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4화
게이트가 터진 그날은 생각보다 유쾌한 날이기도 했다.
오전에는 정신 병동의 홀에서 만난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딸이 면회 와서 줬다며 몰래 주머니에서 귤을 서너 개 꺼내 데아에게도 나눠 주었고, 오후에는 몰래 외출하기 위해 복도 구석을 살금살금 걷던 옆방 여자 환자의 익살맞은 윙크를 마주했다.
처음에는 인상이 사납고 까칠해 보인다며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겉으로만 보기에 왜 정신 병동에 갇혔을지 모를 사람들. 인터넷과 차단된 그 사람들은 이데아가 누군지 모른다. 그들은 가끔 예민했지만 대체로 친절했다.
정신 병동의 창문은 차가웠고, 바닥은 서늘했지만 데아는 생애 첫 기억인 그 창고와 비교하면 아주 살 만한 곳이라고 늘 생각했다.
물론 초반엔 열네 번 정도 탈출을 시도하다 잡혔다지만.
그와 더불어, 새벽 세 시. 눈앞에 떠오른 창만 아니었더라면.
[각성자 상태 창을 확인하시겠습니까?]
게이트가 처음 발발한 그날 새벽, 상태 창이 나타났다.
“…….”
데아는 한참을 굳어 있다가 반투명한 창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러자 곧장 상태 창이 펼쳐졌다.
[상태 창]
[등급 : N]
이데아―헌터명 : 미정
마력 : 21
체력 : 20
생명력 : 30
속도 : 21
―획득한 스킬―
[물속의 발자취(A) : 물속에서 제약 없이 빠른 행동력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심해의 눈(A) : 당신은 승리할 것입니다.]
―미획득 스킬―
[타고난 ○○○](A)
[바다의 ○○](S)
[○○버린 ○○를 ○○○](??)
[○○○](??)
[우리의 ○○○ ○○○](?)
[○○○ ○○○ ○○](??)
“…미친 거 아니야?”
드디어 내가?
정신 병동에 억울하게 들어왔어도 절대 미치지는 말자고 다짐했었는데!
데아는 상태 창 이곳저곳을 눌러 봤지만, 갑작스레 생긴 창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머리를 박아도 그대로 통과될 뿐이었다.
혹시나 이런 창에 대해 아냐고 아무나 불러 물어보면 그때는 정말 돌아가지 못할 길을 건너게 될 것 같아, 데아는 밤새 끙끙 앓으며 사라지지 않는 창과 함께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상태 창은 사라져 있었지만 데아는 한강 인근 공원에서 인어에 의해 사망한 남성을 보도 중인 뉴스를 보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으며, 한강 속으로 모습을 감춘 수십 종의 인어 형태의 괴생명체가 CCTV로 확인되었…….
인어.
데아의 손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컵 안의 물이 울렁이자 이상 상태를 눈치챈 옆 병실의 환자가 서둘러 컵을 대신 쥐여 주고 소리쳐 간호사를 불렀다. 그동안 데아는 눈앞에 펼쳐지는 불투명한 상태 창을 또다시 목격했다. 새로운 문구가 쓰여 있었다.
[각성한 헌터만이 던전에 입장해 인어를 사냥할 수 있습니다.]
[던전의 보스를 사냥하십시오. 클리어한다면 게이트를 탈출한 모든 인어들이 자동 회수됩니다.]
[제한 시간 : 30일]
[시간이 경과할수록 더 많은 인어가 우리를 빠져나옵니다.]
[제한 시간 안에 클리어하지 못한다면 던전 포화가 진행됩니다!]
[몇몇 인어는 식인을 즐깁니다.]
[서두르십시오.]
서두르십시오.
그 글귀에 온몸의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 어쩌라고. 싸우라고? 내가? 갑자기?’
티브이로 보이는 CCTV 안의 인어는 6년 전의 인어만큼 아름답지도, 그와 닮지도 않았지만 일반 사람이 상대하기에 턱없이 강력해 보이는 건 그때와 똑같았다.
꼬리가 두 개인 인어, 물고기와 더 닮아 보이는 인어, 크기도 모양도 각양각색인 징그러운 생물체들이 꾸물거리는 티브이에서 간신히 시선을 돌려 병실 안으로 도망친 지 3주.
‘그가 죽었으면 좋겠어.’
해일이 밀려오던 날의 꿈을 꿨고, 데아는 인어를 향한 살의와 함께 잠에서 깼다. 침대 시트가 온통 땀범벅이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헌터가 되면 힘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건가? 인어를 죽일 수 있게 되는 건가?’
데아는 정신없이 일어나 어두운 병실을 사정없이 배회했다.
‘나에게 힘이 생긴 건가?’
데아는 상태 창을 다시 켰다.
마력 : 21
체력 : 20
생명력 : 30
민첩 : 21
이렇게만 봐서는 힘이 강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데아는 단단한 나무 협탁 모서리를 손으로 잡고 힘을 주었다. 힘을 시험하기 위해 가볍게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우지끈!
“……!”
힘을 가한 순간, 큰 소리와 함께 협탁이 무너져 내렸다. 손아귀에 들린 나무 조각과 부서진 협탁을 번갈아 보던 데아가 처음으로 생각한 건 가능성이었다.
한강으로 숨어든 수십 마리의,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운 인어. 그들에게 멍하니 당하지 않을 것 같다는 가능성. 이제 그들을 죽일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
헌터가 된다면, 그래서 꾸준히 그들을 사냥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붉은 인어를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소리에 놀라 달려온 간호사에게 협탁이 낡아 혼자 넘어졌다는 거짓말을 하며 데아는 그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
자신의 발목에는 아직도 그날의 흉터가 남아 있었다.
간호사가 가고, 데아는 다시 상태 창을 바라보았다. 세 개의 스킬과 그 밑의 미습득 스킬이 눈에 띄었다.
[물속의 발자취(A) : 물속에서 제약 없이 빠른 행동력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심해의 눈(A) : 당신은 승리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옆의 알파벳은 등급인가? A등급이면 그렇게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미획득 스킬―
[타고난 ○○○](A)
[바다의 ○○](S)
[○○버린 ○○를 ○○○](??)
[○○○](??)
[우리의 ○○○ ○○○](?)
[○○○ ○○○ ○○](??)
미획득 스킬은 더 가관이었다.
‘이게 뭐람.’
물음표와 빈칸투성이인 알 수 없는 미지의 스킬을 바라보며 데아는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맨 위에 있는 두 개의 스킬엔 그래도 등급이 각각 쓰여 있었다.
‘뭐지? 지금은 미획득이지만 이 중에선 얻을 가능성이 가장 많은 스킬이라는 건가?’
데아는 힘없이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때 무너진 협탁이 발에 걷어차이며 큰 소리가 났다.
“이데아 환자분! 무슨 소리가 났는데,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 아니요!”
데아는 후다닥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상태 창을 응시하며 밤을 보냈다. 새벽이 깊도록.
◈ ◈ ◈
이튿날, 데아는 우중충한 낯빛으로 면회실에서 정장을 입은 사람 둘을 맞이했다.
“죄송합니다.”
정돈되지 않은 짧은 검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긴 데아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툭 사과의 말을 뱉었다.
고급스러운 슈트를 입고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차가운 인상의 남자는 병동 안에서만 갇혀 지냈던 데아도 저도 모르게 감탄할 만한 미남이었다.
날렵하게 올라간 눈매와 곱게 휘어지는 입꼬리가 언뜻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지만 데아는 채도 낮은 남자의 회색 눈동자를 보며 인상을 굳혔다. 숨기는 게 많은 사람이 이런 눈빛을 한다.
정신 병동 아래에서 뭔가를 능숙하게 숨기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데아가 자연스럽게 상대를 파악하던 그때, 남자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왜죠?”
“6년 전에 인어를 뭐… 예측한 사람으로서 인터뷰를 좀 해달라…….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언론에 오르고 싶지 않거든요. 정말 그 어떤 일로도요.”
데아는 두 장의 명함을 손가락 사이로 휙 돌렸다.
길드 ‘여파’의 길드장 권도언. 그리고 공격 대장 백리서.
“저희 길드 ‘여파’는 국내 최초, 그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빠르게 등록을 마친 길드입니다. 무단으로 사진을 업로드하거나 악질적인 기사를 올리고…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백리서는 흰빛에 가까운 금발을 짧게 정돈한, 시원한 인상의 여자였다. 신비로운 노란 눈동자가 의뭉스럽게 휘었다.
외국인인가.
이데아는 시선을 비켜가며 툭 대꾸했다.
“그러니까 3주 된 길드를 믿으란 말이죠.”
“뭐, 게이트와 던전이 나온 게 그때니까요. 저희와 인터뷰를 해주신다면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이데아 씨의 6년 전 진실 규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중충한 인상의 사람에게 말은 잘한다 싶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왜 길드에서 인터뷰를 하나요? 기자도 아니고.”
“신생 길드의 좋은 이미지라는 거죠. 지금 전국에서 6년 전의 강원도 해일 생존자가 진짜 인어를 보고 예언을 한 게 아닌가 하는 불씨가 타오르고 있거든요. 실시간 검색어가 다 그 얘긴데.”
“여기서는 인터넷을 못 해서요.”
“당시의 언론 기사나 동영상이 재조명되고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데아 씨를 찾고 있죠. 저희도 데아 씨를 찾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지금은 이데아 씨의 말을 아무도 헛소리라 치부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소문의 생존자를 직접 찾아가 정중하게 인터뷰를 하고, 인어에 대한 정보를 얻어서 인어에 대해 널리 알리면 이데아 씨에게도, 길드 차원에서도 좋은 그림이 되지 않을까 하고… 길드장님께서 생각하셨는데.”
남자, 권도언의 눈매가 불만스럽게 가늘어졌다. 그때 백리서가 데아를 보며 활짝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인터뷰만 하기 아깝네요. 이데아 씨, 각성하셨군요.”
오렌지주스를 홀짝이던 데아의 손이 우뚝 멈췄다. 권도언도 그건 몰랐다는 듯이 놀란 표정으로 백리서를 돌아보았다. 데아의 눈에 경계가 물씬 차올랐다.
“…제가 각성한 줄 어떻게 아셨어요?”
“각성을 한 사람은 주변에 흐르는 마력부터 다르거든요.”
“마력이요?”
수상쩍어하는 데아를 안심시키고자 백리서가 유려하게 미소했다.
“네, 마력. 우수한 인재를 알아보고 팀을 짜는 건 공격 대장인 저의 일이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백리서가 잠시 침묵했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데아 씨를 길드 ‘여파’로 스카우트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