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7화
오랜 시간 쪼그리고 있던 탓에 꼬리가 굳은 건지 엉거주춤 협탁 아래에서 기어 나온 아이는 어색한 몸짓으로 피파와 리리타에게 인사를 했다.
―제, 제국의 백성이 고귀한 왕족 피파글렌 님과 권속 리, 리타타 님을 뵙습니다.
―리타타 아니고, 리리타.
―헉, 죄송해요. 리, 리라타 님.
―후… 아니다. 그래.
어떻게 할 거냐는 날카로운 시선이 피파를 향했다. 피파는 손으로 턱을 괴며 딴청을 피웠다.
―안 그래도 간부들한테 의심받고 있단 말이에요.
리리타의 말이 더해질수록 아이의 눈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뻔했다. 태초의 금서에 손을 댄 아이는 간부들에게 발각되어 쫓겼고, 피파가 아이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동굴 의원의 문을 열어주었고…….
태초에게 관심을 가진 아이도, 피파도 잘못은 없었다. 그러나.
―여기 오래 데리고 있을 수는 없어요. 곧 검문이 들어올지도 모른다고요.
“뭐, 그렇지.”
아이가 오들오들 떨었다. 피파가 톡톡, 손가락으로 협탁 위를 두드렸다.
“아가야, 너 이름이 뭐니?”
―저, 저는 유우라라고 합니다!
“유우라……. 네 이름은 이제부터 김유라란다.”
―네, 네?
“3세대라고 했지? 그러면 인간의 다리를 만들 수 있겠네?”
―네, 네.
피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옅은 지느러미가 나풀거렸다.
“살고 싶으면 두 다리로 걸어서 ‘창’ 밖으로 나가렴.”
―하, 하지만 ‘창’ 밖에는 인간들이…….
유우라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힘없는 3세대 인어더러 홀로 새로운 세계에 나가라는 건 죽으란 말과 다름없었다.
―무, 물론 인간은 인어보다 하등한 종족이고, 약하다고 들었지만요. 그래도…….
“오,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구나.”
피파가 인자한 표정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인간이 인어보다 하등하다는 건 트리야 제왕과 그 가솔들이 퍼뜨린 헛소문이란다. 더군다나 최근엔 인간들이 각성을 해서 우리만큼 강해졌는걸?”
―그, 그러면 더 나가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인간들은 낯선 종족을 경계한다고 들었어요!
“그러면? 이 제국에 계속 있다가 발각되면 넌 처형대에 오르겠지. 그럴 바에는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는 인간계에 나가는 게 나아. 특히나 우리 같은 상급 인어는 인간의 다리를 만들어 낼 수 있으니…….”
피파가 잠시 느리게 호흡했다.
“…감쪽같이 인간 행세를 할 수 있겠지.”
서랍을 뒤적거린 피파가 꺼내 든 건 작은 가방이었다. 그 안에서 인간들이 주로 입는 바지와 옷가지가 튀어나왔다. 마력의 힘인지 젖지 않은 상태였다.
“움을 찾으렴.”
리리타가 멈칫했다. 아이도 멍하니 피파를 보고 있었다. 움은 오늘 아침에 와서 던전 등급 측정기를 건네준, 호쾌한 인상을 가진 적발의 인어였다.
움. 그는 1세대 인어 중 셋째였고, 첫째 편에 붙지 않은…….
“제국을 나간 ‘둘째’의 인어지.”
역모 죄인이었다.
아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피파는 그의 미간을 꾹꾹 눌러 주름을 펴준 뒤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인간들의 돈과 생필품, 간식거리를 넣어 주고 꽁꽁 싸맸다. 그리고 유유하게 헤엄쳐서 깃펜을 들고 풀 먹인 제지에 글을 끄적이더니 잘 밀봉해 아이의 손에 꼬옥 쥐여 주었다.
“소개장을 써줄게. 이거면 움도 너를 받아 줄 거야.”
―…….
“움이 무섭니?”
―그, 그게… 제, 제국을 나가신 분은 큰 죄인이라고…….
“지금의 너도 죄인인걸.”
―…….
“그러나 움은 강하지.”
피파는 픽 웃었다.
“현재 움은 방심하기 쉬운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 중이란다. 네가 할 일은, 말을 못하는 인간 아이로 위장해서 ‘연옥’이라는 사람을 찾는 일이야. 연옥은 움의 위장 가명이란다.”
―못, 못 찾으면…….
“틀림없이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움은 널 반드시 숨겨 주겠지.”
―그, 그런데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피파는 잠시 말을 아꼈다. 그의 얼굴에 비치는 건 옅은 그리움이었다. 리리타는 그 표정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꼬리 색이며 머리색이 애매한 검정과 닮아있었다.
애매한 검정이란 결국 애매한 흰색이기도 한 것을.
“너는 왜 태초에 대해 연구를 했니?”
피파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바지로 갈아입던 유우라의 눈이 반짝 감겼다.
―그냥… 궁금해서요. 왜 태초에 대한 정보는 없는 건지, 왜 아는 것을 막는 건지…….
“그리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간부들은 ‘태초를 위하여’라고 말끝마다 인사하지만, 정작 그들도 제왕님도 태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거든요.
“똑똑하네.”
피파가 팔짱을 꼈다. 그리고 이내 허공에 손가락을 뻗어 세로로 죽 그었다.
그때 강한 눈부심이 시야를 침범했다.
리리타는 ‘창’이 생성되는 장면을 처음 보았다. 1세대 인어 중 일부만이 창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그 ‘일부’ 중 하나가 자신의 주군인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하니 놀라움이 앞섰다. 유우라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하얀 빛무리가 동굴 안을 넘실거렸다. 세계와 세계를 이어주는 창. 인간들은 그것들을 ‘게이트’라고 부르곤 한다.
먼 과거, 태초가 실존했을 시절에는 ‘창’이 세계 간의 소통의 창구로 이용되곤 했다.
유우라는 금서에서 본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태초만이 완벽한 ‘창’을 생성해 낼 수 있다. 1세대 인어가 만들어 내는 ‘창’은 겉보기에는 완벽해 보일지라도 불완전하고 위험한 반쪽짜리 ‘창’일 뿐이다…….
반쪽짜리가 저렇게 아름답다면 진짜는 얼마나 황홀할까?
유우라는 가방을 두 손으로 꼭 잡고는 홀린 듯이 걸음을 내디뎠다.
유우라의 몸이 통과하자 그 빛이 전부 허상이었다는 듯이 창은 툭 꺼져버렸다. 어느덧 의원 안에는 피파와 리리타밖에 남지 않았다.
―…무모하셨어요.
침묵 후, 리리타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하지만 나는 인간을 아끼는 만큼 태초도 보고 싶었거든.”
피파가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래서 자꾸 둘째를 돕게 돼.”
피파가 가냘프게 속삭였다.
◈ ◈ ◈
A급 던전을 공략하고 많은 일이 있었다.
바다의 경배라는 연동 스킬은 그사이에 좀 잠잠해졌으며, 데아는 그사이에 주머니에 넣어 놨던 보스 인어의 마석을 잃어버렸다.
그걸 위로한답시고 백리서가 음료와 케이크를 사왔기에 밤새 기숙사에서 먹으며 뛰어놀았고, 그 때문에 옆방의 하영주와 앞방 가윗의 잠을 깨웠다.
그리고 기자 회견을 했다.
데아는 그날 말하는 인어, 피파를 만난 일을 함구했다. 어떻게 A급 던전을 단신 클리어했냐는 질문에 혼이 쏙 빠진 것도 있었지만, 더 큰 이슈 거리를 만들기 싫었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하지만 단독 던전 클리어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데아는 어쩔 수 없이 스킬 하나를 공개하고 말았다. 물론 후드와 마스크를 쓰고 하영주와 가윗이라는 안정적인 방어벽 틈에 흰동가리처럼 숨어서 진행된 기자 회견이었다.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스킬은 공개하지 않았다. 피파의 음산한 경고가 순식간에 머리를 스쳐서였다. 그렇게 데아가 공개한 스킬은.
[바다의 경배(S) : 머리끝까지 물에 젖은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은 강력한 죽음입니다.]
무려 S급 스킬이었다. 데아가 말하자마자 기자 회견장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하영주와 가윗도, 일을 끝내고 다급하게 다가오던 백리서도, 저 멀리 팔짱을 끼고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권도언도 그건 예상 못 했다는 듯이 우뚝 굳었다.
―나를 공개한다고? 자기야, 감당할 수 있겠어?
경배가 허공에서 키득거렸다. 데아는 그냥 이 말하는 스킬을 쉽게 경배라고 부르기로 했다.
왜, 무슨 문제가 있나? 데아는 당황했지만 이내 특종을 잡았다는 표정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다수의 기자들을 보고 자신이 안일했음을 깨달았다.
―아이고. 자기는 아직 모르는구나. S급 헌터가 모두 S급 스킬을 가진 건 아니야. 하지만.
경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번쩍, 카메라 플래시가 강하게 터졌다. 데아는 흠칫 놀라 하영주의 뒤로 고개를 묻었다.
―S급 스킬을 가지면 S급 헌터가 맞거든.
“샤샤 헌터, 그 말은 본인이 S급 헌터임을 밝히시겠다는 겁니까?”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헌터 등급을 지금 이 자리에서 공개하는 겁니까?”
조작한 등급은 B였기에 데아는 순간 평정을 지키지 못하고 권도언을 바라보았다. 권도언은 조용히 하라는 의사를 내비쳤다. 데아는 그가 그렇게 지시했던 이유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데아 씨의 헌터 등급은 B급으로 유지될 겁니다. 샤샤의 헌터 등록증이 하나 더 생기는 것뿐이에요.”
차분한 얼굴로 권도언은 읊조렸다.
“이번 일로 인해 이데아 씨가 샤샤라는 걸 극소수의 수뇌부들은 알게 되겠지만… 그들이 입이 싼 종자들도 아니고. 괜찮아요. 수고했어요.”
“데아 씨는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잘한 겁니다. 주눅 들지 말아요.”
권도언의 재수 없는 얼굴이 그럴듯한 미남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 ◈ ◈
‘그랬었지…….’
데아는 상념을 멈췄다. 저기 나름 봐줄 만한 미남이 있었다. 권도언이다. 그는 안 어울리는 그림처럼 편의점에 서있었다.
시간을 보자 오전 열한 시. 권도언은 길드 내부가 아닌 다른 집에서 산다. 그리고 미약하게 뜬 뒷머리를 보아하니 분명 저건 늦잠이었다.
길드장이 지각한 것이다. 출근을 하고도 남은 시간인데, 서류 가방을 덜렁 들고는 편의점에서 한가하게 핫바나 고르고 있다니, 길드장이! 저건 성실 출근을 하는 자신과 공략 1팀에 대한 모독이었다!
데아는 당당하게 편의점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길드장님.”
“네.”
길드장 권도언은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있었다.
“길드장님도 편의점에 와요? 매일 백화점 VIP룸에나 가실 것 같았는데.”
“네에…….”
그의 눈앞에는 청양고추 핫바와 닭가슴살 핫바, 그리고 데리야키 핫바가 있었다. 데아는 무의식적으로 핫바를 훑었다.
“전 데리야키요.”
“역시 그렇죠?”
“사주세요.”
“으음…….”
그제야 권도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 데아일 줄 몰랐다는 태도였다.
상대방을 확인한 권도언의 입가가 장난스럽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