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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26화 (26/223)

※ 026화

모든 인어들이 도사린 던전 심해의 저편, 피파는 자신의 의원의 문을 열었다.

“이게 뭐니?”

―움 님이 방금 주고 가셨어요!

“움 언니가?”

―네. 인간들이 새롭게 만들어 낸 던전 등급 측정기라고…….

리리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움’은 현재 인어 제국에서 역모 죄인으로 지명 수배가 된 인어였다. 그런 인어와 아직까지도 연락을 이어 가다니, 이러다가 제왕 트리야의 눈에 띄면 어떤 보복을 당할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조심하세요.

물론 피파글랜은 강하지만. 그것도 예전만큼은 아니니까.

100여 년 전 ‘태초’의 죽음 후, 미약하게나마 약해지는 인어의 힘을 느끼지 못할 리리타가 아니었다. 리리타는 2세대 인어이자 동시에 왕족 ‘피파글랜’의 첫 번째 권속이었으므로.

딸랑.

그때 누군가 동굴 입구 벽에 놓인 종을 울렸다.

―누가 왔나 봐요.

피파는 맨 밑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끼워진 작은 홈에 손가락을 넣어 다시 비틀자 보이지 않던 비밀 공간이 드르륵 또 열렸다. 그 안에 리리타가 건네준 던전 등급 측정기를 넣고 다시 서랍을 닫았다. 그에 맞춰 리리타가 의원의 문을 열었다.

―태초를 위하여.

그 앞에 서있는 건 한 명의 어린 인어였다. 그가 인사 구호를 말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작고 왜소한 어린 남자아이. 피부는 한겨울의 살얼음처럼 하얗고 구불구불한 짧은 머리카락은 심해의 빛깔을 닮은 짙은 녹색이었다. 자칫 어린아이라고 해서 우습게 보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리리타는 그러지 않았다.

―간부가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아이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눈과 코만 덮은 검은 가면 아래 냉소적인 붉은 입술이 죽 올라갔다.

리리타는 빠르게 아이의 인상착의를 훑었다. 아이의 상체를 빈틈없이 덮은 검은 망토에는 청록색 자수가 수놓아져 있었고, 1공대 간부의 직급을 뜻하는 흰색 브로치와 은색 장식이 어깨에 달려 있었다.

간부다. 트리야의 독재 아래에서 거짓을 팔고 선량한 인어를 처형대로 넘기는 포악한 군주의 개.

‘무슨 일이지? 설마 움 님이 오셨다 간 걸 아는 건가?’

리리타는 애써 웃음 지었다.

폭군이 뭘 알아챈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이미 이 동굴은 풍비박산이 났겠지. 자기도 1세대이면서 폭군은 같은 1세대에게 온화한 편이 아니니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리리타의 고압적인 물음에 아이의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가면 아래의 녹안이 벨 듯 날카롭게 상대를 응시했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 리리타. 걸리는 거라도 있어?

―이게…….

“무슨 일이니?”

그때 안에 있던 피파글랜이 묻자 아이는 빠르게 기세를 접고 귀족적인 인사 자세를 취했다.

―제1 공대 소속 자잔이 고귀하신 왕족을 뵙습니다.

“인사치레는 필요 없어. 무슨 일로 이 구석까지 온 거지?”

피파의 말에 어린 인어의 모습을 한 간부 ‘자잔’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동굴 내부를 탐색하듯이 훑으며 옅게 웃었다.

―사실 도주한 인어 하나를 찾고 있어서요.

“도주?”

―네. 태초에 관해 연구한 금서를 몰래 숨기고 있더라고요. 평범한 인어 따위가 감히 태초를 글로 정의 내리며 연구한다니. 제국의 금기를 망각해 버렸나 봅니다. 옆집의 신고로 곧바로 죄인을 제압하고 물품을 전부 압수 했지만 잘 타이르는 순간에 이 근방에서 사라졌지 뭡니까. 평범하기 짝이 없는 회색 머리카락에 비늘을 가진 어린 여성체 3세대 인어인데, 혹 보셨을까요?

“글쎄… 본 적은 없지만 보면 연락을 주도록 하지.”

거기까지 말한 피파는 가볍게 등을 돌렸다.

―그러시군요.

자잔은 절도 있는 자세로 그 뒤에 대고 인사를 했다. 리리타는 동굴 너머로 자잔의 검은 망토를 보고 움츠러들어 자리를 옮기는 작은 인어들을 보았다.

자잔. 그는 현재 폭군으로 군림한 제왕 트리야의 유일한 권속이었다.

피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자잔은 리리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피파 님은 여전히 인간들에게 관심이 많으신가 봐?

리리타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가면의 눈구멍 아래 비치는 눈동자 안에 꿈틀거리는 건 빈정거림이었다. 왕족인 주제에 아직도 옛 버릇을 못 고쳐 인간들 뒤나 따라다니냐는 비아냥거림이 그곳에 있었다.

태어난 지 100년도 안 된 어린 것이……!

거기까지 생각한 리리타는 눈을 감았다. 여기서 화를 내봤자 좋을 건 없었다.

―…높으신 분의 취미 생활일 뿐이야.

―제왕께서는 계속 피파 님을 기다리고 있어. 이런 구석의 의원에서 계속 똬리를 틀기엔 너무 아까우신 분이라고.

―고귀한 인어에겐 각자 이상이 있고, 피파 님도 귀하신 분답게 그분의 이상을 좇으실 뿐이지. 그 이상이 맞물릴 때, 왕을 알현하시지 않겠어?

―…그 매끄러운 혀를 뽑지도 못하고.

리리타는 비소했다. 그래, 이게 본성이었다. 리리타가 웃자 자잔의 눈동자에 오래된 서늘함이 모였다.

―이게 몇 번째지? 제왕이 불러 준다면 가는 것이 도리인데, 겁을 상실한 건지, 은혜를 모르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가기만 하면 왕 다음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데 뭐가 그리 잘나서 제왕을 아쉽게 만드는 건지. 이깟 구석의 의사 노릇이 그렇게나 즐겁나?

―자잔. 설마 1세대 인어인 피파글랜 님을 그런 저속한 말로 치부하는 건가? 제왕의 1공대 간부가 되어 드디어 처지를 잊은 거야? 왕족 모독죄로 끌려가 태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언어 선택이로군. 충고를 하나 하자면, 남에게 겁을 운운하기 전에 주제를 상실한 입을 먼저 잘라 내는 게 신변에 좋을 거야.

자잔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이내 이죽거리며 리리타의 얼굴 앞에 바짝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리리타의 시야에 창백한 분노가 가득 찼다.

―리리타. 널 당장 처형장에 넘기지 못하는 게 아쉬워.

―뜻대로 해.

―뻔뻔한 낯짝이 거기 가선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싶네, 아주. 어제도 스물여섯의 인어가 그곳에서 죽었지. 다음 말뚝 위에 걸리는 머리가 네 것이었으면 좋겠어.

자잔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네 주군이 겉으로만 중립일 뿐, 역모 죄인 둘째의 소식을 활발하게 전해 듣고 있다는 거 다 알아. 역모 죄인과 내통하다니, 제정신이야? 트리야 제왕의 바다와도 같은 아량이 없었더라면 이미 다 참수형을 당했겠지.

―…….

―후… 그 둘째의 빌어먹을 면상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네. 100년 전에 추종자들을 데리고 제국을 나가서 볼 수도 없겠지만. 태초라니, 100년 전에 이미 죽은 태초를 어떤 수로 찾겠다고 인간계에 간 거야? 환생이라도 하나?

―…….

둘째. 둘째와 태초.

리리타는 숨을 죽였다.

지금 완전히 갈라선 여덟 명의 왕족, ‘1세대 인어’는 한때 화목했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가족이자 친구였다.

첫 번째 1세대 인어 ‘트리야’.

두 번째 1세대 인어 ‘므아나’.

세 번째 1세대 인어 ‘움’.

네 번째 1세대 인어 ‘피파글랜’.

다섯 번째 1세대 인어 ‘도라안’.

여섯 번째 1세대 인어 ‘칸나니아’.

일곱 번째 1세대 인어 ‘윌로’.

여덟 번째 1세대 인어 ‘헤타’.

어쨌거나 친하긴 친했을 것이다. 1세대 인어 전원이 모두 최초의 인어 ‘태초’의 권속이었으니까. 그러나 태초가 죽고, 첫째와 둘째를 선두로 파가 나뉘어 버렸다.

죽은 태초를 대신해 제왕에 오른 ‘트리야’와 그를 인정 할 수 없던 ‘므아나’의 거대한 싸움.

그래, 그때였다.

결국 전쟁에서 진 둘째가 진정한 제왕인 ‘태초’를 찾아오겠다며 자신의 인어들을 데리고 제국 밖으로 나가버린 100년 전을 기점으로 인어의 사회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격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 나가버린 인어들은 모조리 역모 죄인으로 몰려 제국에 지명 수배되었고, 트리야가 군림한 제국에는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갑작스럽게 피파를 찾아왔던 ‘움’ 또한 그렇게 제국 밖으로 나가 지명 수배된 인어 중 한 명이었다.

―내가 너무 흥분했지?

그때 자잔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러자 일그러뜨렸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빙글거리는 낯짝의 어린 간부 하나만 그곳에 남아있었다.

―말이 너무 많았네. 리리타, 너도 수고해. 비슷한 인상착의를 봤다면 바로 신고 부탁하고.

―…….

―그럼. 태초를 위하여.

―…태초를 위하여.

태초를 위하여라…….

자잔이 가고 문이 닫혔다. 리리타는 얼굴을 문지르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재수 없는 새끼.

평화로웠던 제국은 조각조차 남지 않았다. 둘째와 싸우고 분노한 첫째 ‘트리야’가 폭군으로 군림하자 제국 안에는 비밀 간부가 돌아다니고 처형장의 기둥 위에는 처형당한 인어의 머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매달렸다. 피를 먹는 식인 물고기가 그 주변을 알짱거리고 백성들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믿을 수 없는 공포 정치였다.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부들이 거리를 단속했고, 무리한 공물을 요구했다. 그리고 혹여나 이 체계에 반발을 품거나 의문을 품은 주민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곤 했다. 간혹 거리에서 곧바로 끌고 가는 사례도 빈번했다.

옆집, 앞집, 이웃, 친구, 연인.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밤이 오면 백성은 한 명도 빠짐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고, 거리는 황량해졌다. 숨도 쉴 수 없는 독재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 사회 안에서, 인어들은 검은 망토를 입은 간부들을 보면 누구든 주눅이 들어 자리를 피했다. 그들의 등에 달린 곤봉이 얼마나 강력한 살상 무기인지는 가끔 공개적으로 일어나는 태형장에서 알 수 있었다.

태형장에서 고개를 돌리는 백성은 많았지만 아무도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 못 보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가 그다음 태형장의 주인공이 된 사례가 있었으므로.

간신히 모인 소규모의 반란군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독재가 시작된 지 수십 년이 지나도 큰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들도 힘든 거겠지. 두각을 드러내어 이웃을 사지로 몰아넣는 앞잡이들은 어디든지 있는 법이니까.

‘이런 제국이 변할 수 있을까?’

리리타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피파 님. 자잔이, 아니 간부가 갔습니다.

리리타는 안쪽으로 느리게 헤엄쳐 들어갔다. 구석진 동굴 안, 그 어떤 방랑자도 올 수 있는 바닷속의 의원 안에서, 산호로 장식된 매끄러운 돌 의자 위에 자신의 주군이 앉아 있었다.

넷째 피파글랜. 첫째에게도 둘째에게도 속하지 않은, 오직 둘뿐인 중립 인어 중 하나. 리리타는 자신의 주군이 자랑스러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나긋한 목소리에 리리타가 경직된 입가를 꾹꾹 눌렀다.

―그 아이 말이에요. 방금 간부가 찾으러 왔다는 3세대 아이, 살아 있을까요? 보니까 곧 현상 수배지가 붙을 것 같던데요. 태초와 관련된 금서를 가지고 있다는 건 사형감이잖아요.

“아, 그 애라면.”

리리타가 눈을 휘둥그레 뜨든 말든 피파는 아무렇지도 않게 협탁을 덮은 두꺼운 천을 들어 올렸다. 그 안에 있던 건…….

―아니, 피파 님!

리리타가 비명을 질렀다. 오들오들 떠는 작은 체구의 어린 여자아이가 그곳에서 겁먹은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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