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0화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눈을 뜬 인간은 자잔을 공격하려다가 주춤했다.
“아, 다리가…….”
인간은 부상당한 다리의 통증 때문에 짧은 소리를 지르며 무너졌고, 자잔은 그 틈을 타 몸을 피했지만 꼬리의 부상이 벌어져 덩달아 바위 위를 굴렀다.
“아니, 어린애를 뭐, 어떻게 공격할 수도 없고…….”
다친 다리를 웅크리고 헐떡이던 인간이 고개를 들었다.
“저, 저기 애… 애 맞지?”
자잔의 미간이 와장창 구겨졌다.
―뭐?
“인어… 애야, 혹시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애라니, 겉보기에는 이래도……. 감히 인간 주제에!
“뭐? 나라고 좋아서 여기 있는 줄 알아? 이 생선이!”
―생, 생선? 닥쳐!
“너나 조용히 해! 너나 나나 둘 다 부상당해서 못 움직이고 있잖아! 그러다가 습격당하면 어떡하려고 언성을 키워, 쪼만한 게!”
자잔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렇게 혼나 본 적이… 있던가?
“그래서 여기 어딘 줄 아냐고! 꼬마, 아니 애야. 잘 생각해 봐.”
인간이 숨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작전을 바꿨는지 달래는 투로 말을 건넸다.
“종족이 다른 나보다는 네가 여기 지리를 더 잘 알지 않을까?”
―…….
맞는 말이었다. 자잔의 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여긴 어디지?’
정돈되지 않은 해초와 바닥에 굴러다니는 날카로운 자갈들. 이상할 정도로 아무도 없는 주변. 작은 물고기 정도는 보일 법한데…….
몸을 추스르는 인간에게서 잠깐 시선을 떼며 자잔은 설마 하는 가능성에 미간을 좁혔다.
―제국 밖이군.
그 말도 안 되는 재앙을 만나 제국 밖까지 밀려났다니. 그렇다면 여기는 아마…….
자잔은 빠르게 허리를 숙여 모래의 냄새를 맡았다. 희미한 악취가 진동했다.
“아, 맞아. 위로.”
―뭐?
“위로를 두고 왔어. 이위로!”
자잔은 서둘러 인간의 입과 손을 제압했다.
―소리 내지 마!
인간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자잔은 트리야를 연상하게 하는 인간의 눈에서 애써 고개를 돌렸다.
―바다의 기류가 이상해.
아무도 없는 주변, 갑자기 내려간 온도.
―젠장.
“뭐야, 뭔데.”
―공격하지 마. 소리도 내지 마.
“…….”
―지금 여긴 제국 바깥에 있는 3구역이다. 그늘진 미로라고도 많이 부르는데…….
자잔이 한숨을 뱉었다.
―하필 떨어져도 여기에…….
자잔은 데아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끌었다.
―여긴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야. 지능이 낮고 폭력적인 하급 인어들의 서식지라고. 하급 인어들은 말도 안 통해서 이 상태에서 들키면 죽을지도 몰라. 저 그림자 보여?
저 멀리, 바위벽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구역을 통제하는 놈이야. 절대 존재를 들키지 마.
“…….”
데아는 입을 틀어막힌 채 고개를 재차 끄덕였다. 그제야 눈앞의 인어가 손을 놓아주었다.
물갈퀴 느낌, 저거 이상한데.
‘그나저나 리서 언니랑 아리아 길드장은 잘 있을까?’
데아는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네가 있던 곳은 제왕의 별장이다.
“제왕?”
―문제라도 있어?
“아니…….”
인어들의 제국이 있다고 말만 들었지, 이렇게 신분제의 증거를 엿보게 되니까 좀 남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제왕님은 인간을 아주아주 싫어하셔서 보기만 해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야.
“뭐!”
―서둘러 돌아가지 않으면 쓰러져 있던 인간도 비슷한 신세가 될 테지.
“미친, 어서 빨리 가야 해.”
―가고 싶다면 잘 들어! 무사히 돌아가고 싶다면 하급 인어에게 들키지 말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데아는 잠시 자잔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하얀 볼과 어린 티가 남아 있는 눈매. 그 안에 섞인 건 절박함이었다. 데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움직였다.
“맞는 말이야. 우리는 둘 다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는 여길 나갈 수 없어. 힘을 합쳐야 하지?”
자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둘은 함께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부력 때문에 자꾸 떠오르려 하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주변 해초에 팔을 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딘가 불편한 임시 동맹이었다.
데아는 흘끗, 자잔을 보았다. 하얗다 못해 푸른 피부에 길게 내리떠진 눈. 이마를 덮는 머리카락과 그 아래 비치는, 어딘가 결핍된 초록빛 눈동자. 바쁘게 움직이는 괴물의 그림자를 탐색하는 시선.
이상한 어린 인어.
데아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런데 같은 인어끼리인데 말이 안 통해? 돌아가게끔 설득을 한다든가…….”
자잔이 데아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통솔이 안 되는 위험한 인어들만 몰아넣은 지역이 여기야. 지성은 없고 본성은 사납지. 하급 인어의 말은 같은 인어라도 알아들을 수 없어. 과거엔 안 그랬다고 하는데, 알 바는 아니고.
“싸워서 이길 수 있으려나.”
―사실 하급 인어의 힘은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야. 하지만 지금 내가 부상을 입어서…….
그리고 자잔은 억울하다는 듯이 씨근거렸다. 어린애의 볼이 부풀었다.
―인간, 네가 갑자기 별장에 나타나는 바람에…….
“내 다리는 안 보여??”
―조용히 해. 하필 꼬리를 다쳐서.
“…그럼 이렇게 하자.”
데아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인어지만 어린아이를 계속 방치해 둘 순 없는 노릇이니까.
인벤토리 안에는 간단한 의료용품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지금 쓰기 아까운 것들이 많았다. JJ 길드에서 전해준 포션은 하나뿐인데, 물속이라 마시기엔 어려워 보였다.
“이거다.”
데아는 인벤토리에서 붕대를 꺼냈다. 자잔이 둥실둥실 자신에게 떠밀려 오는 물 먹은 붕대를 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감아.”
이게 데아가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인어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아량이었다.
자잔은 어이없이 데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서툴게 꼬리에 붕대를 감아 지혈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아는 알약 하나를 삼켰다.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해주는 약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다리에도 붕대를 감았다.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 건 그때였다.
“……!”
먼저 반응한 건 자잔이었다.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인어의 커다란 동공을 보며 그는 예상했다는 듯이 손을 뻗어 충격파를 생성했다. 순식간에 눈알이 파인 거대한 괴물 인어가 괴이한 소리를 내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데아는 그곳을 구르듯 빠져나왔다. 열이 오른 괴물이 자잔과 데아가 몸을 숨기고 있던 바위를 깨부쉈다.
‘돌아가야 해.’
저 아이의 꼬리는 어느 정도 움직일 수는 있어 보였고, 그럼 최소한의 어른의 의무는 다한 셈이었다. 아이가 시간을 버는 틈을 타 달아나야 했다. 자신은 이대로 위로를 찾아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데아는 서둘러 헤엄을 쳤다. 바위 뒤에 숨어가며 자리를 뜬 지 한참.
―멍청한 인간.
데아는 똑같은 곳에 다시 돌아와 경멸 섞인 자잔의 눈을 마주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자잔에게 괴물이 시선을 뺏긴 틈을 타 도망친 건 좋았는데 길을 잃어 뱅뱅 돌다 다시 돌아온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3구역이 왜 그늘진 미로라고 불리는지 알아? 이곳에서 길을 잃은 방랑자는 두 번 다시 제국의 땅을 밟을 수 없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거야. 그런데 여길 혼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캉!
또 한 번 공격해 오는 인어를 막으며 자잔이 마음껏 비웃었다. 데아는 반박하지 않고 고스란히 비웃음을 감내했다.
아무래도 이 구렁텅이를 빠져나가려면 이 인어를 해치우고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어린 인어와 협력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데아는 껄끄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스킬을 발동시켰다.
화려하게 타오르듯 붉게 빛나는 상태 창이 머리 위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심해의 눈(A) : 당신은 승리할 것입니다.]
약점 파훼. 눈앞에 존재하는 두 인어의 역린이 환하게 빛났다.
저 거대한 인어의 역린은 입천장 위쪽이군. 입을 어떻게 벌린담…….
“자, 빨리빨리 끝내자.”
데아는 바위를 딛고 훅 일어섰다.
“거기 그… 너! 입을 벌려!”
―뭐?
바다를 표류하는 모든 물체 사이로 어이없는 두 시선이 마주했다. 데아가 날 듯 바닷속을 뛰어올랐다.
[물속의 발자취(A) : 물속에서 제약 없이 빠른 행동력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저 인어의 입천장을 뚫으면 완전히 처리할 수 있어!”
스킬을 더 강하게 활성화시키며 데아는 물결을 밟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공기방울과 해류를 느리게 짓밟고 그대로 튀어 오르는 그때, 괴물 인어가 데아에게로 고개를 휙 돌렸다.
[타고난 몰이꾼(A) : 인어의 주목을 받는 동안 속도가 +60 증가합니다.]
더 이득이다. 데아는 다리 근육이 팽창되는 것을 느끼며 마치 수중으로 총알이 쏘아져 나가듯 속력을 냈다.
욱신, 그때 아직 낫지 않은 다리에 통증이 불시에 올라왔다. 대처하지 못하고 잠시 비틀거리자 그 틈을 노린 괴물 인어가 데아의 옆구리를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거대한 장벽이 성큼 다가온다. 강한 통증을 예감하며 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때.
덥석!
서늘한 온도의 팔이 데아의 허리를 휘감았다.
바다에서 가장 빠른 생명체 인어. 아무리 꼬리에 부상을 입었다 한들 스킬을 쓴 인간보다는 월등하게 빨랐다. 데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곧장 손을 펼쳤다.
‘경배야!’
―아, 자기야. 아직 마력이 다 회복되기 전인데…….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잠깐 들려왔지만 이내 작게 소용돌이치며 부피를 키워가는 눈부신 창이 손 위로 모여들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자잔은 자신들에게로 달려드는 인어를 피해 순식간에 등 뒤로 이동했다. 데아가 짚은 자잔의 몸에서 심장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그리고 괴물이 등 뒤를 확인하지 못하는 그 몇 초, 이곳의 인기척을 눈치챘지만 아직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 있는 때, 자잔은 다른 한쪽 손을 괴물에게 쭉 뻗었다. 반투명한 물갈퀴 너머로 거대한 힘의 구가 생성된다.
―으윽!
자잔이 어금니를 으득 깨물었다. 크게 모여든 힘이 압축하듯 구가 작아진다.
쿠르릉, 쿠릉.
작은 폭풍우를 한 손에 거머쥔 자잔의 눈이 밝은 녹색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그 순간 모든 해류가 정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