어들은 자신의 동료가 처참하게 죽자 전의를 잃은 것 같았다.
이렇게나 쉽게.
이 정도밖에 안 되면서.
“나가자!”
인어의 시체를 밟고 게이트가 있는 곳까지 달려 나가면 바다에 빠지지 않고도 건널 수 있다며 백리서가 데아의 허리를 감싸 부축한 순간이었다. 데아는 자잔과 눈을 마주쳤다.
자잔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데아를 부축한 백리서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허리를 감싼 손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 데아의 옆에서 든든한 호위가 되어 주는 다른 헌터들의 모습을 쭉 훑었다.
“자잔, 너 여기 혼자 있으면 죽어. 같이 나가자.”
“샤샤, 이자는……?”
“그, 그러니까.”
데아가 손을 뻗었다.
“절 도와준 인어예요. 다른 인어와 적대관계에 있던 것 같았고… 잘하면 아군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여기 두면 죽을 텐데, 죽게 두고 싶진 않아요.”
아리아와 다른 길드원은 자잔을 보고는 깜짝 놀란 것 같았지만 곧 데아의 말에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아리아는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자잔을 위아래로 훑었다.
<하지만 그는 인어예요. 밖에는 분명 기자들이 있을 텐데, 섣불리 게이트 밖으로 내보내면 언론의 주목을 받아요. 긍정적이진 않겠죠. 그리고 길드 이미지도……!>
<그만.>
백리서가 아리아의 말을 끊었다. 백리서는 데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저 인어를 그렇게 데려가고 싶어?”
백리서가 물었다.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서늘해진 것 같았다. 데아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어렸다. 피할 수가 없었다.
“네가 찾던 ‘붉은 인어’와 비슷한 등급의 인어 같은데……. 그러면 분명 다리도 만들 수 있겠지?”
“맞아요…….”
“그러면 문제가 없지. 인어 하나 신분 속이는 건 쉬워. 그런데 데아야.”
데아의 코 위로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백리서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절대로 권도언의 눈에 띄어서는 안 돼.”
“네?”
“권도언은 인어라면, 특히 사람 형태에 가까운 인어라면 환장을 하는 사이코라서 네 친구가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분해되어 있을지도 몰라.”
“…….”
“물론 이 언니는 네 편이니까 입은 다물어 주겠지만…….”
백리서는 여기까지만 말을 하고는 허리를 들었다.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택해.”
데아는 조심스럽게 자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모든 대화를 듣고 있었을 슬픈 눈의 인어를 향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자잔은 잠시 데아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맞잡았다. 그리고 다시 놓았다.
―고마워.
자잔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가.
나는 널 만났던 이 짧은 기억으로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어.
수천 년을 살아가는 인어에게 있어서 지금은 아주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자잔은 처음으로 누군가의 관심과 애정을 경험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 시간이 너무나 값져서, 자잔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해 주고 아껴 주는 힘. 그것을 자신에게 처음으로 경험시켜 준 생명체가 인간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꿈같은 시간은 지났다. 인간에겐 또 다른 동료들이 있었다.
저에게 인간은 유일할지 몰라도, 인간에게 저는 유일하지 않았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깨달음은 잔혹하게 커튼을 열어 자잔에게 시간을 알렸다. 거인의 발걸음으로 다가온 현실감이 속을 까맣게 태웠다.
―네 동료 덕분에 인어들이 많이 죽었어. 이제 나 혼자서도 제국에 돌아갈 수 있어.
“무슨 소리야, 길도 못 찾았던 주제에…….”
“샤샤, 지금 인어와 말이 통하는 거예요?”
아, 아닌데요?
데아는 순간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자잔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 때문에 인간이 난처해진다.
―말하지 말고 듣고만 있어. 인간계에 나간 간부는 처형감이야.
“…간부?”
―언젠가, 나중에 네가 인어들의 제국에 들어올 일이 생긴다면, 그래서 곤경에 처한다면 나를 불러. 나는 제1 공대 소속 간부 자잔. 많은 힘을 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간부의 지위는 결코 낮지 않아.
자잔은 비장하게 말했지만 데아는 의아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런 놈이 왜 여기서 처맞고만 있었어……?’
―그러니까 너도…….
자잔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름을 알려 줘.
자잔은 떨고 있었다. 적어도 데아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나가자, 데아야. <아리아 길드장님, 이위로를 데려오세요!>”
<알았어!>
그래서 데아는 서둘러 나가자며 백리서가 자신을 끌고 게이트 쪽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은 붉은 인어 떼가 자신의 발목에 달라붙을 때도, 발을 흔들어 뿌리칠 때도 자잔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꾹 다물려 있던 데아의 입술이 어렵게 열렸다.
“이데아.”
덩그러니 옆에 누워 있는 보스 인어의 시체와 가만히 앉아 자신을 보는 자잔. 데아의 안 어딘가에서 화로가 끓었다. 매캐한 연기가 내면을 채웠다. 잃어버린 가족을 두고 떠나는 기분이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샤샤라고 불러도 돼.”
―샤샤.
자잔이 찡그리며 웃었다.
―사실 널 다시 안 만났으면 좋겠어. 이곳은 너와는 어울리지 않거든.
“…….”
―여기는 너무 추워서…….
데아는 자잔의 말을 마지막으로 듣고는 게이트에 삼켜졌다.
―…….
홀로 남은 자잔은 사라지는 게이트의 잔상을 지켜보았다. 자잔은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열두 살 정도로만 보이는 작은 아이의 육체. 그 육체가 조금 자라 있었다.
◈ ◈ ◈
눈부신 흰 빛이 시야를 가득 가리고, 그 앞에 펼쳐진 건.
찰칵찰칵!
<39시간 만에 공략을 완료했습니다!>
<뉴욕 시민 여러분, 길드 JJ와 길드 여파의 합동 공략이 불과 39시간 만에! 던전 포화 57시간을 남기고 성공했습니다!!>
<위기 상황 코드 레드 단계가 완화될 것으로 보이는 지점에서 공략을 끝마치고 나온 헌터들에게 인터뷰를…….>
눈부신 카메라의 플래시였다. 백리서의 점퍼가 데아의 머리 위로 폭 씌워졌다. 데아는 아리아와 백리서의 앞에 기자의 마이크가 대어지는 것을, 간단한 소감을 말하자 사람들의 환호가 더 쏟아지는 것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전부 지켜보았다.
<샤샤 헌터도 공략에 참가했다는 소식이 있는데요, 아하! 혹시 저분인가요?>
샤샤라는 말이 나오자 카메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데아를 향해 렌즈를 들이밀었지만 백리서가 자연스럽게 앞을 막았다.
<힘든 공략을 마친 헌터들의 휴식을 위해 그럼 이만……>
아리아가 기자들의 손아귀를 뿌리치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
<뭐야, 저거…….>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이 가지각색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 저거…….>
<으아악! 뭐야?!>
<꺄아악! 이, 인어가!!>
끔찍한 비명이 허공을 찢었다. 헌터들의 발걸음이 우뚝 굳었다.
‘그러고 보니 게이트가 닫혔었나?’
온몸을 내달리는 소름을 느끼며 데아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인간들이 많네.”
구덩이에서 흙을 잡고 바깥으로 기어 나온 생존자처럼, 물에 젖어 축축한 머리카락과 비늘을 숨기지 않은 인어.
움이 게이트 밖으로 절반쯤 나와 있었다. 그가 긴 머리카락을 거칠게 넘기며 비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