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6화
“무슨 괴담인데!”
길드 건물 밖으로 나가 카페에 눌러앉은 하영주와 가윗, 그리고 데아는 하영주가 보여 주는 핸드폰 화면에 온 시선을 집중했다. 데아의 앞에는 두 잔의 음료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데아 누나 카페 음료 진짜 좋아하네요.”
하나는 건조 라임 칩과 로즈마리가 올라간 자몽에이드, 또 다른 하나는 마시멜로가 올라간 코코아 밀크였다.
데아는 사실 길드에 온 후부터 꼬박꼬박 길드 앞 개인 카페에 출석 도장을 찍는 중이었다.
병동을 벗어난 속세에는 이리 좋은 것들이 많이 있구나. 세속의 개미가 된 데아가 속으로 만세를 부르짖었다. 이제 카페 사장님은 저 멀리서 이데아의 검은 머리카락만 봐도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컵에 얼음을 담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얼른 괴담 보여 줘 봐.”
“아, 그래.”
해외의 커뮤니티 글을 붉은 한국어로 변역한 캡처본이었다. 조잡했지만 읽을 만은 했다.
[나 너무 무섭고 신비로운 경험했어.]
*밑에 3줄 요약 있음*
이번에 런던에서 게이트 또 터진 건 다 알지? 나 거기에 공략하러 간 A급 헌터임.
잔챙이들 처리 거의 다 끝나고 보스가 언제 나올까 긴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인 완벽한 인어가 나와서 말을 걸었어! 나는 내가 꿈을 꾸는 줄 알았다니까.
물론 모든 인어가 상반신은 사람이지. 그런데 우리도 알다시피 대부분의 던전 인어는 상상처럼 아름답지 않아. 알지? 눅눅하고 징그럽고 이상하게 생긴 인어들도 많다고. 하지만 그 인어는 동화 속에 나올 법하게 생겼어. 진심이야. 디○니 같다고. 징그럽다는 느낌도 하나도 없고 상반신만 보면 사람하고 구별도 안 가.
그리고 너희들은 인어가 말하는 거 들어본 적 있니? 없잖아. 하지만 그 사람은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다니까!
그 인어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바위에 걸터앉아서 우리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어. 사실 처음에는 바로 공격할 뻔했지. 그런데 예감이 들더라고. 이 인어를 공격하면 안 되겠다는 그런. 그리고 역시 그 인어는 우리에게 공격 의사가 없었어.
그 인어는 주로 사람? 인간들에 대해서 물어봤어. 가장 최신 문물은 뭐고, 요즘도 마차를 타고 다니는지, 새롭게 나온 음식 레시피가 있는지를 거침없이 물어보고 그걸 또 수첩에 옮겨 적으니까 우리 공략 팀은 정말 실신하는 줄 알았지.
그리고 나는 손을 벌벌 떨면서 내 간식을 그에게 줬어. 최근에 나온 초콜릿 바인데 진짜 맛있다고 드셔 보시라고 주니까 이런 건 처음 본다며 고맙다고 하고 가져가더라.
그리고 포장 뜯어서 한입을 먹더니 이렇게 단 건 정말 오랜만이라고 하는 거야. 그런 말을 듣고 그냥 넘어갈 수가 있나? 우리 공략 팀은 허겁지겁 인벤토리 안의 모든 간식을 자진해서 그에게 넘겼어…….
그런데 중요한 건 이게 아니야. 곧 보스가 나올 때가 됐었거든. 공격 준비를 하자 보스가 튀어나왔어. 팔이 여섯 개가 달리고 송곳니가 가슴까지 닿아 있는 무시무시한 인어였지.
우리는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었어. 그래도 해볼 때까지 하자는 심정으로 덤벼들었는데 그 완벽한 인어가 선물을 받은 보답을 하겠다는 거야!
그러고는 한순간이었어. 그 완벽한 인어가 손가락을 까닥였고, 보스 인어가 전기에 감전된 듯 발작하더니 이내 쓰러져 버렸지. 그리고 그 인어는 보스 인어에게서 나온 모든 아이템과 마석을 다 우리에게 줬어. 더불어서 자신에게는 필요 없다며 신기한 아이템도 새로 줬는데, 보니까 빠른 속도로 상처를 치료해 주는 포션이더라고. 놀랍지 않아?
아직 헌터 연구 센터에서도 포션은 제작 중이잖아. 인류의 첫 포션이 인어가 준 거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했지만 난 이 포션을 뉴욕의 JJ 길드 연구 센터로 넘기기로 했어. 샘플을 얻어서 더 빨리 연구가 진행될 수 있을 거야.
정말 신기한 인어였어. 인간과 많이 닮은 것도, 말이 통하는 것도, 우리가 본 대부분의 인어는 남성체인데 보기 드문 여성체라는 것도, 신비로운 옅은 갈색 눈동자와 머리카락도. 그리고 감히 우리와 견줄 수 없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는데 공격 의사가 없었다는 것까지도.
모든 공략이 끝나고 나는 그에게 이름을 알려 달라 간청했어. 그의 이름은 ‘피파’라고 했어. 그걸 마지막으로 그는 안개 낀 바다 아래로 내려가 버렸지.
피파. 이름도 완벽해.
아무튼 너희들도 만약 던전을 공략하다가 지나치게 사람과 유사하고 공격 의사가 없어 보이는 인어를 발견하면 절대 공격하지 마. 그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게 강할 뿐더러, 또 그가 묻는 말에 대답만 잘 해주면 오히려 도움을 주고 떠날 거야.
3줄 요약
1. 절대 이길 수 없는 인어가 존재.
2. 그 인어는 인간의 말을 하고 인간과 외향이 아주 유사.
3. 절대 공격하지 말 것. 묻는 말에 대답만 잘 하면 오히려 도움 줌.
“이게 괴담이야? 하나도 안 무서워.”
데아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하영주가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괴담이 무서운 것만 있는 줄 아니? 신비롭고 이상한 경험담도 다 괴담이야.”
“나폴리탄 괴담 같지 않아요? 그 인어를 절대 공격하지 마시오. 이런 거요!”
“그래?”
데아는 온몸에서 힘을 뺐다. 붉은 인어에 대해서 나올 줄 알고 긴장했는데, 괴담에 나온 인어는 그것이 아닌 것 같았고, 관련이 되어 보이는 단서도 없는 듯싶었다. 그래도 실제로 인간의 말을 하고 인간과 많이 닮았다 해서 그런지 흥미가 솟았다.
“그런데 이거 주작이라는 말도 많은데.”
“포션을 연구 센터에 넘긴 건 사실이라잖아요. 저는 진짜 같아요.”
“그러면 인어는 종류가 엄청 많은 거네?”
“그렇겠죠? 하긴, 던전에서 보는 인어도 여러 종류였잖아요. 크기도 모양도 다 달랐고!”
괴담에 나온 피파라는 인어는 붉은 인어와 비슷한 등급의 인어인 걸까. 공격도 하지 않고 인간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어라니.
그렇다면 괴담 속에 나온 인어도 높은 등급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 세상엔 높은 등급의 인어가 많은 걸까. 그들을 직접적으로 만나려면 어떡해야 하지?
“그 피파라는 인어를 직접 만나려면 그냥 던전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지?”
데아의 말에 하영주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겠지? 왜, 만나 보게? 너 생각보다 대담하구나?”
“아, 아니, 그냥 말이 통하는 인어라니까 궁금하잖아요. 인어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있고.”
“인어에 대해서 뭘 물어보려고요?”
“아니, 그냥 궁금한 건 다…….”
그때였다.
끼이익.
데아가 앉은 의자의 뒷자리. 누군가가 커피를 손에 쥐고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가 2미터에 육박하는, 덩치가 큰 남성이었다.
검은 폴라 티와 검은 코트를 걸치고 뚜벅이며 자리에서 벗어난 남자는 능숙하게 커피를 버리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데아는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은빛 눈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었다.
어, 하지만 깨닫기도 전에 시선은 신기루처럼 곧바로 사라졌다.
“미친 존잘.”
남자가 카페 밖으로 나가자 상기된 표정의 하영주가 속삭였다. 가윗의 눈이 샐쭉하게 접혔다.
“너도 봤지? 데아야, 미쳤지? 여기 물 좋네. 길드 가입하기 잘했다.”
“어, 어…….”
“저 남자가 뭐가 잘생겼어요? 너무 무섭게 생기지 않았어요?”
“너는 금욕 절제 미남의 맛을……. 아냐, 애기들은 몰라도 돼.”
평소엔 보이지도 않던 한반도 미남을 누가 갈퀴로 쓸어 모은 것 같다며 주절거리던 하영주 너머로 새롭게 종이 울렸다. 카페의 문이 열리고 묘한 표정의 백리서와 몇 명의 공략 1팀 길드원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데아를 보고 손을 번쩍 올렸다.
“어, 찾았다. 샤…….”
샤샤라고 크게 외치려다가 장소가 길드 밖 카페인 걸 인식한 길드원이 헛기침을 하며 손을 내렸다.
데아는 대외적으로는 공략 1팀의 훈련 보조였다. 길드원들의 컨디션을 기록하고 공략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더 나은 훈련법을 찾는 훈련부장의 보조.
“무슨 일 있어요?”
빠른 걸음으로 데아에게 다가오는 백리서와 길드원들을 바라보며 하영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대부분의 길드원들은 웃음을 참는 듯 입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 데아 씨. 그 혹시 커뮤니티에 가입…했어요?”
“커뮤니티요? 아, 헌팅?”
“네, 네. 혹시 닉네임이…….”
“네, 했는데요. 진짜샤샤가 저예요. 누가 제 헌터명을 뺏었더라고요.”
데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길드원들이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봐봐. 맞잖아. 아니라고 한 사람 누구야.
“왜요?”
예감이 좋지 않았다.
뭐야, 뭔데.
“무슨 일 있어요?”
데아가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자 푸흐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백리서가 맞은편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데아야, 우선 칭찬을 하고 싶은데… 핸드폰을 그렇게까지 다룰 수 있게 되다니, 이 언니는 너어어무 감격이야.”
백리서가 ‘이 언니는’이라는 부분을 강조하며 말을 길게 늘이자 순식간에 주변 헌터들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특히 하영주는 백리서를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놀리는 거 같은데…….”
“눈치도 빨라졌구나. 아주 대견해. 그런데 데아야, 너 가입 인사한 거 댓글 봤어?”
“…혹시 안 좋아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네 헌터명을 뺏은 사칭범이 나와서 조금 소란스러워.”
그게 안 좋은 거잖아!
데아는 당장 핸드폰을 꺼내려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자신이 핸드폰을 기숙사 침대 위에 그대로 버리고 왔다는 사실을 상기해 냈다. 머리가 아파 왔다.
사칭범 새끼. 직접 만나면 면상을 꼬아버리겠다는 일념에 불타며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순간이었다. 백리서가 진정하라며 부드럽게 다시 팔을 잡았다.
“나중에 돌아가서 해. 우선 일단 내가 길드원들이랑 같이 너희들을 찾아온 이유는… 어디 놀러 가고 싶은 곳이 있을까 싶어서.”
“네?”
“그동안 바빠서 밖에 잘 나올 기회가 없던 건 맞잖아. 데아, 특히 너는…….”
아무튼.
백리서가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하영주와 가윗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던전 공략이 끝나고 벌써 한 달이 지났잖아요.”
존칭을 쓰며 백리서가 말을 이었다.
“장례도 다 마쳤고. 사람들도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죠. 계속 던전이 안 나와서 불안할 수도 있는데, 분위기도 전환할 겸. 권도, 아니 길드장님이 이번 주말에 공략 1팀 대상으로 놀러 갈 수 있게 모든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거든요.”
“다 같이 놀러 가는 거예요?”
“아뇨. 시간 되는 사람만 따로따로. 일단 저는 안 돼요.”
백리서의 불참 소식에 하영주와 가윗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데아야, 우리 놀이동산 가자!”
“누나, 이번에 할로윈 기념으로 축제 해요!”
“그럼 이렇게 셋은 놀이동산 가는 걸로 알고 있으면 되죠?”
“네!”
가윗의 신난 대답에 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 의견은?’
카페 밖으로 나와 백리서와 헤어지고 길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길. 갈림길 앞에서 하영주와 가윗과 떨어져 홀로 기숙사 문을 연 데아는 곧바로 침대 위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어플을 켜고 알림 창을 보자 댓글이 1천 개가 훌쩍 넘어있는 자신의 가입 인사 게시물이 보였다.
“아, 세상에. 머리야…….”
어떤 사칭이 나왔나 한번 보자.
데아는 싸늘한 얼굴로 댓글난을 눌렀다.
주목받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칭은 너무 괘씸하잖아.
진짜가 등판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