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5화
길드에 가면 합법적으로 인어를 사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데아는 침착하게 오렌지주스를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저를… 뭘 보고요?”
“6년 전 인어를 직접 봤고, 또 살아남은 최초의 생존자라면 가치는 충분하죠. 상징적으로도, 혹은 헌터로도.”
그의 말에 권도언이 눈썹을 움찔거렸지만 이내 나쁘지 않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길드가 아직 신생이라… 각성자 찾아다니는 것도 일이지. 몇 명은 네 재량으로 스카우트해도 좋아.”
“응, 고마워. 그리고 이데아 씨는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혹여나 헌터로서 크게 활약을 하지 못한다 해도, 던전에 꼭 들어가지 않는 부서에 배치해 드릴 수도 있거든요.”
“아… 사무직.”
“…비슷하죠. 나쁜 제안은 아닐 거예요. 평생 병동 안에 있을 순 없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성인이 되었는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병동 안에 계속 머물 수 있는 건 순전히 국가 지원금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평생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사냥. 여전히 인어를 마주해야 한다는 건 손끝이 식는 두려운 일이었지만 5년 전과 지금은 달랐다. 어젯밤, 물에 젖은 종이 박스처럼 주저앉은 나무 협탁이 데아의 뇌리를 스쳤다.
숨이 가빠졌다. 기회가 왔다.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너무 즉흥적으로 스카우트하시는 거 아니에요?”
손아귀에 잡은 잔이 떨려 안에 담긴 오렌지주스가 출렁였다.
‘인어 사냥을 하다 보면 그 붉은 인어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괜찮아요. 떠도는 마력을 보면 이 사람이 어느 정도 되는 각성자인지 딱 보이죠. 신기하죠? 각성하면 이런 능력도 생기나 봐요. 관련 스킬인가?”
“나한테는 그런 말 없었잖아.”
“내가 너한테 이런 귀한 정보를 왜 말해?”
친한 친구처럼 잠깐 투닥이는 권도언과 백리서를 지켜보며 데아는 짧게 침묵했다.
“혹시 우리 길드에 들어올 생각 있으면 헌터 등급을 말해 줘요. 분명 B 이상이죠? 장담해.”
백리서는 능청스럽게 싱긋 웃었지만 그 순간 데아의 속은 싸늘하게 식었다. 자신의 헌터 등급은 그게 아니었다.
“혹시 헌터 등급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아, 그렇죠.”
각성자는 F등급부터 E, D, C, B, A, 그리고 S등급으로 나눠진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등장한 수만 명의 각성자 중 S등급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본인들이 바로 그 극소수라며 백리서와 권도언은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전 세계에 극소수라는 S등급 두 명이 꼬질꼬질한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이 허름한 정신 병동까지 행차했다는 뜻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정신 병동에 갇힌 스물한 살의 자신에게.
이건 기회였다. 그건 잘 알았다.
그러나…….
그러나 그것보다 더한 압도적인 무력감이 그 순간 데아의 뇌리를 지배했다. 솔직히 말해서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참을 수 없이 무서웠다.
하지만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데아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갈게요.”
“어! 정말요?”
“대, 대신 부탁이 있어요.”
데아의 눈을 지켜보던 권도언이 조용히 픽 웃었다.
“이럴 땐 부탁이 아니라 조건이 있다고 해야죠. 부탁하는 건 우리인데 그쪽이 왜 부탁을 해.”
낮게 읊조리는 음성을 듣자 반사적으로 긴장이 풀렸다.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편안하게 늘어졌다.
맞는 말인데 재수가 좀…….
“인어를 제가 잘 잡지 못해도… 제 실력이 형편없어도, 계속 인어를 잡게 해주세요.”
권도언과 백리서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권도언이 이것 보라는 듯 비식 웃었다.
“만나야 하는 인어가 있어요.”
데아는 어렵게 입술을 열었다.
“인어를 계속 사냥하다 보면 언젠가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그 인어를 반드시 죽일 수 있도록…….”
“6년 전에 만났던 그 인어군요.”
멈칫, 데아의 손이 굳었다. 알 만하다는 듯 권도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웃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는다.
권도언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럼 바로 실전부터 들어가는 게 좋겠죠.”
백리서가 당황스러운 눈길로 권도언을 돌아보았다.
“너 설마…….”
“이번 공략 팀에 들어가 볼래요? 바로 싸울 수 있어서 데아 씨는 좋고, 우리는 인력 하나 더 늘어서 좋고.”
그때 백리서가 빠르게 말을 끊었다.
“…한강 인근 공원에 위치한 하얀색 게이트 보셨죠? 지금 권도언 길드장님은 그 게이트에 투입될 공략 팀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가 짧게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 공략 때는 멀찍이 지켜보기부터 먼저 하세요.”
“네?”
“인어와 싸우는 법을 눈으로 지켜보는 시간은 있어야죠. 안전을 우선으로. 일단은 멀리서 인어를 지켜보고, 할 수 있겠다 싶으면 그때부터 나와서 싸워요. 그때는 던전 공략 팀에 자주 넣어 줄 테니까.”
“…….”
“6년 전 그 인어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데아 씨가 겪은 일이 작은 일도 아니고, 또 공략이 쉬운 일도 아니니까요. 우선 조심해 보자고요. 나중을 위해서.”
“…네.”
자신을 신경 써주는 거였다. 데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류의 걱정이 싫진 않았다.
“인터뷰도 하고요?”
“아, 네. 당연하죠. 하지만 얼굴 노출은 안 해요.”
어차피 평생 정신 병동 안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자 권도언이 만족스러워하며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그럼 지금 당장 가죠.”
지금 당장? 아무리 가자고 말을 얹었어도 이렇게 빠르게 일이 처리될 일인가?
데아는 주춤거렸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와 묘하게 안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백리서가 곧장 옆으로 성큼 다가와 환영한다며 어깨를 토닥였다.
유일하게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자신의 헌터 등급이 B등급도 S등급도 아닌 N이라는 것.
‘최하위 등급 F보다 몇 단계 아래인 거지?’
그러나 데아는 협탁을 간단하게 으스러뜨렸던 자신의 힘을 믿었다.
아직 측정이 덜 됐겠지. 분명 이 사람들은 아는 것이 있을 것이다. 따라가서 천천히 물어보자.
그리고 그날 연고 없는 20대의 데아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퇴원 절차를 밟았다. 애초에 ‘인어’에 관련된 증언이 헛소리라 치부되어 병원에 갇혔던 터라 그 증언이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갖게 된 지금, 더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게 권도언의 주장이었다.
잘 가라면서 살갑게 배웅하는 병원 사람들을 뒤로하고 데아는 검은 세단 위로 몸을 옮겼다.
‘이런 차는 드라마에서밖에 본 적이 없는데…….’
고작 3주 된 길드면서 돈이 많은가 보다.
푹신한 시트를 꾹꾹 눌러보며 안전벨트를 매자 운전석에 백리서가 탔다.
‘권도언, 그 사람은?’
그때 데아가 앉아 있던 오른쪽 뒷좌석 문이 달칵 열리더니 권도언이 황당한 눈으로 데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다시 문을 닫고는 조수석을 열고 차에 올라타는 것이 아닌가.
어리둥절해서 바라보자 백리서가 킥킥, 하고 작게 웃고 있었다. 이때는 몰랐지만, 오른쪽 뒷자리가 사실 상석이었다는 걸 데아는 먼 훗날에야 알 수 있었다.
“자아, 그럼 이제 헌터 등급을 말해 줄 생각이 생겼어요?”
차에 탄 지 몇 시간째, 수도로 들어와 수많은 빌딩들을 홀린 듯이 올려다보고 있던 데아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
N등급.
데아는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말해 봐요. F등급이어도 실망하지 않을게. 어차피 헌터로 활동하려면 헌터 등록이 필요해요. 등급 측정기가 완성되면 나중에 다 뜨니까. 말해 봐요.”
“저는…….”
“네.”
“조금 등급이 이상한데.”
“이상하다고요? 어떻게요?”
권도언과 백리서의 얼굴에 동시에 흥미가 스쳐 지나갔다. 데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말해도 되는 거겠지?
“N이라고 나와요.”
“N?”
“그건 또 뭐지…….”
백리서가 조용히 읊조리자 권도언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창틀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이데아 씨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고, 잘 모르겠지만 수상하기 짝이 없어 보이긴 하네요. 백리서가 하는 말 들어서는 F등급보다 아래일 것 같지는 않은데. 물론 저는 그런 특이점을 퍽 흥미롭게 생각한다지만…….”
권도언이 뜸을 들이다 이어 말했다.
“저어기 높으신 곳에는 새로운 세력인 헌터와 길드가 크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거기에 알 수 없는 미지의 등급까지 나타났다 하면 어떻게든 알아보고 간섭하려고 방방 뛰겠죠. 귀찮은 종자들.”
데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는 천연덕스럽게 계속 말을 이었다.
“등급 측정기가 완성될 때까지 등급이 변하지 않으면 등급 측정기를 조작할 방법을 알아내야겠네요.”
“조작이요?”
“온 세상에 N등급이 나타났다고 하면 그때부터 이데아 씨는 물론이고 저희 길드까지 쌍으로 유의 대상 안에 들어갈걸요? 나처럼 미남도 아닌 늙은 노인네들이 하루 종일 우리를 달달 볶을 텐데, 그런 걸 원해요?”
아, 예…….
표정을 왕창 일그러뜨리는 백리서를 뒤로하고 권도언은 악동처럼 웃었다. 차의 사이드 미러 너머로 떨떠름해하는 창백한 인상의 여자가 눈을 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