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7화
―또 신고가 들어왔어.
―또요?
―걱정 마, 자잔. 이번엔 2공대가 갈 거야.
헤아릴 수도 없는 아주 옛날, 최초의 인어가 탄생했다.
어떻게 탄생했는지, 어떤 경로로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적혀 있는 소수의 책은 금서가 되었고, 그것에 대해 조사하는 연구는 모조리 구속 행위가 되었기 때문에 현재 존재하는 모든 인어는 어렴풋이 상기하는 정도로만 ‘최초의 인어’를 인식할 뿐이었다.
그의 이름은 ‘태초’였다. 모두가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몇 인어들은 그의 이름조차 잊었다. 다음 왕위를 이어받은 1세대 인어 트리야가 곧장 공포정치를 펼쳐 혼란스러운 시대가 계속되자 이름을 망각하는 인어는 더 많아졌고, 그의 이름이 금기시되며 그 속도는 더 가속화됐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인어의 기록은 방대했고, 새로운 왕권의 역사는 짧았다. 모든 기록의 열람을 금해도 새어 나가는 작은 기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젊은 인어들 사이에 금서를 비밀리에 돌려보는 문화가 생겼대. 나도 상대적으로는 젊은 축에 끼는데 더 어린애들은 뭔가 다른가? 왜 이런 책을 목숨을 내놓기까지 하면서 돌려 보는 거지?
같은 1공대의 상사가 압류한 책 한 권을 들었다 놓으며 중얼거렸다. 물에 녹지도 훼손되지도 않는, 인어의 마력이 깃든 낡은 서적이 나풀거렸다. 자잔은 인상을 찡그렸다.
―왜요? 저도 어린 인어인데 모르겠어요. 금지했으면 그냥 따르면 되는 거잖아요. 머리가 나쁜가. 왜 자꾸 반역질이지…….
자잔은 짧은 꼬리에 달린 덜 여문 지느러미를 파닥거리며 짜증스럽게 한탄했다. 오늘 새벽에만 책을 돌려 보는 모임이 생겼다는 신고를 전해 듣고 출동해서 불한당들을 제압하고 금서를 압류한 게 벌써 두 번째였다.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방심하는 족속들의 허를 찌르며 싸운 후, 새벽 물길을 가르며 헤엄친 자잔의 눈가에 그늘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런 재밌지도 않은 짓거리는 최근에 들어 더 늘어났다. 최근에 백성들이 심심한지, 이 오래된 공포 정치에 대한 치기 어린 반항심이 갑자기 차오른 건지, 그 대단하신 폭군이 꺼려한다는 소문이 도는 최초의 인어에 대한 호기심이 훅 든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처형장에 걸릴 목의 개수가 어제보다는 늘었다는 거다.
―자잔, 왜 이렇게 기분이 별로야? 잠 못 잤어? 점이라도 볼래?
―점은 무슨 점…….
“최초의 인어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공식적으로 서적의 열람을 금하며 트리야의 충실한 수족, 칸나니아가 모든 백성들의 앞에서 주장한 말이다.
부정확한 자료의 무분별한 열람은 인어의 정체성에 대한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므로 왕, 트리야의 의지에 따라 모든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이에 반하는 행위를 할 시 왕권을 어지럽힌 행위로 간주해 반역죄로 다스리겠다는 파격적인 선고를 내린 날은 자잔이 태어나기도 전이라 알 수 없었지만 막연하게나마 상상할 수는 있었다.
다 여전했겠지.
그러나 그 사태를 지켜본 인어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 공표로 백성들의 궁금증만 더 키웠다고.
원래 도가 지나친 억압은 반발심만 더 키운다.
뭐가 금서라고?
많은 인어들이 고개를 들었지만 짧은 소란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현 왕권의 현실에 분노한 한 연구자가 해당 금서를 대량으로 구비해 놓고 거리에서 대놓고 나누어 팔다가 적발되어 공개 처형을 당한 것이다. 거기서 더해 처형 집행인들은 처참하게 나누어진 그자의 사지를 거리에 뿌렸다.
그 방법은 효과적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백성들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금서와 관련된 소문은 암암리에 퍼져 나갔다.
자잔도 그 소문과 관련된 말을 조금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최초의 인어에 관한 말이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모를 수가 없던 기본 상식을 이제 와 모른 척하기엔 널리 퍼져 있는 잡소문들이 너무 많았다. 자잔은 필사적으로 이건 반역이 아니고, 단순한 신화 같은 거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때 조개 점을 친다며 조개껍데기를 섞는 상사의 옆에 압류된 서적이 눈에 띄었다. 자잔은 그 첫 장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태초’를 제외한 모든 인어에게는 주군이 존재한다.
어쩌다 본 내용이었다.
주군.
자잔의 낯이 가라앉았다.
주군, 트리야에게서 버림받은 자잔은 하염없이 근처를 헤엄쳤다. 험난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마침 주변을 지나고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준 인어가 높으신 귀족 인어들에게 노예로 팔릴 법한 어린 인어를 물색하던 상인이었다는 사실이 불운일지 행운일지 구분도 되지 않을 만큼.
인어 상인은 자잔의 화려한 생김새에 이끌려 다가왔다. 하얀 피부와 빛나는 초록색 눈. 청록빛으로 빛나는, 심해의 물결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굽이치는 어두운 머리카락. 가늘게 찢어진 눈매에 도톰한 붉은 입꼬리까지.
이런 인어가 거리에 그냥 나와 있다니!
인어 상인은 몸을 들썩거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아마 그 어린 인어에게 경동맥을 베이기 전에는 제국에서 제일 행복한 인어였을 것이다.
그 후 제국 안에서 다시 헤매다가 트리야 왕과 유사한 생김새와 머리카락 색을 지닌 자잔을 누가 알아봐 주었다.
그는 그렇게 왕궁에 입성했고,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공대에 소속되어 처음으로 제대로 왕을 알현할 수 있었다.
무정한 주군은 자신의 유일한 권속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자잔은 주군을 마주했다는 걸로 만족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왕과 자신은 꽤나 닮아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닮은 외모. 녹색 머리카락. 자신이 트리야 왕의 마력을 이어받은 권속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으므로.
―뭘 선택할래?
상사의 목소리에 자잔은 상념에서 깼다.
―그… 하얀색 조개요.
나의 주군. 이 거대하고 강력한 제국을 통솔하는 위대한 왕의 유일한 권속이 나야. 부정해도 닮은 외모는 그걸 증명하고 있어요. 심지어 저는 남성체이죠. 권속을 만들 수 없고, 당신은 여성체이지만 권속을 만들 생각이 없죠. 우리는 영원히 둘뿐이겠네요…….
―어디 보자. 분홍색 조개가 앞면, 하얀 조개가 뒷면이고…….
그사이 자기 혼자 척척 조개껍데기를 던져 자잔의 오늘 운세를 점친 상사가 환하게 웃었다.
―오늘 귀인을 만날 거라는데?
―네? 오늘 트리야 님이 절 불러 주시려나요?
―아… 음, 그래. 그러면 좋겠구나.
잠시 침묵을 지킨 상사가 빠르게 조개껍데기를 정리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잔이 고개를 들어보니 공대실의 다른 인어도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버려진 권속 주제에 뭐라는 거야?
―쉿, 다 들리겠어.
―제왕이 아직도 자기한테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봐. 트리야 님이 그렇게나 철저하게 무시하는데도 아직도 저만 특별하다 여기는 꼴이 웃기지 않아?
―조용히 하래도.
―…….
자잔은 침묵했다. 작은 손을 움켜쥐며 그들을 노려보자 속닥이던 간부들이 후다닥 자리를 떴다.
신경 쓸 가치가 없다. 저들은 나를 질투하는 것이다. 나만이 주군의 옆에서 앞길을 닦을 자격이 있으니까. 나만이 주군의 뒤에서 그를 보필할 의지를 강하게 피력할 수 있으니까. 내가 그의 유일한 권속이니까.
그건 모든 삶을 관통하는 가치관이자 본능의 명령과도 같았다. 강한 인어일수록 그를 따르는 권속의 유대감도 깊어진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트리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어가 맞다.
‘그러니 날 봐줘요.’
자잔은 차오르는 외로움에 입술을 다물었다. 길을 잃은 인정 욕구는 땅에 떨어졌다. 수십 년이 넘는 애정의 방치에 권속은 메말라 버렸다. 황량하고 삭막한 사막 위에 자신의 세상을 심어도 그 어떤 활기도 태어나지 않았다.
―버려진 권속 주제에.
그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때 밖에 나갔던 상사가 곤란한 기색으로 들어왔다.
―자잔, 트리야 제왕의 별장에 잠시 다녀올 수 있을까? 그 거대한 결계가 쳐져 있는 동굴 말이야. 도라안 님의 심부름이야.
―무슨 심부름인데요?
―그림이 그려진 액자? 도라안 님이 그걸 가져오라시네. 너라면 그 동굴 별장의 결계를 뚫고 들어갈 수 있잖아.
도라안은 가장 가까이서 트리야 왕을 모시고 있는 그의 수족이자 다섯 번째 1세대 인어였다.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변덕이 심하고 짜증을 잘 내는 남성체 인어인 그는 다른 2세대나 3세대 인어들 사이에서는 기피 대상 일 순위를 찍었을 만큼 횡포가 심했다.
그런 인어가 화를 내면 주변이 얼마나 죽어 나갈지 모른다.
―네, 다녀올게요.
내면의 공허함을 애써 감추며 자잔은 1공대 간부의 가면과 망토를 두르고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인간?
자잔이 난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