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5화
칼리안은 뭐 씹은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자신을 방에서 풀어 주러 온 인어들이 낄낄거리면서 자물쇠 구멍에 열쇠를 넣었다 뺐다 하며 한참을 놀렸기 때문이다.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그때 너에게 빌려준 3골드를 아직 받지 못했어.
―웃기지 마! 언제 내가 돈을 빌렸다고!
―기억력 감퇴라……. 넌 아직도 구금이 필요한 모양이야. 가서 전해야겠어.
―저게!
―그 3골드가 이자까지 붙어서 원금이 어마어마해졌거든. 한 530년 정도의 세월만큼?
―무슨 헛소리야, 네가 이제 200년을 살았는데 무슨!
―쳇.
덜컹, 육중한 문이 열렸다. 6년 전 자신이 해일에 휘말려 반죽음 상태로 돌아왔을 때는 재밌는 구경을 했다며 연고 하나 던져 주더니, 기운을 조금 차리고 몰래 방을 빠져나와 돌아다니니까 이때다 하고 고자질한 동료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움 님이 갑자기 나를 왜 불러.
기상천외한 표정으로 엡베베, 그를 놀려먹던 인어가 흐음, 하고 바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여기에 있는 첫 번째 권속이 너뿐이라서 그런 거 아니야?
―다샤는.
―네 쌍둥이 누나는 현재 사냥 놀이를 하러 밖에 나갔어. 올리아 패거리하고 같이 있을걸.
말을 멈추고 보니 첫 번째 방의 커다란 돌문이 나타났다.
―그럼 안녕!
동료 인어가 미련 없이 훌쩍 떠나고 홀로 남은 칼리안은 꼬리에 힘을 주고 빠르게 헤엄쳐서 끙, 몸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움 님.
“그래.”
칼리안이 풀이 죽어서 자리에 앉았다. 정식으로 구금에서 나오고 처음 보는 얼굴이 주군이라니. 좋은데 싫었다. 항상 이렇게 따로 부르는 건 늘 좋지 못한 일 때문이었기에 칼리안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저, 저 뭐 잘못한 일 없어요. 계속 방 안에 갇혀 있었다고요. 사고 친 일도 없고, 잡아먹은 것도 없고, 시비 건 일도 없고, 기물 파손도 안 했고, 패싸움은… 한 적 있는데, 그건 정당방위였어요.
“갇혀 있었는데 패싸움은 어떻게 했을까?”
잘게 움직이는 움의 근육을 보고 칼리안이 히익, 몸을 떨었다. 역대 가장 약한 1세대 인어 움. 하지만 그건 다 옛말이었다. 지금 그는 가장 강력한 정신계 능력자였고, 또 약한 신체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악을 쓰고 몸을 단련한 무인이었으므로.
―그건 그냥…….
“뭐, 그래. 그래도 예전보단 조용히 지내는 게 사실이니까 넘어가자.”
―네…….
“그런데 내가 널 부른 건 묻고 싶은 게 있어서야.”
―허윽, 저를 파묻는다고요?
“그래. 너를.”
그리고 움이 경박하게 웃기 시작했다.
인간계에서 노인을 연기하신다는 소문을 듣긴 했는데. 그래서 그런가, 말장난도 철 지난 걸 하시네.
본인이 먼저 시작한 걸 잊은 칼리안이 속으로 생각했다. 속으로만.
“자,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칼리안, 하나만 물어보자.”
―네에, 네. 뭐든지 물어보세요.
“너, 태초를 기억해?”
칼리안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순식간에 달아났다. 그 모습을 본 움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던 칼리안이 애써 웃음 지었다.
―그야… 당연하죠? 아주 옛날에 움 님이 종종 어린 저를 태초 님께 데려다주셨잖아요. 벌써 300년도 더 지난 일인가요? 거기서 그분과 인사를 나눴고……. 제가 어떻게 잊겠어요.
큰 키와 거대한 몸. 한입에 백상아리를 삼키고 입김으로 파도를 일으키던… 세상에서 제일 부드럽고 다정한 인어.
―움 님이 지금 인간계에 가신 이유도 모두 태초 님을 찾기 위해서잖아요.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그래서 그분이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폭군 트리야는 맥도 못 추리고 쓰러질 거라고 해서……. 그런데 왜요?
“내가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건 알 텐데.”
칼리안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가여울 정도로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자, 6년 전 그날 기억하지? 그때 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
“이제 말을 해야 할 거야.”
―저는 움 님이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말해. 안 그러면…….”
움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네가 므아나에게 죽을지도 몰라.”
므아나.
두 번째로 태어난 1세대 인어.
칼리안의 입술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제, 제가 뭘, 뭘 했는데요?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므아나 님이 왜 저를……! 열심히 반란에도 가담하고 있고, 트리야 세력도 적대하고 있고, 인간들을 사냥하는 건 상관없다면서요! 태초 님이 다시 왕궁에 돌아오시길 그 누구보다 바라는 인어가 바로 저……!
“에휴…….”
―…아.
그러던 칼리안은 뭔가를 깨닫고 입을 닫았다. 그가 가련하게 떨기 시작했다.
‘므아나’로 자주 불리는 인어는 트리야 다음으로, 아니 트리야만큼이나 강한 인어였다.
―어, 어떡하죠?
“어떡하긴, 죽어야지.”
―…움, 움 님!
금발을 늘어뜨리고 다니는 바닷속의 태양. 찬란한 외모와 강인한 몸. 천지를 뒤흔드는 힘. 그럼에도 피도 눈물도 없이 동족을 해하는 인어, 므아나.
트리야를 제외한 남은 6인의 1세대 인어들은 므아나가 그 어떤 살육을 저질러도 눈감고 넘어갔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므아나는 질책받은 적이 없었다. 지나가는 말로는 므아나가 그들의 은인이라고 했는데, 공인된 사실은 아니었으므로 모두가 뜬소문이라 여겼었다.
“뜬소문? 세상에, 그건 아냐.”
호기심에 움에게 물어본 칼리안은 이런 대답을 받았지만.
“므아나가 없었다면 남은 1세대 인어는 태어나지도 못했을걸. 우리는 모두 그 순간을 기억하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물어보고 싶었지만 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묻지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참 므아나가 좋으면서도 싫어.”
한때 인어의 사형을 직접 집행했던 집행자. 적장의 목을 애완 식인어의 먹이로 주는 왕족. 태초의 말을 거역한 죄인들의 꼬리를 잔혹하게 들어내어 고통스럽게 죽였던 푸른 피의 사신. 눈부신 외양 아래로 내비치는 잔인함. 태초를 향한 비이성적인 충성심.
칼리안은 아군이었지만 둘째, 므아나가 무서웠다. 그의 미소는 꼭 긍정을 뜻하지 않았다.
상대가 태초에게 도움이 되거나, 충성스럽다고 여겨질 때에는 그 누구보다 친절하고 온화한 귀인처럼 행동하지만, 아니라고 판단하면 그 순간 상대의 눈을 뽑아버린다.
적어도 폭군 트리야는 실수에는 너그러웠다. 하지만 므아나는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에겐 오직 태초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많은 인어들은 그의 강함과 화려하게 빛나는 외양에 반해 그 잔혹함마저 사랑했지만…….
므아나가 왕궁에 있었을 시절, 그를 따르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상기하며 칼리안이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나저나 칼리안. 솔직히 말해 봐.”
움은 돌 서랍을 열어 밀봉된 해초 다과를 꺼냈다. 칼리안의 손에 쥐여 주자 울상을 짓던 칼리안이 하나하나 끄집어내 아삭아삭 집어먹기 시작했다.
“너 나한테 숨기는 게 있지.”
우뚝, 해초 과자를 씹던 이빨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움은 점점 창백해지는 칼리안의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 저는, 저는…….
“왜, 말하지 말래?”
―…….
“6년 전 해일. 나는 아직 그때에 대한 이야기를 잘 모르거든.”
기어코 6년 전의 일마저 나와버렸다. 칼리안은 해초 다과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한동안 눈동자를 굴리더니 고개를 숙여버렸다.
―저는 말 못 해요.
“어허.”
―하지만…….
“이미 알고 있어. 확인하려는 것뿐이야.”
네가 6년 전에 누구를 만났고, 뭘 했으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물론 말을 하지 않으려는 너도 난 이해해. 그러나 털어놓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살려면 말이지.”
결국 움의 말에 수긍한 칼리안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귓가에 대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지나갔다.
“역시.”
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은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육중한 돌문이 거세게 열린 건 그때였다.
끼이이익!!
―움 님! 아, 칼리안?
붉은 머리를 한 인어가 구르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다샤가 위험한 상황인 것 같아요! 지금 당장 지원을 요청한다는 연락책이……!
“좋아, 우선 밖에 나가자.”
―밖이요? 움 님도 직접 밖에 나가시려고요?
“내가 내 권속을 위해 직접 발걸음을 해주는 게 뭐가 어때서. 칼리안. 너도 같이 나가도록 하자.”
―움 님……!
칼리안과 방 안으로 들어온 인어가 감격하여 동시에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움은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휙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곧 들어왔던 인어가 나가고, 나갈 채비를 하는 칼리안에게 움이 툭 물었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아직 너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했어.”
칼리안은 입을 딱 다물었다.
―저는…….
“나중에라도 말해 주면 돼. 괜찮아. 하지만 앞으로는 표정 관리를 잘하는 게 좋을 거야. 넌 연기엔 별 소질이 없으니까.”
―표정… 관리 말이죠.
“그래. 그리고 므아나에게서 네가 살 수 있는 길이 궁금하지 않아? 너는 내 첫 번째 권속이고, 그래서 나도 아량을 베풀어 주려고 하는데…….”
―네, 네!
“잘 들어봐. 이제부터 예지를 쓸 거야.”
움의 입꼬리가 불확실한 미래를 예언하며 휘었다. 붉게 소용돌이치는 눈동자 안에 수만 갈래의 미래가 가지를 뻗는다. 움이 능력을 쓰고 있었다.
미래 예지.
칼리안은 그 작은 희망에 사활을 걸었다.
“…길이 하나 있어.”
―정말요!
“그런데 내가 힘을 좀 써야 하는 일이네. 뭐, 므아나도 이 정도의 개입은 눈감아 줄 거야. 나쁜 일은 아니니까.”
움이 낮게 웃었다.
이것으로 일이 아찔하게 돌아가겠지.
“넌 표정 관리나 잘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모두가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움은 이런 일에 익숙했다. 씨앗을 뿌리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씨앗이 일으킨 파멸을 관전하는 건 언제나 그의 역할이었으므로.
긴박한 연극일수록 즐거운 법이니.
움이 먼저 앞으로 헤엄쳤다.
“자, 빨리빨리 일어서. 밖에 나가야지.”
이 모든 것은 태초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