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0화
데아는 마지막 손을 뻗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위의 촉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그는 그 위에 올랐다. 창백한 인어의 눈동자가 데아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갔다.
거대한 인어의 눈동자가 데아의 발밑에 있었다. 인어가 고요하게 협곡 바위 위로 올라선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 무슨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신 병동에 들어간 이후에도 매일 인어의 꿈을 꿨다. 처음 1년은 그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깼고, 그다음 1년은 홀로 조용히 흐느끼며 일어났다.
그다음 2년은 꿈속의 인어에게 반격하는 상상을 했고, 마지막 1년, 결국 꿈속에서 붉은 인어를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날카로운 이빨에 막혀서 허무하게 끝난 반격이지만, 그 찰나의 당황한 붉은 눈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서, 그래서 전혀 움직이지 않던 보스 인어가 기지개를 켜듯 거대한 몸을 일으켰을 때도 데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계곡의 물이 주변으로 출렁출렁 넘쳐흘렀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사방이 진동하고 폭포의 물방울이 비산했지만 데아는 품 안의 단도만 잡은 채 인어의 눈동자를 또렷하게 응시했다.
‘그래… 와라.’
“인어가 일어났어!!”
“뭐야?! 땅이 움직여!”
갑작스러운 거대한 자연의 울림으로 패닉에 빠진 헌터들과 놀란 듯 데아를 올려다보는 하영주의 시선 뒤에서, 때를 놓치지 않은 두 인영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권도언이 불러낸 바람을 밟고 백리서가 날아올랐다. 드러난 인어의 맨 등과 어깨를 차례로 짓밟으며 정수리까지 올라선 그가 태양만큼 밝은 검을 들어 올렸다.
일순간 빛에 시선을 빼앗긴 인어의 거대한 눈으로 곧장 검을 쑤셔 넣음과 동시에.
“끼아아악!”
권도언이 가장 낮은 곳에서 검을 휘둘렀다.
“안 피해 줘서 고마워요.”
가볍게 허공을 도약해 데아가 있는 바위 위로 착지한 백리서가 스치듯 읊조렸다.
콰과광!
끼에, 까아악!!
인어가 괴로워하며 협곡을 향해 마구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인어가 잡는 모든 협곡과 거기 매달린 흙이 기다렸다는 듯이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인어의 손을 피해갔다. 백리서의 능력이었다.
짜증을 부리듯 끼아아악, 소리를 지르던 인어가 퍽퍽 협곡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그러나 백리서는 데아를 훌쩍 들어 어깨에 메고 냅다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아!!”
빠르게 올라오는 것과 추락하는 건 다르다. 온몸에 돋아나는 소름과 고양감을 고스란히 느끼며 데아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그때 인어가 휘청하는 틈을 타 다시 한번 바람을 타고 뛰어오른 권도언이 인어를 겨냥했다.
살갗을 베는 날카로운 광풍이 일고, 권도언의 검이 그대로 턱 밑 역린을 꿰뚫었다.
유려한 곡선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인어가 턱을 부여잡으며 피를 토해 냈다. 인어의 눈동자는 여전히 떠나가는 데아를 향해 있었다.
“…….”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인어는 절박해 보였고, 처절해 보였다. 인어의 시선이 데아와, 그리고 그를 안고 있는 백리서에게로 향했다. 인어가 허우적거렸다. 마치 새끼를 지키려는 부모의 발버둥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럴 리가.’
데아는 짧게 부인했다.
끼아아아아!
인어가 거칠게 포효했다. 그 인어의 손이 다시 한 번 더 뻗어졌다.
하지만 이윽고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렸다. 커다란 바위가 계곡 속으로 잠긴 것처럼 거대한 물살이 넘쳐 주변 늪지가 고스란히 휘말렸다. 물에 젖은 헌터들은 서로를 놓지 않았고, 비행 스킬을 가진 헌터는 한 번에 여러 명을 들고 날아가길 반복했다.
권도언은 느긋하게 허공을 밟고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지만, 그의 바지 대부분 또한 이미 물에 젖은 뒤였다. 아직 계곡 속에 살아 있는 인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보스의 처참한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물살이 진정이 되었을 때쯤.
“뭐야?”
“…클리어인가?”
“드디어?”
헌터들의 기대 어린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에 응답하듯 하얀 원형의 게이트가 허공에 깜빡거리며 생성됐다.
던전이 클리어되면 게이트가 생성된다.
“하아…….”
환호성을 지르는 헌터들의 소리가 웅웅거리며 데아의 귓가에 꽂혔다.
비린내가 풍기는 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도 헌터들은 해냈다는 희망찬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이내 사망한 동료 헌터를 바라보며 울먹였다.
헌터들이 어떻게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때였다.
침묵을 지키던 권도언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곧장 데아를 향했다. 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앞 머리카락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 누구보다 잔혹하게 미소 지었다.
약점 파훼라니. 이토록 짧고 손쉽게 보스를 사냥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심지어 1차 게이트의 보스 클리어다. 아직 그 어느 나라에서도 게이트를 클리어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으니 아마 여파의 공략대가 최초일 터.
앞으로 얻게 될 찬란한 명성도 명성이었지만, 권도언은 첫 보스를 사냥한 자신에게 무수히 쏟아지게 될 이득을 계산할 수 있었다. 길드의 위명을 높이고 그것을 활용해 더 많은 권력을 얻고…….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권도언의 긴 속눈썹이 느리게 내려갔다 올라가고, 이내 시원하게 비틀려 올라간 웃음이 인어의 시체를 향했다. 데아를 땅에 내려 준 백리서가 인상을 구겼다.
“표정 관리해. 죽은 사람이 많다.”
“아, 그래. 그렇지. 고마워.”
데아가 피가 튄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권도언은 동료를 다섯이나 잃은 비통한 상황 속에서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는 건실한 길드장으로 돌아가 있었다.
“왜요?”
데아의 썩은 표정을 마주한 권도언이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그는 데아에게 할 말이 있다며 바싹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아까 인어의 약점을 눈치챈 거 맞죠? 덕분에 아주 수월한 사냥이 가능했어요. A급 헌터도 어려워하던 보스를, 심지어 미끼 스크롤을 찢었음에도 아주 좋은 대처를 했더군요. 밖에 나가서 정식으로 헌터 직속 계약을 진행하죠. 그리고 새로 습득한 것으로 추측되는 새 스킬에 대한 이야기도 좀 나누고.”
“예…….”
“이 던전의 성공적인 클리어는 이데아 씨 덕분이에요. 길드장으로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리고 그는 아주 정중하게 인사했다.
“사망자가 다섯이나 나온 건 정말 안타까운 비극이지만… 여기서 멈추지 말고 더 앞으로 나아가야겠죠. 앞으로 이런 게이트가 계속해서 열릴 텐데, 인류의 안녕과 죽은 자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미 늦었어요, 길드장님.”
“뭐가요? 이미지 관리라면 신경 쓰지 말아요. 길드장이라면 다들 이러니까. 물론 아까 본 건 어디 가서 말하진 말아 줘요. 한배를 탄 사이에 섭섭하게.”
“저는 길드장님 배를 탄 적이 없는데요.”
“공략 계약서를 썼잖아요? 그리고 여파보다 좋은 조건을 가진 길드는 아마 없을 겁니다. 애초에 스카우트 조건도 지켜졌고.”
“하… 맞네. 그렇네.”
데아가 마른세수를 했다. 권도언이 환하게 미소하고 있었다.
큰일 났다. 이 사람 본심이 영 새까맣다.
데아가 손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노는 길드장님이 저으세요.”
“네, 그럼요.”
그리고 권도언은 잠시 말을 아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데아 씨는 상전이시니까.”
“네……?”
“무슨 말들 하고 있었어? 이데아 씨. 저런 거랑 가까이 있지 마세요.”
헌터들 속에서 사태를 수습하고 대열을 다시 정리한 백리서가 데아 곁으로 성큼 다가와 권도언으로부터 떨어뜨렸다. 권도언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지만 곧 일 잘하는 개미를 보는 표정으로 백리서를 향해 미소 지었다.
“너도 수고했어. 앞으로 좋은 인재 발굴 부탁하고.”
뭐야, 저 뿌듯한 미소는. 불결하게.
낯선 것을 바라보는 얼굴로 권도언을 경계하던 백리서는 잠시라도 같이 있기 싫다는 듯이 데아를 데리고 게이트 앞으로 달아나 버렸다.
빛나는 게이트 너머로 넘어가려는 순간, 데아는 자신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는 기척을 느꼈다. 같이 싸웠던 헌터들 중 한 명이었다.
“감사해요. 누나 덕분이에요.”
“네?”
“약점을 봤잖아요. 미끼 역할도 엄청 잘 해주었고, 인어가 그렇게 코앞까지 달려드는데 피하지도 않으시고……. 너무 존경스러웠어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귀여운 인상의 남자였다. 분명 힐러였던 것 같은데. 키는 컸지만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었다. 그는 고맙다며, 정말 무서웠는데 살 수 있었다며 큰 눈을 반으로 접고서 계속 수줍게 읊조렸다.
그의 뒤에서 같이 게이트를 넘던 또 다른 헌터들도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얼굴로 데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손끝이 저릿한,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데아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저는 서영호라고 해요. 헌터명은 가윗. 편하게 가윗이라고 부르세요. 통성명도 안 한 것 같아서…….”
“어, 네. 저는 이데아라고…….”
“말 놓으셔도 돼요. 저 아직 고등학생이에요.”
“아니, 그럴 수는…….”
“뭐야, 반말 까요. 나한테도 까도 돼!”
그때 하영주가 난입했다. 친밀하게 데아에게 어깨동무를 시도하는 그의 눈 아래에도 데아를 향한 고마움과 대단한 것을 보는 놀라움이 있었다.
또 손끝이 저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데아는 속이 간질거리는 이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뭐지? 이런 낯간지러운 시간은?
“데아야. 우리 생사를 함께한 동료 아니냐. 자꾸 내외하면 이 언니 섭섭하다.”
“어, 어…….”
“옳지. 영주 언니라 불러도 돼.”
나쁘진 않지만… 빨리 이런 시간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데아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소리쳤다.
“아, 알았어. 영주 언니!”
“그래, 그래.”
“저는요!”
“그래, 가윗!”
“네, 누나!”
데아는 서둘러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반긴 건.
찰칵! 찰칵!
수십 명의 사람들과 요란하게 번뜩이는 카메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