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5 스쿠타투해에서 빛난 머포크의 전사 (46/51)

chapter 45 스쿠타투해에서 빛난 머포크의 전사

미트라카 제국의 남쪽 국경지대 카타로드.

얼핏 보면 젊은 부부와 자식들로 보이는 네 사람이 제국을 향해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한 사내는 2m에 조금 모자라는 장검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는데,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끈으로 묶어둔 검이 좌우로 팔랑거렸다.

키나비의 검.

수혁은 어깨에 매달린 키나비의 검을 빼어 들었다.

검을 보자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삼합회의 테러로 구천을 헤매다 만났던 분들… 마계진마 구일행과 나차태자 장삼병 어르신들.

그분들에게 검술과 무술을 배웠다.

지난 며칠 간 각지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제국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장면은 한편의 영화 같기도 했고, 한 편의 게임 같기도 했다.

바스타드 검, 그레이트 스피어, 스파이크 건틀렛, 브론드 실드 그리고 은빛 갑주들과 기병들.

수혁은 파이온 게임을 즐길 때의 아이템들을 떠올렸다.

제국을 향해 달려가던 용병 일행을 붙잡고 무슨 일인지 물었을 때 ‘악마의 군단이 깨어났지. 이제 머지않아 큰 전쟁이 일어날 거야.’라고 그들은 말했다.

수혁은 구일행과 장삼병 그리고 각종 게임 아이템들이 자신에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동안 밤만 되면 미영의 환각증상은 시작되었다.

지독한 색녀로 변하는가 하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어둠속을 향해 걸어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마을에서는 예전처럼 좀비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수혁과 마을에서 만난 남매들을 잠 못 이루게 했다.

두두두두!

수혁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멀리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고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또 용병들인가?”

두두두두!

그 소리는 조금씩 가깝게 들려왔고 머지않아 몇 개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깃발에는 포효하는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말 위에 올라타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황금빛 투구와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외모로만 봐서는 며칠간 보아온 용병들과는 뭔가 다른 기운이 있어 보였다.

“제국으로 가시나 보죠?”

수혁은 말 위에 올라 자신을 내려다보는 기사들에게 물었다.

“그렇소. 당신은 이런 시국에 다른 곳으로 피난가지 않고 왜 제국 방향으로 가는 거요? 그것도 가족들을 이끌고 말이오.”

말해놓고 보니 아들, 딸로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피부색과 머리카락 색이 너무 달라서인지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싸우러 가는 길이오.”

“푸하하하.”

갑자기 투구 위에 걸쳐진 얼굴 가리개를 들어 올린 기사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수혁을 내려다봤다.

180cm 정도 되는 키, 다부진 체격이지만 동방인으로 보이는 얼굴, 너덜너덜하고 희한한 복장에 기다란 검 하나를 들고 있는 사내가 전쟁에 참여한다고 하니 귀족 출신인 그들에게는 같잖게 들렸으리라.

“왜 웃는 거요?”

“전쟁은 애들 소꿉장난이 아니지…….”

발끈.

수혁의 이마에 뇌전 모양의 핏줄이 생겼다 사라졌다.

“후후, 우리는 펠젠티의 검은 사자 기사단이오. 그럼 전쟁터에서 봅시다.”

“자, 잠깐!”

말머리를 돌려 사라지려는 그들을 수혁이 붙잡았다.

“……?”

“우리를 제국까지 태워다주실 수 있겠소?”

“어허… 이 사람이.”

“나는 엘레하라는 엘프와도 아는 사이고…….”

“하하하하!”

“엘레하? 그런 엘프도 있었소? 그럴듯한 말을 할 거면 차라리 라드리엘 왕을 안다고 하시지 그러셨소.”

기사들은 수혁 앞에서 한참을 낄낄거렸다.

“부탁이오. 제국까지만 태워다주시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소.”

“또 누굴? 이번에는 헤르라트 사령관이나 오퍼도버 경이라도 만나겠다고 말하는 거 아니오?”

“그렇소. 옵바인지 돕바인지… 그 사람을 꼭 만나야 하오.”

몇 명의 기사들이 또다시 웃으며 검은 사자 기사단의 단장을 바라보자 단장이 고갯짓으로 그들을 태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좋소. 단장의 명령이니 제국까지만 태워다드리지요.”

“그런데 당신은 왜 꼭 제국으로 가려고 하는 거요?”

어떤 기사의 질문에 수혁이 한참을 침묵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시작된 전쟁이니 내 손으로 끝을 내겠소.”

그동안 한참을 낄낄거리던 기사들이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수혁을 바라봤다.

하지만 약 10초의 침묵이 흐른 후 또다시 폭소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이거 정말 재미있는 분이구만.”

관자놀이 옆에다 검지를 갖다 대고 빙빙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발끈.

자기보고 미쳤다고 하는 사람을 보며 발끈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수혁은 기사의 얼굴에 맹합연포권이라도 날려주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어찌 됐든 일렉트라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방해한 것은 수혁 자신이니까.

* * *

미트라카 제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한 성문 밖에는 각지에서 몰려온 병사와 용병들 그리고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문과 남문에는 엘프의 군대와 드워프의 군대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는데, 그들을 구경하러 몰려든 인간들로 서문과 남문은 유난히도 북적거렸다.

수혁은 자신을 제지하는 병사들을 물리치며 미영을 데리고 제국의 수도로 걸어 들어갔다.

수혁이 제국의 수도 아몬의 노이슈반 황궁 앞까지 쳐들어갔을 때 황궁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수혁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놈이냐?”

“오퍼도버라는 자를 만나야 하니 비켜주시오.”

수혁의 목소리에는 비키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무언의 협박이 담겨 있었다.

“하하하, 이거 잘하면 치겠는걸? 이것 봐. 이쪽으로 와봐.”

병사는 거만하게 웃으며 말했으나 눈앞의 사내에게서 풍겨오는 기운에 눌려 주위에 구원을 청했다.

“뭐야, 너는!”

“참나 이거, 또 힘쓰게 만드시네.”

그때 병사들 중 한 명이 미영의 어깨에 새겨진 문신을 발견하고 고함을 질렀다.

“위리놈의 낙인이다… 아, 악마들! 놈들을 붙잡아라!”

처처척!

순식간에 병사들이 수혁과 미영 그리고 두 꼬마를 둘러쌌다.

“감히 여기가 어딘지 알고…….”

“그러고 보니 동방인들… 살수들일지도 모른다. 죽여라!”

슈슉!

다짜고짜 창날이 수혁과 미영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 수혁이 등에 메고 있던 검을 잡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투두둑!

어찌나 빠른 쾌검이었던지 몇몇 병사들은 수혁이 검을 휘둘렀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뒤로 물러나야 했다. 자신들의 창자루가 모조리 잘려 나간 채 창날이 땅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노, 놀라운 쾌검이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소드 마스터 정도… 아냐, 아냐… 그 이상일지도…….’

그때 병사들의 등 뒤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주먹질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검술도 제법이구나, 너.”

결코 좋아하진 않지만 반가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엘프의 왕 라드리엘의 딸 엘레하였다.

“엘레하!”

엘레하를 더 반기는 것은 수혁이 아닌 미영이었다.

며칠간 동방인이라는 이유로 당한 서러움 때문이었는지 아는 사람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미영 씨, 오래간만이에요.”

엘레하가 늘씬한 허벅지가 드러난 갑주를 입은 채 계단을 내려서자 병사들은 얼빠진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가자, 수혁. 아니… 가시죠, 수혁 씨.”

갑작스런 존댓말에 수혁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원래 버르장머리 없고 싸가지 없는 X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엘레하였으니 그것도 당연하리라.

“네가 무슨 일로 존댓말을?”

“호호호, 오퍼도버 경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작에 준하는 의전으로 정중히 모셔오라고 했어요.”

“뭐? 공작? 그럼 내가 새란 말이야?”

“오빠, 내가 그런 썰렁한 유머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베레들르라는 마을에서부터 제국까지 수혁을 따라왔던 사내 꼬마는 얼빠진 병사들을 향해 혀를 쭈욱 내밀더니 수혁의 뒤를 좇아 달려갔다.

얼빠진 병사들은 멍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어서 오시게.”

배까지 뒤덮는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오퍼도버는 수혁 일행을 반겨주었다.

“수혁이라 합니다. 박수혁.”

“나는 오퍼도버라고 하는 늙은이일세.”

“죄송합니다.”

“뭐가 말인가?”

“사실 저는 두 번이나 일렉트라라는 계집을 만났습니다.”

“허허허, 알고 있네. 지난 일은 잊어버리시게. 모든 일은 제우바 신의 인과율에 따라 정해진 길대로 가는 것이니까.”

수혁은 오퍼도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일렉트라를 놓아준 것도 신의 섭리라는 말이 아닌가.

“저도 이번 전쟁에 참가해서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허허허, 그 대신 자네의 여자 친구를 보호해주고, 전쟁이 끝나면 고국으로 돌려보내달라는 조건이 있겠지?”

수혁은 자신의 속마음을 훤히 내다보는 오퍼도버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놀라지 마시게. 나는 이미 자네가 태어나고 자란 세계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니까.”

“저, 정말인가요?”

끄덕끄덕.

그랬다. 오퍼도버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차원여행을 했던 사람이다.

그가 다녀온 무수히 많은 이계 중 지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그의 여행기는 그의 차원여행기를 다룬 저서 ‘시간과 공간’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는 그 책을 집필했다는 이유로 법황청 지하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하지만 긴장하시게. 시공여행을 하려면 가장 아끼는 것을 하나 잃어야 하는 법이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전쟁이 끝나면 하도록 하지.”

“그, 그러시죠.”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미영이 화제를 바꿨다.

“용병들이나 기사들의 말로는 전쟁이 불리하다고 하던데 할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할아버지? 허허허, 그렇군. 나도 손자가 있으니 할아버지지. 내 손자 녀석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프란츠 말씀이신가요?”

“허허, 그렇지. 그러고 보니 아마 자네가 프란츠를 만난 적이 있을 게야.”

수혁은 오퍼도버를 바라보며 한국에 가서 돗자리를 깔아도 손색이 없는 늙은이라고 생각했다.

세 사람이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사령관의 충복인 프레이저 기사단장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오퍼도버 경, 큰일 났습니다.”

“문명의 문이 함락되었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오퍼도버는 두 눈을 감았다.

“그렇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놈들이 스쿠타투해를 건너 대륙을 침입할 것입니다. 이미 상당수의 군단들이 배를 이용해 제국의 남쪽으로 상륙했으며 또 동방의 이스트리 제국으로도 여러 군대가 상륙했다는 첩보입니다.”

“어찌 됐든 주력은 문명의 문을 넘어오는 자들일세. 이제 공은 우리 동맹군의 한 축인 머포크들에게 넘어갔어. 물론 그들이라고 저놈들을 모조리 수장시키지는 못하겠지만 말이야.”

성스러운 동맹군의 한 축인 머포크들.

반인반어족인 머포크의 군대는 헬벤타리아 대륙과 파이오니아 대륙을 가르고 있는 스쿠타투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적들을 침몰시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

파이오니아 대륙의 최북단, 아시리움 왕국의 항구 도시 아드리아에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고 있었다.

처얼썩! 처얼썩!

강한 파도가 항구에 놓인 방파제에 와서 부딪쳤다.

이미 아드리아는 평상시의 대외무역을 위한 항구가 아니었다. 셀 수 없이 많이 세워진 방책들 그리고 수천 개의 기창들 아래로 비장한 표정의 병사들이 중무장을 한 채 대오를 이루고 있었다.

수십 개의 망고넬(Mangonel)과 트레뷰셋(Trebuchet) 같은 투석기들, 벌리스타와 캐터필터 같은 대 공성전용 병기들도 줄을 이루고 있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굳은 결의가 뒤섞여 있었다.

“저, 저기 하늘을 봐! 뭔가가 날아오고 있어!”

그때 대오 중 한 사내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쌔애애액!

빠르게 활강하며 날아오는 것의 정체는 와이번. 그리고 와이번에 외팔이 소년 마법사 프란츠가 타고 있었다.

이미 와이번의 몸에는 수십 개의 퀘렐(석궁용 화살)들이 박혀 있었기에 피를 흘리는 와이번은 정상적인 비행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와이번… 조금만 더 힘을 내. 도착하면 치료해줄 테니…….”

그리고 프란츠의 뒤에서는 30여 마리의 뱀파이어들이 손에 석궁을 들고 프란츠의 뒤를 쫓고 있었다.

“소, 소년이다… 소년이 뱀파이어들에게 쫓기고 있어!”

슈슉! 슈슉!

뱀파이어들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도주하는 와이번과 프란츠에게 화살을 쏴댔다.

“어서 소년을 구해야 한다. 마, 마법사… 마법사 없나?”

기사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자 전사들의 무리에서 검은색 로브에 십자가가 새겨진 망토를 쓴 마법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오, 마르테즈… 저, 저 흡혈귀들을 쓸어버리세요.”

마르테즈라 불리는 마법사는 로브 안에서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몸속의 마나를 끌어내어 재배열했다.

기우우웅!

장소는 바닷가. 물 속성의 원소마법을 가장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곳.

마르테즈는 호리드 윌팅(Horrid willting)이라는 마법으로 흡혈귀들의 몸속의 피를 뽑아내 흡혈귀들의 몸에서 수분과 피를 모조리 탈수시켜버릴 생각이었다.

이윽고 마나의 재배열을 끝낸 마르테즈가 석궁을 쏘며 날아드는 흡혈귀들에게 호리드 윌팅의 저주 마법을 시전했다.

쫘자작!

“헙!”

프란츠의 뒤를 쫓던 흡혈귀들의 동공이 크게 팽창했다.

순간 하늘을 날던 흡혈귀들의 몸이 찌그러든 깡통처럼 오그라들면서 그들의 몸에서 물방울이 빠져나오더니 이윽고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호리드 윌팅에 걸린 흡혈귀들은 얼마가지 않아 바싹 마른 육포처럼 말라비틀어졌다. 한 줌의 바람이 그들의 마른 육체를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허억!”

화살에 맞은 프란츠와 와이번은 힘겹게 아드리아항에 착륙했다.

“어, 어떻게 된 거냐, 꼬마야?”

“문명의 문은 어떻게 된 거야?”

“모, 모두… 전멸했습니다.”

“뭐어?”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우선 소년을 치료해야 합니다.”

“그래요. 누가 포션 가지고 있으면 와이번과 소년에게 좀 발라주세요.”

몇 명의 마법사들이 프란츠와 와이번을 치료하기 위해 포션을 가지고 왔다.

그때 또다시 문명의 문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놈들의 규모는?”

“살아남은 자는 정말 없단 말이냐?”

“지금 놈들은 어떻게 하고 있지?”

수많은 질문들이 쇄도했다.

“놈들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문명의 문으로 모인 군단만 해도 30만은 족히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명의 문에서 살아남은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놈들이 이곳으로 몰려올 것입니다. 그들은 이번 전쟁을 치밀하게 준비해왔어요. 오크의 대신관 하제든과 군단장 켈쥴은 이미 오래전부터 대규모 선박을 축조하고 있었어요. 지금 그들은 수많은 전사들과 몬스터들을 실은 채 바다를 건너오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놈들의 모습이 나타날 거예요.”

“그래, 알았다. 너는 그만 가서 쉬거라.”

“기사분들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 뭐냐?”

“적들 중 버파리언이라는 몬스터가 있습니다. 일종의 들소형 몬스터들인데… 놈들과는 절대 밤에 맞부딪쳐서는 안 됩니다. 놈들의 저돌적인 돌격에는 오러 블레이드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 그래, 알았다. 어서 가서 쉬거라.”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프란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휴식을 요하는 프란츠를 얼른 편안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츠는 자신을 부축하는 사람들을 만류하며 포션 몇 개를 챙겨 와이번에 올라탔다.

“이봐, 꼬마.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 그래?”

“할아버지가 있는 노이슈만 성으로 가야겠어요.”

프란츠는 그 말 한마디를 남겨두고 와이번에 올라탔다.

프란츠가 아드리아항에 도착한 후 하루 만에 수평선 끝에서 악마의 깃발을 단 대규모의 전투선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다! 적들이 몰려온다!”

항구의 망루 위에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보초병이 고함을 지르더니 망루 아래로 달려 내려와 뿔피리를 불었다.

뿌우우! 뿌우우우!

나팔소리가 울리자 드디어 아시리움 왕국이 자랑하는 호바트 윈드 함대가 출격을 서둘렀다.

그리고 호바트 윈드 함대에 앞서 파도를 가르며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머포크들이 어둠의 군단의 선단을 향해 헤엄쳐 나갔다.

머포크의 왕 무란과 카이오 제독은 빠르게 헤엄치며 머포크 부대를 이끌었다.

물 속 깊이 잠수해 어둠의 군단을 향해 침투해 들어가는 반인반어족의 머포크들은 각자 리피팅 보우건과 석궁, 창과 작살등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슈루루룩!

겉모습만 봐서는 인어 같아 보이는 그들은 물고기처럼 빠르게 헤엄치며 어둠의 군단의 선박으로 다가갔다.

“배를 모조리 부숴버려라! 놈들을 침몰시켜야 한다!”

“한 놈도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해라. 모든 배를 파괴해라.”

한편 배 위의 오크들과 어둠의 군단 전사들도 비상이 걸렸다. 날카로운 병장기들이 배의 밑동을 파헤쳐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포크들이 나타났습니다. 머포크들의 배 밑으로 기어들어왔습니다. 취익!”

“멍청한 것들, 화살을 쏴라! 물고기 같은 놈들을 고기밥으로 만들어버려라!”

삐거걱.

그때 맨 선두에 섰던 배가 좌측으로 기우뚱거렸다.

“배에 구멍이 났습니다.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이런 멍청한 것들! 물고기들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이 진정 없단 말이냐?”

콰각! 파콰칵!

그 순간에도 머포크들은 돌진해오는 배 밑으로 기어들어가 통나무 판에 도끼와 창을 찔러 넣었다.

다른 머포크들은 수면 위로 튀어오르며 화살을 쏴대는 오크들을 향해 리피팅 보우건을 발사했다.

콰콰콰콰!

“꺼으으…….”

악마 군단의 선단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고, 적들은 혼비백산했다.

“샤모스 님, 큰일 났습니다! 머포크들 때문에 바다를 건너기도 전에 물고기 밥이 되게 생겼습니다!”

오크 1군단장 켈쥴은 죽어버린 플뤼톤 대신 1군단을 이끄는 샤모스에게 달려가 애원하듯 말했다.

-멍청한 놈, 우리가 저따위 머포크들에게 막힐 정도로 약체로 보였더냐? 걱정하지 마라, 저런 하찮은 물고기들을 모조리 물어뜯을 비밀 병기들이 지금 막 출발했을 테니. 크크크.

머포크들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벌써 20여 척의 배들이 침몰했다.

기울어진 배 때문에 물속으로 뛰어든 오크들과 몬스터들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들을 향해 머포크들의 작살이 작렬했다.

수백 명의 어둠의 군단 전사들이 순식간에 생명을 잃었다. 그들이 흘리는 피가 푸른 바다를 붉게 적셨다.

그런데 그 기세를 몰아 또 다른 배로 헤엄쳐 가던 머포크의 왕의 두 눈이 순간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저, 저건… 레비아탄(Leviathan)과 크라켄(Kraken)이다. 모, 모두 배보다 저 괴물들을 처치해라.”

머포크의 왕 무란이 당황성을 터뜨렸다.

맞은편에서 빠르게 헤엄쳐 오는 것은 길이만 20m가 넘는 바다뱀 레비아탄과 여덟 개의 발을 회초리처럼 사용하는 문어 모양의 괴물 크라켄이었다.

“세상에… 이건 상대가 안 되는…….”

머포크의 전열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레비아탄과 크라켄의 위력은 상어 정도의 크기에 불과한 머포크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막강했다.

레비아탄의 큰 입속으로 머포크들이 빨려 들어갔고, 크라켄의 여덟 개의 발은 자유자재로 물속을 휘젓고 다니며 머포크들을 유린했다.

“흩어져라! 녀석들을 산개해서 공격해야 한다!”

피유웅! 피유웅!

머포크들은 뒤로 헤엄치며 레비아탄과 크라켄에게 작살과 리피팅 보우건을 퍼부었다.

수백 개의 화살이 레비아탄과 크라켄을 덮쳤으나 레비아탄은 에스 자를 그리며 헤엄치면서 화살을 피했고, 크라켄은 딱딱한 피부를 이용해 화살들을 튕겨냈다.

“샤크 부대는 나를 따르라!”

머포크의 제독 카이오는 부하들을 이끌고 크라켄을 향해 헤엄쳐갔다.

순식간에 전열은 역전되었다. 여기저기서 수많은 머포크들이 몸이 분리된 채 수면 위로 떠올랐다. 머포크의 왕 무란은 눈물을 삼켰다.

마귀처럼 덮쳐오는 크라켄의 촉수를 회피하며 크라켄에게 다가간 머포크의 제독 카이오가 장창을 이용해 크라켄의 눈에 장창을 박아 넣었다.

폐부를 찌르는 고통에 크라켄은 미친 듯이 여덟 개의 발을 휘저었다.

꼬일 대로 꼬여버린 크라켄의 발이 레비아탄을 후려쳤고, 동시에 수십 마리의 머포크들을 때렸다. 뿐만 아니라 몇 개의 다리는 악마 군단의 배를 후려치기도 했다.

카이오의 활약에 용기를 얻은 머포크들이 빠르게 다가와 크라켄의 눈에 수십 개의 창날을 찔러 넣었다.

크라켄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면 칠수록 수많은 물방울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와중에도 레비아탄이 삼켜버린 머포크는 수백에 이르렀다.

“이, 일단 후퇴다! 아시리움의 호바트 윈드 함대와 전열을 정비해서 다시 싸운다.”

둥! 둥!

그 순간에도 아시리움의 무적 해군 윈드 함대는 악마 군단의 선단을 향해 전진해왔다.

아시리움이 자랑하는 해군 궁수들은 파비스라는 거대하고 길쭉한 연 모양의 방패 뒤에 일렬로 숨어서 장궁에 화살을 장착하고 있었다.

또한 갈고리를 들고 있는 병사들은 악마군단의 배로 건너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머포크들이 희생을 감수해가며 크라켄을 무력화시켰기에 일전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놈들이 다가온다. 궁수들 앞으로!”

아시리움의 해군은 제국 최강의 해군들. 오랜 수전 경험과 다년간에 걸친 훈련으로 그들은 기계적으로 파비스 밖으로 활을 내밀고 나오더니 오크들을 향해 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악마 군단의 배가 가까이 다가오자 수십 개의 갈고리가 그들의 배로 날아갔다.

동시에 아시리움의 전사들이 밧줄을 타고 배를 건너갔다.

챙! 챙!

바다 위는 육지 위의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육박전이 격렬했다.

창과, 검, 화살과 마법이 비산했다.

“좋았어! 상당수의 배가 파괴되었다. 또한 수많은 오크들을 물속에 잠재웠어. 이 정도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아시리움의 제독은 입을 크게 벌렸다.

지금까지 그가 보았던 선단은 10분의 1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규모보다 훨씬 큰 규모의 선단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배 위에서는 위리놈의 사도들인 마몬, 타무츠, 쉬코트, 니스로우, 베에몹, 다곤 등이 망토를 두른 채 웃고 있었다.

수백 채의 배를 채우고 있는 몬스터들은 대부분이 버파리언들.

그들은 육지에 상륙하자마자 노도처럼 진격해서 동맹군을 유린할 것이다.

또한 마몬과 타무츠 등이 이끌고 있는 본진의 배 위로는 수백 마리의 뱀파이어들이 마치 배를 호위하기라도 하는 듯 유유히 날아오고 있었다.

“오… 하느님…….”

“제우바 신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거야. 머지않아 천족의 전사들이 나타나 악의 무리들을 모조리 쓸어버리실 거야.”

여기저기서 제우바 신을 찾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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