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2화
데아의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6년 전, 해일. ‘칼리안’이라는 인어는 제가 찾던 붉은 인어임에 틀림없었다.
“어떻게…….”
―우리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냥 던져 봤는데, 역시 맞았군?
다샤의 말에 자잔과 옅은 베이지색 머리카락의 인어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잠깐, 다샤. 인간들은 우리 말을 못 알아들어요?
―응. 너희들은 인간을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 몰랐던 것도 당연하지.
―그런데 저 인간은 왜 알아듣죠?
―그건…….
다샤가 볼을 긁적였다.
―나도 잘 몰라. 잡아가면 움 님이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
순식간에 공기가 수축되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코끝을 적시고, 데아의 심장이 아프도록 뛰기 시작했다.
―인간, 충고 하나 해줄까? 기억해 두면 좋을 거야. 우리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인어들의 공통된 무기는.
길고 날카로운 손톱과 유연한 체술이야.
데아는 순식간에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들이닥치는 다샤의 손톱을 창으로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챙!
손톱에서 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굉음이 울렸다. 창의 위력이 생각보다 강했던 건지, 다샤는 금이 간 자신의 손톱을 까딱이며 살펴보고는 흥, 숨을 뱉었다.
―다시 봐도 역시 좋은 창이네. 뭘로 만들어진 거니? 물?
―잠깐, 다샤.
그를 막은 건 옅은 베이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인어들이었다. 올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불같은 성격은… 붉은 비늘을 가진 ‘움’ 님의 권속의 특징이니까 뭐라 안 해요.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관두었으면 좋겠군요.
짤막하게 경고한 올리아가 손을 들어 올렸다. 파직, 파지직, 그 손안에 약한 전류가 튀었다.
어이쿠, 다샤가 장난스럽게 손톱을 거둬들였다.
―하여간 피파글렌 님이나 너희나, 인간을 지나치게 아낀다니까.
―우리가 피파 님의 권속인 이상, 그분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샤가 질린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인간은 안 건드려. 지금은 말이야. 하지만…….
몸을 빙글 돌린 다샤가 포착한 다음 사냥감은 다름 아닌 자잔이었다. 자잔의 꼬리는 여전히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잠깐, 잠깐. 상대는 애잖아?”
―뭐?
“아동 학대 아니야??”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일 상황이었다. 자잔은 작은 체구를 가진 어린 인어였고, 상대는 건장한 성인 인어였으니까. 그러나 데아의 말에 주변의 인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헛웃음을 터뜨렸다.
―인간, 넌 쟤가 애로 보여?
“……?”
―아마 너보다 쟤가 살아온 날이 더 많을걸? 그런데도 자잔이 크지 않은 건…….
다샤의 얼굴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걸렸다.
―태어나자마자 주군에게 버림받아서?
다샤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서 와르르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웃지 못하는 건 상황 파악이 덜 된 데아와 충혈된 눈으로 인어들을 노려보는 자잔뿐이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다샤가 등을 돌려 올리아에게 손짓했다.
―저 버려진 권속을 공격하는 건 뭐라 안 할 거지?
―음. 뭐… 마음대로 하시죠.
버려진 권속.
올리아가 그 뜻을 비웃으며 가볍게 몸을 돌리는 사이 자잔의 눈매가 사납게 변했다.
―꺼져!
―그나저나 이해가 안 가네. 자잔, 네가 왜 인간과 같이 있는 거야? 꼴을 보면 꼭…….
다샤가 꼬리로 강하게 시체를 철썩 두드렸다.
―이 하급 인어 하나를 처리 못 해서 인간에게 도움을 받은 것 같잖아?
―…….
―네가 인간 따위와 어울려 다닌다는 걸 알면 네 주군이 좋아할까? 그 잘난 폭군이 말이야.
폭력적이고, 탐욕적이고, 잔인하지. 성군의 모습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으면서, 과거에만 머무는 오래된 인어. 이미 죽은 이의 시체를 아직도 싸고도는 미치광이의…….
콰광!!
―……!
다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자잔이 앞으로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푸른 피가 묻어 있는 크고 창백한 손 위에 마력이 모이고, 짧은 파동이 흐르고, 작은 총알처럼 충격파가 다샤를 향해 쏘아져 나간 건 아주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분을 모욕하지 마!
자잔이 서슬 퍼렇게 외쳤지만 다샤는 자신의 뺨에 길게 긁힌 푸른 생채기를 손가락으로 죽 닦으며 표정을 굳혔다.
―뭐, 여전히 귀엽네. 몸도, 힘도. 넌 언제나 그랬지.
그리고 곧장 손톱을 가장한 칼날이 날아들었다. 무의식적으로 데아가 막기 위해 창을 빼 들었지만 가늘고 빠른 칼날은 유려하게 데아를 피해 곧장 자잔을 향해 뛰어들었다.
작은 돌풍이 데아의 옆을 스쳤다. 젖은 옷이 거칠게 펄럭였다. 푸른 피가 데아의 등에 흠뻑 튀었다.
―크윽!
―이야! 다샤 잘한다!
―더 해, 더!!
―저 버려진 권속 새끼를 그냥 죽여버려!!
―어차피 폭군은 제 권속의 존재조차 모를걸? 야! 뒤탈 없으니까 그냥 죽여!!
다샤의 뒤편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흥분한 인어들이 꼬리로 동굴을 철썩 내리치고 주먹으로 바닥을 두두, 두드리면서 거침없는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데아는 표정 관리에 실패하며 뒤를 돌았다.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푸른 피가 울컥이는 복부를 움켜쥔 자잔이 몸을 작게 웅크리고 있었다.
“아.”
데아가 짜증스럽게 마른세수를 했다.
“에이 씨…….”
그는 인벤토리에서 한 병뿐인 포션을 꺼냈다. 그래도 다 쓰기에는 좀 아까우니 조금만 남겨 두고 자잔에게 다가갔다. 다샤가 뭐 하냐는 듯이 쳐다봤지만 이 정도는 봐줄 수 있다는 듯이 옅게 조소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세상에, 약한 인간이 도와주기까지 하네? 그래도 명색이 2세대 인어인데. 너희 왕이 되게 싫어하겠다, 그치?
데아는 무시했다. 포션을 받은 자잔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흔들렸다.
―이걸… 왜?
믿을 수 없다는 듯 올려 마주한 시선이 생경했다. 그건 예기치 못하게 받은 호의에 놀란 거라기보다는, 이런 호의를 처음 받아 본 이의 반응에 더 가까웠다.
“…….”
데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르르 떨리는 긴 눈썹 아래,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이 시체처럼 하얗다. 자잔은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환부에 포션을 발랐다.
그때 그 정도 시간은 주겠다는 듯이 강자의 여유를 두르고 깨진 손톱을 살피던 다샤가 자잔을 향해 말을 툭 뱉었다.
―나라면 인간에게 도움을 받은 순간 창피해서 혀를 깨물었을 거야.
―야. 그 말은 심했다!
―인간은 욕하지 마라!
―다샤, 말 가려서 해!
뒤에서 또 쏟아지는 말소리에 다샤가 신경질적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닥쳐!
―너나 닥쳐라!!
―와아!!
―…….
다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부릅떴다.
―뭐, 티끌만 한 주군의 마력도 교감도 얻지 못한 약한 인어라서 잃을 것도 없으니 수치도 없다 이건가? 넌 2세대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내 깨진 손톱 하나 못 피하는 둔탱이가 무슨 2세대 인어라고. 같은 2세대 욕보이지 말고 영원히 꺼져 줬음 좋겠는데.
그의 짜증은 온전히 자잔에게 쏟아졌다.
데아는 그 순간, 어린 티가 남아있는 자잔이라는 인어가 평소에 어떤 취급을 받고 살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그래, 자잔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인어는 이제까지 봐온 등급 높은 인어보다, 그리고 6년 전 그 인어보다는 확실히 약했다. 그러나 그건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그는…….
“…그렇게 안 약하던데.”
자잔이 번쩍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봤다. 다샤가 코웃음 쳤다.
―인간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낄 수 있겠지. 인간보다 약하면 생선이지, 그게 인어겠니?
“…….”
―그런데 약해. 2세대 인어치고는 약해.
2세대.
“정확한 내 이름은 ‘피파글렌’. 여덟 명의 1세대 인어 중 하나지.”
“네가 궁금해하던 ‘붉은 인어’는 아마 2세대일 가능성이 높아.”
데아의 상념 속에서 베이지색 머리카락의 동그란 안경을 쓴 인어, 피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 1세대와 2세대는 그들만의 등급을 나타내는 단어였다. 전에 들은 말까지 조합해 보면 아마 3세대까지 상급 인어에 속한 것일 테다.
데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을 뭐라 해석했는지, 자잔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검은 눈에 박혀 있는 어두운 채도의 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안 약해.
그가 사납게 읊조렸다.
―…1세대 인어에게 버려진 권속치고는.
그러나 이내 말꼬리를 흐렸다.
버려진 권속.
진저리 칠 만큼 싫어했던 단어인데 이 상황에서 그것을 대체할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잔의 얼굴이 일순간 무너졌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해야만 한다.
주군과 충분히 교감할수록 권속은 강해진다. 그렇기에 자신은 약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힘을 갈고닦았지만 이 정도가 한계였다. 날아오는 머저리들의 손톱 하나도 제대로 막지 못한다.
자잔은 순간 범람하는 감정을 꾹 눌렀다. 그 위에 냉정하고 가차 없는 간부의 표정을 가면처럼 뒤집어썼다. 이런 건 익숙하다.
그런데 데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 그래. 그런데 사실 그런 건 잘 모르겠고.”
―……?
“그보다 너는 저 붉은 인어와 적이지? 인어끼리도 사이가 이렇게 안 좋을 수가 있구나?”
트리야와 닮은 눈이 자신을 바라본다. 한 치 앞을 모르겠는 캄캄한 눈동자 아래 담긴 건 적의뿐만이 아니었다.
예상과 다른 존재에 대한 관심.
그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자잔은 애써 감추었던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자잔이 당황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왜 궁금해?
“그냥.”
인간의 눈 안에 숨죽인 호기심이 엿보인다.
6년 전의 붉은 인어와 닮았을 뿐더러, 아직까지도 나의 목숨을 위협하는 저 인어와, 첫인상은 나빴을지언정 결국엔 나와 협력한 너. 이 둘을 저울질한다면 어쩌면 나는 너의 편을 들 수 있다고, 어쩌면 너와 나는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나는 너를 호의로 봐줄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인간의 눈을 자잔은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너무나도 트리야와 닮아 있어서…….
자잔은 호흡을 멈췄다. 숨통이 막혀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정수리부터 덮쳤지만.
―…….
자잔은 결국 바다를 유영하는 조난자처럼 손을 떨궜다.
목이 졸리고서야 함정인 줄 알겠지.
내면의 작은 이성이 비웃는다. 그러나 자잔은 멍하니 데아와 시선을 맞췄다.
저의 제왕이 저를 저렇게 봐주길 밤새 기도했던 날이 있었는데.
―…너는 제왕이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