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4화
까딱이던 권도언의 구두 끝이 딱 멈췄다. 불빛은 계속 깜빡이고 있었다.
“잠깐, 설마…….”
“쉿.”
권도언은 손을 들어 백리서의 말을 막았다.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 등급 측정실 안에서 키트의 불빛만 계속 이어지다가.
S
느린 공백을 타고 또다시 등급이 올라갔다. 무거운 적막이 맴돌았다.
“…….”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키트를 바라보는 백리서의 옆에 서있는 권도언의 눈가가 일순간 가늘어졌다.
보통 S급 헌터의 등급을 키트로 측정하면 S가 뜨자마자 확정됐다는 뜻의 초록색 불빛으로 변하고 깜빡임도 멈춘다.
S등급뿐만 아니라 다른 등급도 마찬가지였다. 등급이 확정되면 불빛은 초록색으로 변한다. 오늘 백리서와 수많은 길드원들의 등급 측정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데아의 키트 불빛은 여전히 붉게 깜빡이고 있었다. 여기서 더 올라갈 곳이 존재한다는 듯이.
인류에게서 발견되었던 최상위 등급 S급. 세계에 극소수만 존재한다는 완벽한 강자들. 그 S급 헌터 권도언은 손바닥만 한 키트 앞에서 드물게 말을 잃었다.
키트의 글씨는 더 이상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푸슉, 하고 꺼져버렸다. 빠르게 깜빡이던 붉은 불빛이 환상이었다는 듯이 완전히 빛을 잃은 키트를 들고 권도언은 한참을 더 서있었다. 그건 옆의 백리서도 마찬가지였다.
끝내 초록 불빛은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사람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침묵하던 권도언은 빠르게 키트를 인벤토리 안에 넣어 은폐했다.
“여기서 본 건 모두 함구해.”
“키트가 잘못되었을 확률은?”
백리서가 되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러나 잠시의 침묵 후, 다시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이거 원… 인어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을 연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
그 말에 백리서가 대꾸하려던 순간이었다. 문이 활짝 열리고 연구원이 숨을 몰아쉬며 다시 측정실 안으로 들어왔다.
“많이 기다리셨……. 어! 릴림 헌터님도 여기 계시네요?”
“하하, 네.”
언제 분위기가 경직됐었냐는 듯이 인상 좋은 미소를 건네며 릴림, 백리서가 웃었다.
그 뒤로 순조롭게 권도언의 등급 측정까지 마친 후, 둘은 밖으로 나왔다. 등급 측정을 마친 길드원들은 각자 돌아가고, 데아만 센터 앞 벤치에 홀로 앉아 있었다.
“미안해. 많이 늦었지?”
“아니에요. 얼마 안 기다렸어요. 영주 언니랑 영호, 그러니까 가윗이 같이 있어 줬어요.”
“그래? 같은 공략 팀하고는 친해지는 게 좋지.”
부드럽게 웃는 백리서를 보며 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곧 그가 나올 것 같다는 말에 부리나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 둘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얘기했어?”
그러나 다 알고 있다는 눈을 한 백리서가 데아를 향해 물었다. 세단의 문을 열다 데아가 멈칫했다.
“…그냥 리서 언니가 저한테 잘해 주시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응? 내가?”
“네. 그냥 처음부터 다… 친절하고 엄청 챙겨 주고.”
사실 영문 모를 스카우트는 백리서의 눈이 좋았다고 쳐도, 이동 스크롤을 거리낌 없이 건네준 거나 그 후로 계속된 과도한 호의는 아무리 그가 천사라고 쳐도 이해할 수 없었다. 6년 동안 갇혀 지내서 세상 물정 모른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 1주 동안, 데아는 내심 백리서를 멀리했었다.
그러나 백리서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길드 안에서 데아가 새로운 헌터들과 인맥을 다질 수 있게 다리를 놓아 주었고, 밥을 사주었고, 맛있다고 생각한 디저트를 또 사다 줬으며, 데아가 쓰면 좋을 것 같다면서 고급스러운 노트북을 사주었다.
또 새로 받은 핸드폰의 사용 방법을 알려 주었고 근사한 취향의 옷을 주었다. 심지어 바쁜 시간을 쪼개 물건 쇼핑도 같이 나가 주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데아는 백리서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는 걸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기대하는 마음을 품은 스스로를 깨달았다.
세상에 이유 없이 친절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백리서는 예외였다.
백리서 이름 석 자만 들리면 무섭다며 진저리를 치는 하영주나 가윗의 태도를 보면 그 의문은 더 깊어졌다.
“무섭다고? 완전 착하고 다정하지 않아?”
그 순간, 이데아는 미쳤냐는 하영주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유일한 공략 1팀의 힐러 가윗조차 이데아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으니 말을 다 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데아는 억울했다. 백리서는 정말로 사려 깊고 착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말에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던 권도언이 소리 내어 웃었다. 세단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공략 1팀이 그런 말을 들으면 억울하죠.”
“뭐래. 나 친절한 사람 맞아.”
“들었죠? 본인 입으로 친절하다는 사람은 믿으면 안 돼요.”
그래도…….
권도언이 사이드 미러를 통해 데아를 바라보았다. 첫날과 다르지 않은 하얀 얼굴의 여자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데아는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표가 난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백리서가 이데아 씨한테 유난히 친절한 건 있죠. 늘 궁금한 지점이었는데, 너 진짜 왜 그래?”
“뭐가? 난 원래 그래. 그런데 뭐… 굳이 이유를 하나 꼽자면.”
백리서의 눈이 살풋 휘었다.
“옛날 가족 닮아서?”
데아의 표정이 굳었다.
가족. 자신에게도 죽은 가족이 있었다. 백리서에게도 그런 이가 있던 걸까?
권도언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자 백리서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살아 있어. 그렇게 심각한 얼굴 할 필요 없어.”
“그런데 왜 그냥 가족도 아니고 옛날 가족이라는 말을 써?”
“그냥… 가출했거든.”
철없는 동생이 있었나 보다.
데아의 머릿속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가는 백리서의 어린 동생이 오버랩되었다. ‘저리 비켜!’ 하는 동생 앞에서 가지 말라 온몸으로 막다가 이내 튕겨져 나가는 백리서…….
“데아가 그 가족을 닮아서 조금 더 정이 가나?”
“아… 네.”
“그것만으로 호감을 가지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백리서가 사이드 미러 너머로 가볍게 윙크했다. 장난기 넘치는 눈이었다. 데아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 가족 못 찾았어? 지금이라면 찾을 수 있을 텐데.”
권도언이 물었다. 백리서는 예상보다 더 길게 침묵했다.
“찾는 중이야.”
“찾는 거 도와줘?”
“괜찮아.”
세단의 속도가 올라갔다. 핸들을 잡은 백리서가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세단이 멈추고, 다시 훈련장으로 올라가는 길, 권도언이 할 말이 있다며 데아를 길드장실까지 안내했다.
“아이템을 줘야 할 것 같아서요.”
잘생긴 얼굴로 느른하게 웃으며 권도언이 낮은 협탁 위로 주르륵 아이템을 꺼내 펼치기 시작했다.
“왜요?”
“어차피 기존 길드원에게는 대부분 배부된 것들이에요. 이데아 씨만 아직 못 받은 거지.”
호신용 단도, 잭나이프, 장갑, 밧줄, 작은 구급상자와 붕대, 소독제, 식수와 열량이 높은 초콜릿 바.
그렇다면 혹시.
“이동 스크롤도 줘요?”
“죄송하지만… 이동 스크롤은 물량이 워낙 부족해서요. 공략 직전에 제가 직접 전해 드릴게요.”
“…직접.”
“네, 이전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도록.”
그리고 권도언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이전 일은 미안해요. 일을 저지른 당사자가 바로 죽어버려서 어떻게 처벌할 수가 없네요. 담당 부서에 교육이 다시 들어가긴 했지만, 부족하죠?”
“…괜찮다고 말은 못 하겠어요.”
“알아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더 확실하게 관리할 테니까 용서해 줘요. 대신…….”
“대신?”
권도언이 고개를 까딱였다.
“이데아 씨 몫의 이동 스크롤을 몇 개 따로 챙겨 드릴게요. 중급 이상으로. 수급에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기다려 줄 수 있어요?”
데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럼요. 그런데 저도 여쭤볼 게 있어요.”
“뭔데요?”
“그 소문이라는 게 뭐예요?”
“소문?”
데아가 눈을 반쯤 깔고 권도언을 응시했다.
“샤샤에 대한 소문이요. 아까 차현 길드장님이 말하셨잖아요. 저, 밖에서 소문이 어떻게 돌고 있는 거예요?”
“음?”
“그… 소문의 샤샤라면서요…….”
말하면서도 뭔가 창피했다.
무슨 소문인데 이런 말이 들리는 거야. 설마 6년 전 일과 관련된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빨리 알아내서 조치해야 했다.
그런데 권도언은 ‘아아, 그거.’라며 태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인터넷 보면 다 나오는데. 걱정 마세요. 신상은 전혀 모르니까. 하긴, 이데아 씨는 핸드폰도 최근에 받았죠.”
“혹시 6년 전과 관련 있는 거면…….”
“아, 그런 거는 아니고. 약점을 파훼하는 특수 스킬. 저번에 저희에게 말했던 거 기억나죠?”
3주 전, 공략을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훈련을 하며 새로 습득한 스킬과 심해의 눈(A) 스킬에 대해 사실대로 실토해야 했다. 호들갑을 떨며 대단하다 연거푸 소리치던 하영주와 가윗이 아직까지 생생했다.
“그… 후로 세상이 한창 떠들썩했어요. 인어들의 약점은 찾아보기 어렵고, 또 다양해서 헌터들에게는 긴 골칫덩어리였거든요. 그런데 그걸 처리해 줄 특수 스킬이라고 하니까 눈이 돌아가서 당장 그 헌터 정보랑 위치를 내놓으라고 지… 아니, 성화를 부렸지 뭡니까.”
“지랄이요?”
“못 들은 척해 주시지.”
복도를 지나가던 한 헌터가 못 들을 걸 들었단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권도언이 여상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