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7화
이쯤 되면 모른 척하고 갈 길 갈 법도 한데 사람들은 데아를 그렇게 두지 않았다. 처음 만나 친해진 하영주조차 데아에게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새로운 전학생의 반 창문에 얼굴을 들이미는 것 같은 짓을 왜 하는 거냐며, 소식을 전해 들은 권도언이 웃었지만, 역시나 그 사실 또한 오직 데아만 몰랐다.
그만큼이나 이데아는 묘한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유난히 검은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시리도록 하얀 피부에 깊은 눈매, 의도하지 않았으나 고압적인 눈길.
숨겨진 재벌 3세가 아니냐, 엄청난 혈연과 연줄이 있는 게 아니냐, 연예인 누구의 가족이라서 몰래 입단을 한 게 아니냐 등의 많은 추측이 쏟아졌지만 정확한 건 뭐 하나 없었다.
“아, 이데아 씨…….”
생각을 마친 헌터는 다시 눈앞의 서늘한 미인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말을 걸다니.
크흠, 잠시 헛기침을 한 헌터는 애써 말을 이었다.
“뭐라고 말씀하셨죠?”
“이번 던전 난도가 많이 높냐고요. 이제까지 공략을 시도했던 길드에 A급 헌터도, S급 헌터도 있을 텐데 3주가 되도록 공략을 못 했잖아요.”
“어… 던전의 등급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없을걸요. 그리고 공략이 느린 이유는… 아무래도 처음이잖아요.”
헌터가 난처하게 웃었다.
“인어를 끊임없이 죽여도 보스 인어가 나오는 조건이 뭔지도, 공략 방법도, 뭣도 몰랐는데……. 등급이 높다고 무조건 빠르게 공략에 성공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헌터의 미소에는 숨길 수 없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그때 주변의 누군가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인어들! 던전 밖으로 나온 인어들은 다시 못 들어가게 하나?”
[던전의 보스를 사냥하십시오. 클리어한다면 우리를 탈출한 모든 인어들이 자동 회수됩니다.]
[제한 시간 : 30일]
데아는 병동 안에서 눈앞에 떠올랐던 시스템의 문구를 기억해 냈다. 데아가 입을 열었다.
“보스 인어를 죽이면 돼요.”
“뭐?”
“처음에 상태 창에 떴잖아요.”
“그러고 보니, 어?”
“왜요?”
“그쪽도 무슨 문구 같은 거 봤어요?”
“문구요?”
옆에 서있던 얼빵하게 생긴 헌터가 당황한 얼굴로 데아를 바라보았다.
“그 상태 창 위로 떠오른 문구 말하는 거 아녜요? 그거 A급 이상 헌터한테만 떴다고 들었…….”
“이데아 씨.”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데아의 어깨를 휙 잡아 돌렸다. 백리서였다. 그리고 백리서 어깨 너머에 전직 유도 선수 하영주가 있었다.
“어! 데아……!”
데아를 알아본 하영주가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었다. 자신의 상사 백리서가 앞에 있다는 걸 알자마자 놀라 눈을 부릅뜨고는 손을 거뒀지만.
백리서의 등장에 데아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헌터들이 눈치를 보며 빠져나갔다.
“제가 한 말 기억하죠? 우선 인어를 공략하기보다는 멀리서 지켜보는 시간을 갖자던.”
“아, 네.”
“저번에 공략을 한번 다녀온 입장에서 말을 하자면, 인어가 나오는 길은 사실 정해져 있기에 안전하게 인어를 보기만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야기 들었죠?”
인어가 어느 정도 처리되자 보스가 나왔다. 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공략은 보스 토벌전이 될 수도 있어요. 갑자기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몰라요. 선택은 데아 씨가 하세요.”
갈 건가요? 말 건가요?
백리서의 눈이 시험하듯 빛났다. 채도 높은 황금 같은 노란 눈을 바라보며 데아는 입을 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목숨은 하나다. 가족이 지켜 준 하나뿐인 목숨. 그리고 이건 그 가족을 위한 일이었다.
“참가하겠습니다.”
백리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도… 우선은 구석에 있다가, 위험하다 싶을 때 밖으로 나올게요.”
데아가 머쓱하게 마저 말을 이었다.
멀리서 지켜보고 영 못 싸우겠다 싶으면 게이트로 나갈 것이다. 붉은 인어도 살아 있어야 죽일 수 있는 거니까.
남이 들으면 현장 체험이냐고 비아냥댈 말이었지만 데아의 결심은 굳건했다. 백리서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예 위험한 보스 공략 팀에서 빼버리고 싶은데, 그렇게까지 나오니 어쩔 수 없네요. 하지만 꼭 약속 지켜요.”
제가 나가라 하면 고민하지 말고 나가세요.
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게 공격 대장님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신 조건이었는걸요.”
“뭐어… 그건 그렇죠. 그런데 편하게 릴림이라고 부르세요.”
“릴림이요?”
“네. 제 헌터명.”
헌터는 모두 헌터명을 갖는다. 본명과는 다른 가명. 헌터만이 가질 수 있는 상징적인 이름이었다. 헌터명과 본명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다르게 등록했다.
“아니면 리서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저희 길드는 상하 관계가 뚜렷한 수직 문화에 반대하거든요.”
어깨 너머에서 하영주가 상사 백리서를 보고 슬슬 피했지만 데아는 모른 척했다.
“네, 리서 언니…….”
헌터가 된 지 얼마 안 된 데아로선 아직은 헌터명보다는 이름이 편했다.
백리서가 싱긋 웃었다.
“이번 던전과 탈출에 대해서 더 설명해 줄게요.”
백리서가 말한 건 이와 같았다.
첫째, 게이트는 던전을 클리어하기 전까지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동 스크롤’을 사용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게이트가 짧게 생성되는데, 게이트가 유지되는 시간에 따라 하급, 중급, 상급으로 나누어진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라고.
둘째, 기본적으로 배부되는 건 하급 이동 스크롤이고, 딱 2초 동안 열린다고 한다. 어느 정도 강한 인어를 사냥하면 많이 드롭되는 아이템이지만 애초에 강한 인어를 사냥할 수 있는 강한 헌터의 수가 적어 그마저도 많이 없다고 한다.
“다른 분들도 다 이동 스크롤을 가지고 가시는 거죠? 보스가 나타나도 크게 다치시면 안 돼요.”
보스가 나타나면 토끼겠다는 사람이 하기엔 양심이 없는 말이었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러자 백리서가 웃었다.
“이동 스크롤이 워낙 가짜가 많고 엄청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 다 가지진 못해요. 도중에 무단이탈할 가능성도 있고. 그래서 따로 관리하시는 분이 한 번에 관리하세요. 걱정 마세요.”
“아…….”
“그분이랑 같이 공략 나간 게 한두 번도 아니고, B급 헌터이기도 해서 믿을 만한 분이세요. 혹시 모르는 사태를 대비해서 권도언이랑 저는 따로 한 장씩 더 가지고 있지만. 그럼 정혁규 씨!”
백리서가 부르자 정혁규라는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와 손가락만 한 크기의 돌돌 말린 이동 스크롤을 데아에게 건네주었다.
“하급 이동 스크롤이에요. 찢으면 실행돼요.”
“…저한테 막 줘도 돼요?”
“혹시 모르니까요. 그리고 제가 직접 스카우트를 했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겠죠? 괜찮아요. 사실 다 권도언 예산이라.”
“거기까지 진행됐으면 바로 곧바로 계약 진행하죠.”
그때 권도언이 데아와 백리서에게 다가와 허공에 손짓을 했다. 아마 인벤토리에서 꺼낸 것으로 추정되는 하얀 종이가 데아의 앞에 훅 늘어졌다. 고급스러운 필체로 적힌 그것은 정식 헌터 계약서가 아닌, 1회성 공략 계약서였다.
“정식 계약과 인터뷰는 공략에서 살아 돌아오면 해요.”
권도언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는 자신이 6년 전의 생존자라는 사실을 굳이 내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데아를 배려하고 있었다.
겉은 차갑고 딱딱한데 의외로 속은 배려심이 깊다.
이런 걸 뭐라 부르더라.
“겉바속촉…….”
“네?”
“아뇨. 아닙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아가 다시 계약서로 눈을 돌리려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이동 스크롤을 건네준 정혁규였다.
“……?”
정혁규는 다소 산만해 보이는 남자였다. 굳건한 나무처럼 서있는 권도언과 백리서, 그리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말을 섞는 데아를 바라본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잠시 후, 계약을 완료하고 나중에 보자며 권도언과 백리서가 떠나자 그가 데아에게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저… 이데아 씨. 제가 이동 스크롤 담당이거든요. 근데 아까 제가 이동 스크롤을 잘못 드린 것 같아서요…….”
“네? 아, 네.”
정혁규가 새롭게 건네준 이동 스크롤은 이전에 받은 것보다 더 낡고 꼬깃꼬깃했다. 데아는 별생각 없이 새로운 이동 스크롤을 점퍼의 안주머니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 ◈ ◈
여의도 한강 공원에서는 이미 많은 수의 구급차와 경찰차, 그리고 사람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게이트 앞에서 무장한 사람들에게 공략 허가증을 내보이는 권도언 너머로 하얗게 비산하는 게이트가 보였다.
‘저게 게이트구나.’
실제로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 컸다.
별무리가 쏟아지는 것처럼 원형의 빛 테두리가 하늘거리며 깜빡거렸다. 게이트가 열렸다는 표시였다.
“자, 갑시다.”
백리서가 검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자 다른 헌터들이 좌우로 물러나 주었다. 거침없이 걷는 그를 필두로 많은 헌터들이 동시에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트가 더 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무리 속으로 검은 장검을 든 권도언과 백리서가 한꺼번에 뛰어들었다. 그 뒤를 이어 게이트를 향해 몸을 던지는 수많은 헌터들 속에서 데아는 자신의 단도를 고쳐 쥐었다.
‘지켜보기만, 지켜보기만 하고 나오자.’
리서 언니의 말이 맞아. 섣불리 나서다 죽을 수 있어. 내가 정말로 싸울 수 있을지, 인어를 직접 마주해도 떨지 않는지 확인만 하고 나오는 거야.
데아는 마지막으로 게이트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물론, 데아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