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1화
유우라는 하얀 잔상 속에서 눈을 떴다.
유우라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바다 밖을 본 적이 없었다. 제국 안에서 사는 백성이 바다 위로 고개를 내민다는 건 처형감이었기 때문에, 그저 유우라는 수없이 상상했을 뿐이었다.
인간들의 세상은 특별해. 밤에는 장막처럼 아른거리는 별이 머리를 적시고, 심해 속의 진주처럼 반짝이는 달이 물방울처럼 빛나지. 낮에는 끝없이 펼쳐진 대양 끝에 걸린 하얀 해류가 몽글몽글하게 헤엄쳐.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오색찬란한 태양을 보고 있노라면, 대지의 열기가 온 사방에서 손짓하는 것 같아…….
그리고 지금, 그 상상이 현실이 되어 들이닥쳤다. 금기서로 지정된 책 안에서만 읽을 수 있던 내용이었다.
―…….
유우라는 어두운 밤, 한적한 시골 한가운데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호도 아니고 미역도 아닌 것이 휘이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유우라는 그것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나무와 풀이다. 이것도 책에서 봤다.
머리 위에는 조개 가루를 뿌린 듯이 반짝이는 별들과 얇은 달이 휘영청 외롭게 떠있었다.
―와아…….
진짜 자신이 인간들의 세상에 나온 것이다.
휘이이이…….
―추워.
그토록 궁금해했던 인간 세상에 드디어 나왔지만 사색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바람이 너무 찼던 탓이다. 저 멀리 깜빡이는 불빛이 보이긴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유우라는 걸음마를 하듯 젖은 옷의 물기를 죽 짜며 인간의 다리를 조심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맨발 밑에 닿는 흙의 감촉이 새로웠다. 아주 작은 꽃게가 발밑에 우르르 지나가는 것 같다.
―…정신 차리자. 여기는 인간들의 세상이고, 사방이 적이야. 나는 움 님… 아니, 연옥 님을 찾아야만 해. 믿을 건 이 편지뿐이고…….
“갑자기 피파의 마력이 느껴져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
퍼뜩 놀란 유우라가 가방을 껴안고 뒤를 돈 순간이었다.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멱살을 잡아채 그를 위로 들어 올렸다.
―커헉!
발이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백발을 가진 인간 노인이 유우라를 한 손으로 제압한 채 노려보고 있었다. 비틀린 미소가 주름진 입가에 걸쳐졌다.
‘노인인데 강해! 인간은 다 이렇게 강한 건가?’
유우라의 손이 벌벌 떨렸다. 어떡하지? 어쩌지?
“3세대 인어군. 누가 보냈지? 피파인가?”
유우라의 눈이 믿기 힘들 만큼 크게 떠졌다. 노인의 몸에서 나올 법한 말과 힘이 아님에도 놀랐지만, 그보다 자신이 3세대 인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는 것에 더 충격을 받았다.
‘인간인가? 인어인가?’
패닉에 빠진 뇌가 급박하게 경고음을 울려 댔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찰나 눈앞의 노인이 ‘피파’라는 말을 했음을 기억해 내고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답해야 해.
―네, 네! 큭, 저는 피파글렌 님의 전, 전서를……!
“…….”
노인은 가만히 유우라를 응시하다가 그의 손에 들린 작은 편지를 낚아채 펼쳤다. 유우라는 읽을 수 없는 이상한 문자가 가득했다.
아, 저게 바로 1세대 인어들만 쓰고 읽을 수 있다던…….
그리고 유우라는 불현듯 굳었다. 그렇다면.
―움… 님?
확신을 잃고 작게 묻자 노인, 세 번째 1세대 인어 ‘움’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이내 주머니 안에서 라이터를 꺼내 편지를 태웠다.
“피파가 수를 많이 썼네.”
―네?
“태초의 연구를 하다가 발각되어 잡혀갈 위기였다고?”
―…네.
“하여간 비늘에 흰색이 섞인 인어들은 하나같이 호기심이 많아.”
노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라이터를 다시 집어넣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네가 인간들의 말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연옥이라는 이름엔 익숙해지도록 해. 내가 위장하는 인간의 이름이지.”
―네, 네!
“그리고 너는… 앞으로 내 손녀 해라. 그게 편할 거라고 하는군. 뭐, 동의해.”
‘나를 내치지 않는 건가?’
움은 반드시 널 숨겨 줄 거라는 피파의 음성이 뇌리를 스쳤다.
‘피파 님의 말이 맞았어!’
유우라는 먼저 등을 돌려 돌아가는 노인의 뒤를 허겁지겁 쫓았다.
깜빡이는 시골의 가로등 아래, 꽃무늬 몸빼바지를 입은 왕족과의 조우였다.
그리고 지금은…….
―와!
유우라는 잘 닦인 리무진 유리창에 두 손바닥을 갖다 대며 홀린 듯 소리쳤다.
―움 님, 저게 집이에요? 길고 네모나고 반짝이는 게 꼭 큰 얼음 같아요. 아, 저건 뭐예요? 가끔 난파선 안에 들어가 보면 저렇게 동그랗고 반짝이는 게 있더라고요. 와, 역시 인간들의 세상은 다른가 봐요. 너무 신기해요. 인간들은 다 이렇게 사나요? 그런데 옷차림은 생각보다 수수하네요. 장신구도 주렁주렁 안 달고.
“유라야, 수도 와서 기분이 좋니? 이 할미가 여기서 팔찌 하나 사줄까?”
어렸을 때의 사고로 말을 하지 못하는 연옥의 손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연옥이 킬킬 웃었다. 귀여운 손녀를 보는 개구진 미소에 운전기사가 흐뭇하게 웃었다.
“네 할미 이제 각성자다. 돈 걱정? 시골 살 때는 생각도 하지 말어. 우리 유라가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다 해줄 수 있지.”
―정말요, 움 님……?
김유라. 연옥의 손녀. 15세. 며칠 사이에 한국에 완벽 적응한 인어 한 마리가 다과를 집어 먹으며 환호했다. 예언자가 들러야 할 첫 번째 목적지, 여파 길드에 거의 다 온 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여파의 공격대장 릴림입니다.”
“네, 네. 연옥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제 손녀딸이에요.”
“…….”
유우라는 백리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위압적인 모습에 그새 위축되었다. 연옥이 유우라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쌌다.
“우리 유라는 사고로 말을 하지 못해요.”
“네.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죠.”
세 인영이 발걸음을 옮겼다. 백리서가 길드장의 대리 자격으로 연옥을 마중나간 사이, 데아와 하영주, 그리고 가윗은 길드 건물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그마한 머리통 세 개가 나란히 길드 건물 내부로 향했다.
“뭐야, 그냥 할머니잖아?”
“뒤에서 팔랑거리는 여자애는 손녀인가 봐. 뭐라 하는지 들려?”
“안 들려.”
데아는 벌떡 일어서서 뒤로 향했다.
“리서 언니는 예언자를 길드장실로 안내하겠지?”
“응? 아마 길드장실… 잠깐, 너 왜 모자 써. 설마 따라가게?”
‘예언자는 붉은 인어에 대해 잘 알까?’
그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여섯 개의 던전을 꿰뚫어본 유일한 사람이자 놀라운 예언 능력의 소유자다. 확신할 수는 없어도,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다면 따라가야 했다.
“뭐… 너라면 릴림 대장님이 들여보내 줄 수 있겠다.”
“어? 누나, 가요? 그럼 저랑 같이 가요!”
“안 돼. 같이 가면 거절할 수도 있어. 나 혼자 갈 거야. 넌 나중에 와.”
“힝.”
너랑 같이 가면 붉은 인어에 대해 물어볼 수가 없단 말이야!
풀 죽은 가윗의 뒤로 하영주가 심드렁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도착한 길드장실 문 앞에서 권도언이 아는 체를 해왔다. 데아는 불쑥 물었다.
“예언자님은 어디 계세요?”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듯이 시야를 가늘게 좁힌 권도언이 데아를 훑어보았다.
“…안 돼요. 호기심이 드는 건 이해하지만, 지금은 중요한 시간이거든요. 돌아가세요.”
그런 권도언의 앞을 가로막으며 데아가 처연하게 올려다보았다.
“상대에게 무리한 부탁을 할 때는 우선 불쌍한 척을 해야 해!”
하영주의 가르침을 머릿속에 떠올린 데아는 착실히 실천에 옮겼다.
“부탁이에요, 길드장님.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래요. 멀리서 훑어보기만 할게요. 네?”
“그러면 더 안 돼요.”
그러나 권도언은 얄짤없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같았다.
“지금 기회 지나가면 예언자님 영영 못 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잠깐이어도 되니까, 지나가는 길도 괜찮으니까 허락만 해주신다면…….”
“안 돼요.”
권도언은 굳건했다. 데아는 하영주가 가르쳐 준 두 번째 협상의 기술을 꺼내 들었다.
“아, 샤샤 러브 콜이 얼마나 왔더라.”
협박이었다.
그에 권도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나중에 길드 시설 구경을 위해 이곳저곳 안내할 계획인데, 그때 안내원으로 붙여 주면 될까요, 샤샤?”
데아가 승리의 주먹을 꽉 쥐었다.
“네. 그럼 길드장실에 들어가서 예언자님 옆에서 대기하고 있을까요?”
“안 돼요. 밖에서 기다렸다가 부르면 들어오세요.”
“…….”
데아가 입을 꾹 다물며 옆으로 물러섰다. 이 정도로 봐주겠다는 낌새가 만면에 가득했다.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서있길 몇 분, 들어오라는 신호가 왔고 데아는 차분한 발걸음으로 길드장실에 들어갔다.
예언자라 불리는 노인 연옥.
오랜 세월을 담은 골동품 같은 눈동자에 데아가 비쳤다. 데아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를 처음 보고 느낀 감정은 무감각하다는 거였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 주름진 얼굴 위로 스쳤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이분이 길드를 안내해 줄 겁니다.”
“…안녕하세요. 헌터 이데아입니다.”
집요한 수색자의 시선이 그의 안에 있었다. 데아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품에 안고 몸을 둥글게 말아 어둠 속에 기척을 숨기는 고대의 괴물을 떠올렸다.
‘그 괴물의 이름이 뭐였더라? 아니, 내가 그 괴물을 어디에서 봤었지?’
정확히 무엇인지 기억하기도 전에 예언자가 고개를 기울여 손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뭐라 속삭이더니 빙긋 웃었다. 그는 그저 인자하고 평범한 할머니였다. 모든 생각이 산산이 흩어졌다.
“어이고, 안녕하세요. 연옥이라고 합니다. 여기, 자, 여기는 제 손주 유라라고 합니다. 김유라.”
예언자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데아에게 걸어왔다. 가벼운 표정을 하고서 그렇지 않은 눈으로, 상대를 탐색하는 상급 인어의 눈으로.
“그럼 안내 부탁합니다, 헌터님.”
연옥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