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3화
“네. 아리아 길드장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김영식. 47세. 샤샤의 거센 까임과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고 길드장실에서 쫓겨난 비운의 JJ 길드원. 유일한 한국인이어서 한국의 길드 여파로 출장을 왔건만, 그는 결국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JJ의 길드장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거듭 영어로 죄송하다며 정중하게 빌었고, 그제야 휴대폰 너머의 화난 음성도 가라앉았다.
―너 미쳤어? 방금 도원한테서 연락 왔어. 여파 길드원 이마를 손가락으로 내리찍었다면서. 너 제정신이니? 기본적인 예의도 없어? 한국 문화 잘 아는 거 아니었어?
“하, 하지만 그 길드원 때문에 포션이 다…….”
―지금 우리가 포션이 아쉬운 위치야? 샤샤가 아쉽지! 포션은 수백 병을 더 가져가도 돼! 던전 포화까지 5일도 안 남았어!
“죄송,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샤샤를 데려와. 무릎을 꿇어서라도 데려와! 그 어떤 조건을 걸어도 상관없으니까 데려와! 그전에는 JJ에 발도 디디지 못하게 할 거니까!
“네? 아리아 길드장님? 아리아, 아리아!”
아밀리아 허밍턴. 헌터명 ‘아리아’. 쇠봉을 쓰는 S급 헌터.
그 긴 쇠봉에 얼마나 많은 인어의 머리가 아작 났던가. 그 끔찍하고 경이로운 광경을 수없이 본 김영식은 그가 화나면 얼마나 불같아지는지 알고 있었다.
맙소사. 아마 샤샤를 영입하기 전까지 JJ에 발도 디디지 말라는 말은 진심일 것이다.
‘설마 나, 해고당하나?’
안 된다. 어떻게 JJ 길드에 들어갔는데……. 어떻게든 샤샤를 데려가야 해!
초조한 기색의 김영식이 손톱을 까득 깨물며 여파 로비를 서성이던 그때.
“JJ 길드 김영식 씨?”
“……!”
단정한 차림새의 여파 길드원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가 손가락을 위로 치켜들었다.
“길드장실에서의 호출입니다. 모셔 오라는군요. 저와 함께 올라가시죠.”
◈ ◈ ◈
“샤샤가 마음을 바꿨더군요.”
감흥 없이 중얼거리는 권도언의 앞에서 김영식은 입을 떡 벌렸다. 최고의 가정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겠지만, 곧 여기로 샤샤가 올 테니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치세요.”
“네, 네! 저는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계약서에 서명하시고요.”
“네?”
샤샤의 정보를 절대 노출하지 않겠다는 내용과 JJ 길드 생산의 다량의 포션, 협력금, 그리고 여파가 원할 때 언제 어디서나 JJ 길드는 헌터 지원을 내줘야 한다는 짤막한 계약서였다. 그리고 뭐가 더 많이 달려 있지만… 우선 중요한 내용은 그랬다.
“아리아 길드장하고 통화 마친 내용이에요.”
김영식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서명을 마쳤다.
“자, 그럼…….”
황설수설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는 김영식은 당장 엎드려서 샤샤의 발이라도 핥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권도언은 바닥과 물아일체가 되려는 김영식의 허리를 지켜보며 서랍 안에서 자일리톨 껌을 하나 꺼내 먹었다.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가 다분했다.
“허리 각도 좋네요. 유지하세요.”
“네… 네?”
“샤샤가 올 때까지.”
“……?”
길드장실의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먼저 반응한 건 권도언이었다.
“어, 샤샤.”
김영식은 그 소리를 향해 허리를 숙인 채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구세주를 향해. 포션이 없음에도 어려운 요구에 응해 줘서 길드 추방을 면하게 해주신 위대한 헌터를 향해. 외부인은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모른다는 신비주의 헌터를 향해.
그리고 김영식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커다란 캐리어를 질질 끌고 나타난 왜소한 여자애는 이미 구면이었다. 자신이 이마를 꾹꾹 눌러 댔던 그 애. 반말을 찍찍 뱉으며 가방을 던지듯 맡겼던 그 애. 강하게 몸으로 밀치고 악을 써서 강제로 길드장실로 끌고 갔던 그 어린애.
‘말도 안 돼…….’
김영식은 서둘러 데아의 등 뒤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영주 언니가 캐리어를 빌려줬는데 너무 무겁네요. 비행기 처음 타봐서 그런데, 거기서는 회전 초밥처럼 빙빙 도는 곳에 캐리어 올려 둘 수 있다면서요?”
“그건 착륙하고 짐 회수할 때요.”
드르륵, 캐리어와 검고 날렵한 단화가 김영식의 구두 앞에서 멈췄다. 김영식의 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내가, 내가 저 헌터를 어떻게 대우했더라?’
자신이 말을 할 때마다 싸늘하게 식어 갔던 검은 눈동자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데 저 여권이 없어요.”
“긴급 여권 발급받으세요. 괜찮아요.”
권도언이 김영식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귀한 헌터를 저런 모지리에게 보내게 되어 퍽 유감이라는 기색이었다.
김영식은 덜덜 떨리는 손을 공손하게 모아 잡았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데아라는 이름을 가진 헌터…였던가? 아리아, 아리아에게 어떻게 보고해야 하지? 샤샤 헌터가 지원 와준다는 걸로 되려나? 정말?
“찔리는 게 있으면 다 알아서 해주겠지.”
◈ ◈ ◈
“아, 목이 마른데.”
“그, 여기 생수가…….”
“아, 생수 말고 좀 달달한…….”
“음료수를 사올까요? 기, 기다려 주세요!”
김영식이 데아의 앞에서 연신 굽실거리다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 들린 자몽에이드를 보며 데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와, 자몽이라니. 레모네이드로 다시 바꿔오세요.”
“네? 하, 하지만 별 차이도 없는데 그냥…….”
“아, 갑자기 귀찮네. 가지 말까.”
“기, 기다려 주세요!”
데아는 건물 밖에 서서 심드렁하게 목을 한 번 쭉 돌렸다.
아무래도 정말 몸이 찌뿌둥했다.
…아니, 찌뿌둥…한가?
“신분증, 사진, 법정대리인 동의서……. 또 뭐 필요하죠?”
“음…….”
그러자 옆에 서있던 권도언이 데아의 손에 들린 파우치 안을 하나하나 짚어 주었다.
“이거랑 저거랑… 다른 건 다 여기 챙겼어요. 어서 가요. 아, 그리고.”
떠나기 직전, 건물 앞까지 배웅해 주며 권도언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길드 헌터를 홀로 보낼 수야 없죠. 백리서랑 같이 가요.”
“네? 리서 언니랑요?”
“백리서도 동의했어요.”
5일간의 출장이다.
하긴, 이미 샤샤의 등급은 S급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긴 했지만 확정된 건 아니고, 공격 스킬도 하나뿐이니 홀로 보내기 불안했겠지.
데아는 수긍했다.
“데아야!”
권도언의 뒤에서 튼튼한 검정 캐리어를 끄는 백리서가 쾌활하게 웃고 있었다.
‘리서 언니라면 붉은 인어에 대해서도 아니까 안심이지.’
“갑자기 연락 와서 놀랐잖아. 급하게 준비하고 나오느라 짐이 별로 없는데, 뭐 필요한 건 가서 사자.”
“네.”
언제나처럼 고아한 미소를 지은 백리서가 먼저 준비된 밴에 타고, 데아도 타려던 순간이었다.
“레, 레모네이드! 레모네이드요!”
김영식이 허겁지겁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데아는 그의 손에 들린 레모네이드가 노란색이라는 것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블루 레모네이드요. 블루 레모네이드.”
“허억, 허억, 하아, 그…….”
“센스가 없으시네. 블루 레모네이드로 바꿔 오세요.”
“…하, 하지만.”
김영식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때 권도언이 끼어들었다.
“뭘 모르시네. 저희 귀한 헌터님은 블루 레모네이드 외에는 용서를 못 하시거든요.”
“레, 레모네이드나 블루 레모네이드나 별 차이는 없을 텐데요!”
“왜 헌터님이 블루 레모네이드밖에 안 드시는지 아세요? 여기엔 아주 유구한 역사가 또 있죠. 바로 제가 편의점에서 처음으로 사드린 음료가 블루 레모네이드였거든요.”
“…네?”
데아도 눈살을 찌푸리며 올려다보았지만 권도언은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틀린 말을 했냐는 듯 눈을 예쁘게 깜빡였다.
“하여튼 빨리 다녀오세요. 지금 출발해야 하는데 저희 헌터님이 목이 마르다고 하시잖아요.”
“흐, 흐어, 으으… 네.”
김영식은 다시 터덜터덜 돌아갔다.
“빨리요!”
재촉하자 걸어가던 김영식이 뜀박질을 시작했다. 그의 모습이 사라져갈 때쯤 권도언이 뒤를 돌았다. 그리고 데아가 그 안에 탄 걸 확인한 후, 밴의 문을 닫아버렸다.
“백리서 인벤토리 안에 블루레모네이드 하나 들어 있을 거예요. 그거 드시면서 가세요. 저 사람이 사오는 건 제가 먹을게요.”
“인성 봐!”
“다 들려요.”
“귀도 밝아서는.”
“꼭 살아 돌아와요.”
“…….”
데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권도언이 나긋하고도 가볍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자신의 얼굴 위로 드리워지자…….
“으.”
데아는 손을 휘휘 저었다. 그만하고 저리 가라는 표시였다. 그에 권도언이 유쾌하게 미소 지었다.
“사실 데아 씨는 저랑 같이 갈 곳이 있어요. 그런데 뉴욕 건이 더 바빠 보이니까 이 건은 뒤로 미루도록 할게요.”
“어딘데요?”
“재밌는 곳이요. 가면 알게 될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백리서의 낯이 미약하게 굳었다. 실험실이다.
이상한 멜로 눈깔을 한 권도언의 머릿속은 분명 실험에 대한 망상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눈앞의 이데아가 과연 인어인지 아닌지, 맞는다면 어떻게 실험할 것인지 상상하고 기대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 백리서는 작게 혀를 찼다.
“하지만 데아는 6년 전 생존자야. 인어로 인해 가족을 잃고 피해를 입은 사람이 인어일 리가 없어.”
“동시에 강원도의 해안 절벽 귀퉁이를 잡아먹은 해일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지. 이상하지 않아? 열다섯 살짜리 애가 어떻게 해일에서 살아남았겠어? 거짓말을 했거나 본인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은?”
“…….”
백리서는 지나간 권도언과의 대화를 상기했다.
이데아가 걱정되어 날 같이 보내?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감시 역할이 더 크겠지.
하여간 속이 검었다.
“재밌는 곳이 어디일까요?”
부드럽게 출발한 밴이 공항에 거의 다 왔을 때, 데아가 백리서에게 받은 블루 레모네이드를 쪼옵 빨며 물었다.
그리고 백리서는.
“권도언을 믿어?”
대답해 주지 않고 오히려 데아에게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