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8 한 남자 그리고 두 여자 (39/51)

chapter 38 한 남자 그리고 두 여자

최면에 빠진 듯한 사람들의 눈!

달루시아의 주신(主神)을 연호하는 군중들의 눈은 이미 집단 최면에 빠져 있는 듯했다.

“제우바! 제우바!”

마치 성난 황소 떼와도 같은 군중들의 함성 소리가 한 사내의 등장으로 일순간 조용해졌다.

십자가가 그려진 붉은 추기경 모자를 쓴 사내는 두 손으로 좌중들을 진정시키며 마을 광장에 서 있는 제단 위로 올라갔다.

팔자 주름이 고운 인자한 얼굴의 사내는 바로 이단 심문관 휘들리!

얼마 전 시공을 여행하는 대마법사이자 프란츠의 친할아버지인 오퍼도버를 미트라카의 지하 감옥에 투옥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지금 팜파스 왕국의 서쪽 땅에 자리 잡은 리건 마을에서 마녀 재판을 주관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주님의 어린 양들아!”

낮으면서도 멀리 울려 퍼지는 휘들리의 말 한마디에 마녀 재판을 구경나온 사람들은 머리를 숙인 채 무릎을 꿇었다.

“신은 너희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 하지만 몇몇 불손한 무리들은 아직도 전능하신 제우바신을 시험하려 들고 있다. 여기 이 동방의 이교도는 영원한 천국을 버리고 짧은 현세의 쾌락을 택하였다.”

“우우우우우!”

휘들리의 말에 군중 속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전능하신 제우바의 사제들은 위리놈을 필두로 하는 어둠의 세력들을 저 연옥의 무저갱 속으로 영원히 봉인시켜버렸다. 하지만 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악한 어둠의 힘에 의지하려는 자들이 있다.”

“우우우우우!”

계속되는 휘들리의 연설만큼 군중의 야유도 계속됐다.

“신의 손길을 거부하고 어둠의 유혹에 빠져든 이 어린 양을 어떻게 해야겠느냐?”

“죽여라!”

순간 찬물을 끼얹는 듯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누군가가 소리치자 순식간에 동요가 일어났다.

“죽여라!”

“마녀를 죽여라!”

“킬(Kill)! 킬!”

모두 이성을 잃었다.

사람들은 마치 환각에 사로잡힌 망령들처럼 마녀를 죽이라고 외쳤다.

그들은 동굴에서 숭마 의식을 치르던 고트교의 이교도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의 머리가 조각된 십자가에 묶여 있는 여인은 바로 강미영이었다.

어깨에 목 없는 십자가의 낙인을 새긴 그녀는 허름한 누더기 옷 하나만을 두른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광기에 사로잡힌 군중들은 그녀를 죽이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미영의 눈에 검정색 헝겊이 덮여 있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들려오는 군중들의 야유소리는 미영이 공포감을 극대화시켰다.

“죽여라! 마녀를 죽여!”

그 와중에 누군가가 던진 돌멩이가 미영의 복부에 적중했다.

퍼억!

“컥!”

폐부를 찔러 오는 고통에 미영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두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사랑과 자비의 신인 하느님이시여, 제게 희망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마지막 가는 길까지 당신을 저버리지 않게 제게 신념을 주시옵소서.’

미영은 십자가에 매달린 채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 순간에도 돌멩이들은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딱!

돌멩이 하나가 미영의 이마에 꽂혔다.

오래 지나지 않아 돌멩이에 맞은 부분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미영은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다.

“조용히들 하라.”

이단 심문관장 휘들리의 말에 좌중이 또다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제 마녀를 심판할 것이다.”

“와아!”

“와아아!”

휘들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망나니들은 도르래를 이용해 미영의 목을 동아줄로 묶었다.

이단 심문관의 마녀 재판은 교수형과 화형(火刑)식을 동시에 치른다.

그녀의 목에 동아줄이 걸리자 또 다른 망나니들은 제단 아래에 쌓여 있는 장작더미에 기름을 끼얹었다.

“신께서는 조건 없는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 가르침을 어긴 자들에게는 심판의 철퇴를 가하라 하셨다. 이제 이 마녀를 재판할 것이다.”

“와아!”

“와아아!”

광기에 사로잡힌 군중들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그 무렵 서편 전쟁터를 빠져나와 리건 마을을 지나고 있던 수혁과 엘레하는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오밤중에 어떤 미친놈들이 잠 안 자고 떠드는 게지?”

수혁의 질문에 엘레하가 주위를 살폈다.

“마녀 재판이군.”

“마녀 재판?”

수혁은 엘레하에게 되물었다.

“그래, 마녀 재판. 인간들은 너무 나약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래서 쉽게 사교에 빠져들지. 최근에는 더욱 많은 이교도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들었어. 그만큼 어둠의 세력이 부활하고 있다는 뜻이지. 아마 저곳도 이교도에 빠진 마녀들을 재판하고 있는 중일 거야.”

“마녀 재판이라…….”

수혁은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훗! 보아하니 동방의 마녀 같군… 피부색이 우리완 달라. 아무래도 수혁 너처럼 동방인인 것 같아.”

인간들보다 훨씬 좋은 시력을 가진 엘프.

엘레하는 그 뛰어난 시력으로 마녀 재판이 한창인 곳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엘레하의 말을 듣자마자 수혁은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뛰어올랐다.

“나와 피부가 같다고?”

수혁 역시 천마구령심법으로 발달된 시력을 통해 리건 마을의 광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마녀 재판을 바라봤다.

“미, 미영!”

교수형을 위해 목에는 밧줄이 감겨 있고 매달린 십자가 아래로는 장작더미가 깔려 있는 곳. 그 한복판에 미영이가 기절한 채 매달려 있었다.

그동안 이국에서 갖은 고생으로 피부가 많이 상해 있었지만 수혁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미영, 강미영이었다.

타핫!

반사적으로 수혁의 신형이 리건 마을의 광장을 향해 튕겨 나갔다.

엘레하 역시 수혁의 여자 친구 이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에 수혁의 뒤를 좇아 빠르게 달려 나갔다.

“죽여라! 죽여! 빨리 마녀를 죽여!”

“그래!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마녀를 불태워버려!”

성난 군중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쉿!

이단 심문관 휘들리가 코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누구 이 재판에 반대하는 사람 있는가?”

“…….”

그러자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 모습에 이단 심문관은 망나니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덜커덩!

그 순간 미영의 발을 받치고 있던 의자를 망나니의 발이 걷어찼다. 그러자 미영의 목이 밧줄에 감긴 채 축 늘어졌다.

“와아!”

“와아아!”

“불을 질러라! 누가 불을 질러!”

사람들은 미친 듯이 화형식을 집행하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목을 죄이는 압박감으로 인해 미영의 온몸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두 손으로 목을 조르는 로프를 붙잡았다.

빠르게 숨통을 거머쥐는 로프의 압력 때문에 미영은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로프는 더욱 강렬하게 목을 죄어왔다.

로프를 잡고 있는 손바닥은 살갗이 찢어지며 선혈이 비쳤다.

죄어드는 로프 때문에 미영은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두 눈이 서서히 감기며 영혼의 안식처로 몸이 빠져들려 할 때였다. 그녀는 멀리서 천사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날개 없는 천사!

두 천사가 빠르게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무섭게도 천사의 두 눈에는 지옥의 불길 같은 분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져가는 순간, 망나니들이 진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장작더미에 횃불을 던졌다.

불기둥은 삽시간에 몇 미터가 되어 치솟아 올랐고 미영을 덮치려 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수혁 씨, 이제 저는 주님의 곁으로 가요. 안녕…….’

그때였다.

노기가 가득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목소리가 미영의 귓전을 때렸다.

“여기, 이 마녀 재판을 반대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멈춰라!”

수혁의 일갈성은 땅을 가르고 하늘을 찢어버릴 것 같았다.

“천마한빙장(天麻寒氷掌).”

수혁이 천마한빙장을 외치자 그의 손에서 얼음송곳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옥의 화염마저도 꽁꽁 얼려버릴 듯한 천마한빙장은 미영을 덮쳐 들어가는 불길을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동시에 수혁의 뒤를 좇던 엘레하의 손에서는 화살 하나가 빠져나왔다.

쐐애액!

대기를 파고들며 비행한 엘레하의 화살은 미영의 목을 죄고 있는 동아줄을 잘라버렸다.

철썩!

“웬 놈들이냐?”

휘들리의 고함소리!

동시에 중력에 따라 떨어지는 미영의 신형!

이글거리는 두 눈을 번뜩이며 수혁의 신형은 허공을 날아 낙하하는 미영의 신형을 재빨리 받아냈다.

“미영아! 정신 차려! 죽으면 안 돼!”

“여긴… 다… 당신은 천사인가요? 아니면… 콜록콜록.”

미영은 목을 붙잡으며 힘겹게 두 눈을 떴다.

그녀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박수혁!

눈앞에는 꿈에도 잊지 못했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늠름하고 듬직한 어깨와 두 팔로 수혁은 자신을 안고 있었다.

“오빠… 수혁 오빠.”

“그래, 미영아. 나다, 박수혁이야. 그러니 정신 차려!”

꿈이었다. 아니, 꿈이라도 좋았다.

이대로 잠들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으리라.

“마녀를 구출한 저 마귀를 잡아라!”

“죽여라!”

“저놈, 저년을 죽여!”

누군가가 고함을 쳤다.

그 저주 섞인 고함소리가 미영을 꿈에서 깨게 했다.

“미영아, 여기서 조금만 쉬고 있어. 금방 해치우고 돌아올 테니까.”

스르릉!

“놈을 죽여라!”

휘들리의 고함소리에 제단을 둘러싸고 있던 성기사들이 빛의 검을 뽑아 들었다.

“얼마든지 덤벼라. 자비를 모르는 신의 사제들이라면 나 역시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

“닥쳐라, 악마의 종자 놈아!”

빛의 검이 빛처럼 빠르게 수혁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미 세풀투라와의 혈전으로 깨달음을 얻은 수혁에게 성기사 따위의 검이 통할 리 없었다.

“내 주먹은 자비를 모른다. 태산거권!”

파고드는 빛의 검을 향해 수혁의 반듯한 주먹이 터져 나갔다.

챙강!

수혁의 주먹에 찔러 들어가던 빛의 검은 두 조각이 났다. 동시에 성기사의 실버 패너플리는 산산조각이 나며 깨져버렸다.

“으아악!”

은빛 갑주를 뚫고 들어간 수혁의 직권은 심장을 꿰뚫어버렸다.

“다음!”

“이, 이런 악마!”

츄츄악!

이번에는 세 명의 기사들이 수혁을 덮쳤다.

부웅!

찔러 들어오는 빛의 검의 검세 위로 수혁의 몸이 떠올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수혁의 몸이 세 자루의 검신 위에 서 있었다.

“뇌천마공 비무각!”

수혁이 외치자 뇌천마공의 각권, 승룡연타십이각의 제이식 비무각이 터져 나왔다.

한 개의 다리면 땅을 가르고 열두 개의 다리면 하늘을 찢어발긴다는 강력한 각술, 일각분지, 십이각파천도 동시에 뿜어져 나갔다.

쫘자작!

내력이 실린 각권 하나하나는 성기사들의 투구를 일그러뜨리고 들어가 두개골을 박살냈다.

“어, 엄청난 힘이다… 악마가 아니면 이런 힘을 낼 수 없어.”

수혁을 둘러싸고 있던 성기사들은 겁을 먹었다.

가공할 만한 위력의 체술도 체술이지만 수혁의 눈빛이 지옥의 아수라장을 이제 막 헤치고 나온 무시무시한 악귀 같았기 때문이다.

“겁먹지 마라. 놈은 하나다. 라이베로스 님의 권능이 함께할지니, 저놈을 죽이고 마녀를 화형 시켜라!”

휘들리는 성기사들을 독려하며 또다시 성서를 꺼내 들었다.

“신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저 어둠의 악귀에게 하늘의 벼락을 내릴지어다. 헤븐스 썬더(Heaven’s thunder)!”

그렇게 휘들리의 심장을 둘러싼 마나가 대기의 전격계열 마나와 공명을 이루기 시작할 무렵, 휘들리의 등 뒤에서 거친 파공성이 들려왔다.

쐐애액!

파공성이 들리기가 무섭게 휘들리의 두 손에 들린 성서가 하나의 화살에 꿰뚫려 떨어졌다.

“누, 누구냐? 누가 감히 신성한 성경을 훼손시킨단 말이냐!”

노기 섞인 목소리로 뒤돌아보던 휘들리의 두 눈이 벌어졌다.

“에… 엘프!”

순간 군중 속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엘프다!”

“정, 정말이다… 숲의 요정 엘프가 나타났다!”

이렇듯 군중들의 탄성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수혁의 주먹과 발은 우레처럼 쏟아져 나갔다.

“맹웅이십사로권!”

버버버벅!

수혁의 권술은 실버 패너플리이든, 빛의 검이든 뭐든지 가리지 않고 파괴해갔다. 즉, 그의 주먹과 맞닥뜨리는 것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으아악!”

수십 명의 성기사들은 수혁의 옷자락 하나 건드려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머, 멍청한 것들! 마녀를 잡아라! 마녀를 인질로 잡아 놈의 무릎을 꿇게 해라.”

명색이 이단 심문관이라는 자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이 가관이었다.

입으로는 정의며 진리며 사랑을 베푼다고 말하는, 제우바교의 일선에서 활동하는 복음의 전도사가 인질극을 지시하다니…….

수십 명의 성기사들은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뜯어졌다. 심한 경우 내장이 쏟아져 나온 자들도 있었다.

완패한 성기사들의 뒤에서 순백의 로브를 걸친 이단 심문관들이 수혁의 등을 넘어 미영을 향해 날아올랐다.

“비겁한 것들, 인간이란 것들은 어찌 이리도 번번이 날 실망시키는 거지?”

관망하던 엘레하가 분노를 터뜨렸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다섯 개의 화살이 걸려 있었다.

파촤앙!

츄츄츄츄츄!

빛으로 된 화살, 오러 애로우(Aura Arrow)가 미영을 향해 날아가는 이단 심문관들을 덮쳤다.

“조심해라! 엘프의 화살이다!”

“홀리 실드(Holy shield)!”

라이베로스의 권능이 실린 성스러운 마법이 엘레하의 화살 공격을 막아내자 오러 애로우가 빛을 잃으며 소멸되었다.

하지만 엘프의 화살은 강했다. 이단 심문관들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으나 그것은 상당한 내력이 실린 공격이었다.

때문에 오러 애로우를 막아낸 이단 심문관들이 별모양의 팬터그램이 그려진 실드를 걷어냈을 때 그들의 입에서는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치잇! 역시, 엘프의 활 공격은 강하다… 완벽하게 방어했는데도 내상을 입다니…….”

엘레하 덕분에 미영을 잡으려던 그들의 시도는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엘레하의 화살 공격을 받아 내기가 무섭게 인간의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가공할 위력의 체술이 이단 심문관들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죽여 버릴 테다! 뇌천마공 분혼사권! 뇌천마공 납천와슬!”

터져 나오는 무공마다 극성으로 끌어올린 것들이었다.

파콰콰콰!

마을 공터를 순식간에 삼켜버릴 듯한 위력에 이단 심문관들이 지면을 박차고 떠오르며 수혁의 공격을 회피했다.

버버버버벅!

그나마도 내상을 덜 입은 심문관들만 수혁의 공격을 피해냈고, 몸 안의 마나 홀이 뒤틀려버린 심문관들은 그 자리에서 두개골이 파혈되고 척추가 부러져 쓰러졌다.

“쿠엑!”

세 명의 심문관들이 뱀의 허물처럼 맥없이 쓰러지는 것이 그 자리에서 즉사한 듯했다.

순식간에 세 명의 심문관들을 천국(?)으로 보내버린 수혁은 허공으로 떠올라 나머지 이단 심문관들을 향해 날아갔다.

“뇌천마공 창룡승권!”

원래부터 창룡승권은 허공에 있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권술!

분혼사권과 납천와슬에 이은 창룡승권은 마치 이 모든 일들을 예상했던 것처럼 이어졌다.

당황한 이단 심문관들은 허공에서 급하게 홀리 실드를 펼쳤다.

뻐어엉!

뇌천마공의 권술과 심문관들의 프로텍션 마법이 부딪치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강렬한 반탄강기가 일어났다.

하지만 수혁은 그 반동을 이용해 더욱 빠르게 심문관들을 향하여 치솟아 올랐다.

“납천와슬 제삼식, 원슬퇴!”

뿌지직!

활처럼 몸을 휜 상태에서 수혁의 무릎이 홀리 실드를 뚫고 들어가 심문관의 머리에 작렬했다.

“으아악!”

동시에 수혁의 검지가 펼쳐졌고, 권과 각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심문관의 머리는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뚫렸다.

“허억!”

탄지신통. 권술과 각술에 이은 탄지신통으로 인해 여섯 명의 이단 심문관들을 순식간에 즉사했다.

“너, 너는 누구냐? 인간이 아니구나… 너는 전투의 화신이다. 지옥에서 빠져나온 악마야…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성기사에 이어 이단 심문관들과의 싸움을 지켜보던 휘들리는 생애 처음으로 공포를 맛봤다.

제단 위에 지탱하고 있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데도 휘들리는 자신이 떨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단 심문관님께서 공포에 질리셨다. 모두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해.”

그제야 마녀 재판을 구경나왔던 군중들은 마을의 공터를 벗어나 도망을 쳤다.

“라이베로스 님, 라이베로스 님을 소환해야 해.”

휘들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 성서를 집어 들었다.

순간 엘레하의 신형이 바람처럼 날아와 휘들리의 목에 해프문(Half moon-중검 길이의 검으로 검신이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다.)이 바싹 다가와 있었다.

‘이, 이런… 계집에게… 이런 수모를…….’

“명색이 이단 심문관이라는 자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당신의 행동은 산골의 이름 없는 화전민보다도 못한 짓거리야.”

“흥! 인간과 엘프의 성스러운 동맹은 아직까지 유효할 텐데, 내게 이래도 될까?”

휘들리는 엘레하에게 목을 내준 채 협박조의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웃기지 마! 인간들은 타락했어. 무능력하다면 정의롭기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닥쳐라! 어차피 너희 엘프들도 제우바 신의 손길이 닿아 만들어진 종족. 신의 사제들인 우리에게 이런다면 엘프족도 무사할 수 없어. 더군다나 마녀와 악마를 도왔으니 그 죄는 엄히 다스려져야 할 것이야.”

“오호호호, 그래? 그거 정말 무섭군. 하지만 그보다 먼저 죄를 물어야 할 이들이 있어.”

“…….”

엘레하의 차가운 음성에 휘들리는 말문을 잃었다.

“신의 이름을 빙자해 죄 없는 사람들을 못살게 군 너희 이단 심문관들의 죄는 그 어떤 죄악보다 질이 나쁘지.”

“개소리하지 마. 네년이 이러고도 무사히 이 땅을 벗어나 엘프의 숲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닥쳐! 멍청한 네놈들이 오퍼도버 님을 지하 던전에 가두지 않았다면 내가 이 고생을 할 이유가 없지.”

“어, 어떻게……?”

휘들리의 두 눈은 말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고.

“엘프는 신의 축복을 받은 종족이야.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지. 네놈들이 히나 왕국에서 오퍼도버 님을 방해하는 바람에 위리놈의 씨앗이 살아남았고 그는 이 대륙에 재앙을 불러오려 하고 있어. 그 죄 하나만으로도 너희들은 지옥행이야.”

엘레하가 휘들리의 목에 대고 있는 해프문에 더욱 힘을 줬다.

그 순간 휘들리는 법복 안에 감춰둔 단도를 꺼내 엘레하의 복부를 찔러 들어갔다.

푹!

“이, 이런 개자식!”

뒤늦게 엘레하가 몸을 뺐지만 이미 휘들리의 단검이 복부를 깊게 훑고 지나간 후였다.

“끄으으… 가만두지 않겠어.”

복부의 상처를 움켜쥔 엘레하가 휘들리에게 반격을 가하려 했다.

그러자 휘들리는 재빨리 성서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대법황 라이베로스를 소환할 수 없었다. 수혁의 두 눈에서 천여 개의 장력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마 일천쇄비장! 닿기만 해도 재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버릴 것 같은 가공할 장력이 휘들리를 감쌌다.

“아, 악마 같은 놈… 분하다…….”

이단 심문관 휘들리의 몸은 마치 용암에 빠진 것처럼 녹아내렸다.

그런 휘들리 뒤로 수혁의 신형은 미영을 안은 채 지면으로 착지했다. 그리고 수혁의 입에서 냉소적인 외마디가 흘러나왔다.

“신은 죽었어.”

수혁은 곧바로 미영을 안은 채 엘레하에게 다가갔다.

“잘난 척하더니 그깟 공격도 못 막아내고 꼴이 말이 아니군.”

“남 걱정하지 마. 내게 포션이 있으니까.”

엘레하는 주머니에서 치유 포션을 꺼내 들었다.

은빛 여명!

엘프의 숲 우드스탁의 세계수 액으로 만든 은빛 여명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는 포션이다.

엘레하가 자신의 상처에 포션을 뿌리자 단도에 찢긴 상처는 기적처럼 아물어갔다.

“이야… 그런 것도 있었어? 엘레하, 그거 좀 빌려주라.”

“아, 안 돼! 누구 맘대로!”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수혁의 손은 재빠르게 은빛 여명을 낚아챘다.

“너만 살려고 하지 말고 없이 사는 사람들과 좀 나누며 살 줄도 알아라. 네 입만 입이고 우리 미영이 입은 주둥이냐? 우리 미영이도 상처를 많이 입었잖아.”

군중들이 던진 돌멩이 때문에 미영은 머리와 등, 허벅지 등에 심각한 타박상이 많았다.

수혁은 미영의 몸에 포션을 골고루 발랐다.

츠츠츠츠!

에메랄드와 같은 색이 나는 빛과 함께 포션의 기운이 미영의 상처에 닿자 새살이 돋아나듯 미영의 상처는 아물어갔다.

마침내 혼절해 있던 미영이 눈을 서서히 떴다.

두 눈 사이로 광채가 쏟아져 들어오자 미영은 잠시 시야가 흐릿하다고 느꼈다.

그 흐릿한 시야로 낯익은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다.

“수혁 오빠아…….”

“…….”

미영의 말에 수혁은 미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모진 운명의 질곡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미영의 두 눈에서는 은구슬 같은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둘의 사연을 들어 익히 알고 있는 엘레하 역시 콧잔등이 따끔거렸다.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이국땅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뜨겁게 다시 만났고 둘의 입술은 만남만큼이나 뜨겁게 하나로 포개졌다.

* * *

엘프의 나라, 요정의 숲 우드스탁에서는 엘레하의 아버지이자 엘프족의 왕인 라드리엘 웬헴이 뒷짐을 진 채 급한 볼일이 있는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성거렸다.

“친애하는 라드리엘이여, 정신 사나우니 그만 진정하고 자리에 앉으시오.”

헤르라트 마틴.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륙 최고의 검사이자 미트라카 제국의 권력 서열 2인자였으며 동시에 유일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였다.

그런 그가 지금 엘프의 왕에게 앉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소. 엘레하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지 않습니까.”

헤르라트 마틴은 사람 좋은 얼굴로 라드리엘을 안심시키려 했으나 그의 얼굴 역시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오. 아무래도 또다시 히나 왕국에 엘프 전사들을 파견해야 할 것 같소.”

“…….”

라드리엘의 말에 헤르라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 역시 암묵적으로 라드리엘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다.

“어떻소, 마틴 경. 엘프 최고의 전사들로 기동대를 만들어 그 계집을 잡아야 하지 않겠소?”

“신중을 기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요.”

“그래요, 지금 당장 전사들을 소집해야겠소.”

서성거리던 라드리엘은 문 밖을 향해 소리쳤다.

“크루건! 거기 있느냐?”

“예, 라드리엘 전하. 부르셨습니까?”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사내.

허리까지 늘어뜨린 금발을 펄럭이며 크루건이라는 엘프의 전사가 라드리엘에게 다가왔다.

“지금 당장 솜씨 좋은 엘프 전사들을 골라 히나 왕국으로 떠나라!”

“하오면…….”

“그렇다. 엘레하 그 녀석이 일을 그르친 것 같아. 지금 당장 히나 왕국으로 가서 일렉트라라는 그 계집을 잡아와라. 만약 그 악마가 잉태한 어둠의 씨앗이 반항한다면 그 자리에서 없애도 좋다.”

냉정한 라드리엘의 표정에 크루건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떠나겠습니다.”

그런데 뒤돌아 나가려는 크루건을 헤르라트 마틴이 불러 세웠다.

“크루건.”

“예, 마틴 경.”

대륙의 그랜드 마스터에 대한 예우를 갖추며 부동자세를 취하는 크루건에게 마틴이 입을 열었다.

“어젯밤 내가 왕과 함께 팔란티르(Palantir)를 봤네. 완전하진 않지만 어둠의 힘이 점점 커져가고 있어. 더군다나 히나 왕국에서 강력한 마왕의 기운이 느껴졌네.”

크루건에게 말하는 마틴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숙했다.

“알겠습니다. 최고의 전사들을 고르고 골라 반드시 라드리엘 님의 지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어서 떠나라. 지체해선 안 된다. 너의 어깨에 대륙의 운명이 달려 있다.”

“예, 전하.”

크루건의 신형이 빠르게 사라졌다.

“마틴 경.”

“말씀하십시오.”

“성스러운 동맹(Allies of the holy)의 깃발을 올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소.”

라드리엘은 뒷짐을 진채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뒤에 앉아 있던 헤르라트 마틴이 세월의 풍파에 지친 육신을 일으켰다.

“하지만 성스러운 동맹의 한 축이 무너져 내렸으니…….”

“그러게 말이오. 인간들의 황제가 죽고 그의 뒤를 잇는 자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전쟁광이 되어버렸으니… 장차 이 땅의 앞날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마치 한폭의 수묵화와도 같은 엘프의 숲을 바라보는 라드리엘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아직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헤르라트 마틴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라드리엘에게 다가갔다.

“후훗, 희망이라… 무수한 재앙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 태초부터 그것은 고문의 또 다른 이름이었죠.”

인간들에 대한 불신이 가득 섞인 라드리엘의 말에 마틴은 말없이 하늘만 바라봤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우드스탁의 광경은 예전과 다를 것 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신들의 축복이 엘프족뿐만 아니라 이 대륙의 모든 생명체에게 함께하길 바랍니다.’

마틴은 아직까지는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 * *

“자, 이제 약속대로 일렉트라 그 여자애를 찾는 데 협조해.”

엘레하는 격앙된 목소리로 수혁을 쏘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수혁은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미영 옆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고 있었다.

‘정말이지 미치겠군! 꼴불견도 저런 꼴불견이 어디 있담!’

엘레하는 속이 부글부글 끓고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마을 광장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저 동방의 인간 수컷은 자신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미영’이라 불리는 여자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

미영이라는 여자도 그랬다. 별로 재미있지도 않은데 수혁이 한마디만 하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못 봐주겠군.’

하지만 무엇보다도 엘레하의 속을 뒤집어놓는 것은 수혁의 태도였다.

분명 수혁은 미영을 찾으면 일렉트라를 찾는 걸 도와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화장실 갈 때하고 화장실 나올 때 사람 마음이 다르다고 했던가. 몇 번이고 일렉트라를 찾으러 같이 갈 거냐고 확인 차 물었지만 그는 듣는 척 만 척하고 있었다.

“야, 박수혁! 도대체 엘프 말을 뭐로 듣는 거야?”

“…….”

“남자의 약속은 황금이라며! 지금 듣고 있는 거야?”

엘레하가 뭐라고 말하던 수혁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니까… 그 작코와 타르키노라는 흑마법사들이 저에게 마법을 써보라고 했어요.”

“개자식들!”

수혁과 미영은 엘레하가 방방 뛰든 말든 소설보다 더 기구한 자신들의 경험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제 90번만 더 들으면 100번이다. 엘레하는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수혁이 구천에서 두 늙은이들에게 무공인가 뭔가 하는 것을 배웠다는 이야기와 현세로 돌아가서 국정원인지 뭔지 하는 곳 그리고 게임회사 사장을 상대로 통쾌한 복수를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미영이 팜파스의 흑마법사들에게 납치되어 겪은 이야기까지… 모두 엘레하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저 두 화상들은 지겹지도 않은지 그 이야기를 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제가 마법사가 아니라 게임회사 프로그래머라는 사실을 설명했죠. 그랬더니 마법 지팡이를 가지고 제 몸을 검사하더니 저보고 마법사가 아니라며 자신들에게 사기를 쳤다고 화를 내는 거예요.”

“그런 나쁜 자식들!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자. 그 개자식들을 능지처참해야겠어!”

수혁의 불같은 분노를 보며 미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요, 오빠. 이제 더는 나쁜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 해서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 하지만 널 고생시킨 놈들을 혼내줘야 하지 않을까?”

미영의 불안한 얼굴을 보며 수혁의 분노는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오빠, 우리 돌아가요. 이곳은 무서워요.”

“그래, 알았어. 미영이 네가 돌아가자는데 돌아가야지. 나도 엄마, 아빠한테 말도 없이 이곳으로 와버려서… 부모님들이 걱정하실 거야.”

“그래요, 돌아가요. 제가 이곳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 그리고 직접 목격한 판타지 세상을 소재로 게임을 만들면 훨씬 실감나는 게임이 되지 않겠어요?”

“오… 그런 방법이 있었네. 좋았어! 그럼 미영이 너는 게임을 만들고 나는 그 게임을 신나게 즐기면 되겠네.”

미영의 말에 수혁이 맞장구를 쳤다.

“호호호, 그러면 되겠다. 오빠는 게임의 제왕이니까요.”

“음하하하, 그럼 내가 누구야! 오락 신동, 게임의 제왕 랏사드 아냐, 랏사드!”

“호호호, 오빠가 게임의 제왕이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우웩!

엘레하는 속이 더부룩하고 메스꺼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손가락이라도 집어넣고 한바탕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게워내고 싶었다.

‘놀고 있네, 놀고 있어. 짚신도 제 짝이 있다더니 아주 둘이 잘 만났구나, 잘 만났어.’

엘레하의 입은 산봉우리만큼이나 튀어나와 있었다.

“박수혁! 정말 그럴 거야? 내 말 안 들리냐고? 일렉트라 그 계집을 당장 찾아야 한다니까.”

버럭 화를 내는 엘레하를 미영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빠, 무슨 엘프 성질머리가 저 모양이에요?”

“그러게 말이야. 한국 게임 회사들, 엘프에 관한 프로그래밍을 전부 수정해야겠어. 나는 엘프하면 미모와 고결함을 동시에 간직한 존재라 생각했는데…….”

“정말요. 저 엘프는 생김새만 엘프고 완전 욕쟁이예요.”

부글부글!

뱃속에 장작불이라도 집어넣은 듯했다. 엘레하는 홧병으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수혁 오빠. 근데 한국으로는 어떻게 돌아가죠?”

“…….”

쿠오오오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핵심 질문을 받았을 때의 난처함이란… 수혁은 갑작스러운 미영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푸헤헤헤… 둘이 아주 꼴값을 떨더니 잘됐다, 잘됐어. 네들이 왔다는 그 이계로 돌아갈 방법도 없으면서 지금까지 그 꼴값을 떤 거냐?”

엘레하가 배꼽을 잡으며 오래간만에 웃었다.

“저런 싸가지 없는 년이! 너 온몸이 또 마비되고 싶냐?”

자신들을 비웃는 엘레하를 향해 수혁이 쌍심지를 켜고 엘레하를 바라봤다.

“오냐! 그렇지 않아도 네 연놈들을 손봐주고 싶었는데 어디 한번 못 다한 승부를 겨뤄보자.”

파창!

성질머리로는 절대 지지 않을 엘레하였다. 그녀는 번개처럼 재빠르게 엘레멘탈 보우를 꺼내 들었다.

“오빠, 그만 해요.”

“쩝… 엘레하, 너 운 좋은 줄 알어! 우리 여친 덕분에 네 목숨 건진 거니까. 어서 미영에게 고맙다고 해라.”

그녀는 도저히 찌질이 커플들의 작태를 두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일렉트라를 찾으러 떠나야 했고 자신의 실력으로는 수혁을 어찌해볼 수 없었다.

순간 엘레하의 머리에 번뜩이는 영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야, 박수혁. 네가 일렉트라 찾는 걸 도와준다면 내가 너랑 네 여자 친구가 돌아가는 걸 도와주마. 그건 우리가 이미 약속했던 것이잖아?”

번쩍!

쫑긋!

그 말에 미영과 수혁이 눈을 번쩍 뜨고 귀를 쫑긋 세우며 엘레하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그런데 어떻게 도와줄 건데?”

“우리 아버지가 아시는 분 중에 오퍼도버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차원 여행을 자기 집 안방 드나들듯 하시는 분이지.”

“오퍼도버?”

수혁은 오퍼도버라는 단어가 어딘가 귀에 익는다 생각했다.

‘오퍼도버? 어디서 많이 들어본 단어 같은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순간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긴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싸가지 없는 마법사, 프란츠!

비록 외팔이지만 마법 솜씨 하나는 일품이었던 외팔이 마법사 프란츠가 드워프 감론, 감노와 이야기할 때 분명 오퍼도버 라는 자에 관해 말했다.

위대한 마법사이자 대륙의 현자라는 오퍼도버, 그는 분명 프란츠의 할아버지라고 했다.

“오퍼도버? 혹시 프란츠의 할아버지 오퍼도버를 말하는 거냐?”

수혁의 질문에 엘레하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수혁을 바라봤다.

“오퍼도버 님을 알아?”

“그래, 대륙의 현자이자 위대한 마법사라는 오퍼도버.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다.”

“네, 네가 어떻게 그분을…….”

엘레하는 수혁이 정확하게 오퍼도버에 관해 말하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프란츠 할아버지라 그 말이지? 그렇다면 정말 우릴 한국으로 되돌려 보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미영은 수혁과 엘레하의 대화를 들으며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래, 일렉트라 찾는 걸 도와준다면 너희 둘을 오퍼도버 님께 소개시켜주겠다.”

“오빠, 그럼 우리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

“응,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그전에 계집 하나를 찾아야 해.”

“계집이라구요?”

그러자 이번에는 엘레하가 끼어들었다.

“그래, 계집. 장차 이 땅에 어둠을 몰고 올 악의 근원이지. 모두 그 잘난 네 오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어둠이라뇨? 악의 근원이라뇨? 무서워요, 오빠.”

미영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수혁의 팔을 붙잡았다.

“아냐, 아냐. 걱정하지 마. 이곳 사람들이 유난히도 허풍을 잘 치더라니까. 내가 보기에는 미영이 너보다 더 순진해 보이고 파리 한 마리 잡지도 못할 만큼 연약해 보이던데… 무슨 악이고 어둠이야. 당장 그 계집아이 찾아주고 이 지긋지긋한 대륙을 떠나자.”

수혁의 말을 듣고 있던 엘레하의 표정이 자못 비장했다.

“설마 너 이번에도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지? 이번에는 확실하게 일렉트라 찾는 데 협조할 거지?”

“아, 알았다니까. 참 말 많네. 그러니 누가 너보고 엘프라고 하겠냐?”

“좋아. 그럼 지금 당장 미자비엘 마을을 향해 떠나자.”

“그러지, 뭐.”

“근데 네 여자 친구는 계속 붙어 다닐 거냐?”

엘레하는 미영과 수혁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럼?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엘레하의 말에 미영이 수혁의 팔을 더욱 꽉 붙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있으니까. 아직까지 이 땅에서 나보다 강한 놈은…….”

수혁은 잠시 말을 더듬었다.

분명 아직까지 자신보다 강한 자는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세풀투라가 떠올랐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그 무시무시한 창술과 가공할 위력. 지옥을 헤치고 나온 듯한 눈빛.

하지만 수혁은 고개를 흔들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까지 이 땅에서 나보다 강한 놈은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니 걱정은 말라고. 미영이는 내가 지킬 테니까.”

수혁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며 미영을 끌어안았다.

‘놀고 있네. 아직 세상 넓은 줄 모르는 놈이군. 아무튼 저놈이 일렉트라 찾는 걸 도와주고 나서도 이곳에 남는다면 우리 엘프들에게 큰 힘이 될 텐데…….’

엘레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엘레멘탈 보우를 등에 꽂아 넣었다.

그렇게 미자비엘 마을을 향해 세 사람의 그림자가 해를 등지며 걸어 나갔다.

한 명은 둘을 재촉하며 빠르게 걷고 있었고 나머지 둘은 자석으로 붙여놓은 듯 착 달라붙어 느긋하게 앞장 선 여인을 따라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