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0화
“무슨 보고요?”
백리서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하영주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다음에 온다고 할 걸 그랬나.
“그… 그런데 권도언 길드장님은 안 계세요?”
“권도언 길드장은 차현 길드장과 여기은 길드장을 배웅하러 나갔습니다. 용건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영영 헌터.”
“네…….”
하영주는 눈을 바싹 깔았다. 딱딱하고 음산한 분위기와 무거운 말투. 당장이라도 속을 내보이면 그대로 칼로 찔러 도려낼 것 같은 눈빛에 편하게 서있기 힘들었다. 다른 S급 헌터는 안 이러던데, 왜 백리서의 앞에서만 궁지에 몰린 소동물처럼 움츠리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데아 헌터에 대해서인데요…….”
각성하기 전에 직업 용병으로 활동했다더니, 진짜인가. 그럼 헌터가 되기 전에도 사람 여럿은 살해했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위압감이 이해가 갔다.
“사실 고민도 많이 했는데…….”
하영주는 첫 번째 던전의 첫 공략 때, 죽기 싫다며 동료 두 명을 대신 사지로 밀어 넣은 헌터를 죽인 백리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백리서는 헐떡이며 돌아온 헌터의 얼굴을 그대로 차올렸다. 순식간에 피가 터졌고, 그는 즉사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헌터인데, 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충격을 받았지만 공략은 실전이었다. 당장 인어가 몰려들고 있었다. ‘이 일은 함구합니다.’라던 권도언의 담담한 음성 너머로, 당시 공략에 참가한 공략 1팀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네.”
하영주는 더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데아에 대해서 이 사람에게 말해도 되는 건가? 괜히 보복당하는 건 아니겠지?’
이 잔혹한 공격대장은 이상하게 이데아에 한에서만 유해진다. 여파 길드 안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인물은 백리서였다. S급 헌터 ‘릴림’. 하영주는 그가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그의 이성을 믿었다. 백리서에게는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단단한 힘이 있었으므로.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이상하다……. 어떤 게요?”
“저번 A급 던전 기억나세요? 물론 데아가 살아 돌아온 건 너무 다행이고,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그와 별개로 찜찜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영주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놀이공원에서 던전이 터지고, 이데아 헌터가 그쪽으로 다가가는 이상행동을 보였는데… 뭐, 그 정도는 갑자기 충격을 먹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영주는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데아의 뒤에서 마치 태양처럼 빛나고 있던 던전과 기꺼이 그곳으로 다가가던 이데아, 그리고…….
“인어가 데아를 공격하지 않았어요.”
“…….”
바닥에서 펄떡이는 작은 인어라고 해도 이빨의 힘은 엄청났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손톱과 이빨을 드러내고 상처를 내서 얼마나 까다롭게 돌고 돌아 이데아에게 다가갔던가.
하지만 당시의 인어는 이데아의 운동화 밑에서 쉼 없이 펄떡이고 있었지만 그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데아를 아예 공격 대상으로 인지하지 않는 듯했다. 인어는 그저 옅은 물웅덩이 위를 맴돌며, 심지어는 이데아가 나아가는 길을 비켜 주며…….
“잘못 본 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백리서가 답지 않게 당황하며 되물었다.
“…정말요?”
“네, 정말이에요! 그냥 넘어가기에는 뭔가 찜찜해서…….”
하영주는 고개를 숙였다. 손안에 땀이 고였다. 손등의 핏줄이 서고 호흡이 미묘하게 가빠졌다. 데아의 생존을 확인한 그 순간, 하영주는 다행이라 안도하면서도 의문을 품었었다.
‘어떻게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어?’
무시하고 넘어가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물 밖으로 떠오르는 거대한 인어의 시체 위에 우뚝 선 데아의 인영을 보자마자 내면의 의문은 하영주의 안에서 순식간에 덩치를 불렸으므로.
“…그렇게 친하면서, 꽤나 냉정하게 보고하러 오네요.”
백리서가 툭 던진 말에 하영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데아 헌터가 의심돼요?”
“네? 아니, 그…….”
“둔갑한 인어거나, 인어랑 손잡은 첩자 같아요?”
“…네?”
하영주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며 항변했다.
백리서는 웃었다.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결국 보고를 올린 하영주의 판단이 마음에 든 듯했다
“좋은 보고네요.”
대답은 하영주의 뒤에서 들려왔다. 번쩍 놀라 고개를 틀자 권도언이 다가오고 있었다.
공격대장 혼자만 있는 것보다는 길드장님도 같이 있는 게 낫다!
하영주는 눈에 띄게 반색했다.
“하지만 영영 헌터가 모르고 있는 게 있어요. 이데아 씨에겐 바다나 물에 관련된 스킬이 아주, 아주 많거든요. 또 숨기고 있는 스킬도 있는 것 같고……. 인어가 초반 몇 초간 공격하지 않는다, 이런 스킬일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건…….”
하영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렇지?’
하영주는 내심 안도했다.
“네.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그래도 날카로운 추측이었어요. 하영주 헌터가 말을 안 했더라면 평생 모르고 지나갔을 정보겠죠. 고마워요.”
“네? 아니, 아닙니다.”
하영주는 그래도 백리서와 권도언이 자신의 말을 들어줬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어디 말하고 다니지는 마세요.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
“네.”
권도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그럼 안녕히 계세요!”
길드장실 밖으로 나가는 하영주를 배웅하는 권도언을 바라보던 백리서가 탁, 소리 나게 협탁 위로 무언가를 집어 던지고 소파 위에 앉았다. 권도언이 빙글 몸을 틀었다.
“즐거워?”
“응, 아주.”
권도언이 눈썹을 내리며 가늘게 웃었다. 그의 회색 눈이 짙어졌다. 백리서는 그 표정을 알고 있었다. 새로운 실험 거리를 찾았다는 그 표정. 호기심에 들뜬 얼굴.
“인어는 오염된 물에 닿으면 고통스러워하는 거 알아? 특히 오염된 바닷물.”
말을 들은 백리서가 비웃었다.
“어디서 알아낸 정보야? 또 헛소리 아니야?”
“아냐. 이번에는 정확해. 어제 나온 결과지. 생각해 보면 던전에 나오는 바다 전부 오염되지는 않았잖아? 그래서 어제 인어 열 마리를 상대로 오염도를 다르게 해서 살짝만 담갔는데… 반응이 바로 오더라고. 오염도가 심한 물과 접촉한 인어일수록 꼬리의 비늘이 무사하지 못했어. 해당 인어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손으로 박박 긁었거든. 그래서…….”
권도언이 말끝을 흐리자 백리서가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떠보려고?”
백리서는 묻고 있었다. 이데아 위에 오염된 물을 끼얹을 거냐고, 너는 이데아를 의심하고 있냐고.
“응.”
권도언이 빙글거렸다.
“해서 나쁠 건 없잖아?”
“데아의 신뢰도를 제외하면 그렇지.”
“이데아 씨는 큰 아량으로 나를 이해해 줄 거야. 그만큼 인어를 증오하니까.”
하여튼 능구렁이 같은 새끼.
“상관은 없는데, 어디서?”
“내 실험실?”
“그러면 네 실험실을 다 노출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라면 손해가 클 텐데. 네 실험실의 존재는 극비잖아.”
“뭐, 이데아 씨가 인간이 확실하다면 믿을 수 있지.”
“아하. 그럼 만약에 인어라면?”
“내 실험실에 드디어 완벽한 인간형 인어 실험체를 모셔 오는 거고.”
권도언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장신의 남자의 무게에 소파의 쿠션이 푹 꺼졌다. 의중을 모를 건조한 시선이 백리서의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무 말도 안 하네? 네가 그렇게나 아끼는 헌터를 본 적이 없는데, 실험실로 데려가서 내가 떠본다는 거에 기분 안 나빠? 심경이 어때?”
노골적인 질문에 백리서는 실소했다.
“인간이냐 인어냐 그걸 의심해서 하는 짓인데 왜 기분 나빠 하겠어. 내 일도 아니고. 뭐, 인간이라면 권도언이라는 개똥을 밟았다 치자고, 내가 데아를 위로해 주겠지만…….”
“개똥…….”
“인어라면 지금이라도 알아냈다는 것에 감사하며 당장 살해해야 하는걸.”
노란 눈이 살풋 가늘어졌다. 손가락이 소파의 팔걸이를 타닥타닥 두드렸다. 권도언이 손목시계를 쓱 확인했다.
“그런데 내가 알아봐 달라고 했던 건?”
“저기.”
백리서가 협탁 위에 던져두었던 서류를 향해 턱을 까닥였다. 권도언이 서류를 집어 들어 넘겼다. 그의 눈이 커졌다.
“‘예언자’의 뒷조사야. 확실히 이상하더라고. 그동안 소식도 없이 산에서 풀이나 뜯고 살아서 정보가 없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없나 싶고.”
“뭐, 그래 보이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예언 능력은 진짜라는 거야.”
예언 능력 각성자.
수일 전, 산속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오던 노인 한 명이 갑작스럽게 세상으로 뛰쳐나와 소리를 쳤다.
물론 시골이라 그 외침은 묻혔지만, 전국적으로 여섯 개의 게이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되고, 그 노인의 외침을 누군가가 동영상으로 찍어 올림으로써 사람들은 그를 더 이상 무시하고 넘어가지 못했다. 노인의 예언은 바로 여섯 개의 게이트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뉴스에 나오던 하얀 동그라미가 열릴 거야! 그 인어가 나오는 문 있잖아. 그것도 여섯 개나!
―할, 할머니. 진정하시고…….
―진짜야! 내가 봤어! 여기 네모난 칸 보여? 나만 보이는 거여?! 갑자기 이게 빛나더니 세상이 깜깜해지고 동그라미 여섯 개가 한국 전체에 생기는 걸 내가 봤다고!
동영상의 내용이었다. 아마 빛나는 네모난 칸은 상태 창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동영상이 찍힌 날짜는 던전이 터지기 4일 전이었다.
사람들은 놀라운 예언 능력 각성자에 관심을 기울였다. 인터넷이 쉽게 끓어올랐다.
그리고 이 ‘예언자’는 곧 서울 대형 길드의 주도로 수도에 모셔 올 계획이었다.
“어린 손녀가 한 명 있고… 인상은 평범. 87세. 수도가 처음이라 약간 주눅이 들어있을 수 있으며, 이름은…….”
권도언은 서류를 감흥 없이 훑어보고는 다시 협탁에 던져두었다.
“연옥. 뭐, 다 평범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