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9화
첨벙!
쏴아아아아―
―뭐, 뭐야!
거대한 모래섬이 거친 파도를 일으키며 물속에서 뛰쳐나오고, 그에 수직으로 솟았던 물줄기가 비처럼 사방에 쏟아졌다. 데아는 자신의 바로 앞까지 튀어나와 자신을 향해 몸을 들이대는 보스 인어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바다, 바다, 바다니임.
보스 인어의 눈가에서 눈물이 속절없이 떨어졌다.
―바, 바다니임, 살아야, 나가야. 나가서 살아야…….
푸른 피가 바닷물에 섞여 암벽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데아는 이미 폐부에 여러 대 꽂힌 창대를 만져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붉은 인어들의 군단은 거침없이 밀려들어 왔다. 자잔의 충격파에도 한계가 있었고, 자신의 마력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으며, 쏘아올린 신호탄이 무색하게 인간 지원군은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게이트를 열고 나가기 위해서는 보스 인어의 죽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자잔은 제 발로 기어들어 온 보스 인어를 의문스럽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곧장 데아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 기회야. 인간! 빨리 죽여!
보스 인어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데아는 제가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서!!
데아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자잔이 먼저 나서서 보스 인어에게 꽂혀 있던 창대를 잡았다. 그러자 얌전하게 떨고만 있던 보스 인어가 발작하듯이 온몸을 뒤틀며 자잔에게 ‘끼아아악!!’ 고함을 질렀다.
―싫어!! 시러어! 바다님 말고 시러어, 싫어…….
―뭐, 뭐야.
“내가, 내가 할게!”
결국 데아가 뛰어들어 자잔을 멀리 떨어뜨렸다. 보스 인어가 곧장 얌전해졌다.
그리고 그 장면을 움이 지켜보고 있었다. 지루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심드렁하게 바위에 기대어 있던 움이 상체를 느리게 들어 올렸다. 그의 입가에 작은 호선이 길게 그어졌다.
“내가 할게…….”
암벽 위로 차갑고 습한 인어의 손이 덥석 올라왔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게이트를 열면 자잔은?’
물론 인어 따위의 안위는 제 알 바가 아니었다. 그냥 무시하고 가면 되었다. 꿈에도 나오지 않을 터였다. 죽음을 한두 번 목격하나?
하지만…….
덥석!
데아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잔의 팔을 잡았다. 꼭 쥔 데아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팔을 쥔 뜨거운 온기에 자잔은 말도 잃고 그 손을 바라보았다.
“사, 상급 인어는 인간의 다리를 만들 수 있다 들었어.”
―…….
“게이트가 생성되면, 곧장 인간의 다리를 하고 같이 나가자. 나 이래봬도 나름 인지도 있는 헌터야. 나가기만 하면 다른 게이트에 몰래 들여보내 줄 테니까, 그때 다시 안전하게 제국으로 돌아가면…….”
간부가 허락 없이 인간계에 가는 건 처형감이다. 그럼에도 자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다. 뇌 기능 일부가 마비된 것 같았다. 거친 풍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위태로운 모양새를 하면서도 퍽 든든하지 않은가.
‘내가 미쳤지.’
자잔이 냉소적으로 웃었다.
그리고 대화를 마친 데아는 시간을 오래 끌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있던 인어의 칼 하나를 집어 들어 눈앞의 보스 인어에게 겨눈 그는.
약점 파훼.
스킬을 발동했다.
고통 없이, 단번에 삶을 앗아갈 수 있는 역린의 정중앙. 그 무엇보다 붉게 물든 점을 향해 데아는 덜덜 떨리던 팔을 휘둘렀다.
푸욱!
움직이지도, 저항하지도, 심지어 소리도 지르지 않는 상대인데, 그 어떤 사냥보다 힘이 들었다. 그래서 데아는 엎드려 비명을 지르는 착각에 휩싸였다. 그의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가죽과 근육을 찢고 들어간 날붙이의 생생한 촉감. 그건 비겁한 죽음의 향취였다. 자신에게서 악취가 나는 것 같았다.
챙캉!
칼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데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야비한 인간. 까뒤집은 상대의 복부에 칼을 찔러 넣는 매정한 작자.
쿠웅!
푸른 피를 뿜어대는 보스 인어의 몸뚱어리가 옆으로 쓰러졌다. 왼쪽 지느러미에 달려 있던 형형색색의 해초는 여전히 그 자리에 걸려 있었다.
데아의 표정이 순간 완벽히 무너졌다. 떨리는 아랫입술을 물고, 그는 가까스로 비명을 참아 냈다.
자신의 치부의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이유는 사방이 고요한 탓일 것이다.
데아는 데구루루 떨어진 보스 인어의 마석을 주우며 생각했다.
―인간, 저거 아니야? 창? 아니, 게이트!
자잔이 가리키는 손의 끝에는 과연 하얗게 비산하는 둥근 게이트가 떠있었다. 랜덤으로 게이트가 형성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애매한 거리에 당황해하던 그때.
덥석!
―잡았다!!
한 붉은 인어가 데아의 목덜미를 훌렁 잡아 올렸다. 인간의 두 다리를 이용해 수월하게 암벽을 오른 인어가 데아의 뒤를 급습한 것이다.
‘생각보다 시간을 너무 끌었어!’
이미 암벽은 붉은 인어들로 인해 빈틈없이 포위된 상태였다. 게이트까지 갈 수 있을까?
푸억!!
―으아악!! 이 새끼가!!
데아가 자신을 뒤에서 제압한 인어의 명치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인어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자 보스 인어를 죽였던 칼을 다시 집어 든 데아가 공격을 막고, 반동으로 훅 뒤를 돌아 뒤이어 올라온 인어의 머리를 내리치려했다. 그 순간이었다.
그건 찰나의 섬광과 같았다.
수천 갈래로 나누어진 마력의 파장이 돌풍을 일으키며 수직 낙하했다. 데아의 발밑이 움푹 파이고, 대지가 흔들렸다. 땅에 새겨진 힘의 흔적은 시공을 가르는 리히텐베르크 무늬와 닮아 있었다.
익숙한 마력의 향취, 소름이 끼칠 만큼 반가운 색. 황금을 닮은 노란색.
“데아야.”
백리서가 구원의 형태로 제 앞에 나타났다.
반갑다는 말이나, 왜 이제 왔냐는 말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데아는 한동안 백리서를 바라보다가 마른세수를 하고는 내면 깊숙이 무언의 감정을 꾹꾹 밀어 넣었다.
“다쳤어?”
“아니, 아뇨. 안 다쳤어요…….”
데아는 찢어진 오른쪽 바지를 뒤로 쓱 숨겼다.
‘그러고 보니… 다른 헌터들은?’
“그런데 혹시 오시는 길에 이위로 보셨나요? 분명 동굴 안에 아직도 있을 텐데……! 그리고 다른 헌터들은!”
“이위로라면 만났어. 네가 떨어진 근처의 이상한 막이 쳐져 있는 동굴 말하는 거지? 그곳에 있더라. 다리에 부상을 크게 입었는지 잘 움직이질 못해서 지금은 안전한 곳에 두고 왔지만. 다른 헌터들은 오는 중이고.”
“와, 정말 다행이에요!”
그동안 답답하게 막혀 있던 걱정거리가 하나 해소되었다. 데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 두 인영이 훅, 위에서 아래로 또 뛰어내렸다. 아리아와 그의 또 다른 길드원이었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JJ 길드의 깃발이 크게 펄럭였다.
아.
데아는 문득 이 순간이 예언자 연옥이 말하던 순간임을 깨달았다.
―인간. 네 동료들이야?
그때 무리의 뒤쪽을 맴돌던 자잔이 작게 물어왔다. 그는 왠지 풀이 죽은 것 같아 보였다.
“응.”
“뭐야?”
백리서가 자잔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경계 태세를 취하자 자잔도 곧장 버르장머리 없는 소년의 얼굴을 하고 백리서를 꼬나보기 시작했다.
그들을 말린 건 인어 떼가 여전히 오고 있다는 아리아의 고함이었다.
“자, 자. 데아야. 여기 경치가 영 별로지?”
백리서가 의기양양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섬뜩한 노란 눈동자가 좌중을 훑자 붉은 인어들이 동작을 멈추고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롭게 나타난 인간을 두려워하고, 또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의아해한다고?’
데아는 자신의 남은 마력을 계산해 알맞은 크기의 창을 불러내었다.
‘갑작스러운 인간 동료의 출현 때문이겠지.’
데아는 넘겨짚었다.
<샤샤!>
그때 아리아가 반가운 목소리로 데아를 불렀다. 그는 데아가 크게 다치지 않았음을 본 뒤, 안심하고 바로 공격태세에 들어갔다.
“늦어서 미안해. 곧장 정면 돌파하고 저기 열려 있는 게이트로 나가자.”
<샤샤, 대단해요. 보스 인어를 홀로 쓰러뜨리다니!>
데아는 쓰게 웃었다. 싸늘하게 누워 있는 보스 인어의 지느러미에 걸린 해초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턱, 그때 백리서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어, 샤샤. 뒤로 물러서 있어. 여기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온기와 굳건함을 뭉쳐 만든 작은 구슬이 있다면, 현재 백리서의 눈 안에 박혀 있을 것이다.
데아는 홀린 듯 뒤로 한 발자국 걸었다. 그곳에서는 자잔이 불안한 눈빛으로 저와 백리서, 그리고 다른 동료를 훑어보고 있었다.
“언니가 다 처리할게.”
백리서가 장난기를 담아 눈을 찡긋거렸다. 수백 마리의 인어가 동시에 포효했다. 가운데에 껴있는 칼리안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고, 저 멀리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움은 찡그린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러 펴고 있었다.
붉은 인어들은 왜인지 조금 당황한 것 같았고, 백리서가 인어 떼에게 쏟는 적의는 상당했다.
전세가 기울었다. 패배의 예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
데아는 문득 눈앞의 금발의 헌터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예상대로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데아야, 넌 여기 있어.”
백리서는 물 위로 튀어나와 있는 인어의 머리를 징검다리 삼아 바다 위로 몸을 날렸다. 검의 힘을 출력하고, 모래바람을 닮은 마력을 흩뿌리며 반동으로 몸을 저 멀리 띄운다.
퍽, 퍼억!
―으아악!!
그리고 자신에게 손톱과 이빨을 드러내는 인어의 흉기를 먼저 서걱, 베어 낸 뒤 단숨에 인어의 복부를 꿰뚫길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