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4화
“네.”
“믿지 마.”
“알았어요.”
데아가 너무 쉽게 대답했기에 백리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왜 이렇게 빨리 수긍해?”
“믿지 말라면서요.”
“그걸 말한다고……. 아니다. 잘했어.”
밴이 멈췄다. 데아의 짐과 캐리어까지 대신 챙겨 밴에서 내린 백리서가 데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뉴욕 사람들도 믿지 마. 그 누구도 믿지 마. 나도 믿지 마.”
“알았어요.”
“극단적이라는 말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언니가 걱정하는 게 뭔지는 아니까요.”
얼굴과 신분을 가린 어린 헌터의 첫 외국 출장이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낯선 사람이 한가득 모여들겠지.
워낙 자신을 아꼈던 백리서였기에 이 출장에서 상처받고 다칠 게 뻔한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뉴욕 던전 안에서 자신의 가장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겠지.
“그렇게 말해 주는 언니라서 제일 안심돼요.”
백리서가 멈칫하더니 힘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백리서의 뒤를 졸졸 쫓아가 퍼스트석에 탑승한 데아는 우와, 우와, 소리를 내며 창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열세 시간 후.
―낯선 냄새가 나!
마력 부족 현상으로 한동안 비실거리다가 결국 파업을 선언하고 잠에 들어 있던 스킬, 바다의 경배(S)가 눈을 떴다.
―자기야, 또 싸우러 가?
“응.”
“어, 왜, 데아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17시 53분. 한국에서 떠날 때도 이 시간쯤이었는데 시차 탓인가, 뭔가 순간 이동을 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붉은 인어를 만날 수 있다 이거지.
데아의 손바닥 안쪽이 순식간에 땀으로 가득 찼다. 붉은 인어를 생각하자 인생 첫 해외에 들떴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마음속에 모여든 건 가슴 한편을 검게 살라 먹는 긴장감과 기대감이었다.
바로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잘난 면상에 흠집이라도 낼 수 있다면, 가까이 다가가 겨뤄 볼 수만 있다면, 그다음은 가능하지 않을까?
붉은 인어와 싸울 만한 힘만 있다면… 그때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보고만 있었다는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릴림? 그리고…….”
뉴욕의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한 데아가 밖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샤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백리서를 발견하고 은밀하게 다가와 속삭였다. 후드와 선글라스를 뒤집어쓴 데아를 연신 흘끗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맞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JJ 길드의 길드장 아밀리아 허밍턴이고…….”
금발을 높게 틀어 묶은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헌터명은 아리아입니다. 편하게 아리아라고 부르세요.”
신원 노출을 꺼리는 샤샤를 배려하고자 조용하게 이루어진 JJ 길드의 마중이었다.
<우선, 우리 길드원이 무례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수락해 주신 여파 길드에게 무한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아리아가 우아하게 인사했다. 영어로 말을 해서 사실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인사하는 그 모습만큼은 오랜 시간 숙련된 발레리나 같다고, 데아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아리아의 눈이 미안함을 담아 휘었다.
<먼 길 달려와 주신 소중한 헌터분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내일 아침 던전 지원이 가능할까요? 던전 포화가 며칠 남지 않아서요.>
아리아와 백리서가 서로 악수를 나눴다.
<지금은 잘 못 느끼시겠지만 뉴욕은 비상사태입니다. 던전 근방의 수많은 시민이 대피했죠. 이미 던전 주변에는 시민 대피령이 내려졌어요.>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직 포화된 건 아니니까요……. 그나마 시간이 남은 게 위안이죠. A급 던전의 포화라니, 너무 끔찍하잖아요.>
미국에서 A급 이상의 던전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고, 덩달아 공략도 순탄히 이루어졌기에 던전 포화가 되었을 때의 상황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던전 연구학자들은 인어들이 몇 튀어나오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이 닥쳐올 거라 예고했다.
도심 한가운데 해일이 닥쳐올지, 식인귀가 미쳐서 날뛰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 말을 들은 많은 시민들이 겁을 집어먹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영어를 모르는 데아가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백리서가 어깨를 숙여 속삭였다.
“가면서 말해 줄게.”
<그나저나 샤샤, 맞나요?>
‘샤샤?’
부름에 응답하며 고개를 든 데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탐색하는 눈빛이었다.
어……?
데아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피했다가 자신의 팔을 부드럽게 잡는 릴림의 손을 느끼고 다시 마주 보았다. 카메라도 기자도 없다. 눈앞의 사람들은 궁금해하는 것일 뿐이었다. 데아는 아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어, 음…….”
굳이 영어로 자기소개를 해야 하나?
“네. 제가 샤샤입니다.”
데아의 한국어에도 아리아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뭐라 뭐라 말을 하더니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다.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노려보자 백리서가 다시 고개를 숙여왔다.
“급하게 나오느라 한국인 통역사를 초청하지 못해서 미안하대.”
“오…….”
미안한 줄은 아니까 되었다.
그때 아리아가 데아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그리고 천천히 데아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작고, 어린아이구나.’
그건 아리아가 느낀 데아의 첫인상이었다.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헌터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몸을 한 아이는 태양을 피하는 도망자처럼 온몸을 꽁꽁 싸매고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었다. 그때 반짝, 데아가 고개를 들었다.
메마른 눈이다.
<이 애가 샤샤래.>
데아를 응시하던 사람들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생각보다 왜소하다. 이런 애가 ‘샤샤’였다니.
그리고 아리아는 탄식했다. 자신보다 열 살은 더 어리다. 그런 헌터의 손을 빌려야 하는 현실이 착잡했지만… 그럼에도 기꺼이 지원을 와준 헌터의 존재는 늘 눈부시니까.
아리아는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을 켰다. 급하게 번역기를 돌린 한국어였다.
지원에 응답해 줘서 반갑고 고맙다. 우리 JJ 길드는 클리어에 실패해도 당신을 잊지 않을 것.
“아, 네…….”
<갈까요, 이만.>
싱긋 웃은 아리아는 차량으로 데아와 백리서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뉴욕 던전의 난이도는 그렇게 높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헌터의 지원을 원한 건…….>
<공략 방법이 기상천외해서죠.>
<네. 우리는 보스 인어의 비늘 한 조각도 못 봤어요. 그래서 샤샤 헌터를 이 먼 곳까지 모셔 온 거죠. 내일 아침부터 공략을 시작한다면 남은 공략 기한은 94시간, 대략 4일. 잘 부탁해요.>
준비된 세단 안에 릴림과 데아가 탑승하고 조수석에 아리아도 올라타며 말이 이어졌다. 대충 앞으로 묵게 될 숙소나 지원, 그리고 던전의 기본적인 환경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론 데아는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릴림이 주의 깊게 경청을 하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창문 밖의 정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국적인 간판이며 건물이 빠르게 창을 스쳐 지나갔다. 잔잔한 영어 노래가 세단 안을 가득 채웠다.
―긴장돼?
허공에서 자기가 원할 때만 나타나 불쑥 말을 거는 경배의 행동에는 이제 익숙해졌다. 데아는 느리게 눈동자를 굴렸다.
“조금.”
작게 속삭이자 키득거리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들었어? A급 던전이래. 자기가 나를 만난 던전이랑 같아.
“그러게.”
―안 떨려? 나는 좋아. 또 자기와 함께 싸울 수 있잖아. 나는 자기가 나를 쓸 때 기분이 좋아.
데아가 어이없이 웃자 경배의 키득거림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정말이야. 자기가 날 쓸 때마다 그리운 느낌이 나서 좋아. 당연하지만.
그 후로 경배는 입을 다물었다.
뉴욕 던전 안에서 인어를 만날 수 있을지, 예언자의 말이 참일지 던전 안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는 많았지만 하나하나 다 곱씹고 있다간 머리가 터질지도 몰랐다. 데아는 좀 자두라는 백리서의 조언을 받아들여 눈을 감았다.
◈ ◈ ◈
“데아야. 갈 시간이야.”
다음 날 아침 일곱 시 삼십 분. 데아는 뉴욕 던전에 진입하는 공략 팀 전원이 자신의 얼굴과 정보를 노출하지 않겠다는 계약서를 쓴 걸 확인하고는 공략 팀에 참가했다. 자신과 백리서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이었다.
“너무 적지 않아요? 아무리 전원이 S급 헌터, 아니면 A급 헌터라고 해도…….”
“던전 특성 때문에 많은 헌터를 데려갈 수가 없어서 그래.”
“아…….”
그렇게 도착한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안. 길쭉한 통로를 지나 금빛으로 치장된, 화려하고도 거대한 로비 안으로 들어선 순간, 데아는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하얀 게이트를 마주할 수 있었다.
터미널보다는 거대한 무도회장에 더 어울리는 곳이었고, 그 중앙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게이트는 이 세계에 침입한 불청객이라기보다는 공간을 더 아름답게 장식해 주는 설치 작품에 가까워 보였다.
“네가 샤샤야?”
그때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와 데아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화들짝 놀란 데아가 점검하고 있던 단도를 떨궜지만 그 누군가는 태연하게 떨어지는 단도를 잡아 데아의 손에 들려 주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포니테일로 검은 머리를 올려 묶은 어린아이가 개구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