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8화
한 인간은 정신을 잃은 건지 누워 있고, 한 인간은 서있다. 다리 두 개. 손에 물갈퀴가 없고, 전신을 다 가리는 의복을 착용하고 있으며, 귀가 작고 동그랗다. 인간으로 둔갑한 3세대 인어인가 싶었지만…….
“이럴 때가 아닌데. 위로야, 이위로. 정신 좀 차려 봐!”
인간이 확실했다. 공문으로만 내려왔던 인간의 특징과 아주 흡사했다. 바다에 돌아다니는 인간들의 시체는 많이 봤어도 살아 있는 인간은 처음 보는 거였다.
―감히 제왕의 별장에 침입하다니.
“…뭐?”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지?
도대체 어떻게?
자잔은 자신을 복잡한 표정으로 응시하는 눈앞의 인간을 바라보았다. 자잔의 이빨이 거칠게 다물렸다.
―제왕의 결계 안에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어.
제왕과 같이 태어난 1세대 인어거나, 권속이거나, 혹은 그의 주군만이 결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가능한데 저런 아무 상관도 없는 한낱 인간이 어떻게! 무슨 추악한 수를 쓴 건가?
―침입자는 사살한다.
“잠깐, 뭐?”
―닥쳐라, 인간!
대외적으로 내려온 공대의 공문에 의하면 인간은 한 없이 나약하므로 보호해 줘야 했다. 그래서 인간을 목격하면 바로 수면 위로 올려 보내거나, 실수로 죽여도… 절대 백성들에게 들키지 말 것.
인어 제국은 대외적으로 인간에게 우호적인 제국이어야 했으므로.
―하지만 사실 왕은 인간을 아주 싫어하시지.
그러니 인간의 목을 몰래 선물로 드리면 기뻐하실 것이다.
자잔이 한숨처럼 중얼거리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두른 작은 창을 든 인간이 흠칫 몸을 굳혔지만 자잔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 행복한 망상이 가득 찼다. 인간들의 목을 가져가는 자신과 환하게 웃는 트리야 왕. 어서 오라면서 뻗는 다정한 두 손과 또다시 머리를 쓰다듬는 따뜻한 체온.
자잔은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도 수백, 수천 번 보았던 장면인지라 아주 수월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훅.
공기의 흐름이 멈췄다. 자잔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드리운 건 코앞까지 다가온 펼쳐진 손아귀였다.
―이런!
자잔은 허리춤의 검을 빼어내며 곧장 창을 막았지만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뒤로 밀쳐졌다. 애초에 여긴 수중이 아니었다. 물 밖으로 나온 인어는 약해진다. 자잔의 눈이 급하게 근처를 훑었다. 주변에 적실 만한 게… 없었다!
한편, 데아는 쿵쾅이며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인어는 무조건 죽이고 공격하는 게 맞지만, 상대는 어린아이였다. 기껏해야 10대 초반밖에 안 돼 보이는 작은 남자아이. 우선 아이가 먼저 공격하려고 하길래 제압은 했지만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너…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거 맞지?”
붉은 인어와 마찬가지로 뇌에 직접 입력되는 음성에 데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너 말하고 있던 거 맞지?”
―무슨 헛소리를…….
“나는 그걸 들은 거고?”
6년 전과 똑같아.
검은 머리카락을 목덜미까지 짧게 자른 인간이 허탈하게 웃더니 이내 정색했다. 마지막에 중얼거린 말은 너무 희미해 자잔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여기서 빠르게 바다로 뛰쳐나가지 않으면 큰 부상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너는 그 붉은 인어와 관련이 있는 인어구나. 어쩌면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모르고 말이야.”
―뭐…….
“그렇지?”
인간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자잔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뱀과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저 인간은 약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은 연약하다는 공문과 유일하게 다른 내용이었다.
나가야 한다.
자잔은 등을 돌리고 몸을 숙였다. 그대로 동굴 안쪽을 휘저으며 거침없이 돌파했다. 반대쪽에 위치한 문으로 곧장 나갈 생각이었다.
밖으로 나가야 해. 인간은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한다고 들었으니까!
“거기 서!!”
예상대로 인간은 야차처럼 쫓아오기 시작했다. 숙인 등 뒤로 해류가 회전하는 기이한 형태의 창날이 스쳐 지나갔다. 살아생전 이런 형태의 무기는 본 적이 없었다.
바다로, 바다로 나가야 한다. 인간은 바다로 뛰어들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자잔의 예상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빠르게 별장 안을 헤집으며 문밖으로 뛰쳐나가 바닷속으로 뛰어내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인간도 덩달아 바다로 뛰어들어 자유롭게 자신을 사냥하는 게 아닌가!
자잔은 유연한 헤엄으로 공격을 피하며, 공대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공문의 거짓된 정보를 바로잡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감춰진 저 의복 아래에 숨겨진 아가미라도 있는 게 틀림없었다.
“너……!”
그러나 그때, 인간이 움직임을 돌연 멈췄다.
―이!
그래서 자잔은 검을 들어 공격해 인간의 다리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물이 붉어지고 인간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또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데 고통스러운 신음에 가려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강해 봤자 인간. 수중전의 최강자는 인어다.
뜨거워졌던 뇌가 다시 식는 느낌이었다.
그래, 목을 베자. 그리고 다시 공대로 돌아가야만…….
“아니, 뒤, 뒤!”
인간이 비명을 질렀다.
‘뭐?’
그리고 그 순간이 되어서야 자잔은 자신의 뒤에서 느껴지는 거대하고도 압도적인 바다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러고 보니 제왕은 인적이 드문 장소에 별장을 지어 놓고 휴식하기를 즐겼다.
‘왜 인적이 드물었지?’
자잔은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그곳에 있었다.
파과과과과…….
평범한 인어는 대적조차 하지 못하는 거대하고도 고고한 바다의 들짐승. 자연재해. 어둡고도 웅장한 형태의 파도의 소용돌이가 그대로 전신을 강타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고통이 자잔을 엄습했다.
퍽!
강하게 치받는 해류에 배를 얻어맞고 신음하다가 옆을 돌아보니 이미 인간도 소용돌이에 얽혀 정신없이 휘말리고 있었다.
“으아아아…….”
인간의 비명이 울렸다.
―……!!
그러나 결국 자잔도 바다의 폭풍우 속에 제대로 휘말리고 말았다.
―젠장.
순식간에 강한 물살에 휩쓸려 이지를 빼앗기는 아찔함이 오감을 감쌌다. 사고가 정지하고 눈앞의 존재가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같은 재앙에 휘말린 두 인영의 거리가 성큼 가까워졌다.
“……!”
―저리 비켜!
상대도 바라지 않았던 접촉인 양 강하게 양발을 세워 걷어차려는 모습을 보이다 돌연 몸을 빙글 돌리더니 손을 뻗었다.
퍼억!
그 손이 서로의 접촉을 막았다. 자잔의 가면이 데구루루 떨어져 나갔다. 한층 더 밝아진 시야에 보이는 건 세상을 가득 채운 검은 눈동자였다.
인간의 눈.
자잔은 데아의 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해류에 휘말려 이마까지 드러난 인간의 하얀 얼굴이 동공에 발자국을 냈다. 그 안의 무감각함이 보였다. 가장 서늘한 온도로 소용돌이치는 열정 또한. 순간 호흡도 멎는 듯한 충격이 뇌를 울렸다.
트리야와 닮았다.
자잔은 거부감과 기꺼움이 동시에 드는 끔찍한 기분을 맛보며 숨을 삼켰다. 곧 강한 바닷속의 폭풍우가 또다시 밀려들어 왔고, 생애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거대한 통증을 느끼며 그는 정신을 잃었다.
◈ ◈ ◈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무슨 일이세요, 움 님?
여파 길드 안에 마련된 손님용 객실에서 연옥, 아니 움이 마실 커피를 휘휘 타던 유우라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움은 잠자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홀짝, 유우라는 움의 커피를 한 입 몰래 뺏어먹었다.
―또 미래를 보신 거예요?
“비슷해. 그나저나 내 커피는?”
―아, 여기요!
“네가 마신 거 말고 새로 타 와.”
―…….
유우라가 오래된 직장인의 미소를 지으며 능숙하게 커피를 원샷했다. 100년 전, 다른 인어들과 힘을 합쳐 제국을 박살 내고 추방당하듯 떠난 무시무시한 역모 죄인이라던 인어는 성품 좋고 서글서글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가만히 앉아서 이거 내놔라 저거 내놔라, 이건 맛없으니 다시 타 와라, 하는 귀찮음에 약한 고집쟁이였다.
―여기 있습니다!
“시럽 빼랬지. 다시 타 와.”
―…….
시럽이 왜, 달아서 맛있기만 하구만.
유우라가 울상이 된 채로 다시 커피를 원샷 하며 커피믹스를 뜯었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움 님이 인간을 친절하게 대할 수도 있었다니.
“뭐? 무슨 뜻이야?”
―제국에서 공부할 때 배웠어요. 제국을 나간 대표적인 세 명의 1세대 인어. 역모의 주범들은…….
유우라가 눈치를 살짝 보며 말을 이었다.
―약한 인간들의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는 파렴치한 폭력 집단이자, 이미 죽은 태초를 앞장세워 역모를 저질러 그에게 안식조차 주지 않으며, 또 분란을 일으키고…….
유우라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식인을 즐긴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