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3화
“뭐라고? 안 들려.”
―너는…….
자잔의 음성이 끝없이 작아졌다. 그러나 평생 갈구했던 신앙의 증거를 목격한 신도처럼 자잔은 데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하지만 이건 주군을 배반하는 행위가 될 수 있어.
이성이 다시금 멱살을 잡아채었지만 자잔은 무시했다. 그는 메말라 있었다. 오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생명의 바다는 눈앞에 있었고, 남은 건 이름 모를 가능성에 온몸을 던져 넣는 것뿐이다.
‘정신 차려, 아무리 닮았다 해도 저 인간은 제왕이 아니야!’
이성이 소리쳤지만 인어의 광활한 본능 앞에서 이성은 파도에 쓸려 나가듯 자취를 감췄다.
자잔은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떨림과 두려움으로 그의 목소리는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애정을 얻기 위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
―응. 적이야.
소동물이 주인을 보듯 자잔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조금 비굴하게 웃었다.
―나도 저 인어들이 죽었으면 좋겠어.
데아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그랬구나. 어쩐지 사이가 좀…이 아니라 아주 많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 아니 뭐, 나도 인어가 너무 싫고… 다 죽었으면 좋겠어. 저 붉은 인어는 특히. 그런데 넌…….”
―너희들 지금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내가 준 시간은 끝났어.
다샤가 비아냥거렸지만 데아도, 자잔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자잔의 머리 위로 태양이 내리쬔다. 인간이 난처하게 웃었다. 입꼬리만 살짝 들어 올린 어색한 미소였지만 자잔의 메말랐던 사막엔 그 순간 비가 내렸다.
트리야와 닮은 눈으로 냉정하지 않은 시선을 보내온다. 모든 생명의 씨앗이 영양분을 공급받고 기뻐 고개를 치켜든다. 세상의 채도가 올라갔다.
“너도… 빌어먹을 인어는 맞는데. 뭐, 도와주면 좋고.”
적의 적은 아군이라잖아.
인간은 가볍게 말했지만 자잔은 그 순간 고요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래.
오랫동안 갈구하던 애정의 끄트머리가 손안에 잡혔다. 자잔의 마음이 아주 조금 풍족해졌다.
“마지막으로 말할게.”
데아가 자잔의 앞에 서서 인어들과 눈을 마주쳤다.
“우리를 그냥 보내 줘.”
―너는 그냥 보내 줄게. 그런데 네 뒤에서 풀 죽은 금붕어처럼 있는 저놈은 안 돼.
그때 경배가 혼자 말을 시작했다.
―맞아, 자기야. 쟤 버리자. 자기는 저 인어들이랑 싸울 이유가 없다니까? 위로라는 동료는 천천히 찾으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쟤도 길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스킬, [물속의 발자취]가 [바다의 경배]에게 음성을 전송했습니다.]
[‘맞아. 너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 안 하나.’]
[‘쟤는 뭐, 나도 제대로 못 쓰던 너만큼이나 약한 것 같은데.’]
‘이 수다쟁이들.’
물론 자잔을 버리면 일이 쉬워진다. 자잔을 넘겨주고 자신은 다시 위로를 찾고…….
“그래도 그냥 버려두고 갈 수는 없잖아.”
붉은 인어의 손에 죽을 걸 훤히 알고 있는데, 6년 전과 같이 마냥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 진짜!
그때 다샤가 팍 짜증을 냈다.
―둘이 눈이라도 맞았어? 그냥 넘기면 될 것을 구질구질하게 막아서는.
그다음에 다샤가 본 건 시력을 꿰뚫는 섬광이었다.
―흐아아악!!
―뭐야!
눈 안쪽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감각과 함께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난 다샤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다샤!
동굴 위에 서있던 인어들이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취한다. 경직된 수많은 연갈색 눈동자가 데아를 바라보았다.
―아, 으! 이런 미친……!
인어의 시체 위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던 다샤가 비틀거리며 다시 수면 밖으로 올라왔다. 가까스로 감싼 얼굴 아래서 파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눈가에 상처를 입었다. 피하는 게 늦었다면 실명됐을 것이다.
―이 미친 새끼가!!
다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멍하니 지켜보는 자잔의 앞에서 휘몰아치는 바다의 창을 어깨 위에 탁탁 두드리며 낯선 표정을 짓던 데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빠르구나.”
―이, 이 인간이……!
다샤의 손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전의, 그 무기력하게 서있던 인간이 맞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던 얼굴로 방관하듯 자잔의 상처에 약품이나 대충 발라 주던 인간과는 다른 적의와 열감이 지금은 있었다.
―이, 이 인간 놈이…….
그때 데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눈동자가 순식간에 더 검어지고, 그 모습을 본 다샤의 움직임이 순간 굳었다.
“아까 내가 깨달은 게 있거든.”
첨예한 눈의 초점이 하나로 맞춰진다. 딱딱하게 마른 머리카락이 데아의 이마 위에서 흔들렸다.
“넌 내가 6년 전의 생존자라는 걸 알고 있어. 그렇지?”
그게 뭐라고.
다샤는 분노를 여전히 갈무리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야…….
“이름이 칼리안이라고?”
―그…….
“물음에 답이나 해!”
헐떡이던 다샤가 숨을 죽였다.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갔다. 다샤의 눈가 근육이 움찔 경련했다. 이윽고 그가 비웃듯이 입술을 올렸다.
―뭐, 그래. 칼리안. 6년 전에 그 녀석이 뭘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혹시나 걔를 만나게 해달라고 이 행패를 부리는 거면!
“필요 없어. 이미 다른 인어를 만나 봐서 알거든. 너희들은 순순히 답을 내어 주는 존재가 아니지.”
피파글렌. 두루뭉술한 단서만 주고 사라져 버린 빌어먹을 인어.
“그냥 협박해서 답을 얻어 내는 게 더 빠르겠더라고.”
―아이고, 아이고, 결국 이렇게 되네.
결국 인어한테 선전포고를 한 데아를 바라보던 경배가 탄식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형체가 있다면 자신의 이마를 팍팍 치고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다샤가 올리아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거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인간들은 다 이렇다니까. 이게 다 인간들만 보면 호기심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너희들 때문이잖아! 미리 공격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래, 그래. 일단 진정하고.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칼리안, 칼리안, 칼리안…….”
허공을 보며 이름을 빠르게 중얼거리던 데아가 다샤의 붉은 눈을 마주했다.
“내가 찾아갈 수 없으면 찾아오게 만들면 그만이야.”
―뭐?
“너는 그의 가족이지?”
널 죽이면.
“인어에게도 가족애가 있을까?”
생각의 끝과 동시에 데아는 인벤토리 안에서 낡은 포장지에 감싸인 신호탄을 꺼냈다. 인벤토리 안에 있어서 젖지 않은 라이터도 꺼내 신호탄에 불을 붙였다.
피융―!
허공으로 다량의 붉은 연기를 쏘아 보낸 데아가 툭, 남은 신호탄의 껍데기를 바다에 버렸다.
위치 알림 신호탄.
물속에 있었을 땐 쓰지 못했지만 물 밖일 땐 얘기가 다르다. 평범해 보이는 붉은 연기는 사실 최근에 개발된 마력 파동 장치였다.
금방 색을 잃고 허공에 녹아들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용자의 몸에 달라붙어 물에 닿아도 사라지지 않는 특성을 지녔으며, 응축되어 오랜 시간 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단 하나밖에 가지지 못한 귀한 아이템이었지만 데아는 지금이 그것을 쓰기에 적기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백리서가 가지고 있는 마력 탐지기 나침판이라면 분명 자신을 향해 올 수 있으리라.
―저, 저 인간이 뭘 쏜 거야?
“위치 추적용.”
―젠장, 인간들이 여기 엄청 많이 오는 거 아니야?
―야, 상관없어! 다 죽이면 돼. 우리가 더 강해!
―하지만 난 인간을 처음 보는데……. 다 강한 인간이면 어떡해?
―인어가 겨우 인간한테 당하겠냐?!
인어들이 혼란스럽게 수군거렸지만 이 모든 사건의 주범은 미동 없이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다샤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인간. 동료를 부르는 꼴이 참 비겁하구나. 인간들은 역시 다 죽여야 한다니까!
올리아가 조심스럽게 데아에게 말을 걸었다.
―맞아요. 굳이 이렇게 일을 키우는 이유가 있나요? 그대는 그냥 방관하고 자리를 떠나면 될 일이었어요.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데아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버려진 강아지처럼 자신을 올려다보는 자잔의 표정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었다.
그건 인간이 자신의 앞에 서있다는 미묘한 수치심 같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을 기껍게 느끼는 자신에 대한 당혹감 같기도 했다.
데아는 옷에 남은 물기를 탈탈 털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맞아. 그쪽 말대로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이 인어를 여기 두고 가면 그만이야. 자잔하고는 처음 만났을 때는 피터지게 싸웠고, 좋은 기억도 없어. 사실 인어는 다 별로야. 맞아. 네 말이 다 맞아. 굳이 여기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어. 그런데…….”
―…….
“붉은 인어, 네가 기뻐할 만한 기회를 별로 주고 싶지가 않네.”
마지막 말은 한숨처럼 새어 나왔다. 그런 데아를 자잔은 홀린 듯이 지켜보았다. 밑에서 올려다본 데아의 눈은 더 또렷했다.
주군을 닮은 저 눈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자잔의 떨리는 눈이 감겼다.
그는 자신이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리라는 걸 직감했다.
―인간이 동료를 불렀어. 여기 가만히 있으면 안 돼요.
―우리는 인간은 공격할 수 없어.
―피파글렌 님이 원하지 않을 거야!
차분한 얼굴로 상황을 곱씹던 올리아와, 그와 같은 베이지색 머리카락의 인어들이 주춤했다. 그러나 붉은 머리카락과 비늘을 가진 인어들은 달랐다.
―뭐야? 눈치 안 보고 인간과 싸울 수 있는 기회야?
―야! 나가자! 싸우자!
붉은 인어 무리들이 각자 파도 아래로 뛰어내렸다. 지켜보던 자잔이 데아의 옷자락을 덥석 움켜잡았다.
―인간, 저거 잡아!
그때 데아의 눈앞에 넓은 파장의 흐름이 보였다. 파도 속으로 뛰어든, 뛰어들고 있는 인어들이 하나같이 입을 크게 벌리고 무언가를 부르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