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1화
아프도록 온몸을 휩쓰는 폭풍우 속에서 조금의 파도와도 스치지 않기 위해 뒤를 돌아 달아난 지 한참, 땅이 발에 푹푹 박혀도 멈추지 않고 달리자.
철썩!
이내 뒤에서 땅에 고개를 처박는 파도의 마찰음이 들렸다. 그 소리에 맞춰 사납게 휘몰아치는 바람이 훅 불어왔다. 밀려 비틀거렸다. 세상이 한 바퀴 돌았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던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뒤를 돌아보자 운동화 앞까지 검게 그어진 파도의 흔적이 보였다. 아찔할 만큼 가까운 위치였다.
한 번 무섭게 달려든 파도는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없었다.
“허억, 헉. 와, 파도 장난, 없네요…….”
저 멀리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숨을 몰아쉬는 가윗이 보였다. 하영주도 무사했다. 조금이라도 달리는 걸 지체했으면 파도에 먹혔을 거라는 걸 아는지, 둘 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기 이상한 자국이 나있어…….”
“어디?”
“파도가 지나간 해안가 위에.”
아주 작고 긴 자국이었다. 데아의 바로 뒤로부터 잔잔해진 파도가 있는 곳까지 이어진, 아주 작고 긴 자국은 다섯 개씩 모여 있었는데, 수가 너무 많아 셀 수도 없었다.
다섯 개의 줄이 두 쌍씩 모여 있는 그 모습이 마치 사람 손자국 같아서 데아는 자세히 자국들을 들여다보던 걸 멈췄다. 이마를 뜨겁게 적시는 것이 빗물인지 식은땀인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인어의 손자국이었다. 사냥감을 놓쳐서 아쉬워하며 질질 끌려간 작은 인어들의 손가락 자국이었다.
“…데아 누나 말대로 파도에 스치기만 해도 끌려가겠네요.”
“잠, 잠깐. 일단 생각을 하자. 그나저나 저 안에 있는 인어들을 어떻게 죽이지? 파도가 몰려왔을 때 낚아채?”
“아니, 우리가 끌려가는 게 먼저일 거야.”
“그럼 어떻게 해?”
“…보스를 먼저 찾아야 해.”
데아는 아무 말 없이 파도를 응시했다. 빗소리만 고막을 두드리는 적막 속에서 파도가 자기들끼리 몰아치더니 또 수면이 낮아지고 있었다. 방금 전과 같은 파도가 또다시 몰려올 것이다.
“보스는 저 바다 안에 있을까?”
“저 원거리 공격 스킬 딱 하나 있는데! 이거라도 쓸까요? 위력은 엄청 약하긴 한데…….”
“가윗… 그러다가 인어들 어그로가 너에게 끌릴 수도 있어.”
“하,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보다는……!”
하영주와 가윗의 대화가 아스라이 흐려져 갔다.
“잠시만.”
그리고 데아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드러난 눈동자가 붉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뚜렷한 붉은색에 가윗이 헛숨을 들이켰다.
“스킬 쓸게요.”
[심해의 눈(A) : 당신은 승리할 것입니다.]
주인의 부름에 응답하듯 상태 창이 켜졌다. 스킬이 붉게 번뜩였다.
약점 파훼.
시간과 장소에 제약받지 않고 적의 역린을 단숨에 꿰뚫어 아군에게 승리의 깃발을 가져다주는 영광의 스킬.
데아는 자신을 향해 번뜩이는 수만 마리 인어의 적대감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파도 속, 지평선, 저 심해의 아래까지 도사리고 있는 모든 인어들의 붉은 역린이 한눈에 잡힌다. 하지만.
“너무 많아……!”
“뭐?”
“파도 속에 있는 인어들의 약점이 다 보이고 있어. 역시 그 작은 인어들은 별것 아냐. 사지 어느 곳을 부러뜨려도 죽을 거야. 약점이 온몸에 퍼져 있으니까. 그만큼 약해. 하지만.”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잔챙이 인어들의 약점이 아니라 보스 인어의 약점이었다.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 보스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부위. 단숨에 상황을 끝내 버릴 유일한 단 한 번의 기적을 원했다.
하지만 시야에 빼곡하게 가득 찬 붉은 점들은 그런 데아를 비웃듯 현란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이래서야 보스가 보이지도 않는다.
“잠깐, 지금 또 파도 높이가 낮아졌어요!”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던 데아 너머로 가윗이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바다의 높이가 아까보다 눈에 띄게 낮아져 있었다. 곧 있으면 거대한 파도가 몰려올 것이다.
“이런 파도가 끝없이 밀려들어 오는 건가?”
“아마도 그럴 것 같아. 보스를 죽이지 않으면 이 해일 같은… 파도는 계속되겠지. 거기다가.”
데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수면이 전보다 더 낮아져 있었다. 위험한 징조였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파도의 일렁거림을 눈앞에 두고 데아는 주먹을 꼭 쥐었다.
저 멀리 쌓여 올라가는 파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시야의 끝과 끝을 장식하는 거대한 죽음의 물결이 잿빛을 담고 흐르듯 밀려오고 있었다.
고요하고도 묵직한 절망이 거기 있었다. 데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거대한 재앙 앞에서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말도 안 돼. 파도의 크기가 더 커졌어요.”
“뭐?”
귀에 들리는 숨소리가 너무 가빴다. 데아는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설마, 아니 그래도 이건, 하지만…….
맞는다면.
“파도는 반복될수록 더 커질지도 몰라.”
반사적으로 세 명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디까지 도망 갈 수 있지?’
그러나 뒤는 어둠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낯선 소리만이 가득 찬 미지의 공간. 그들은 본능적으로 멀리 갈 수 없음을 절감했다.
“더 커지기 전에 서둘러 보스를 사냥해야 해. 우리가 도망갈 수 있는 한계는 정해져 있으니까.”
그러나 발이 쉽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
‘왜 또 해일이지? 왜 또 바다일까?’
시야가 빗물로 흐려졌다.
“누나, 누나들 뭐 해요?”
그때 우뚝 서서 멍하니 뒤를 바라보고 있는 데아와 하영주에게 가윗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파도가 또 밀려오고 있잖아요! 잡히기 싫으면 당장 달려요!!”
기폭제처럼 터진 음성에 발작하듯 세 사람이 뛰어올랐다. 이전보다 더 거대한 파도의 그림자가 머리 위를 메웠다.
“으아악!”
두 번째 파도는 예상대로 훨씬 더 거대했고, 강력했다. 철썩이는 바다는 인간 셋을 잡아먹기 위해 서슴없이 돌진했고, 데아는 거침없이 쓸려 올라가는 해안가의 모래를 피해 발을 놀렸다.
[타고난 몰이꾼(S) : 인어의 주목을 받는 동안 속도가 +60 증가합니다.]
스킬이 요란하게 깜빡였다. 세 명의 헌터 중 가장 민첩도가 낮던 데아가 한순간에 그들을 앞질렀다. 그는 허공을 밟고 공중 도약을 하며 그중 뒤처지고 있던 가윗의 어깨를 낚아챘다. 이대로면 잡힌다.
“꽉 잡아!!”
“헉, 누나. 잠시만, 죄송해요!”
“뭐?”
“스킬 쓰려면 어쩔 수 없어요!”
가윗이 입술을 꽉 깨물더니 데아의 팔에 손톱을 세웠다. 따끔한 감각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존재를 알렸다. 데아의 팔 위로 존재를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미약한 붉은 상처가 그어지고, 가윗의 등 뒤로 천사의 날개가 펄럭 펼쳐졌다. 순간 시야가 환해졌다.
[구원의 부름(B) : 상처 입은 동료를 빠르게 운반합니다. 일시적으로 비행을 허용합니다. 일시적으로 민첩도가 +40 증가합니다.]
“누나, 데아 누나! 영주 누나 어디 있어요?”
저 멀리 죽어라 뛰는 하영주가 보였다.
“영주 언니 저기 있어!”
데아가 소리치자 데아를 팔에 매달고 날아가던 가윗이 고개를 돌렸다. 파도가 꿈틀거리며 하영주의 뒤를 바싹 쫓고 있었다.
“누나! 제 손 잡아요!!”
하영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가윗의 등 뒤에 달린 날개를 보고 경악하더니 이내 몸을 둥글게 말았다가 번쩍 도약했다. 거칠게 서로의 팔이 잡혔다. 데아의 눈앞으로 가윗의 땀이 뚝 떨어졌다.
“아으윽!!”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공중을 향해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한 가윗의 밑으로 처참한 물결이 휘몰아쳤다. 계속 뛰었다간 분명 바다에게 먹혔을 것이다. 끝도 없이 퍼져 나가는 파도의 여운을 보며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길 한참.
콰과과과과…….
이윽고 파도가 잦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덮쳐 왔던 파도는 딱 그만큼 빠르게 물러났다. 비척이며 날던 가윗이 눅눅한 해변에 데아와 하영주를 내려 주고는 픽 쓰러졌다.
“괜찮아?”
“세상에, 가윗아. 천사 날개 대박이었어. 넌 최고야.”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제가 이 스킬을 쓰면…….”
한동안은 잘 못 움직이거든요.
B급인 이유가 있다며 가윗이 우는소리를 냈다.
“넌 쉬어. 내가 업고 갈게. 하 참, 인어랑 싸우는 것도 아니고 계속 도망이나 가야 한다니.”
“언니, 바지 젖은 거 아니야?”
“끝만 젖은 거야. 물에 튀겨서. 이 정도는 괜찮아.”
바지를 허공에 탈탈 털며 하영주가 억지로 웃었다. 피곤한지 얼굴에 그늘이 져있었다.
“나 스킬 한 번만 더 쓸게.”
“약점 파훼 스킬? 아까 전에는 너무 많아서 보스가 안 보인다고 하더니.”
“응. 그런데 이상한 점을 발견해서…….”
“…뭔데?”
파도는 반복할수록 더 커진다. 그리고 파도가 커지는 만큼 수면은 더 낮아진다. 보충할 물이 필요하니까.
데아는 느리게 파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스킬은 발동되고 있었다. 붉게 빛나는 눈이 악천후와 파도를 뚫고 지평선 너머로 향했다. 한곳에 중점적으로 붉은 점이 모여 있었다. 아주 아래의 공간. 파도와 해안가보다 더 낮은 장소였다.
“보스가 보여.”
“뭐? 아깐…….”
“이전보다 수면이 더 낮아진 만큼, 아주 깊은 곳에 몸을 묻고 있는 보스가 더 쉽게 노출된 거지.”
“그러면 보스를 완전히 사냥하기 위해서는 수면이 더, 더, 더 낮아져야 하고…….”
“그만큼의 반복된 파도를 견뎌 내야겠지.”
“…….”
세 번째 파도가 밀려오려는 것처럼 수면이 또 급격하게 낮아지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지면이 노출됐다. 미처 파도에 섞이지 못하고 펄떡이는 작은 생선이 보였다.
데아는 인어의 손자국이 죽죽 나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낮아진 수면을 보니까 앞으로 두 번 정도만 반복하면 보스의 모습이 온전하게 드러날 것 같은데…….
덥석!
그때 뒤에서 하영주가 팔을 잡았다.
“데아야, 우리 나가자.”
“…….”
“아까보다 더한 파도가 올 거야. 우리 못 버텨.”
전 파도에서 큰 활약을 해줬던 가윗이 탈진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 할 수 있다며 버티고 있는 건 초짜의 오기라고 답지 않게 심각한 낯을 한 하영주가 말했다.
“우리 못 해. 너도 알잖아.”
하영주가 인벤토리에서 이동 스크롤을 꺼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나가자. 우리끼리는 불가능해. 도망쳐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