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0 대륙은 암흑 속으로(6권) (41/51)

chapter 40 대륙은 암흑 속으로

“야, 엘레하! 좀 쉬었다 가자.”

수혁의 짜증 섞인 말투.

그리고 도끼눈을 하고 째려보는 엘레하.

“도대체 몇 번을 쉬는 거야? 네 여자 친구 찾으러 갈 때는 쉬자고 해도 안 쉬더니 일렉트라 그 여자아이 찾자고 하니까 완전 배짱이네. 여친 찾았으니까 이젠 다 상관없다 이거야?”

카랑카랑한 엘레하의 말에 미영이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버렸다.

“너는 신의 축복을 받은 엘프고 나야 뭐 천마구령심법으로 단련된 몸이니 상관없지만, 미영이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란 말이야. 그것도 여자. 다리 아프다잖아.”

“그러게 내가 뭐라고 그랬어. 여자 친구는 우리 엘프의 숲에 잠시 맡겨두자고 했잖아. 지금은 몬스터도 없고 적들도 없지만 저번처럼 기사들이 칼이라도 들고 달려들면 그때는 어쩌려고 그래?”

빠직!

엘레하의 말을 듣고 있던 미영의 눈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매서운 두 눈은 엘레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어휴, 무슨 엘프가 마법도 못 쓰지. 우리나라 게임에 등장하는 엘프들은 마법 쓰기를 주머니에서 구슬 꺼내듯이 하는데 말이야. 마법도 못 쓰는 무능력자면 심보라도 고와야지, 무슨 여자가 저리 드세다냐. 안 그래요, 오빠?”

“그래그래, 엘프는 뭔가 나긋나긋하고 샤방샤방해야 하는데 말이야, 흐흐흐. 우리 파이온에서 만났던 세나 생각해봐. 샤방샤방의 결정체 아냐.”

“호호호호. 오빠, 너무 웃기지 마요. 얼굴 근육 당겨요.”

미영이 엘레하를 흉보자 수혁이 맞장구를 쳤고, 수혁의 농담에 미영이 한참을 크게 웃었다.

‘정말 놀고 있네. 내 저것들과 함께 가다가는 제명에 못 죽는 거 아냐?’

엘레하는 속으로 두 사람을 흉본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좋아, 그럼 조금만 더 쉬었다 바로 출발하자. 이제 뭐 미자비엘 마을에 거의 다 왔으니까.”

미자비엘 마을 지척에 있는 라보나 성지에서 셋은 휴식을 취했다.

엘레하는 하루 빨리 일렉트라를 생포해 우드스탁으로 데리고 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수혁은 미영의 다리에 박힌 알을 풀어주기도 하고 어깨를 주물러주기도 하면서 꼴사나운 애정행각을 벌였다.

하지만 지난 긴 시간 동안의 별리에 대한 보상은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언제나 악은 선보다 빨랐다.

일렉트라의 각성을 바라보는 빛과 어둠도 그러했다.

염마대전에서 살아남은 악마교단의 왕, 위리놈의 4대 그림자 중 한 명인 세풀투라.

그는 바로 악의 씨앗의 각성을 예감하고 북쪽 비오트 숲의 오크 선봉대를 이끌고 스쿠타투해를 건너 시나 왕국의 해안선 근처의 절벽을 넘었다.

비오트 숲의 골고다스 강에서 목선을 주조한 오크들은 세풀투라와 함께 바다를 건너 각성한 일렉트라를 찾으러 시나 왕국으로 접어들었다.

그들이 미자비엘 마을의 서편까지 다가왔을 때 일렉트라는 딜란을 찾아 빅토리아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보다 한 발 늦게 엘프의 숲을 떠난 크루건과 그의 전사들도 미자비엘 마을 지척까지 다다랐다.

일렉트라를 쫓는 이들 중 가장 늦은 이들이 바로 엘레하와 수혁 그리고 미영이었다.

“취익! 잠시 인간고기 좀 먹고 가면 안 될까요?”

“돼지 같은 놈들, 그러니까 너희들이 돼지코라는 멍에를 안고 사는 거다.”

동쪽 비오트 숲의 1군단장 켈쥴이 인간 냄새를 맡고 껄떡거리는 오크 부하들을 나무랐다.

“취익, 너무 오래간만에 인간 냄새를 맡아서요.”

“끌끌, 이제 머지않아 인간의 시대는 막을 내릴 것이다. 이제 오크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야.”

켈쥴은 오크의 시대라는 부분에서 앞장서고 있는 세풀투라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세풀투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풀투라의 뒤를 따르는 오크 파이터들이 미자비엘 마을에 당도했을 때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더니 금세 사방이 시커멓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짙은 먹구름 사이로 보랏빛 여명이 스멀스멀 나왔는데 한 폭의 지옥도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일렉트라 님이 각성하셨다. 서둘러라.

오랫동안 초조한 듯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세풀투라가 입을 열자 인간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던 오크들이 도끼를 휘저으며 빅토리아 여백작의 저택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저 대궐이다. 저 대궐에서 강렬한 마의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어.

세풀투라의 무표정한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이제 빛의 시대는 갔다.

드디어 어둠의 시대가 달루시아를 지배할 것이다.

-가라, 오크의 전사들아! 가서 위대한 왕의 딸을 알현하라!

세풀투라는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취이익!”

오크들은 밀물처럼 빅토리아의 저택으로 몰려 들어갔다.

3층 빅토리아의 침실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빅토리아의 사체와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은 딜란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방의 한가운데 발가벗은 일렉트라가 각성으로 인한 충격으로 기절해 있었다.

“취익! 이, 이분이?”

일렉트라를 모시러 간 오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생각했던 어둠의 왕의 씨앗은 상상과는 달리 나약한 인간 여성이었다.

“뭐, 뭐야? 저, 정말 이분이 위리놈 대왕의 씨앗이란 말인가?”

-무엇들 하느냐. 어서 그분을 정중히 모셔라.

머뭇거리는 오크들 등 뒤로 세풀투라가 거대한 신형을 드러냈다.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오크들은 일렉트라를 들쳐 업었다.

-자, 어서 이곳을 떠나자.

세풀투라는 일렉트라를 들쳐 멘 오크들들 이끌고 계단을 내려와 빅토리아의 정원으로 빠져나왔다.

슈슈슈슉!

슈슈슈슉!

그때 소나기 같은 화살들이 망을 형성하며 세풀투라와 오크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스벅!

스벅! 스버벅!

“취익!”

“꾸에엑!”

빛처럼 날아온 화살이 오크들의 머리를 관통하자 사방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난무했다.

“기, 기습이다.”

오크들은 혼비백산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빅토리아의 집을 둘러싼 채 화살비를 날리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엘프.

뾰족귀에 은빛 갑주를 걸친 엘프들은 쉴 새 없이 오크들을 향해 화살을 쏴댔다.

“죽여라! 더러운 오크 놈들을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슈슈슈슉!

우드스탁에서 라드리엘 웬헴의 명을 받고 일렉트라를 찾아 떠난 엘프의 전사들은 천신만고 끝에 일렉트라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은 일렉트라가 쳐들어간 빅토리아의 대저택으로 오크들이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엘프 전사들이 오크들을 쫓아 빅토리아의 저택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세풀투라 때문이었다.

붉은 피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위압감과 주위를 고요하게 만드는 엄청난 마기.

결국 그들은 오크와 세풀투라가 저택을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을 습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큭! 이, 이놈들이 어디서……!

어느새 세풀투라는 기다란 스피어를 뽑아 들고 날아드는 화살들을 원형의 망을 만들어내며 막아냈다.

“저, 저기 가운데 붉은 피부를 하고 있는 괴물을 집중공격해라!”

슈슈슉!

엘프들은 당황했다.

달루시아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를 통틀어 가장 궁술이 뛰어난 종족이 엘프다.

하지만 세풀투라는 오직 창 하나만을 휘둘러 엘프들의 궁술을 막아냈다.

“멍청한… 비켜랏!”

세풀투라를 향해 화살을 날리는 엘프 전사들 중에서 에메랄드 단검을 찬 사내가 튀어나왔다.

엘프 전사 크루건.

100명의 궁수들로 이루어진 엘프 아처리(Archery)의 대장을 상징하는 에메랄드 단검을 찬 크루건은 다른 엘프들보다 두 배는 굵은 활의 시위를 당겼다.

“내가 놈을 상대할 테니 너희들은 오크들을 죽이고 여자를 빼앗아라!”

크루건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그는 엘프의 나라 우드스탁을 떠나올 때 엘프의 왕 라디드엘이 신신당부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계집을 잡아와야 한다. 그리고 만약 생포에 실패하면 죽여도 좋다.’

크루건의 손을 타고 보석처럼 찬란한 빛이 그의 강궁(强弓)으로 흘러들어갔다.

“크루즈 애로우(Cruise arrow)!”

크루건의 손을 떠난 화살은 마치 한 마리의 골드 드래곤 같았다. 온몸에서 금가루가 떨어질 것 같은 용 모양의 화살은 대기의 마나를 끌어들이며 세풀투라를 향해 날아갔다.

“드, 드래곤이다!”

오크들은 크루건이 쏜 화살을 보며 겁을 집어먹고 혼비백산했다.

드래곤.

준 신의 존재로 신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

비록 크루건의 손을 떠난 화살이 만들어낸 마나의 응집체지만 오크들은 그 모양 하나만으로도 겁을 집어먹었다.

-크훗! 재미있는 기술이군.

세풀투라는 크루건의 화살을 비웃었다.

-그따위로 위리놈 님의 그림자인 나 세풀투라를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더냐?

이번에는 태산과 같은 압력이 세풀투라의 스피어로 몰려들었다.

-블러디 블레이드!

핏빛 오러가 폭렬했다.

순간 엄청난 크기의 오러 블레이드가 도끼날처럼 크루즈 애로우를 벨 기세로 덮쳐 들어갔다.

“흥, 멍청한 놈… 넌 끝이야. 방금 그 공격이 왜 크루즈 애로우였겠어?”

세풀투라가 뿜어낸 블러디 블레이드가 골드 드래곤 형태를 띤 크루즈 애로우를 두 동강 내려 할 때였다.

크루즈 애로우는 마치 살아 있는 용처럼 쫙 벌린 아가리를 틀며 허공에서 방향을 급선회했다.

그리고 한 마리의 뱀이 장애물을 피해 순식간에 먹이를 낚아채듯 세풀투라를 덮쳤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화살이 직각으로 방향을 꺾으며 우회하는 모습이랄까? 그것은 너무도 빠르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엘프들조차 입을 벌리고 놀랐다.

콰앙!

강한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비산했다.

동시에 짙은 초록색 피가 분수처럼 흩어져 나와 순식간에 시야가 가려질 정도였다.

“크루건 님의 궁술이 벌써 저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굉장하다!”

엘프들은 저마다 탄성을 자아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초록색 피를 뿜으며 온몸이 벌집처럼 구멍이 나 죽어야 할 세풀투라가 연기 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두 손에는 너덜너덜해진 오크 두 마리의 시체가 들려 있었다.

“저, 저런… 오크들을 방패로 삼다니…….”

크루건은 회심의 일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하지만 그런 잔재주로 나를 잡을 순 없지. 뭣들 하느냐? 멍청한 놈들아, 저 뾰족귀 놈들을 깡그리 쳐 죽여라!

“취이익!”

오크 특유의 함성소리와 함께 도끼를 치켜든 오크들이 엘프들을 향해 밀려들었다.

“대오를 정비해라! 나이츠들은 1열을 맡고 아처들은 2열에서 엄호한다. 초록 괴물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라!”

슈슈슈슉!

크로건의 일사불란한 지휘에 맞춰 이선 궁수들의 화살이 불을 뿜는다.

하지만 숫자에서는 오크들이 곱절은 되는지라 육탄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오크무리와 엘프의 일선 기사들은 곧바로 육탄전에 돌입했다.

촤차창!

“꾸에엑!”

도끼와 검이 어우러지면 시뻘건 선혈과 살점이 난무했다.

그런 혼란을 틈타 세풀투라는 몇몇 오크부대장들을 데리고 빅토리아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계집을 데리고 도망가는 놈들을 막아야 한다!”

“네놈 걱정이나 해라!”

어느새 밀물처럼 밀려드는 오크들이 크루건을 향해 도끼날을 밀어 넣었다.

파창!

크루건은 몸을 구르며 한꺼번에 세 개의 화살을 시위에 잰 후 오크들의 머리통에 날려 박았다.

“꾸에엑!”

“구디즈! 모이너핸! 이곳을 맡아라! 저 마물 같은 놈은 내가 쫓겠다!”

“크루건 님,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걱정 마라. 라드리엘 님의 가호가 나와 함께할 것이다.”

크루건은 밀려드는 오크들의 머리통을 향해 화살을 마치 검처럼 찔러 넣으며 세풀투라의 뒤를 쫓으려 했다.

하지만 일은 크루건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앞길을 막고 육탄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오크들.

그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대체 뭐, 뭐란 말인가? 이, 이 저급 몬스터들이 목숨을 내 걸 정도란 말인가? 저, 저 일렉트라라는 계집이……?’

* * *

한편 옥신각신 싸우던 수혁과 미영, 엘레하는 미자비엘 마을에 당도해 있었다.

“미영아, 이제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참아라.”

“응, 알았어. 근데 언제까지 저 엘프 계집을 따라다녀야 하는 거지?”

“글쎄, 일렉트란지 일렉트릭 기타인지 하는 여자애만 찾아주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빨리 그 일렉트릭 기타를 찾았으면 좋겠다.”

수혁과 미영이 키득거리며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 돌연 엘레하가 검지를 코에 가져다 댔다.

“쉿!”

“뭐야? 왜 그래?”

“뭔가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어. 아무래도 이곳 미지비엘 마을에 악의 기운이 창궐하고 있는 느낌이야.”

엘레하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어머, 이제 저 엘프 계집이 점도 보나 봐요?”

“그러게… 폼이 돗자리 깔아도 되겠는데? 키키키.”

파이오니아 대륙에서 해후한 후로 수혁과 미영은 죽이 잘 맞았다.

“수혁, 빨리 나를 따라와!”

그 순간 엘레하가 몸을 날리며 뛰기 시작했다.

“뭐, 뭐야? 네가 따라오라면 내가 따라가야 되는 거야?”

“너 자꾸 그렇게 삐딱선 타면 네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협조하지 않겠어!”

“헉, 너 정말 치사하구나. 내가 알고 있던 엘프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 깨졌다. 정말 퐈다~ 퐈.”

“오빠! 나는 어떡하고?”

수혁이 엘레하의 뒤를 쫓아 신법을 전개하자 혼자 남겨진 미영이 안절부절못했다.

“미영아, 조금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시, 싫어! 무섭단 말이야.”

“걱정 말고 어디 한쪽 구석에 숨어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나 믿지?”

끄덕끄덕.

애써 불안한 표정을 감추며 미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네 여자 친구는 데리고 다니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했잖아.”

“닥쳐. 그 일렉트릭 기타만 찾으면 곧바로 여길 뜰 테니까 너무 잔소리하지 마.”

둘은 미자비엘 마을에 늘어선 오두막들의 담벼락을 오소리처럼 타고 넘으며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가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지붕 위를 뛰어갔다.

그리고 얼마쯤을 달렸을까?

수혁은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오는 것을 느꼈다.

‘뭐, 뭐야, 이 느낌은? 심장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가슴이 이렇게 아려오는 거지?’

수혁은 얼마 전 세풀투라와의 대결에서 가격 당했던 상처가 욱신거렸다.

그리고 수혁의 두 눈이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저, 저 개자식은!”

천마 구령심법으로 평범한 사람보다 수십 배 좋은 시력을 갖게 된 수혁의 동공에 마치 버펄로의 뿔처럼 생긴 두 개의 뿔을 달고 초록색 피부에 악귀가 양각된 에뮬렛을 달고 있는 세풀투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뒤따르는 오크무리.

“뭐야, 서로 아는 사이였어?”

엘레하는 수혁의 어금니 가는 소리에 의외라는 눈으로 수혁을 바라봤다.

“세풀투라 개자식… 이번에는 결코 지지 않는다.”

“뭐, 뭣? 저, 저 괴물이 세풀투라라고?”

엘레하는 말을 더듬었다.

만약 수혁의 말대로 눈앞의 오크들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는 자가 세풀투라라면 일렉트라를 엘프의 성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엘레하가 놀라는 사이 세풀투라와 오크들의 모습이 점점 선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오크들의 어깨 위에 여인 한 명이 걸쳐져 있었다.

“일렉트라다!”

엘레하가 놀람성을 터뜨리는 순간 수혁의 신형이 세풀투라를 향해 용수철처럼 튕겨 나갔다.

“죽인다… 지난번 빚은 확실하게 갚아주겠어!”

투왕!

총알처럼 튕겨져 나오는 수혁의 등장에 세풀투라와 오크들이 멈칫했다.

-네, 네놈은!

“취익, 막아랏!”

오크들이 도끼를 꺼내 들고 세풀투라를 호위했다.

-이놈은 내가 막는다. 나머지는 뒤따라오는 엘프 궁수를 처치하고, 나머지는 저 앞에 서 있는 엘프 계집을 죽여라. 그리고 나머지는 일렉트라 님을 모시고 대륙을 떠나 헬벤타리아로 들어가라.

“취익, 세풀투라 님은요?”

-나는 곧 너희들의 뒤를 따라갈 것이다. 헬벤타리아 북단에 가면 일곱 개의 다리가 있다. 그 일곱 개의 다리만 건너면 소멸 협곡으로 들어갈 수 있다. 어서 떠나라.

세풀투라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애병 데블스 스피어(Devil’s spear)를 꺼내 들었다.

-그그그, 지난번에 네놈의 목을 끊어 놨어야 하는 건데… 또다시 만나게 됐구나.

“흥, 저번에는 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았어. 사실 그때는 설사병이 나서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네놈을 묵사발로 만들어주마.”

-하찮은 인간 주제에 입만 살았구나.

콰오오오!

수혁과 세풀투라의 신형이 허공 위에서 한 지점을 향해 치달았다.

둘의 돌진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부딪치면 둘 다 깨질 것 같았다.

콰아앙!

둘의 격돌에 지축이 흔들리고 천지가 울렸다.

먼저 맹공을 퍼부은 것은 수혁이었다.

“뒈져버렷, 괴물 자식아! 맹웅이십사로권!”

버버버벅!

섬광과도 같은 주먹이 세풀투라의 몸을 향해 빗발쳤다.

파차차창!

치익.

세풀투라는 일전의 수혁과의 결투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지금의 주먹은 조금 전보다 훨씬 강렬했다.

초식과 투로(鬪路)는 분명 그때와 비슷했지만 주먹의 위력은 그때와 완전 달랐다.

뭐랄까?

깊고 무거워졌다고 해야 할까?

위리놈이 그려진 방패로 맹웅이십사로권을 받아냈으나 세풀투라는 자신의 몸이 한없이 뒤로 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새 많이 늘었구나, 인간. 그그… 하지만 네놈은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

세풀투라는 자신의 방패 위에 데블스 스피어를 올려놓으며 땅으로 내려섰다.

방패 뒤에 자신의 몸을 숨긴 채 날카로운 창끝을 수혁을 향해 겨누자 얼핏 봐서는 파고들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하찮은 인간… 이번엔 내 공격을 받아봐라.

기유우웅!

세풀투라의 스피어에 흙빛 오라가 빨려들었다.

-다크니스 오브 썬더!

콰르르릉!

번쩍!

섬광과 함께 황금빛 뇌전이 수혁을 덮쳐 들어갔다.

“흥,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수혁은 덮쳐 들어오는 뇌전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격계 마법 공격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노맹웅이십사로권!”

콰콰콰콰!

말 그대로 그것은 성난 곰의 몸짓이었다.

구일행이 전수해준 뇌천마공의 맹웅이십사로권에 수혁의 분노가 더해졌다고 해야 할까?

24번의 주먹이 두 번 뻗어나갔으니 정확하게 48개의 권강이 뻗어 나오는 뇌전과 충돌했다.

뻐어어엉!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수혁의 권강이 뇌전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놈에게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저번에는 정말 제 실력을 감추기라도 했단 말인가?’

다크니스 오브 썬더는 그가 사용하는 전격계 마법 공격 중 가장 강한 공격이다.

대기 중의 전격계 원소를 응축시켜 마치 폭탄처럼 뿜어대는 공격이 막혔다면 더 이상 전격계 마법으로는 수혁을 공략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세풀투라는 짐짓 태연한 척했다. 기세에서 눌리는 싸움은 절반은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그흐흐… 인간, 못 본 사이 무슨 영약이라도 집어삼킨 것이냐? 하지만 그런 약품 오남용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도 있을 텐데?

“흥, 속으로는 지금 벌벌 떨고 있으면서 태연한 척하는 것이냐? 걱정 마라. 내가 먹은 천세보혈주라는 것은 약이 아니라 술이니까. 그것도 대한민국 식약청의 검열을 무사통과했으니까.”

-뭐, 뭣?

세풀투라는 천세보혈주라는 말에 분명 수혁이 기연을 얻긴 얻었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수혁의 강함은 영약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깨달음!

화경에서 현경으로 넘어가기 전 거쳐야 할 필수 코스.

수혁은 이미 세풀투라와의 싸움을 복기하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었다.

“하나만 묻자. 도대체 저 성질 더러운 계집 엘프가 쫓는 여인의 정체가 뭐냐? 도대체 저 여자가 뭐기에 그토록 많은 자들이 눈깔 빠져라 뒤를 쫓는 거지? 더구나 너 같은 괴물까지도…….”

-닥쳐라! 앞으로 어둠을 지배하실 분이다.

“뭐, 뭣? 여기 소설 쓰는 놈 또 하나 있었네. 그럼, 이제 빚을 갚아볼까?”

-오너라!

츠츠츠!

수혁은 온몸의 기를 끌어올리며 앞으로 한 발 크게 내디뎠다.

쿵!

그러자 땅바닥이 움푹 파였다.

쿠웅!

두 걸음을 내딛자 땅바닥이 ‘쩌정’ 하고 갈라졌다.

세풀투라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몸이 벽에 부딪치고 나서야 자신이 뒷걸음질 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이런 내가 지금 겁을 집어먹었단 말인가? 4대 가신 최고의 마력을 자랑하는 내가…….’

이제는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자신이 죽더라도 일렉트라만 소멸 협곡으로 들어간다면 세상은 어둠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주군인 위리놈께서 부활하여 자신을 소생시켜주리라.

-죽엇!

결심이 서자 세풀투라는 마나를 잔뜩 주입한 스피어를 휘둘렀다.

-헬 버스터!

성벽도 무너뜨린다는 폭렬계 공격 마법 헬 버스터가 작렬했다.

퍼엉! 퍼엉! 퍼퍼펑!

수혁의 신형을 둘러싸고 연거푸 폭음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잿빛 연기 속에서 수혁의 몸이 빠르게 튕겨 나왔다.

“흐읍!”

세풀투라가 신음성을 삼키는 사이, 수혁의 주먹이 거암처럼 크게 느껴졌다.

“태산거권!”

뻐어어엉!

수혁의 외침 소리와 함께 세풀투라의 육중한 몸이 벽을 무너뜨리며 나가떨어졌다.

-쿠울럭!

기침 소리와 함께 초록 선혈이 세풀투라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뭐야? 벌써 뒈져버리면 안 되지. 나는 이제 시작인데 말이야.”

그때 엘레하가 다급하게 수혁을 불렀다.

“그 괴물은 조금 있다가 해치우고 우선 일렉트라를 먼저 잡아야 해!”

엘레하는 자신을 둘러싼 오크대장들과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이것 봐, 엘레하. 내 말 똑똑히 들어. 너와 나의 계약은 어디까지나 일렉트라를 찾는 데 있었지 그 여자를 잡는 데 있지 않았어. 이제 그 일렉트라인지 일렉트릭 기타인지를 찾아줬으니 더 이상 내게 명령하지 마. 나는 이 개자식을 먼저 죽여야 하니까.”

수혁이 엘레하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쓰러져 있던 세풀투라가 수혁을 향해 지옥의 가시덩굴을 소환했다.

추르르륵!

수혁의 목, 양팔, 양다리에 잿빛 빛무리가 어리더니 시커먼 가시덩굴이 수혁의 몸을 감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건 또 무슨 마술이람?”

“저런 멍청이!”

오크들의 뒤를 쫓던 엘레하는 수혁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엘리멘탈 보우에 화살을 재웠다.

츄츄츙!

다섯 개의 화살이 한꺼번에 폭사되었다.

콰지직!

콰작!

엘레하의 화살은 수혁의 몸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정확하게 세풀투라의 가시덩굴을 갈라놓았다.

“누가 너 보고 도와주랬냐? 너 아녀도 얼마든지 끊어버릴 수 있었다구.”

-그흐흐,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어디 네놈이 이것도 피해내는지 보자.

어느새 상체를 완벽하게 일으켜 세운 세풀투라가 허공을 향해 스피어를 번쩍 치켜든 채 주술을 외듯 저주를 퍼부었다.

-파이어! 익스플로전(Explosion)!

세풀투라의 스피어에 응축된 암흑의 마나는 대기 중의 화염계 원소들과 공명을 하며 지옥의 유황불을 연성했다.

-죽어랏, 인간!

퍼엉!

펑! 펑!

수혁의 신형을 향해 지옥의 화염이 뿜어져 나갔다.

파이오니아의 휴먼 왕국 브리네카 성벽도 한방에 박살을 내버린다는 화염계 마법 파이어 익스플로전이 수혁을 향해 폭사했다.

“흥, 네놈의 마술쇼, 이젠 조금 지겨워지려고 한다. 어디 이 건 어떤지 한번 맛 좀 봐라! 북해빙궁의 절기, 빙백신장!”

쩌저정!

쩌어엉!

초식을 외치는 수혁의 입에서 허연 연기가 새어나왔다.

동시에 수혁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빙백신장이 세풀투라의 파이어 익스플로전 불덩이들을 꽁꽁 얼려 제압해버렸다.

-이, 이…….

세풀투라의 동공이 심하게 떨렸다.

‘가, 강하다… 인간 중에 저토록 강한 인간이 있었단 말인가? 저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이다. 마치 인간왕 키나비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 저 정도 실력이라면 우리 네 명의 가신들이 협공해도 그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도대체 저놈은…….’

세풀투라는 자신도 모르게 두 다리가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옥의 가신이라는 내가…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단 말인가? 이, 이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일렉트라 님을 보호해야만 한다. 일렉트라 님이 바다를 무사히 건널 때까지 내가 이자들을 막아야 한다.’

세풀투라는 마지막 암흑 마나를 짜내 자신의 스피어에 응축시켰다.

-전지전능하신 어둠의 왕이시여, 저에게 암흑의 힘을 주시옵소서.

취지지지…지직!

-페이드 썬더 스톰(Fade thunder storm)!

쩌저저정!

세풀투라는 자신의 모든 공력을 다 짜내 페이드 썬더 스톰을 시연했다.

집채만 한 성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는 페이드 썬더 스톰이 수혁을 감싸 돌며 날아들었다.

“뇌, 뇌신이다. 저, 저놈은 번개를 다루는 신이야. 피해! 이 멍청아!”

다급하게 들려오는 엘레하의 음성.

“빠, 빠르다… 이, 이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수혁의 두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끙, 좋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면 모두 비껴내 버리면 그만이지.”

마치 어기충소의 형태로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린 수혁.

공중에서 몸을 거꾸로 돌리며 두 팔이 지면을 집었다.

“뇌천마공 각권 일천사령각!”

풍차처럼 회전하는 수혁의 몸에서 무려 1000개나 되는 각강(脚强)이 뿜어져 나왔다.

퍼엉! 펑! 펑!

뇌전과 각강의 충돌! 하늘이 울리고 땅이 꺼졌다.

두 사람의 대결을 바라보던 엘레하가 입을 쩌억 벌렸다.

세풀투라의 전격계 마법도 놀라웠지만 그 번개를 맞받아치는 수혁의 체술(?)도 놀라웠다. 더구나 그 순간적인 순발력이란.

수혁의 각앙에 맞아 방향을 바꿔버린 썬더 스톰이 두 사람이 위치해 있는 사방 100m 내외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흥, 이제 쇼는 다 끝난 모양이지? 보아하니 미천 다 바닥난 것 같은데 그만 항복하시지!”

-저급한 인간 주제에 입만 살았구나!

부웅! 붕붕!

세풀투라가 마지막 사력을 다해 스피어를 휘두르며 수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지! 바로 그 기백이야. 지금이 오기를 기다렸다.”

콰우우우우!

수혁이 중단전에 머무는 내기를 이끌어 양손으로 응집시켰다.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북해의 얼음 맛을! 뇌천마공 빙백신장!”

쩌저저정!

그것은 전율이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어둠의 왕 위리놈의 4대 가신 중 한 명인 세풀투라는 온몸이 공포로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발과 손끝이 실제로 마비되기 시작했다.

먹물이 종이에 번지듯 북해의 냉기가 세풀투라의 몸을 잠식해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그의 신형을 얼려버렸다.

“뭐야, 고작 그 정도였어? 이제 게임 끝이야!”

스피어를 찔러 들어오는 자세로 얼어버린 세풀투라.

그를 향해 수혁의 오른손 손가락이 활짝 펼쳐졌다.

“탄! 지! 신! 탄!”

큐큐큐웅!

구슬 모양을 한 다섯 개의 신탄이 매직미사일처럼 세풀투라의 얼어붙은 신형을 향해 폭사되었다.

콰콰콰콰쾅!

“맙소사!”

엘레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저… 저놈이 저토록 셌단 말이야? 그, 그럼 지금까지 나랑 장난친 거였단 말인가?”

얼어붙어 있던 세풀투라의 신형이 유리조각처럼 산산조각 나며 무너져 내렸다.

“아디오스! 후우웁!”

수혁이 거친 심호흡을 내뱉었다.

“이, 이봐… 이제 그 괴물은 죽었으니 나를 좀 도와다오. 저, 저… 도망치는 오크 무리를 잡아야 해.”

엘레하는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눈앞에서 일렉트라를 놓친다면 아버지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 그건… 네놈 때문에 저번에 다 잡았던 일렉트라를 놓쳤잖아.”

“그래서 다시 찾아줬잖아.”

“그러니까 붙잡자구.”

“벌써 잊었냐? 우리 약속은 일렉트라를 찾아내는 거였잖아. 그러니 이제 너도 나와 미영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줘야지. 어서 우릴 집으로 돌려보내줘.”

엘레하는 가슴을 망치로 두드리고 싶었다.

이 답답한 인간.

앞뒤가 꽉 막힌 고집불통.

“이 바보야, 저 계집 하나 때문에 이 대륙이 염마대전에 휘말릴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라니? 대륙의 모든 생명체가 소멸돼버릴지도 모른다구.”

“이건 어디까지나 너희들의 전쟁.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나는 어서 빨리 내 고향으로 돌아가 그동안 못했던 게임이나 실컷 하고 싶단 말이야.”

쿵!

처음에는 말만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진심이었다.

“좋아, 네 멋대로 해.”

파앗!

엘레하는 수혁을 매섭게 쏘아본 후 도망치는 오크들을 뒤쫓아 사라졌다.

“흥, 성격 더러운 계집.”

수혁은 엘레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미영이 걱정되었는지 조금 전 미영을 숨겨두었던 곳을 향해 바쁘게 뛰어갔다.

“저 계집 엘프를 막아라! 나머지는 어서 능선을 넘어라!”

무리를 지어 달아나는 오크들 중 몇 명이 도끼를 들고 엘레하를 향해 돌아섰다.

가뜩이나 큰 오크들의 입이 결사항전의 자세로 굳게 다물자 더없이 커 보였다.

“어딜 하찮은 쓰레기들이! 엘리멘탈 데미지!”

큐큐큥!

독수리처럼 날아가는 엘레하의 화살이 오크들의 입을 관통해 목 뒤로 삐져나왔다.

“꾸르륵.”

“꿱.”

“좋았어! 이제 몇 마리 남지 않았다. 저놈들이 능선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해. 저 능선만 넘으면 해안이다. 저놈들이 배를 이용해 바다를 건너면 그 누구도 일렉트라를 막을 수 없다.”

비장한 각오로 엘레하가 오크들의 뒤를 쫓았다.

“우선 저 일렉트라라는 계집을 먼저 죽여야 한다.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어.”

끼익!

엘레하는 두 발을 넓게 벌리고 서서 엘리멘탈 보우의 시위를 최대한 팽팽하게 당겼다.

오크들은 일렉트라를 들쳐 메고 사라지고 있었다.

한쪽 감은 그녀의 눈동자에 일렉트라의 뒤통수가 정확하게 들어왔다.

“가랏!”

투웅!

쐐애애애액!

번개처럼 내달리는 엘레하의 화살!

그 순간이었다.

능선 위로 순백의 오러가 구름을 뚫고 뻗어 나왔다.

“저, 저건 또 뭐야?”

하늘이 열리고 구름이 걷혔다.

눈이 부실 정도로 흰 오러의 장막이 일렉트라와 엘레하의 화살 사이에서 화살을 가로막았다.

티잉!

동시에 빛의 장막에 부딪친 엘레하의 화살이 두 조각으로 부러졌다.

“마, 말도 안 돼… 엘프 숲의 떡갈나무로 만든 화살이 부러지다니 도, 도대체…….”

엘레하는 당황성을 삼키며 또다시 시위에 화살을 쟀다.

투웅!

퉁!

이번에는 연거푸 두 개의 화살이 일렉트라를 향해 쏘아졌다.

팅강!

팅!

이번에도 화살은 빛의 장막에 부딪쳐 두 조각으로 부러지고 말았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답 대신 공허한 메아리뿐.

일렉트라는 빛의 장막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석양을 뒤덮는 은회색 빛의 향연.

“저, 저건!”

그것은 소나기였다.

몇백 년 전 종족대전 당시 인간의 왕 키나비의 군대가 위리놈의 트롤 부대를 괴멸시켰다는 실버 애로우.

그것은 바로 은빛 화살로 이뤄진 소나기였다.

그 소나기는 마치 태풍처럼 하늘을 뒤덮으며 엘레하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 이게 뭐야… 마, 말도 안 돼… 누가 이런 짓을…….”

엘레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제라의 정령들이여, 숲과 빛의 힘으로 나를 저 사악한 화살로부터 막아다오. 엘리멘탈 실드(Elemental shield)!”

기우웅!

엘레하가 방어 마법을 캐스팅하자 그녀가 들고 있던 활에 박힌 보석에서 에메랄드 빛 원형 방패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처척!

엘레하는 빠르게 몸을 방패 밑으로 숨기며 허공을 향해 방패를 치켜들었다.

콰우우우우!

소낙비 같은 실버 애로우들이 엘레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퍼컹!

파카캉!

화살들이 방패에 박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스벅!

순간 둥그런 원형 방패로 미처 가리지 못했던 엘레하의 왼쪽 허벅지에 화살이 박혔다.

“치잇!”

순간 엘레하의 이마에 내천 자(川)가 짙게 새겨졌다.

퍼컹!

티앙!

화살 세례는 무려 3분여 동안 계속되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화살비가 쏟아지는 3분이 엘레하에게는 3년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위리놈의 블랙 크로우라면 모를까. 도대체 실버 애로우가 왜 나를 덮친단 말인가! 더구나… 저 장막의 정체는…….’

휘이잉!

바람에 실려 조금 전에 죽은 오크들이 뿜어내는 지독한 혈향이 엘레하의 코를 간질였다.

“화살비는 지나간 건가?”

엘레하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바깥으로 내밀었다.

“이, 이런… 오크들이 사라졌다! 놈들이 어디로 가버린 거야?”

엘레하는 방패를 끈 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자신과 오크들의 사이를 막았던 빛의 장막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타다닥!

엘레하는 미친 듯이 뛰어 높은 지대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 어디를 둘러봐도 오크들의 무리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이제 어떡하면 좋죠? 이제… 대륙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녀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주저앉고 말았다.

“엘레하!”

그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엘프 아처리의 대장 크로건.’

엘레하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멀리서 크루건이 어깨에 스트롱 보우를 멘 채 달려오고 있었다.

“크루건!”

“엘레하!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여긴 어떻게?”

엘레하는 달려오는 크루건의 몸에 자신의 지친 몸을 의탁했다.

와락!

크루건이 쓰러질듯 안기는 엘레하를 받아 안았다.

“엘레하! 왜 그래? 오크들은? 일렉트라는?”

“크루건… 이제 어떡하면 좋지?”

엘레하의 볼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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