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6 두 번째 위기를 넘기는 악의 씨앗! (37/51)

chapter 36 두 번째 위기를 넘기는 악의 씨앗!

“멍청한 놈!”

“사부님.”

“이 노부의 무공이 고작 그 정도로 약한 줄 아느냐? 어디 가서 절대로 마계진마 구일행을 사부로 뒀다고 말하지 마라.”

“사부님! 하지만 놈은 너무 강했습니다. 더군다나 아직까지는 천마구려심법을 완벽하게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못난 제자를 용서해주십시오.”

수혁은 구일행에게 머리에서 피가 나도록 머리를 찍으며 사죄했다.

“쯔쯔, 그것이 바로 사파무공의 한계일세. 그러니 처음부터 내 무공을 배웠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을. 사파무공이라는 것이 속성심법에만 치우쳐 있어 무공에 깊이가 없어, 깊이가.”

“이 영감탱이, 지금 말 다 했어?”

“이것 보게, 말 한마디에 발끈하니 어디 무공으로 대성할 수 있겠어? 사부나 제자나 똑같구먼.”

“이… 이 자식.”

수혁 앞에서 구일행은 장삼병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에헴, 수혁아. 그래서 검을 만병지왕이라 했느니라. 내 너에게 무당의 검술을 가르쳐줬으니 다음부터는 검을 이용하도록 해라. 어찌 권술로 검술을 당해낼 수 있겠느냐.”

장삼병은 자신의 멱살을 움켜쥔 구일행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이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아, 지금이라도 내 권술로 그 잘난 무당의 검술을 파훼하는 것을 보여줄까?”

구일행은 버럭 성을 내며 또다시 장삼병의 멱살을 움켜쥘 기세였다.

“하오나 사부님, 저에게는 검이 없지 않사옵니까?”

“쯔쯔쯔, 검이 없으면 만들면 될 것 아니냐.”

“검을 만들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어디서 어떻게 해야…….”

“이놈아, 하나부터 열까지 일러줘야겠느냐? 우린 그만 가련다.”

“사부님! 사부님!”

수혁은 꿈을 꿨다.

꿈속에서 구일행과 장삼병을 만났는데 어찌나 생시 같던지 수혁은 두 팔을 휘적거리며 눈을 번쩍 떴다.

순간 수혁은 기절할 뻔했다. 아니, 심장마비로 죽을 뻔했다.

원래부터 고소공포증 같은 것이 조금 있어서 바이킹이나 청룡열차 같은 놀이기구를 잘 못 탔는데 자신의 몸이 허공을 날고 있었던 것이다.

두 눈 아래 천하가 굽어보였다. 그는 지금 구름 위를 날고 있는 것이었다.

“하하하, 드디어 깨어나셨수?”

‘이, 이 목소리는?’

가온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너… 너는 프란츠?”

“그러기에 내가 뭐랬어? 오크들과 부딪치지 말고 피해서 문명의 문으로 가라고 했잖아. 당신이 세풀투라를 분노케 했으니 이제 그들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질 거야.”

프란츠는 수혁을 나무라듯 말했다.

“어떻게 된 거냐?”

“어떻게 되긴, 마물의 기가 느껴져 돌아와 보니 당신이 골고다스 강물에 흘러내려가고 있더구만. 그래서 내가 구해준 거지. 앞으로 생명의 은인 대하듯 해야 할걸?”

수혁이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틀었을 때, 그의 눈은 커다란 독수리처럼 생긴 새의 눈과 마주쳤다.

“헉! 뭐야? 이… 무지막지한 새는?”

“놀라지 마슈. 그리폰이라는 건데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에 사자의 몸통을 하고 있는 동물이지.”

프란츠의 설명에 수혁이 그리폰의 몸을 살펴보니 그 새는 가슴 아래부터 사자의 몸뚱이를 하고 있었다. 즉, 자신은 새의 지금 앞발에 낚인 채 허공을 날고 있었다.

“야, 프란츠. 나 좀 어떻게 위로 올려주든지, 빨리 내려주면 안 될까? 멀미가 날 것 같아서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

“멀미? 맨손으로 늑대도 때려잡는 인간이 멀미를 한단 말이야? 하하핫! 그리마, 이분께 멋진 비행을 선물해드려라.”

“아, 안 돼에!”

그러자 프란츠를 태우고 수혁을 거머쥔 그리폰은 활강하듯 빠르게 날았다.

수혁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목이 쉴 정도로 비명을 질렀다.

얼마를 날았을까, 끝없이 펼쳐지던 아드리아 해가 끝나가는 곳에 거대한 항구가 보였다.

“저곳이 아드리아 항구야.”

“아… 아드리아고 뭐고 시끄러. 빨리 내려달란 말이야, 이 자식아. 저, 정말 나중에 만나면 죽이고 말 테다.”

“거참, 덩치에 안 어울리게 노네. 그리마, 이제 우린 그만 비오트 숲으로 돌아가자.”

끼엑, 끼엑.

“그래, 이 사람은 이제 그만 내려줘.”

끼엑, 끼엑.

프란츠가 그리마라 부르는 그리폰은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아시리움 왕국과 히나 왕국의 국경지대인 히루자 마을의 초가지붕 위에 수혁을 내려줬다.

털썩!

수혁은 지붕 위로 떨어지자마자 구토를 했다.

“우에엑!”

“하하하… 나중에 또 보자고, 수혁.”

그리폰 위에서 프란츠는 크게 웃더니 어느새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제기랄! 쌍놈의 시키, 가만 안 두겠어.”

수혁은 초가지붕 위까지 닿아 있는 사다리를 타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한적한 시골마을이어서인지 인적은 드물었다.

수혁은 곧바로 마당 옆에 있는 헛간으로 들어갔다.

그의 머릿속에서 얼마 전 있었던 세풀투라와의 싸움이 대국 후 복기되는 것처럼 복기되었다.

위리놈의 가신인 세풀투라의 스피어는 얼마나 빠르고 현묘했던가.

수혁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두 손을 말아 단전 아래 올려놓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의 머릿속으로 치열했던 세풀투라와의 결투가 영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악마 같은 세풀투라가 내뻗던 현란한 검초들. 그리고 자신의 뇌천마공이 그들을 어떻게 받아넘겼고 자신의 권강과 각강을 그가 어떻게 받아넘겼는지…….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떠오르자 수혁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하나하나의 동작들이 방금 전 일처럼 뚜렷이 떠오르고 세풀투라의 움직임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얼마지 않아 수혁의 온몸은 자색 기운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수혁의 몸을 싸고 있던 자색 증기는 황망히 머리 위에 덩어리졌다.

잠시 후 수혁의 머리 위에는 눈부시도록 흰 연꽃 세 송이가 떠 있었다.

그 연꽃은 정중동의 상태로 한참을 지속되더니 이내 수혁의 내천혈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사라졌다.

삼화취정.

‘됐어.’

수혁이 곧바로 천마구령심법의 구류공법을 시도하자 단전의 진기가 노도처럼 일어났다. 그러더니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단전을 뛰쳐나가 경락을 따라 줄달음질쳤다.

수혁은 소스라쳤다.

단전의 내기가 일절 자신의 통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수혁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구류공법으로 진기를 통제하려 들었지만 막무가내였다.

‘이, 이런… 어떻게 된 일이냐?’

극양지기는 마치 망나니처럼 몸속을 활개를 치더니 삽시간에 백회혈을 휘감아버렸다. 그리고 잠시 정중동의 상태를 지속하던 진기가 두 개로 쫙 갈라져 우박처럼 거꾸로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두 개로 나누어진 진기가 달려가고 있는 곳은 여태껏 단 한 번도 흘러가보지 못한 임맥과 독맥이었다.

아무리 제지하려고 해도 제지할 수 없이 기는 날뛰었다. 어찌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몸 안은 변화가 일어나 막무가내로 움직였다.

쿠콰콰.

뇌력 소리가 몸속에서 일어나며 수혁의 몸은 붕 떴다. 그리고 맞은편 나무 기둥에 부딪쳤다.

엄청난 충격에 정신이 얼얼하긴 했지만 다행히도 뼈가 부러지거나 다친 곳은 없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잠시 바닥에 누워 있던 수혁이 몸을 일으켜 세우는 순간 그의 몸은 또다시 허공으로 솟구쳤고 이번에는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수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 허공을 딛고 서 있는 듯 전신이 가벼워지고 단전에는 폭포수 같은 내공이 득실거렸다.

‘생사현관이 타통되었구나.’

생사현관은 고수로 가는 최대의 관문이다.

단전에서 출발한 진기는 전신을 한 바퀴 돌며 몸 구석구석에 묻어 있는 찌꺼기를 깨끗하게 쓸어 단전으로 가져온다. 단전은 이런 노폐물을 운기조식을 통해 몸 밖으로 배출하거나 다시 정화하여 순기로 재탄생시킨다.

그런데 임맥과 독맥이 막혀 있으면 진기가 온몸을 한 바퀴 돌지 못하고 중간쯤에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게 되면 진기가 몸속의 폐기와 탁기를 단전으로 가져오지 못해 금방 지치게 된다.

하지만 생사현관인 임맥과 독맥이 뚫리면 진기가 끊임없이 온몸을 회전하며 피로를 씻고 탁기를 제거하고 재생시키기 때문에 오랫동안 싸워도 지치지 않는다.

수혁은 세풀투라와의 접전으로 깨달음을 얻었고 그 깨달음으로 인해 예전에 성취했던 화경의 경지를 넘어 생사현관을 타통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현경의 경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단전에 득실거리는 내기를 잠재우자 몸을 감싸고 있던 자색의 기운은 수혁의 코로 빨려 들어갔다.

마침내 수혁이 두 눈을 떴다. 맑고 깊은 그의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내가 환골탈태를 한 것이냐?”

수혁은 놀람을 금치 못하며 온몸을 더듬었다.

숨을 쉬는 듯한 피부는 마치 어린아이의 것처럼 유들유들하고 탄력적이었다.

수혁은 곧바로 헛간을 빠져나가 우물에 얼굴을 비췄다.

“이런 젠장, 이왕 환골탈태될 거면 미남이 될 것이지.”

수혁은 단지 피부만 깨끗해졌을 뿐 변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화를 버럭 냈다.

“누구시죠?”

그때 수혁의 목소리를 들은 집주인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하하,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이온데 물 좀 마시려고요, 하하하! 그럼 안녕히 계세요.”

하늘에서 떨어졌다 하면 미친놈이라 할 것이 뻔하기에 수혁은 넙죽 절을 한 후 집을 빠져나왔다.

마당에 우물이 있는 집을 빠져나오자 구렁이처럼 구부러진 대로가 펼쳐졌다.

‘프란츠 자식, 이왕 내려줄 거면 길 좀 가르쳐줄 것이지. 그때 그 마법사 자식들이 오이로파라는 곳에서 왔다고 했지? 미영을 찾으려면 오이로파로 가야 할 텐데…….’

이제 수혁의 머릿속에는 오직 미영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때 마을 사람으로 보이는 한 아낙이 수혁의 눈앞으로 물동이를 들고 지나갔다. 여인을 본 수혁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말씀 좀 묻겠습니다.”

힐끗!

하지만 여인은 수혁을 쳐다보더니 경계하는 눈빛으로 보내며 그를 회피했다.

‘젠장.’

얼마쯤 걸었을까?

갑자기 수혁의 귀가 쫑긋거렸다.

‘이건 말발굽 소리… 누군가가 쫓기고 있구나.’

수혁은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감지하고 비응신보를 이용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 * *

“이랴, 이리야!”

철갑주를 걸친 기사들의 거친 숨소리!

천지를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

두두두두두.

30여 명의 기사들은 한 남자와 여인의 뒤를 쫓고 있는 중이이었다.

“놓치면 안 된다. 드와이트 자작님을 살해한 연놈들이다.”

기사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휘몰아치는 기마 위에서 고함을 지르며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섬뜩할 정도로 잘 벼려진 검이 들려 있었는데, 그 끝은 도망치고 있는 두 명의 신형을 향해 있었다.

“헉헉, 일렉트라. 내가 시간을 벌 테니 먼저 도망쳐라.”

“안 돼. 그럴 순 없어. 오빠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졌어. 오빨 혼자 두고 갈 순 없어.”

“일렉트라, 이러다간 우리 둘 다 죽어. 그러니까 너 먼저 도망치란 말이야.”

딜란과 일렉트라.

히에나 마을의 순수한 소년, 소녀였던 둘은 모진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그렇게 원하지 않은 도피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그 이유는 히에나 마을의 자작인 홉킨스의 아들 드와이트가 일렉트라를 겁간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와이트 때문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였고 근본적인 이유는 일렉트라에게 있었다.

어둠의 왕, 위리놈의 씨앗을 잉태해 태어난 악마의 딸.

천사와 악마의 본성이 양립하는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모두의 관심을 끄는 미모를 가지고 있었고 결국 그녀의 외모는 이 모든 사단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드와이트를 죽인 일렉트라와 딜란은 밤길을 이용해 도망과 은신을 반복하다가 죠드 마을의 분계선에서 기찰을 돌던 근위대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그 이후 홉킨스 가문 기사들의 추적을 받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딜란 오빠.”

두두두두두.

딜란과 일렉트라가 서로를 위해 희생하려 하고 있을 때에도 홉킨스 가문의 기사들은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고, 둘의 꼬리를 거의 다 따라잡고 있었다.

“하하하! 자포자기했구나, 이 지독한 것들!”

“죽여라, 특히 저 악마 같은 년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두두두두두.

일렉트라의 두 눈에 기사들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때였다. 기사들의 반대편 방향에서 때 아닌 거친 파공성이 날아들었다.

티이잉!

티팅!

“우아악.”

히히히히힝.

기사들의 비명과 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졌다. 매섭게 돌진하던 기마에서 떨어진 기사는 팔다리가 부러졌는지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웬 놈이냐?”

“어떤 놈이 감히 홉킨스가의 레이어 기사단을 막아선단 말이냐?”

그러자 일렉트라와 딜란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를 향해 말고삐를 늦춘 기사단의 대장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기사? 방금 기사라고 했소? 기사라면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야지 무기도 없는 처녀, 총각을 그렇게 모질게 대한단 말이오?”

수혁은 비아냥거리듯 기사단의 대장에게 대꾸했다.

“보아하니 떠돌이 낭인 같은데 다치기 싫으면 우리 일에 참견 마라.”

“우… 팔다리가 부러진 것 같아요, 대장.”

“씨파 새끼, 감히 돌을 던져?”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이 검을 짚고 일어서자 홉킨스가의 레이어 기사단 단장인 사비에는 부상 입은 부하들을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

‘저, 저런, 풀메탈 플레이트를 쪼개 놓다니… 이건 돌에 의한 상흔이 아니야… 매직 미사일보다 더 날카로운 마법이다. 그렇다면 저놈은 마법사란 말인가?’

“당신은 누구요? 왜 우리 일에 참견하는 거요?”

상대가 마법사, 더군다나 풀메탈 플레이트도 박살내버리는 매직 미사일을 쏘아대는 마법사임을 파악한 기사단 단장 사비에의 어조가 조금 누그러졌다.

“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수혁이 더욱 기세 좋게 나오자 일렉트라와 딜란은 그의 뒤로 가 몸을 숨겼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딜란이 먼저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하자 일렉트라도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 아름답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하지? 예쁘다는 표현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저, 정말 영혼을 저당 잡힌 것 같아.’

그렇게 수혁은 일렉트라를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다가 딜란과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했다.

“험험.”

‘이런 미친놈! 미영을 구하자고 이곳까지 와서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다니… 그것도 임자가 있는 여자를… 근데 예쁘긴 예쁘다.’

수혁이 이렇게 일렉트라의 미모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수혁이 날린 탄지신공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던 기사 중 한 명이 검을 들고 수혁을 덮쳐왔다.

“이 개자식, 단칼에 베어버리겠다.”

“타르고, 안 돼!”

기사단 대장 사비에는 분노에 사로잡혀 뛰쳐나가는 휘하 기사를 제지하기 위해 고함을 질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내의 검은 단번에 수혁을 두 동강낼 기세로 찔러 들어갔다.

버버벅!

그러나 순식간에 타르고라 불리는 기사의 신형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입고 있던 풀메탈 플레이트가 산산조각이 난 채 허공에 휘날렸다.

수혁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뇌천마공 권술 맹합연환권은 풀메탈 플레이트를 종잇장처럼 찢어버렸다.

“끄아악!”

‘노, 놀랍다. 매직 미사일을 구사하는 마법 실력에 마스터들보다 뛰어난 체술이라니… 도대체 저자는 누구란 말이냐… 외모는 동방의 외인처럼 생겼는데… 히나 왕국에 저토록 뛰어난 체술을 구사하는 자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다.

레이어 기사단의 대장인 사비에는 수혁의 경지가 이미 자신을 넘어서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자식, 용서치 않겠다.”

하지만 하수들은 고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수혁의 외모만 보고 그를 얕잡아보고 있는 기사들은 검을 들고 수혁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잠깐 뒤로 피해 계세요.”

수혁은 일렉트라와 딜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허공으로 도약했다.

매섭게 찔러 들어오는 검로 속에서 수혁은 용트림하는 한 마리 용처럼 뒤틀렸고 그의 두 주먹은 부챗살처럼 펼쳐졌다.

뇌천마공 창룡승권.

한 번의 공격으로 백무리를 잡아내고도 남는다는 창룡승권이 한 번의 빗나감도 없이 정확하게 기사들의 헬멧을 강타했다.

우지끈!

그러자 권강이 번쩍이고 헬멧이 찌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은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으아악!”

두개골이 파열되고 목뼈가 부러진 기사들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만두시오. 자신보다 약한 기사들을 어찌 그리도 무참히 짓밟는단 말이오.”

“그건 내가 할 소린데?”

사비에 대장의 말에 수혁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험, 홉킨스 가문의 레이어 기사단 백인장 사비에, 당신에게 한 수 가르침을 청하오.”

“내가 한 수 가르쳐주면 저들을 보내줄 텐가?”

“좋소.”

“대장님!”

사비에의 말에 부하들이 그를 바라보며 외쳤다.

“닥쳐라! 이건 기사 대 기사의 승부다. 명예가 아니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레이어 기사단의 철칙이다!”

수혁은 눈앞의 기사를 보며 진정한 무인이라 생각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저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자, 그럼 한 수 부탁드리오.”

챠앙!

사비에는 말에서 뛰어내리며 검을 꺼내 들었다.

“자, 들어갑니다.”

츠츠츠츠.

처음부터 사비에는 자신의 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눈앞의 상대는 적어도 6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아니면 소드 마스터급의 기사.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호오, 이런 곳의 기사들도 검기를 불어넣을 수 있단 말인가? 신기하군. 양놈들이 무슨 심법을 연마했기에 이런 검기를…….’

수혁은 뇌천마공의 보법 중 하나인 후중속보를 밟으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손날로 검로를 차단했다.

“역시 대단하시구려, 오러 블레이드를 맨손으로 받아내다니 말이오.”

사비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는 것처럼 파상 공세를 해왔지만 사실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할 줄 아는 기사는 파이오니아 대륙의 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아무리 오우거나 미노타우르스의 가죽이 단단하다고 해도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 앞에서는 모두 종잇장처럼 찢기고 만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특이하게도 양손에 오러 블레이드를 불러일으킨 채 자신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단숨에 끝내야 한다.’

사비에는 계속되는 자신의 파상 공세를 보법으로만 피해내는 수혁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수혁이 지금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안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이런 치욕적인…….’

“대단하구려… 이건 어떠시오. 파워 스트라이크!”

순간 사비에의 검은 뇌력을 뿜어내는 것처럼 스파크를 일으켰고 도끼 모양의 검강 같은 기운은 수혁을 덮쳐왔다.

‘훗! 제법이군, 서양의 기사들이 검강을 사용할 줄 알다니…….’

“하지만 이건 어떨까? 뇌천마공 태산거권!”

수혁은 주먹 하나가 태산도 들어 올린다고 할 정도로 강력한 태산거권에 5할의 내공을 불어넣었다.

콰콰쾅!

뇌력 같은 검강과 거암(巨巖)같은 권강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하지만 사비에는 기껏해야 소드 마스터 초급 정도의 수준. 이미 생사현관을 타통시키고 현경의 경지에 들어선 수혁과는 내력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파카앙!

사비에의 검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조각났다. 그와 동시에 사비에의 신형이 5, 6미터를 밀려나 넘어졌다.

쿨럭!

사비에는 기침 소리와 함께 시뻘건 핏덩이를 게워냈다.

“대장님!”

그의 부하들은 사비에를 부축했다.

“이, 이럴 수가… 드워프들이 만들었다는 롱소드가 이토록 허무하게 부러지다니…….”

드워프가 만들었다는 말에 수혁이 두 눈을 작게 떴다.

“웃기지 마쇼. 그 검은 드워프가 만든 것이 아닐 것이오. 이제 이분들을 놔줄 거요?”

수혁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비오트 숲에서 만난 난쟁이들의 대장장이 기술은 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들이 만든 검이라면 이토록 쉽게 망가지지 않을 것이었다.

“치잇,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비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사의 예를 다하더니 수혁의 주먹에 허무하게 무너지자 성격(?)을 드러냈다.

“내가 보기에는 끝난 것 같은데…….”

“닥쳐!”

사비에의 검이 앞으로 뻗어 나왔다.

쿠오오!

그의 검세는 밀려오는 파도 같았다. 하지만 뭔가 결여된 듯 힘과 속도가 모두 떨어져 있었다.

소드 마스터라고는 하나 사비에는 이제 겨우 소드 마스터 초급의 수준. 그의 오러 블레이드는 수준급에 오른 소드 마스터들의 것보다 약했다.

좀 전의 일격으로 내상을 입은 탓에 그의 오러 블레이드는 모양만 파워 스트라이크를 흉내 낼 뿐 위력은 현저히 저하되어 있었다.

“기어이 피를 보자는 게요?”

피는 이미 본 지 오래다. 사비에를 잠시나마 진정한 무사라 생각했던 수혁은 자신의 마음을 접었다. 그 역시 장부의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필부에 지나지 않았다.

“뇌천마공 곡권 맹합연환권!”

두꺼비가 먹이를 낚아채듯 수혁의 주먹은 뱀처럼 구부러지며 사비에의 몸을 열두 번 강타했다.

버버버버벅!

“쿠악!”

하나의 주먹에 뼈마디가 부러지고 하나의 주먹에 근육이 파열되었다.

열두 번의 주먹 중 두 개는 밀려오는 사비에의 오러 블레이드를 쳐냈고 나머지 열 개는 사비에의 온몸을 난타했다.

허공에서 방향을 잃은 사비에의 몸은 부하 기사들을 덮치며 쓰러졌다.

철퍼덕!

“사비에 님.”

“정신 차리십시오, 사비에 님.”

“쿨럭, 쿨럭.”

부하들이 몸을 부축했으나 사비에는 이미 일곱 개의 구멍에서 피를 쏟아냈고 온몸의 근육이 파열되어 제대로 서지 못했다.

“저, 저자는… 사, 사람이 아니다. 저자는… 필경… 드… 끄윽.”

말을 끝맺지 못한 사비에의 목이 힘없이 꺾였다.

“백인장님!”

“사비에!”

부하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미안하오. 하지만 약속을 어긴 건 그쪽이 먼저였소. 이제 이 두 사람을 놓아줄 것이오?”

“…….”

홉킨스 가의 레이어 기사단의 기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수혁과 딜란 일행을 쏘아봤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자신들보다 훨씬 앞선 경지에 있던 사비에를 두 번의 권술로 죽여 버린 무시무시한 강자. 사비에의 복수를 하자고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다.

“무언은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이겠소. 그럼 우린 이만 가도 되겠소?”

수혁은 레이어 기사단을 등지며 두려움에 질려 있는 딜란과 일렉트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갈 길을 가셔도 좋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마법사, 아니 기사님.”

“하하하, 난 마법사도 기사도 아니오.”

“그, 그럼… 헙! 기사님, 위험해요!”

순간 일렉트라는 헛바람을 삼키며 두 눈을 부릅떴다. 수혁의 등 뒤로 열 개의 검이 폭풍처럼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어라, 개자식아!”

“이런 떨거지들이,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수혁의 두 발은 팔괘를 그리며 미끄러졌다.

팔괘보(八卦步).

마계진마 구일행은 팔괘보 하나로 십이 방위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단 하나의 걸음으로 수혁은 열 개의 검을 흘려보냈다.

“헙!”

“……?”

분명 눈앞의 수혁은 피를 토하며 쓰러져야 했다. 열두 개의 검이 망을 형성하며 찔러 들어갔기에 상급의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이번의 기습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레이어 기사단의 기사들은 수혁이 쓰러지는 것을 보기는커녕 발 모양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만큼 수혁의 보법은 신기했다.

“오랜만에 써보는구나. 뇌천마공 승룡연타 십이각!”

구일행이 화산논검에서 북해궁주 혈마흔을 일초에 무너뜨릴 때 쓴 전설적인 각법으로 일각분지, 십이각파천이라 하며 한 개의 다리면 땅을 가르고 열두 개의 다리면 하늘을 찢어발긴다 하는 강력한 각술이었다.

허공에서 부챗살처럼 펼쳐진 수혁의 다리는 순식간에 열두 개로 늘어나며 무서운 속도로 레이어 기사단을 향해 폭사됐다.

버버버버버!

정확하게 열 개의 각강이 레이어 기사단원들의 가슴을 후려쳤다.

“마, 말도… 안 돼…….”

“이, 인간이 아니다…….”

열 명의 기사들은 가슴에 통나무 한 개가 들락날락거릴 정도의 구멍이 뚫린 채 미동도 없이 멈춰 있었다.

수혁 스스로도 승룡연타십이각을 날리며 놀랐다.

생사혈관이 타통된 후로 처음 시전하는 승룡연타십이각의 경지는 이전과 달랐다. 일전의 뇌천마공이 태풍이었다면 지금의 뇌천마공은 폭발하는 화산이었다.

천하의 어떤 것이라도 파괴해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권술이 드디어 정점에 이른 것이다.

수혁은 허공에서 몸을 돌려 나비처럼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딜란과 일렉트라는 수혁을 경외감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들이 자초한 일이니…….”

그러자 수혁은 겁에 질린 그들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와하하… 아닙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죄악이라고 장삼병 사부님께서 가르치셨죠.”

“예?”

수혁의 말에 두 사람이 눈을 말똥말똥 뜨며 그를 바라봤다.

“아, 아니에요. 그런 사람이 있었죠, 헤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딜란이 말끝을 흐리자 수혁이 넉살좋게 웃으며 딜란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아니라니깐요.”

‘그나저나 형씨, 재주도 좋수.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를…….’

수혁은 하마터면 몸에 밴 습관처럼 자연스레 농담을 할 뻔했다. 하지만 속으로 꾸욱 삼켰다.

“딜란 오빠, 그럼 우리는…….”

일렉트라는 여전히 수혁을 경계했다. 일생동안 힘 있는 자들은 항상 그녀를 짓밟고 뭉개려 했다. 브루스가 그랬고 드와이트가 그랬다.

딜란과의 도피행각 중에도 수없이 많은 남자들은 자신을 음흉하게 쳐다봤고 넘봐왔다. 그중에는 드와이트처럼 각성한 일렉트라에게 처참하게 죽은 자들도 있었다.

사실 딜란은 악마의 모습으로 각성한 일렉트라가 죽인 것은 드와이트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와이트 뒤로도 많은 사내들이 딜란 모르게 죽어갔다.

일렉트라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선과 악이 동시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하지만 폭주하는 마성과 악한 기운이 선한 기운을 능가하지 못한 데에는 딜란의 공로가 컸다.

마녀 같은 그녀의 각성한 모습을 보고도 딜란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드와이트가 죽던 날도 딜란은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위로해주고 걱정해줬다.

기나긴 도피행각 동안 어둠의 왕 위리놈의 씨앗으로 인해 어둠의 왕의 숙주로 각성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딜란의 헌신적 사랑 때문이었다.

일렉트라에게 있어 딜란은 하나밖에 없는 절대 존재,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아가페적인 순수한 사랑 그 자체였다.

하지만 눈앞의 수혁은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강한 사내, 그 역시 다른 남자처럼 자신을 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렉트라는 수혁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눈앞의 사내는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음흉한 눈으로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기사님, 저희 부부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흰 갈 길을…….”

딜란은 일렉트라의 의중을 파악했는지 수혁에게 떠나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자신과 일렉트라를 부부라고 했다. 혹시라도 눈앞의 사내가 일렉트라에게 흑심을 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기사들이 쫓는 걸 보니 앞으로의 여정도 험난할 텐데 싫지 않으시다면 제가 동행을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수혁의 말에 딜란은 일렉트라를 바라봤다.

막강한 힘을 가진 수혁이 곁에 있어준다면 든든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렉트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딜란을 향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지금까지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저흰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그래요? 거참… 두 분 뜻이 그러시다면야…….”

딜란은 일렉트라의 표정을 살핀 후 정중하게 수혁의 제의를 거절했다.

수혁 역시 그들이 거절하자 강권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았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일렉트라와 저는 기사님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기사님.

수혁은 쓴 웃음을 지었다.

기사(Knight)야말로 수혁과 아주 거리가 먼 말이었다.

미영에게 수혁은 기사다운 모습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사모님에 나오는 김기사가 오히려 수혁과 가깝다고 해야 할까?

마지막으로 수혁은 그들에게 한 가지 물었다.

“한 가지 물읍시다. 오이로파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오이로파요? 이곳에서 상당히 먼 곳인데요…….”

오이로파.

파이오니아 대륙의 중심인 미트라카 제국을 사이로 히나 왕국과 오이로파, 아시리움 왕국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오이로파는 미트라카와 바로 국경을 지척에 두고 있었고 히나 왕국으로부터 동쪽에 자리 잡은 왕국이었다.

수혁은 한국에서 미영을 납치하던 흑마법사들이 분명 오이로파에서 왔다고 들었다.

또한 자신은 미영을 구하기 위해 이 먼 이계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멀다고요? 얼마나 먼데요?”

“우리 히나 왕국과 국경을 하나 접하고 있으니 엄청 멀죠. 여기서 300km 정도 꼬박 걸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300km라고요?”

서울에서 충북 보은까지 약 180km. 수혁은 그렇다면 오이로파까지는 대략 서울에서 제주도 정도의 거리쯤 될 것이라 생각했다.

‘젠장, 그렇게 먼 곳을 어떻게 걸어서 가야 한단 말이야? 프란츠 이 자식…….’

수혁은 죄 없는 프란츠를 씹었다.

“그런데 오이로파는 무슨 일로?”

“아… 그냥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라고나 할까요.”

“그래요, 아무쪼록 기사님의 소중하신 분을 구출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수혁은 멋지게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후 발걸음을 옮겼다.

“저, 저기…….”

“왜 그러시죠?”

“오이로파는 그쪽이 아닌데요. 동쪽으로 가셔야…….”

‘헉!’

“도, 동쪽이 어디죠?”

수혁의 물음에 두 사람이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제야 수혁은 그들이 왜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지 깨달았다. 머쓱한 수혁이 양팔을 으쓱할 때 딜란이 손가락으로 동쪽을 가리켰다.

“아하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동쪽은 그가 내딛었던 곳과는 정반대에 있었다.

수혁은 뒤통수를 긁으며 빠르게 걸었다. 그런 그를 일렉트라가 적의를 품고 바라봤다.

훗날 어둠의 왕 위리놈의 숙주가 되어 위리놈의 강마의식의 제물로 쓰이게 될 일렉트라는 본능적으로 눈앞의 상대에게 적개심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수혁은 자신이 생명을 구해준 천사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훗날 자신의 발목을 붙잡아 고향으로의 귀로를 방해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혁은 둔치를 넘어 딜란이 가르쳐준 동쪽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순간 수혁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 기운은?’

실로 엄청난 기운이 방금 자신이 지나온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혁은 재빨리 그 기운의 행로를 쫓았다.

놀랍게도 그 매서운 기운은 조금 전 자신이 구해줬던 딜란과 일렉트라를 뒤쫓고 있었다.

“이, 이런… 그들이 위험하다. 도대체 그들이 어떤 자들이기에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노린단 말이냐?”

수혁은 번개처럼 천마지보를 밟아 날듯이 뛰어갔다.

딜란을 따라 히나 왕국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미자비엘 마을로 가고 있던 일렉트라는 걸음을 멈췄다.

“일렉트라, 왜 그래?”

“오, 오빠… 무서운 기운이 다가오고 있어요.”

일렉트라의 말에 딜란은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어. 피곤한가 보구나. 너무 예민한 것 같은데 어디서 좀 쉬었다 갈까?”

“아니에요, 강렬한 기운이에요… 강렬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어요.”

하지만 딜란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주위에는 수목과 풀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렬한 기운이라면 어떤? 혹시 사악한…….”

“아녜요. 한없이 강하면서도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하고, 또 맹렬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런 기운이에요.”

“그, 그래?”

“하지만 위험해요. 그 기운 속에 살의가 담겨 있어요. 아무래도 저를 노리는 것 같아요.”

딜란은 그제야 일렉트라의 말을 곧이들었다. 지금까지 봐온 일렉트라는 딜란의 상상을 뛰어넘는 여자였다.

뭐랄까… 천사와 악마의 양면성을 지닌 야누스적인 인물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녀의 예지력이 빗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눈을 감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기운을 느끼던 일렉트라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왜 그러지?”

“그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라니?”

“조금 전에 우릴 구해줬던 그 사람, 그 사람도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어요.”

“뭐, 뭐라고?”

츄츄츄츄.

일렉트라의 말대로 능선 너머에서 엄청난 속도로 하나의 신형이 두 사람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말에 타지도 않았는데 그 신형은 말처럼 빨랐다.

“오빠, 위험해요.”

순간 일렉트라가 딜란을 안고 넘어졌다.

능선에 선 신형은 일렉트라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빠른 몸놀림으로 등에 멘 활을 꺼내 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화살을 재지 않고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르탈 보우(Mortal bow).

이름 하여 죽음의 샷으로도 불리는 모르탈 보우는 대륙의 남단에 위치한 엘프의 나라 우드스탁에 사는 엘프들이 구사하는 전설의 궁술이다.

파이오니아 대륙과 버려진 대륙 헬벤타리아, 거인의 나라 베리사드, 죽음의 대륙 마턴즈베크를 통틀어 최고의 궁술을 가진 활의 귀재들 엘프.

태어날 때부터 자연의 정기를 몸 안으로 끌어들여 마나를 다룰 줄 안다는 엘프.

그들은 엘븐스 듀실리티(Ductility)라는 독특한 마나 연성법을 연마해왔는데, 마나 연성법이 경지에 이른 엘프들은 별도의 화살 없이도 마나를 대기 중에 연성시켜 마나가 응축된 화살을 먼 거리까지 날릴 수 있었다.

투웅!

엘프의 신형이 활시위를 퉁기자 바람을 가르며 마나가 응축된 오러 애로우가 일렉트라의 심장을 향해 빛처럼 날아갔다.

그때였다.

능선의 오른편에서 달려오던 또 하나의 신형이 허공을 밟고 뛰어오르며 그림자가 쏜 오러 애로우를 걷어찼다.

능공허도(能空許徒)에 이은 창파패각이 수혁의 발에서 뻗어 나와 일렉트라를 향해 날아드는 마나 화살을 걷어찬 것이다.

찌릿!

욱신욱신.

신법을 펼치며 넘어진 딜란과 일렉트라 앞에 나타난 그는 발이 욱신거리며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누구냐?”

수혁은 언덕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기, 기사님. 또다시 저희들의 목숨을 구해주셨군요,”

“도대체 당신들의 정체가 뭐요? 왜 이토록 무서운 자들이 당신을 뒤쫓는 거요?”

투웅!

쐐애애애액!

수혁은 전해오는 미통 때문에 인상을 찡그리며 딜란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또다시 강렬한 파공성과 함께 날아드는 화살을 바라보며 몸을 날렸다.

뇌천마공 납천와슬.

이번에는 수혁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무릎에 강한 기공을 실어 날아오는 화살을 무릎으로 걷어 올리며 한 손으로 방향이 꺾인 화살을 낚아챘다.

스스스스!

순간 마나로 응축된 화살은 수혁의 손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뭐, 뭐냐? 화살도 없이 활을 쐈단 말이야? 도대체 저자는…….”

투웅! 투웅!

이번에는 두 발.

콰콰콰콰!

여의주를 문 용이 덮쳐오듯 빛무리를 일으키는 두 개의 화살은 수혁과 일렉트라를 동시에 덮쳐왔다.

“이런, 씨발!”

수혁은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몸을 가위처럼 뒤틀었다.

수라분광권과 창파패각을 엇갈리게 뻗어내 날아오는 화살을 퉁겨내는 그는 그때마다 손끝과 발끝에서 강한 충격파를 느꼈다. 그것은 수혁의 온몸에 전해졌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수혁은 일렉트라와 딜란을 바라보며 외쳤다.

“어서 달아나시오, 어서! 당신들이 곁에 있으면 모두 다 위험해지니 어서 달아나란 말이오.”

그 말에 딜란과 일렉트라는 몸을 일으켜 미친 듯이 뛰었다.

언덕 위의 그림자도 도망치는 일렉트라를 보자 수혁을 무시하며 일렉트라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이런 싸가지 없는 XX를 봤나. 감히 나를 무시해? 어디 너도 맛 좀 봐라.”

구일행이 강호를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은 권술과 각술 때문이 아니라 뇌천마공과 천마구령심법 덕분이었다.

지금 수혁은 사부에게서 배운 장법 중 하나인 천마한빙장을 날리기 위해 양손으로 천세보혈주의 극양지기를 몰아넣고 있는 중이었다.

쿠오오오!

허공의 모든 기운이 수혁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나 싶더니 그가 두 손을 내뻗자 금강석처럼 빛을 발하는 얼음덩어리의 결정체가 나타나며 일렉트라를 향해 뛰는 그림자를 향해 날아갔다.

“죽어버려!”

파차차창!

허공을 날아가는 천마한빙장을 보며 엘프의 신형은 두 눈을 좁게 떴다. 그에 그는 일렉트라를 쫓던 걸음을 멈추고 등 뒤에 멘 활을 꺼내 들어 시위를 퉁겼다.

투웅! 콰오오오!

퍼엉!

그러자 허공에서 두 개의 강렬한 기운이 충돌했다.

하나는 북해빙궁의 절기 천마한빙장, 하나는 신궁이라 불리는 엘프들의 오러 애로우였다.

두 개의 강기가 허공에서 부딪치며 강렬한 반탄강기를 만들어내자 엘프뿐만 아니라 수혁도 뒤로 조금 밀려났다. 하지만 엘프가 훨씬 더 많이 밀려났다.

탁! 탁!

뒷걸음질을 치던 엘프는 일렉트라를 한 번 뒤돌아보더니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수혁을 향해 몸통을 틀었다.

“당신 먼저 처치해야겠군.”

수혁은 언덕 저편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여, 여자?’

능선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더군다나 자신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그 여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은 온통 은으로 덧칠을 한 것처럼 반짝였고 에메랄드와 같은 색을 가진 눈동자는 빨려들 것처럼 매혹적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은빛 머리칼은 완벽에 가까운 이목구비의 상당부분을 가리고 있었는데, 바람에 머리카락이 일렁일 때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은 조금씩 드러났다.

더더욱 그를 숨 막히게 하는 것은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수혁이 살던 곳의 섹시 가수를 연상시킬 정도의 도발적인 의상. 가슴의 볼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하프 플레이트 메일은 중요한 부분만 가리기 위해 입은 것처럼 희뿌연 팔의 곡선과 유들유들한 복부를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었는데, 배는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끈했다.

서구적인 체형 때문에 동양인보다 엉덩이의 높이가 위에 있는 하반신은 더더욱 점입가경이었다. 정강이 받이와 짧은 스커트만 착용했기에 더 매끈하게 보이는 허벅지가 매력적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수혁이 뇌천마공의 초식이나 천마구령심법의 심결을 외우고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넋을 잃고 침을 흘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인간 수컷, 왜 저 악마의 딸을 보호하려는 것이냐?”

“뭐, 뭣?”

그제야 수혁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엘프를 바라봤다.

‘우씨, 예뻐서 봐주려고 했더니 초면에 반말 짓거리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저 불쌍한 사람들을 죽이려는 거냐?”

“이유야 네깟 인간 수컷이 알 필요 없다. 내 일을 방해하는 자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쿠오오오오!

엘프 엘레하.

그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의 축복이 내렸다는 꿈의 동산 우드스탁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엘프족의 왕이자 아버지인 라드리엘 웬헴의 오랜 친구인 헤르라트 마틴이 찾아오면서 한적한 생활은 끝이 났다.

헤르라트 마틴이 누구인가. 파이오니아 대륙의 최강대국인 미트라카 제국 군부의 최고 실력자이자 동방의 이스트리를 제외하면 유일한 대륙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군부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남부러울 것이 없는 그가 경호 무사도 없이 혼자 우드스탁을 찾아왔다는 것은 대륙의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헤르라트 사령관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웬헴은 곧바로 헤르라트 마틴과의 독대에 들어갔다.

두 분의 만남은 새벽이 되도록 이어졌다.

다음 날 엘프의 왕인 라드리엘 웬헴은 자신의 딸이자 우드스탁 최고의 궁수로 꼽히는 엘레하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방 안에는 미트라카의 사령관 헤르라트 마틴이 구석 의자에 수심 어린 얼굴로 앉아 있었다.

“엘레하 웬헴, 대륙의 사령관이시자 엘프의 오랜 친구인 헤르라트 마틴 경을 뵙습니다.”

“엘레하, 그동안 더욱더 아름다워졌구나. 왜 수많은 시인들이 너의 미모를 칭송하는지 알겠다. 하지만 엘레하, 나는 더 이상 제국의 사령관이 아니다.”

마틴이 근위 기사도 없이 우드스탁을 찾았을 때부터 그녀는 불길한 예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엘프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육감이었다.

하지만 마틴 경이 제국의 사령관이 아니라면 이제 누가 제국의 사령관이란 말인가?

“게오르그, 그 미치광이가 달루시아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구나.”

갑자기 말을 꺼낸 마틴 경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했다.

“엘레하, 지금 당장 히나 왕국으로 떠나야겠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엘프의 왕 라드리엘의 어조는 단호했다.

“너의 손에 달루시아의 운명이 걸려 있다.”

“아버님,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당시 엘레하는 라드리엘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라드리엘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나았을 뻔한 이야기였다.

위리놈에 관한 이야기라면 어려서부터 서적과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귀가 닳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염마대전에서 지옥의 무저갱에 봉인된 위리놈의 4대 가신들 중 하나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그가 염마대전에서 살아남아 수차례의 종족대전을 이끌었으며 악의 씨를 잉태할 육체를 찾아 위리놈의 씨앗을 뿌렸다는 이야기는 거의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그 아이가 온 대륙을 멸망시킬 어둠의 씨앗이라면 왜 마틴 경이나 아버님께서 직접 그녀를 처치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아이, 아직까지는 그렇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란다.”

구석에서 라드리엘과 엘레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틴 경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게오르그 마이어스, 그 미치광이의 계략에 빠져 마나홀을 폐위 당했단다. 놈의 함정에 빠지기 전, 나는 내 오랜 친구이자 네 아버지 라드리엘의 친구이기도 한 오퍼도버를 찾아갔다. 그때 오퍼도버가 어둠의 씨앗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지.”

“오퍼도버 님이라면 저도 몇 번 뵌 적 있어요. 오퍼도버 님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책도 잘 읽어봤고요. 그분께서는 건강하신가요?”

그때 마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지금 미트라카의 교권의 상징인 대법황청 단죄의 탑 지하실에 갇혀 있단다.”

“예? 도대체 왜 그분이 단죄의 탑 지하 던전에…….”

대법황청 단죄의 탑.

그것은 허울 좋은 포장지에 불과하다. 그 단죄의 탑 지하 감옥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제우바 신의 이름 아래 죄 없이 죽어갔다는 사실은 달루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였다.

순박한 엘프들은 단죄의 탑을 가리켜 지하 던전이라고 불렀다.

“이교도. 대법황 라이베로스가 오퍼도버에게 씌운 죄목은 이단, 그 두 글자였다. 나는 오퍼도버가 지하 던전에 갇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러 급히 단죄의 탑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서 일렉트라라는 어둠의 씨앗에 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었지. 대륙 최고의 천민 마법사라는 이유로 물 한 모금도 주어지지 않는 지하 감옥에서 오퍼도버는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밤마다 위리놈의 꿈을 꾼다고, 머지않아 어둠의 왕의 강마의식이 시작할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 어둠의 씨앗, 아니 일렉트라라는 아이가 완전히 각성한 건가요?”

그 질문에 헤르라트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도 아직은 확실하게 마성을 드러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선과 악이 샴쌍둥이처럼 공존하는 야누스적인 인간, 결국 인간의 탐욕은 그녀를 악마로 만들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너는 지금 오퍼도버가 그 아이를 발견했다는 히나 왕국으로 가서 그 아이를 찾아야 한다. 찾아서 이 엘프의 나라 우드스탁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 인간은 그녀를 결코 지켜줄 수 없어. 아니, 어쩌면 그녀를 더욱더 타락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

“마틴 경, 그렇다면 만약 제가 일렉트라를 발견했을 때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성을 드러내고 있다면 즉결 처분해도 되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처단해야 한다. 엘레하, 명심해라. 그 아이가 악마의 심성을 키워나갈수록 위리놈의 부활은 빨라질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헤르라트 마틴의 얼굴은 거의 검은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아버지가 가시는 게…….”

“그럴 순 없단다, 엘레하. 지금 미트라카의 권좌가 바뀌었단다.”

라드리엘은 무겁게 대답했다.

“뭐라고요? 그럼 헬무트 마이어스 대제께서 붕어하셨단 말씀이신가요?”

순간 엘레하는 몸서리칠 정도로 섬뜩한 이빨 가는 소리를 들었다. 제국의 사령관이자 헬무트 마이어스의 충복이셨던 헤르라트 마틴이 이빨이 닳아질 정도로 어금니를 깨문 것이다. 어찌나 무섭게 이를 가는지 그의 입가에서 피가 맺힐 정도였다.

“권력과 전쟁에 눈이 먼 게오르그 그놈이 헬무트 대제를 독살하고 미트라카의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 놈은 자신의 야망을 위해 형이 테오도어 마이어스와 동생인 비오테 마이어스까지 주살했다. 그리고 제국의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나를 함정에 빠뜨려 흑마법을 이용해 나의 마나홀을 폐했지. 이제 나는 죽어서 헬무트 대제를 뵐 낯이 없다.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나는 게오르그 그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마틴 경의 말대로다. 지금 게오르그는 제국의 모든 군대를 동원해 파이오니아 대륙의 왕국과 공국들을 복속시켜나가고 있다. 머지않아 전쟁의 불씨는 대륙 전역을 불태울 것이고 이곳 우드스탁까지 남하해올 것이다. 며칠 전 미트라카 제국의 사신이 우드스탁에 다녀갔던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을 테지?”

엘레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무례하게도 오로하 신의 가호를 받아 엘프의 왕이 된 나에게 야만족의 나라 마턴즈베크를 칠 것이니 지름길인 하제라 숲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 미치광이 게오르그의 야망은 거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턴즈베크를 침공하고 나면 이제 대륙의 모든 왕국과 공국의 기사들을 끌어 모아 선대에서부터 숙원이었던 동방의 대제국 이스트리와의 일전을 벌일 것이다.”

“저, 정말 그자가 미쳤군요. 마틴 경의 말대로라면 머지않아 암흑의 종족들이 부활할 텐데 염마대전의 동맹국들인 인간, 엘프, 드워프, 머포크가 키나비의 맹세 아래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인간들끼리 대전쟁을 벌인단 말인가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엘레하. 그래서 나는 지금 마틴 경과 함께 드워프의 나라 테라랜드와 머포크의 나라 인트리그로 가서 딤디왕과 무란 스튜어드를 만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이 길로 히나 왕국으로 떠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기필코 그 어둠의 씨를 이곳 우드스탁으로 데리고 오겠어요.”

그렇게 엘레하는 우드스탁을 떠나오던 때를 생각하며 수혁을 향해 자신 있게 다가왔다.

어느새 그녀의 두 손에는 엘프의 화살이 엘리멘탈 보우가 들려 있었다.

“이런 기어이 피를 보자는 건가? 참고로 말해두는데 나는 여자라고 봐주지 않는다.”

“훗!”

수혁의 말에 엘레하가 콧방귀를 뀌었다. 동시에 그녀의 두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미친…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화살을 쏘겠다는 건가?’

수혁은 급하게 두 팔과 두 다리에 천마구령심법의 심결을 이용해 기를 흘려보냈다. 천세 보혈주의 그 극양지기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위이이잉.

투웅! 투웅! 퉁!

엘레하의 손이 활시위에 세 번 걸렸다.

그와 동시에 세 개의 오러 애로우가 소낙비처럼 수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은 마치 뇌력처럼 강하고 번개처럼 빨랐다. 세 개의 섬광 같은 화살비는 수혁의 몸을 관통할 기세로 매섭게 날아들었다.

“뇌천마공 혈루각!”

수혁의 몸이 허공에서 춤을 춘다.

“뇌천마공 비무각!”

두 개의 각권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되더니 마지막 일격은 직권 중 가장 빠르고 날렵하다는 수라분광권이 터져 나왔다.

“뇌천마공 수라분광권!”

텅! 텅! 텅!

수혁을 타겟 삼아 비행하던 엘레하의 오러 애로우는 각강에 맞아 소멸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수라 분광권의 강렬한 반탄력에 의해 도리어 방향을 바꿔 엘레하를 향해 날아들었다.

수혁은 그 짧은 순간에 엘레하의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두 눈이 커다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을 엘레하는 엘리멘탈 보우를 휘저어 상쇄시켜버렸다.

“인간 수컷 치고는 제법이군.”

“쯔쯔, 생긴 것과는 다르게 말하는 싸가지가 형편없구나. 걸핏하면 수컷, 수컷.”

사실 엘레하는 말은 제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속으로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수혁과의 거리는 불과 30여 미터, 이 정도 거리에서 자신이 쏜 오러 애로우를 방패나 병장기가 아닌 손과 발로 쳐내는 인간은 적어도 소드 마스터 상급의 기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볼품없는 사내는 자신의 공격을 맨손으로 받아 쳐내고 있었다.

하지만 엘레하가 모르는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수혁은 이미 구천의 심곡에서 구일행과 장삼병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아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동체시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세풀투라와의 일전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현경의 경지를 훌쩍 넘어선 상태였다.

이 정도의 경지는 엘프 로드라 할 수 있는 라드리엘 웬헴과도 필적할 만한 경지이며 대륙 최강의 검사이자 파이오니아 대륙의 유일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헤르라트 마틴 경과도 호각지세를 이룰 경지였다.

스르릉.

엘레하는 오러 애로우가 먹히지 않자 허리에 차고 있는 블레이드 문을 꺼내 들었다.

푸른 교룡을 닮은 블레이드 문이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예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엘레하는 소름 끼칠 정도로 매혹적인 눈으로 수혁을 쏘아봤다.

“화살이 안 통하니 칼인가? 훗!”

수혁의 입술이 얇은 선을 만들었다.

‘죽이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야. 더군다나 언제 다시 이런 엘프를 만나보겠어. 한국 같았으면 폰카로 기념사진이라도 찍어 두는 건데, 쩝.’

수혁은 엘레하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을 때 그녀가 엘프족임을 직감했다. 이미 드워프 일족인 감론에게서 파이오니아 대륙과 달루시아 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갖가지 일족들에 관한 지식을 얻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눈앞의 여인의 모습은 한국에 있을 때 영화나 소설, 게임을 통해 본 엘프의 모습 그대로였다.

인간의 것과 비교되는 비쭉 솟은 당나귀 귀 그리고 밀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흰백의 피부. 무엇보다도 매혹적인 몸매와 풍성한 가슴.

갑자기 수혁이 등을 돌려 달아났다.

“……?”

엘레하는 느닷없이 도망치는 수혁을 보며 동공을 벌렸다.

‘우선 딜란과 일렉트라 신혼부부(?)가 멀리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야 해.’

수혁이 내심 속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엘레하는 온몸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그렇게도 긴장하게 만들었던 인간 사내가 생명을 걸어야 할지도 모를 대결을 앞두고 도망치다니. 이런 행운(?)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실 엘레하에게 수혁이란 존재는 방해물일 뿐이지 꼭 처단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자신은 오직 일렉트라 그 여자만 잡아 우드스탁으로 데리고 가면 될 뿐이다.

마틴 경과 아버지의 걱정과는 다르게 그녀는 아직 온순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별다른 마성을 드러내지도 않고 있는 듯했다.

‘잘 가라, 븅신.’

엘레하는 도망치는 수혁을 쫓지 않고 곧 바로 몸을 틀어 활을 꺼내 들었다.

일렉트라와 딜란은 이미 100미터를 달아나고 있었다.

엘레하는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다리만 분질러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도록 할 계획으로 활시위에 오러 애로우를 재웠다.

‘뭐, 뭐야? 쫓아올 줄 알았더니… 이, 이런…….’

수혁은 그제야 자신의 계산이 틀렸음을 깨닫고 허공에서 급하게 몸을 틀어 엘레하를 향해 탄지신통을 연거푸 날렸다.

파앙! 파앙! 파아앙!

엘레하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마나를 응축시킨 오러 애로우를 일렉트라의 허벅지에 박아 넣는다면 손쉽게 그녀를 우드스탁으로 데리고 갈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저 매직 미사일을 놔둔다면 자신의 몸은 벌집이 되고 말 것이다. 갈등을 하던 엘레하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혔다.

“젠장!”

엘레하는 빠르게 몸을 틀어 마나를 급하게 응축시킨 엘리멘탈 보우에 회전력을 가해 날아드는 탄지신통을 쳐냈다.

티티팅!

“이 미친놈아, 왜 나를 방해하는 거냐?”

“그니까 왜 저 사람들을 죽이려고 드는 건지 말해봐라. 들어보고 합당하면 방해하지 않을 테니, 헤헤.”

눈앞의 인간은 이제 자신을 이죽거리기까지 했다. 속이 뒤집히고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고 놈에게 주저리주저리 어둠의 씨앗이니 위리놈이니 하는 이야기해줄 수도 없고 또 한다고 해도 믿지도 않을 터였다.

“죽여 버리겠다, 개자식.”

엘레하는 블레이드 문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놈을 죽이고 반드시 일렉트라라는 계집을 잡고 말리라고 다짐했다.

수혁은 엘레하가 검을 꺼내 들자 또 꼬리를 빼기 시작했다.

“이 개자식, 네놈을 기필코 죽여 버리겠어.”

대륙의 모든 남자를 홀리고도 남을 미모를 가진 엘프 엘레하는 수혁의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욕지기를 서슴없이 내뱉으며 수혁을 뒤쫓았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일렉트라에 대한 생각은 하나도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 오직 자신을 철저히 농락하는 수혁을 죽이겠다는 마음만 자리 잡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일렉트라가 아직은 인간의 따뜻한 온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엘레하는 그것만으로도 안위를 느꼈다.

‘놈을 죽인 후에 다시 계집을 뒤쫓아야 한다. 이대로는 절대 여자를 잡을 수 없어.’

수혁은 엘레하에게 꼬리를 잡힐 것 같으면 천마후호장이나 천마한빙장으로 엘레하를 괴롭혔고 블레이드 문을 꼬나 쥔 엘레하는 힘겹게 수혁의 뒤를 쫓았다.

제아무리 엘레하가 우드스탁의 촉망받는 궁수라지만 수혁의 신기에 가까운 천마지보는 그녀의 애간장을 태우며 추격을 가까스로 따돌렸다.

금방이라도 수혁의 뒷덜미를 잡을 거라 생각했던 엘레하는 뒤늦게야 수혁이 일부러 자신에게 뒷덜미를 내주며 자신을 유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쳐 죽일 놈.”

하지만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둘은 한나절을 그렇게 지루하게 쫓고 쫓기고 했다.

그들은 이미 히나 왕국의 히루자 마을에서 완전 동떨어진 오이로파의 서쪽 국경지대인 리토스 마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편 수혁 덕분에 시간을 번 일렉트라와 딜란은 그곳은 듀란 백작의 영지이자 히나 왕국의 최북단에 위치한 미자비엘 마을로 무사히 숨어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미자비엘 마을의 젊은 미망인 빅토리아 여백작이 달루시아의 운명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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