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 어둠의 왕의 그림자
멀리서 보면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연상시키는 웨스트 비오트 숲.
하늘과 땅의 경계를 연상시키는 울창한 밀림을 한 사내가 빠르게 걷고 있었다.
그 사내의 전진 방향을 보아, 최북방 베리사드를 등지고 있는 것이 아마도 남동쪽에 있는 문명의 문을 향해 나아가는 듯했다.
사내의 목에는 만개한 흑장미를 연상시키는 붉은색의 목걸이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테라랜드의 대장장이 감론, 감노가 만든 것으로서 프란츠의 마법이 인챈트된 붉은 늑대의 갑옷이었다.
그 인챈트된 마갑의 주인은 바로 수혁이었다.
그는 며칠 전 드워프 일가와 프란츠가 붉은 늑대의 갑옷을 완성시키던 장면을 떠올렸다.
붉은 늑대의 갑옷 세트를 이틀간 응달에서 말린 감노는 프란츠에게 착용 마법을 인챈트해줄 것을 부탁했다.
“가만있어봐. 할아버지의 마법서를 한 번 더 읽어봐야겠어.”
처음 착용 마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프란츠는 줄곧 오퍼도버의 마법서를 읽으며 준비를 해왔다.
프란츠가 소지하는 배낭에는 각종 아이템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대부분 몬스터들의 뼈나 털, 독충이나 벌레들의 배설물이 담긴 유리병이었다.
프란츠는 그런 것들을 이용해 마법진을 그렸고 그 마법진의 한가운데에 붉은 늑대의 갑옷 세트를 정렬시켰다.
“팍수혁, 당신 피가 한 방울 필요해.”
프란츠는 마법진을 완성시키고 나서 다짜고짜 수혁의 가운데 손가락에서 피를 뽑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지팡이를 이용해 수혁의 피를 붉은 늑대의 갑옷으로 날려 보냈다.
프란츠는 수혁과 난쟁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마법 캐스팅이 완료되었을 때 프란츠는 마법진을 향해 명령하듯 외쳤다.
“갑옷은 피의 노예다. 붉은 늑대의 갑옷은 주인의 의지에 따른다. 물과 혼은 이제 하나가 되어 적으로부터 주인을 지켜야 한다. 오토 웨어링.”
프란츠의 외침이 끝나자 눈앞의 갑주 세트에서 섬광이 뻗어 나왔다. 그리고 갑옷은 물질의 속성을 재배열시켰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공중에 떠오른 늑대의 갑옷 세트는 프란츠가 만들어놓은 마법의 질서대로 형체를 변형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늑대의 갑옷 세트는 늑대의 얼굴이 그려진 펜던트에 붉은 가죽이 덧대어진 형태의 목걸이로 변했다.
“뭐, 뭐야? 프란츠 이 자식, 갑옷을 망쳐놨잖아.”
수혁은 금방이라도 프란츠의 멱살을 움켜쥘 기세였다.
“아니에요, 팍수헉 님. 프란츠 님이 갑옷에 마법을 인챈트시켜 에뮬렛(부적)화시킨 거예요.”
“에뮬렛? 그게 뭐야?”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갑옷을 들고 다니거나 휴대하기 편하게 만들었다고 해야 하나? 붉은 늑대의 갑옷 세트를 항상 메고 다닐 수도 없는 거고, 날마다 입고 있을 수도 없으니까 작은 아이템 형식으로 만든 거예요. 휴대하기도 쉽고 착용하기도 쉽게 변형시켰다고 해야 하나? 이해하기 쉽게 설명이 됐나요?”
“아, 그니까 쉽게 말해서 더 좋게 만들었다는 이야기 아냐?”
“헉! 뭐, 그렇죠.”
“쯔쯔, 저런 무식한 사람을 위해 내 할아버지의 고급 마법을 쓸 필요가 있었나?”
프란츠는 조심스럽게 마법진을 허문 후 가운데 떨어져 있는 늑대 모양의 가죽 목걸이를 수혁에게 건넸다.
“자, 이제부터 이건 수헉 당신 거야.”
“고, 고맙다, 프란츠. 근데 언제까지 나를 팍수헉이라고 부를 거냐? 나는 박수혁이라나까, 박. 수. 혁.”
그렇게 수혁은 난쟁이들과 프란츠가 갑옷을 만들어주던 장면을 생각하며 문명의 문을 향해 더 빨리 걸었다.
“이쪽 길로 한참을 가다보면 다섯 갈래의 길이 나올 거예요. 그중 가장 오른쪽 길로 가세요. 그러면 거대한 폭포가 나오는데, 골고다스 폭포라고 해요. 그 폭포가 흐르는 골고다스 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초록의 관목 지대가 나올 겁니다. 그 관목 지대를 통과하면 바위산이 있을 거예요. 그 바위산을 통과하면 또다시 울창한 밀림이 나오고 그 밀림의 끝에서 보면 웅장한 요새 같은 것이 보이는데, 그게 바로 문명의 문이죠. 헬벤타리아 대륙과 파이오니아 대륙을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동, 서 비오트 숲의 추방된 몬스터로부터 문명을 지켜내는 최후의 보루 문명의 문. 그곳에 가면 팜파스 왕국으로 가는 배가 있을 거예요.”
감론은 수혁에게 다시 한 번 길을 가르쳐주었다.
대충 알겠다고 했지만 감론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밀림을 벗어날 때까지 따라와 길을 다시 한 번 가르쳐줬다.
그리고 몇 번이나 자신과 삼촌을 구해줘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리며 프란츠와 함께 서편 비오트 숲을 향해 떠났다.
수혁은 그들이 떠나기 전에 늑대들의 공격을 또다시 받거나 그 위험하다는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을까 걱정이 돼서 셋이서 위험하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당신이나 걱정하지?”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프란츠의 자신감과 비아냥거리는 말 뿐이었다.
“하여튼 프란츠 그 자식!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쯔쯔.”
수혁은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며 목에 매달린 늑대의 갑주 에뮬릿을 만져봤다.
펜던트처럼 만들어진 늑대의 머리털은 촉감이 매우 부드러웠다.
“마법이란 정말 놀라운 것이구나.”
그때였다. 걷고 있던 수혁의 눈앞에 감론의 설명대로 다섯 갈래의 길이 나왔다.
“오… 드디어 다섯 갈래의 길이다. 맨 오른쪽 길이라고 했지?”
수혁은 감론의 지시대로 마지막 길을 타고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낙수 소리가 들려왔다.
“폭포다! 골고다스의 폭포.”
다섯 갈래의 길에서 폭포까지는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혁의 청력은 골고다스 폭포의 낙수 소리를 잡아낼 수 있었다.
수혁은 폭포를 향해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폭포수의 낙수 소리에 섞여 짐승들이 호흡하는 소리가 들리자 수혁은 걸음걸이를 조심스럽게 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무슨 고릴라들의 울음 같기도 하고.’
수혁은 조심조심 폭포를 향해 나아갔다. 그의 신형은 연기처럼 발끝에서부터 점점 사라졌다.
잠행술.
수혁은 천마지보의 잠행술을 펼쳤다.
그렇게 병풍처럼 늘어선 나무들을 헤치고 들어가자 눈앞에 장관이 펼쳐졌다.
100m가 훌쩍 넘는 높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물보라의 향연이 만들어내는 칠색의 무지개는 진한 초록색의 밀림과 어울려 춤이라도 출 듯 폭포를 받치고 있는 절벽에 걸려 있었다.
흰 물기둥 장막은 우렁찬 고함을 토해내며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내린다.
수혁은 자연이 만들어내는 눈앞의 광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시리도록 아름답다.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수혁은 한참을 넋을 놓고 대자연의 미를 완상하다가 폭포의 아래쪽에서 들려왔던 고릴라 같은 짐승들의 소리가 나는 쪽으로 잠행술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취이익, 서둘러라. 오늘 내로 선착장을 만들 나무 준비를 끝내라는 켈쥴 단장님의 지시가 있었다.”
유리알 같은 폭포수가 흘러내려가는 하류에서 초록의 짐승들이 떼를 이루어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큼지막한 도끼가 들려 있었는데, 그들은 왕방울 같은 비지땀을 흘리며 그 도끼로 나무를 찍어댔다.
쿠웅, 쿵!
“더 빨리, 더 빨리 해라!”
‘저자들이 바로 오크?’
수혁은 눈앞의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몬스터들이 오크임을 직감했다.
도마뱀을 연상시키는 초록색 피부, 자신의 귀가 보일 정도로 쫙 찢어진 눈, 비가 오면 빗물이 들어갈 정도로 하늘을 향해 들린 들창코 그리고 막무가내로 자리 잡은 털.
그들은 비오트 숲의 지배자 오크였다.
육체적 능력은 중급 몬스터인 트롤에 못 미치지만 인간 다음으로 많은 개체수와 높은 지능을 가진 그들은 군락을 이루어 생활하는 습관이 있다. 때문에 종족대전 이후 버림받은 대륙인 헬벤타리아 대륙과 비오트 숲에서 군락을 이루어 생활을 하며 실질적인 지배자 역할을 해왔다.
‘놈들이 왜 나무를 베는 거지?’
수혁은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되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강물을 따라 오크들이 나무를 운반하는 곳을 추적했다.
강 건너에서 나무를 자르고 있는 오크들은 어림잡아 50여 마리, 기둥 같은 굵직한 나무를 2인 1조로 운반하는 오크들이 대략 50여 마리. 얼핏 보기에도 오크는 100마리 정도 되어 보였다.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오크는 머리를 하늘을 향해 틀어 올리고 목에 몬스터들의 뼈로 된 목걸이를 차고 있었는데 지휘자로서의 위엄을 강조하고 있는 듯했다.
상투처럼 머리를 틀어 올린 그 오크는 한 손에 끝이 평평한 검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찌 보면 검이라기보다는 철퇴처럼 보일 정도로 무식하게 생긴 것이었다.
‘뗏목을 만들려고 하는 건가?’
수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강가에서 아름드리나무를 베고 있으니 배를 건조할 목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내려가니 나무들이 운반되는 종착지인 강의 하류가 있었다. 그곳에는 더욱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집채만 한 크기의 배들이 탄탄한 갑옷을 입은 듯 강의 하류에 정박해 있었는데, 족히 30척은 더 되어 보였다.
또한 오크들은 쉬지 않고 나무를 깎고 대패질해가며 배를 건조하고 있었는데, 작업하는 인원수만 해도 2, 300마리는 되어 보였다.
“취이익, 서둘러라. 선착장 작업이 끝나야 배를 더 건조할 수 있다.”
‘뭐라고 하는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완벽한 통역 마법을 걸어달라고 하는 건데.’
수혁은 오크 대장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크들이 엄청난 규모의 선단을 제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을 치를 건가?’
수혁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프란츠가 말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문명의 문으로 가다 보면 한 번쯤은 반드시 오크들과 부딪히게 될 거야. 놈들은 오우거만큼이나 흉포하지. 더군다나 그들의 개체 수는 종족 전쟁 이래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어. 당신의 성격상 그들과 부닥칠 확률은 높아.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고 절대 그들과 맞붙어선 안 돼. 오크들과의 싸움은 일대일의 싸움이 아냐. 병법과 지략을 이용해서 상대하지 않는다면 당해내기 힘든 종족이야. 특히 오크 종족을 영적 에너지로 지휘하고 있는 하제든은 명실상부한 비오트 숲의 오크 로드야. 그의 흑마법은 할아버지도 예측할 수 없다고 했어. 하지만 하제든 그자보다 더 무서운 자도 있는데 그자 역시 오크들을 지배하고 있지.”
“그게 누구죠?”
귀신 이야기를 하듯 분위기를 잡는 프란츠에게 감론은 물었었다.
“세풀투라!”
“뭐? 뭐라고? 프란츠 군, 방금 누구라고 했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난쟁이 감노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프란츠에게 확인하듯 물었었다.
“새풀투라! 어둠의 왕 위리놈의 가신이자 그림자 같은 네 명의 섀도우들 중 한 명.”
“마, 말도 안 돼. 네 명의 섀도우들은 염마대전에서 천계의 신들에 의해 봉인된 채 지옥으로 떨어졌어.”
감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후후후, 그건 인간과 엘프, 드워프 그리고 머포크들의 바람이겠지.”
“바람이라니, 말이 심하군. 프란츠 군. 그건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이야.”
여전히 감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고 그의 얼굴에는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도대체 세풀투라가 어떤 자이기에 감노가 저렇게 대경실색을 하는 건지, 수혁은 몹시 궁금했다.
“트루스시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고 싶어 하는 집단 최면. 어쩌면 염마대전에서 천계의 수하노릇을 했던 당신네들은 위리놈의 그림자가 봉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싶은 것일 수도 있어. 할아버지께서는 네 명의 그림자들 중 한 명이 염마대전에서 살아남았다고 하셨어. 그리고 후일의 종족 대전도 세풀투라의 지령에 의해 일어난 거라고 하셨고. 어떻게 된 일인지는 천계의 신들만이 알겠지. 어쨌든 염마대전에서 세풀투라는 죽지 않았어. 가까스로 그 생명을 건져 지금까지 마계와 중간계를 오가며 자신의 주인인 위리놈의 부활을 위해 애쓰고 있지.”
“헛소리 집어치워!”
감노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불같이 화를 냈다.
“삼촌, 도대체 그림자라는 게 뭐죠?”
버럭 화를 내는 삼촌의 모습에 주눅이 든 감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들은 악마의 화신이야. 선조들의 역사서에 의하면 그들은 100kg이 넘는 둔기를 휘두르며 한 번의 공격으로 2, 30명을 죽인다고 했어. 또한 인간, 드워프, 엘프, 머포크의 동맹군의 무기로는 그들을 죽일 수 없다고 쓰여 있어. 그들은 어둠의 왕 위리놈의 분신일지도 몰라. 4명의 붉은 패왕인 세풀투라, 오비츄어리, 생크리몬 그리고 케르갈. 그들이 바로 위리놈의 섀도우들이지.”
“후후, 난쟁이 치고는 제법이군.”
“드워프를 얕잡아보지 마. 나의 조상께서도 염마대전과 종족전쟁 때 친히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가 싸우셨어. 때문에 우리 드워프들도 알고 있다고, 그 어둠의 왕의 가신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를.”
“팍스헉, 이제 알겠지? 내가 왜 오크들을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하는지?”
그 당시만 해도 수혁은 그들의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오크들을 보자 하제든과 세풀투라에 대한 궁금증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얼핏 보기에 저들 중 하제든인가 하는 오크 로드와 세풀투란가 뭔가 하는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것 같군. 적어도 프란츠가 겁을 줄 만큼 무시무시한 힘을 풍기는 놈은 없어. 어디, 가까이 가볼까?’
수혁은 한참을 더 내려와 조심스럽게 강을 건넜다. 폭포의 하류라지만 물살은 제법 빨랐다. 때문에 잠수를 해서 강을 건너가는 수혁은 적잖은 애를 먹었다.
‘휴우, 하마터면 물고기 밥이 될 뻔했어.’
수혁은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낸 후 다시 상류를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위쪽에서 연장질하는 소리와 작업하는 오크들의 말소리가 뒤섞여서 들려왔다.
‘오크와 선단이라… 뭘 하려는 걸까?’
수혁은 잠행술로 조심스럽게 30여 척의 배가 놓인 곳까지 다가갔다.
그 순간 찌르는 검이라기보다는 후려치는 철퇴로 보이는 조악한 검을 들고 있던 오크 무리의 지휘자가 심하게 코를 벌렁거렸다.
“취익, 수컷 인간의 냄새다. 하류 쪽에서 올라오고 있어.”
작업을 진두지휘하던 오크는 두 손으로 검을 받쳐 들고 하류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와칸 님, 왜 그러십니까?”
우두머리가 작업 지시를 하지 않자 옆에 있던 오크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수컷 인간이 다가오고 있다. 놈은 하류에서 조심스럽게 올라오고 있어. 오랜만에 인간고기를 먹겠구나, 크으흐흐흐. 놈을 죽여라! 인간이 우리의 작업을 염탐하면 곤란하지, 그으흐흐흐.”
와칸, 오크군단의 중대장급에 속하는 그의 입이 나지막하게 열렸다.
그리고 그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근처에 있던 오크 하나가 디언그랄의 뿔로 만든 뿔나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잠시 후, 침입자를 알리는 뿔고동 소리가 강가에 울려 퍼졌다.
부우우우우우… 부우우우우.
“취이익, 침입자다.”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라!”
“그으흐흐, 놈은 하나다. 사냥하듯 즐겨라!”
철컥, 철컥.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던 오크와 통나무를 운반하던 오크들은 뿔고동 소리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병장기를 챙겼다. 그리고 나무 옆에는 세워둔 검을 쥐고 대형을 갖춰나갔다.
그렇게 동료들이 대형을 갖추고 있을 때 한 오크가 둥그런 청동방패를 집어 들었다.
“멍청한 놈… 고작 인간 수컷 하나니 방패는 필요 없어! 어서 가서 놈의 목을 가져와라. 뇌수는 나 와칸 님의 몫이다, 그흐흐흐.”
취이익.
철벅, 철벅.
오크들은 내달렸다. 그들은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들고 달리면서 잘 훈련된 보병들처럼 대열을 정돈했다.
“인간이다. 오래간만에 인간고기를 먹을 수 있다.”
그들은 세뇌된 이들처럼 한결같이 말했다.
‘저놈들이 뭘 하는 거지? 설마 내 위치를 알아낸 건가? 말도 안 돼. 마계진마 구일행의 잠영술은 고금최고수라는 혜능대사도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고 했어.’
수혁은 잠행술로 선단으로 다가가다가 일이 꼬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구나. 내가 강 건너에 있을 때는 강물 때문에 내 냄새를 맡지 못하다가 내가 강을 건너고 나니 냄새를 맡고 위치를 알아낸 거야.’
그랬다. 오크들은 인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발달된 후각을 가졌기에 그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제길!”
수혁은 자신을 향해 검을 들고 달려오는 오크들에게 서서히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신형은 안개 숲의 거목처럼 서서히 드러났다.
“진짜다, 와칸 님의 말대로 인간 수컷이다!”
“취익, 감히 인간 수컷 한 마리가 우리 오크들의 선단 제작 현장을 염탐하다니… 죽여라. 놈의 창자를 끄집어내라!”
초록색 돼지 코 안의 코털이 보일 정도로 오크들은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였다. 수혁의 두 발을 지탱하던 곳이 움푹 꺼져 들어갔다. 그것은 천마구령심법으로 내기를 모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타합!”
기합 소리와 함께 수혁의 신형은 오크들의 돌격 대형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그러자 오크들의 찢어진 눈이 힘겹게 원을 그렸다.
“취익, 말도 안 돼. 한걸음에 다가오다니.”
“감탄은 지옥에 가서나 해라.”
맞았다 하면 태산이라도 온전치 못할 가공할 기세가 수혁의 몸에서 나와 사지로 뻗어 나간다.
그러자 오크들은 검을 휘두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수혁은 선두에서 찔러 들어오는 오크 선봉대의 검을 옆으로 흘리고 오크의 안면에 수라분광권을 꽂아 넣었다.
일반 사람의 얼굴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오크의 얼굴은 수혁의 직권 한방에 목이 부러져 널브러지고 말았다.
용용하게 선두에 선 놈이 가랑잎처럼 널브러지자 오크들의 대열은 급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수혁은 동료의 시체를 피하기 위해 비틀거리는 오크들을 쫓으며 주먹을 뻗었다.
수라분광권에 이은 태산거권.
반듯한 주먹 하나로 태산을 들어 올릴 수 있다는 바로 그 직권. 그것은 오크의 몸통을 뚫고 들어가 뒤에 달려오던 오크의 몸까지도 꿰뚫어버렸다.
취에엑!
오크들의 비명이 난무했다.
수혁은 왼발을 축으로 해서 돌며 옆에서 조악한 검을 찍어 들어오는 녀석의 목덜미를 수라분광권으로 찍어냈다. 그리고 신속히 돌아서면서 등 뒤에서 찔러오는 오크의 검을 맨손으로 쳐냈다.
눈앞의 오크의 표정은 ‘인간의 맨손으로 어떻게 검을?’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콰작!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크의 검이 부러졌고 당황하는 오크의 얼굴에는 맹합연환권이 작렬했다.
우측에서 돌격해오던 오크 두 마리는 승룡연타십이각 제일식 혈루각에 헛바람을 삼키며 바닥을 나뒹굴었고, 수혁의 뒤통수를 노리고 들어오던 오크는 분혼사권에 맞아 머리가 통째로 몸과 분리되어버렸다.
오크들의 무리 속에서 수혁의 발 모양은 일사불란하게 변했다.
순식간에 20여 명의 오크들은 경추가 부러지고 몸과 목이 분리되어 죽어 버렸다.
이미 대형이 붕괴된 상태에서 남은 오크들은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오크가 누구인가, 복수의 화신으로 회자되는 몬스터가 아닌가.
그들은 공백을 메우려 더욱더 흉포한 얼굴을 하고 괴성을 지르며 수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수혁의 몸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의 신형은 회오리바람처럼 회전했고 두 발끝은 송곳처럼 날을 세웠다.
승룡연타십이각 제삼식 태풍각.
극성으로 연마하면 사람의 몸과 두 발이 720도 회전한다고 했다.
구일행은 생전에 다수와의 대결에서 사방팔방에서 달려드는 적을 일거에 궤멸시킬 목적으로 승룡연타십이각 제삼식 태풍각을 고안했다. 그 승룡연타십이각의 태풍각이 수혁의 몸과 발에서 뿜어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허공에서 몸을 돌린 수혁의 두 손이 땅바닥을 짚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날을 세운 두 발끝이 풍차처럼 회전했다.
두 팔을 축으로 도는 매서운 속도와 두 발의 탄력에서 뿜어져 나가는 강기는 스치기만 해도 뼈가 으스러질 기세였다.
바바바바바!
태풍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오크들의 살점이 비산했다.
수십 마리의 오크들은 폭풍에 나부끼는 가랑잎처럼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인근 나무에 가서 부딪혔는데, 이미 그들의 숨통은 끊긴 상태였다.
어떤 오크들은 태풍각에 맞아 강으로 떨어졌는데 모양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온몸이 일그러져 있었다.
“취익, 멍청한 것들! 뭘 넋 놓고 보고 있는 게냐? 궁수들, 궁수들, 앞으로!”
순식간에 보유 병력의 2할을 잃어버린 와칸이 부하들 앞에서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한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입을 열고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오크들도 와칸의 고함소리를 듣고서야 부리나케 나무에 기대놨던 석궁을 들고 달려 나왔다.
“쏴라, 쏴! 저 수컷 인간을 죽여 버려라!”
“와칸 님, 지금 쏘면 우리 동료들까지…….”
쫘악!
순간 와칸의 솥뚜껑 같은 손이 대답하던 오크의 머리를 후려쳤다.
“누가 그걸 몰라? 무조건 쏘라면 쏘는 거야!”
철컥, 철컥.
그제야 겁을 먹은 녀석들은 무릎을 꿇고 오크의 무리 속을 종횡무진 헤집고 다니는 수혁을 향해 석궁을 겨눴다.
슈슈슈슈슉.
수십 개의 파공성이 수혁의 귓전을 때렸다.
“화살?”
태풍각으로 오크들의 뼈를 도려내던 수혁은 그제야 두 발로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의 두 발은 뱀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팔괘보.
마계진마 구일행은 수혁에게 보법을 가르치면서 천마지보의 팔괘보면 십이방위의 공격을 거뜬히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오크들의 무리를 빠져나가는 수혁의 신형은 춤을 추는 듯했다.
퍼퍼퍼퍽.
날아든 화살이 오크들의 머리통을 관통했고 심지어는 목을 뚫고 들어와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꾸에엑!
비명이 비산하는 아수라장 속에서 수혁은 털 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몸을 뺐다.
“이, 이럴 수가… 놈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드, 드래곤?”
“멍청한 놈들, 이대로 두면 전멸이다. 어서 하제든 님에게 알려야 해.”
중대장 와칸은 목에 매고 있는 몬스터의 뿔로 만든 목걸이를 뜯어냈다.
솥뚜껑 같은 무식한 손에 조그마한 목걸이가 쥐어졌고 와칸은 날카로운 몬스터의 뼛조각으로 자신의 가슴을 그었다.
주르르륵.
그러자 날카로운 예기에 베인 것처럼 와칸의 가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중대장 와칸이 매고 있던 목걸이는 오크의 주술사이자 비오트 숲의 오크 로드인 하제든이 만들어준 흑마법이 인챈트된 목걸이였다.
흑마법이 걸린 목걸이에 피가 묻자 와칸의 영혼은 하제든의 소울 에너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와칸의 눈에서는 눈동자가 사라져갔다.
“이제 와칸의 눈은 더 이상 제 눈이 아닙니다. 이제 와칸의 몸은 더 이상 제 것이 아닙니다. 중대장 와칸이 몸과 혼을 하제든 님께 바칩니다.”
스스스스스.
한편 피 묻은 목걸이에서 빛이 완전히 빠져나간 후, 오크 로드 하제든은 자신의 눈으로 골고다스 폭포 하류에서 일어나는 일을 목격할 수 있었다.
“취이익,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저것은 인간?”
서쪽 비오트 숲의 오크 요새 바로우의 왕좌에 앉아 있던 하제든의 두 손은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눈앞의 인간은 지금도 계속해서 동족들을 죽이고 있었다.
“놈, 도대체 정체가 뭐냐! 기사인가? 하지만 소드 마스터라면 검을 들고 있어야 할 터, 네놈은 맨주먹과 발로 오크들을 짓이기는 구나. 누구냐! 설마 드래곤은 아닐 테지?
드래곤이라는 단어에서 하제든의 눈이 가로로 찢어졌다.
“혹시 드래곤이 강마의식을 눈치 챈 건가?”
순간 하제든의 두 눈에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럴 리가… 지금까지 보안을 지켜왔다. 오크 로드를 제외한 그 누구도 강마의식에 대해 알지 못해. 저자가 정녕 드래곤이라면 우리 힘으로는 저자를 당해낼 수 없다. 또한 우리 힘으로 강마의식의 비밀을 지킬 수 없어.”
하제든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에도 수혁의 몸은 오크들의 무리 속을 빠르게 파고들며 동족들을 죽이고 있었다.
“강하다, 실로 강해.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자다.”
그때 하제든의 눈을 더욱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눈앞의 인간이 석궁을 든 오크들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는데 그 인간의 손가락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오크들의 머리가 뚫려버리는 것이 아닌가.
“드래곤의 마법이다! 저것은 드래곤의 마법이야.”
하지만 하제든이 목격한 것은 드래곤의 마법이 아니라 사실 뇌천마공의 탄지신공이었다.
하제든의 두 눈이 좌우로 심하게 요동쳤다. 그것은 그가 고민에 빠졌을 때 하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하제든의 두 눈은 선혈로 덮였다.
순간 200여 명의 오크들을 무참하게 짓밟은 수혁의 신형이 와칸 쪽으로 날아드는가 싶더니 그의 팔꿈치가 와칸의 정수리를 내리찍었고 그러면서 와칸의 머리가 잘 익은 수박처럼 좌우로 쪼개지면서 피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파밧.
그러면서 순식간에 수혁의 모습과 골고다스 폭포 하류의 장면은 사라져버렸다.
끄으으.
하제든은 밀려오는 두통을 참지 못해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것은 소울 에너지를 통한 음관이 실패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대신관님.”
하제든이 머리를 싸고 의자의 한쪽으로 쓰러지자 옆에 서 있던 오크들이 달려들어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대신관님?”
“비켜라!”
하제든은 자신을 부축하는 근위병들을 물리치며 늙고 병든 몸을 일으켰다.
“놈을 죽여야 해. 강마의식이 시작되기도 전에 오크들의 부활이 알려져선 안 된다. 하지만 누가? 1군단장 켈쥴? 2군단장 쓰랄루? 그들도 아니면 동쪽 비오트 숲의 오크 로드 아족이라면 몰라도 켈쥴이나 쓰랄루는 저자의 상대가 될 수 없어. 아니다, 저자가 드래곤이라면 동쪽의 오크 로드 아족도 상대가 될 수 없다. 설령 상대가 된다 하더라도 동쪽 비오트 숲에서 골고다스 폭포까지는 너무 먼 거리… 끄으응…….”
하제든의 찢어진 두 눈 사이로 회색의 눈동자가 요동치듯 움직였다.
“그래… 어쩔 수 없다. 어디까지나 왕의 부활을 위한 일. 그분도 이해하실 거야.”
이윽고 요동치던 그의 잿빛 눈동자는 정지했다.
“지금 신관으로 갈 것이다. 싱싱한 산양을 준비해라.”
“예? 산양이라구요?”
하제든의 명령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부관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렇다. 스케이프 고트. 세풀투라 님께서 제물을 원하실 게다.”
쿠우우우우.
바로우의 내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했고 순간 정적이 흘렀다.
하제든을 제외한 오크들의 눈동자는 좁쌀처럼 오므라들었다.
바로우 내실 안의 오크들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세풀투라라는 이름 하나에 오크들이 공포로 떨기 시작한 것이다.
허공으로 치솟은 두 개의 발이 폭포수처럼 갈라져 내려왔다. 정확하게 열두 개의 송곳처럼 날이 선 발꿈치는 오크들의 정수리를 찍어 들어갔다.
바바바바바.
꾸에엑!
마지막 남았던 십여 마리의 오크들이 동료들이 간 길을 따라 죽어갔다.
일권일사, 일각일사였다.
수혁이 내뻗은 주먹과 발은 어김없이 오크들의 숨통을 끊어버렸고 그렇게 해서 황천길로 보낸 오크들은 어림잡아 250은 되는 것 같았다.
“후우, 후우.”
아무리 천마구령심법이라 하더라도 혼자서 200이 넘는 수를 상대하는 것은 버거웠으리라.
수혁의 호흡이 매우 거칠었다.
“다 끝난 건가? 이게 복수의 화신이라는 오크의 실력이냐? 내가 보기에는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수혁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며 호흡을 골랐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수혁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훈련된 오크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중무장한 오크들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숲 속의 마물들이 만들고 있는 배라면 틀림없이 나쁜 용도로 쓰일 터…….”
그의 눈에 작업을 하던 오크들이 붙여놓은 모닥불이 들어왔다. 수혁은 허공섭물을 이용해 그 모닥불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경신술을 이용해 측면을 밟고 날듯이 배 위로 올라갔다.
“기름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오크들이 만들어놓은 배는 외관만 완벽하게 축조되고 아직 내부는 작업이 덜 끝난 상태로 있었다. 배 안에는 각종 나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햇빛을 받아서 그런지 잘 말라 있었다.
수혁은 나무들을 향해 모닥불을 겨누었다. 그리고 반대편 손으로 자색의 기운을 뭉쳤다.
“뇌천뢰장.”
순간 수혁의 손바닥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태양열 같은 장력이 모닥불의 불씨를 업고 폭사되었다.
화르르르륵.
순식간에 배에 쌓아둔 나무는 불이 붙었다.
들러붙은 불은 대보름 논두렁을 태우는 쥐불처럼 삽시간에 온 배를 삼킬 듯 퍼졌다.
수혁은 경신술을 이용해 배를 옮겨 다니며 오크들이 축조한 배들을 모두 불살랐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뭍으로 내려왔다.
“활활 타올라라.”
불길은 삽시간에 30여 척의 배들을 삼킬 듯 타올랐다. 또한 치솟은 불기둥과 연기는 골고다스 폭포를 뒤덮을 기세였다. 어찌나 불기둥이 높은지 불기둥과 연기가 멀리 문명의 문에 있는 수파대원들에게까지 보일 정도였다.
한편 불기둥은 마법 수련을 위해 베리사드로 가고 있던 프란츠의 눈에도 확연히 드러났다. 물론 테라랜드의 대장장이 일족인 감노와 감론도 그 불기둥을 보았다.
“삼촌, 산불이 났나 봐요.”
“아니, 저건 산불이 아니다. 산불이라면 새들이 날아오르고 불기둥과 연기가 퍼져야 하는데 저 불기둥은 한 자리에서만 피어오르고 있어. 누군가가 불을 지핀 모양이다.”
비오트 숲에는 낙뢰로 인한 산불이 해마다 종종 일어나곤 했는데 지금 피어오르는 불꽃은 그 산불과는 다른 형태였다.
“대신관님, 큰일 났습니다. 드래곤이 우리 선단을 모조리 불태우고 있습니다.”
“취익, 알고 있다.”
“하오면, 무슨 조치를…….”
순간 하제든의 꺼져가는 듯한 눈에 광채가 서렸다.
“크흐흐흐, 걱정 마라. 놈은 곧 죽을 것이다.”
“그, 그건?”
“크흐흐흐, 좀 전에 세풀투라 님께서 골고다스로 출발하셨다. 놈이 설령 드래곤이라 해도 정예로 뽑힌 오크 돌격대원들과 세풀투라 님을 상대할 수는 없을 거야.”
그제야 옆에 있던 오크도 하제든의 눈빛과 소름 끼치는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듯했다.
졸졸졸.
골고다스의 폭포 아래에서 낙수 소리가 들렸다.
부르르르.
사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 시원하다. 이래서 어른들이 불장난하지 말라고 하는 거구나.”
수혁은 지퍼를 올려 바지를 닫았다.
“설마 누가 본 건 아니겠지? 흐흐흐, 봐봤자 본 사람이 잠 못 자는 거지 내가 잠 못 자는 건 아니니까.”
아직까지도 불길은 잡히지 않고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수혁은 그 불기둥을 등지고 실례를 한 후 다시금 문명의 문을 향해 떠날 채비를 했다.
그 순간 수혁은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온몸이 마비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이, 이건… 엄청난 놈이다.’
수혁은 그제야 고개를 홱 돌렸다.
흰색 장벽 같은 골고다스의 폭포수 안에서 붉은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초록색 광채가 연달아 나왔는데 그것은 엄청 빠른 속도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위험하다. 이건 마치 구천에서 카이버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야.’
수혁은 온몸의 피가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몸 안의 혈맥들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쐐애애애액.
붉은 신형과 함께 초록색 오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이내 그들의 손에서 창이 날아들었는데, 파공성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위력적인 투창술이었다.
수혁의 발이 뒤쪽으로 느릿하게 미끄러져 나갔다.
천마지보의 후방완퇴.
수혁의 발 아래 여섯 개의 창이 차례로 박혀 들어갔다.
처처척.
그리고 골고다스 폭포의 하류까지 날아온 그들은 새털처럼 가볍게 땅으로 내려왔다.
쿠우우우우.
눈앞의 20여 명의 오크들은 좀 전의 200여 명의 오크들에 비해 일당백의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오크들의 뒤에 서 있는 짐승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자는 더 가공할 만한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이마에 뻗어 나온 두 개의 뿔은 태산도 꿰뚫을 것 같았고 군더더기 없이 발달된 울룩불룩한 근육은 금강석을 연상시켰다.
눈알은 석류꽃보다도 붉었으며 허리를 감싸고 있는 갑주는 지옥의 악귀를 보는 듯했다. 가슴에는 붉은색 거미가 수놓아져 있었고 피눈물을 흘리는 악귀들이 새겨진 장갑을 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얼굴에 새겨진 검정 문신은 지옥의 마왕이 부활한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이 들게 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이런… 초면에 창을 내지르는 걸 보니 나를 배웅하러 온 것들은 아닌 것 같고…….”
“취익, 우리는 제 일군단의 정예 돌격대다. 어서 목을 길게 빼고 우리 창을 받아라.”
20여 명 중 먼저 다섯 오크들이 수혁의 앞에 박혀 있는 창을 꺼내 들고 앞으로 나섰다.
“이놈들아! 취익, 취익거리지 말고 말을 해라,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수혁은 눈앞의 오크들을 향해 기수식을 취했으나 정작 온 신경은 뒤쪽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붉은 뿔의 괴물에게 가 있었다.
“취익, 우릴 좀 전의 오크병들과 비교하지 마라.”
“미친놈, 감히 우리 오크들의 선단을 불태우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두 오크가 날렵하게 수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새 두 자루의 창끝은 수혁의 가슴과 얼굴을 짓쳐들어와 있었다.
수혁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좀 전의 오크잡병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간결하고 빠른 창술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오크들의 창이 수혁의 얼굴과 가슴을 찔렀을 때 수혁의 신형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없었다.
천마지보가 펼쳐진 것이다.
두 오크의 창날이 흩어진 잔영을 벤 순간 어느새 그들의 코앞에 나타난 수혁의 주먹은 섬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뻐엉!
수혁도 눈앞의 적수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깨달았기에 공력을 끌어올려 맞섰고 천마구령심법이 내공이 실린 수라분광권에 맞은 오크들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버렸다.
얻어터진 부위의 이빨이 모두 분질러져 나갔고 눈알은 뽑혀버렸다. 두 오크의 목은 나뭇가지처럼 부러져버렸는데 목은 축 늘어져 시계추처럼 대롱거렸다.
순간 주변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취익, 죽여라.”
나머지 세 명의 오크들은 수혁의 발과 몸통 머리를 일제히 찔러 들어왔다.
오크 일군단의 돌격대 중 창술로는 최고수의 반열에 들었다는 그들은 동작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빨랐다.
“우리 다섯이면 죽이지 못할 몬스터가 없다고 했거늘, 이깟 애송이에게… 취이익!”
오크들의 창은 말 그대로 전광석화였다.
세 명의 창이 마치 한 사람이 휘두르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약속된 움직임을 보였는데, 찌르고 베는 데 있어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창술은 항상 수혁의 발놀림보다 반 박자 느렸다. 수혁의 신형은 반 보만 움직여 매서운 예기를 피하고 흘려보냈다.
“취익, 제법이긴 하다만 이제 놀음은 여기까지다.”
세 명의 오크들은 드디어 수혁의 움직임을 간파했다는 듯이 자신 있게 일제히 짓쳐들어갔다.
그때 수혁의 얼굴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의 몸은 지네의 몸통을 붙잡고 정수리를 쪼아대는 철계처럼 보였다.
뇌천마공 합권 철계투합권 제삼식 금무섬.
어떤 공격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없고 어떤 갑옷도 뚫지 못하는 게 없다고 하는 철계투합권이 세 개의 창날을 흘리며 허공을 갈랐다.
퍼퍼퍽!
“쿠아악!”
창을 든 세 마리의 오크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서 절명해버렸다.
“이노옴!”
이번에는 뒤에 선 열두 명의 오크들이 일제히 조악한 검으로 수혁의 신형을 광포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네놈의 목을 따고 창자를 드러내고 말리라.”
열두 개의 검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곧장 수혁에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오크들의 검에서 검환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저게 정녕 열두 명이 찌르는 공격이란 말인가?’
수혁은 흠칫 놀라며 뒤로 미끄러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오크들, 그들이 만들어낸 검환은 강렬한 광채를 발산했다.
‘이런… 이건 검강이 아닌가?’
눈앞의 검환은 보랏빛 검강을 뿜어내며 맹렬한 기세로 수혁의 신형을 파고들었다.
수혁은 본능적으로 목덜미와 심장을 파고드는 검환을 향해 주먹을 뻗어 나갔다. 주먹은 허공에서 눕는 것 같더니 일순 검환을 퉁겨냈다.
퍼어엉!
신체의 일부를 물체화시킨다는 마도의 극성마권 중 하나인 분혼사권이 시전된 것이다.
하지만 수혁이 퉁겨낸 열두 개의 검날은 허공에서 한 바퀴 도는가 싶더니 더욱 빠른 속도로 수혁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이런… 이거 장난이 아니군.’
한 번의 충돌로 검강은 옅어졌으나 빠르기는 여전히 변함없는 공격이었다.
‘우선 저 열두 놈의 균형을 무너뜨려야 한다.’
천마만변무영(天魔萬變無影).
순간 수혁의 몸은 수십 개로 갈라졌다.
“흡!”
다 잡았다 싶은 사냥감이 눈앞에서 수십 개로 흩어지자 오크의 열 두 검사들의 표정엔 당황함이 역력했다.
고수들의 싸움에서는 순간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법이다.
잠깐의 머뭇거림을 놓칠 리 없는 수혁의 신형은 열두 명의 오크들을 차례로 무너뜨렸다.
태산거권이 눈앞의 오크의 몸을 꿰뚫어버리는가 싶으면 이내 보법을 바꿔 옆에 선 오크의 턱을 올려쳐 버렸다. 그리고 거꾸로 돌아서 양팔로 땅을 짚고 승룡연타 십이각을 뿜어내니, 열두 명의 오크들의 살점과 뼈마디는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꾸에엑!”
“취이익!”
그것은 찰나였다.
단순한 체술이 아닌 천마구령심법으로 내공을 운용하는 뇌천마공은 검이나 창보다 강력했으며 그 어떤 병기보다도 날카로웠다.
마지막 남은 한 마리의 오크 뒤에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붉은 뿔을 가진 자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좀 전에 수혁의 손에 떨어져 나간 오크들은 그냥 잡병들이 아닌 모두 일당백의 오크 전사들이기 때문이다.
“역시 넌 드래곤이냐?”
붉은 뿔을 가진 사내의 앞에 서있던 오크가 허공을 박차며 수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뭐? 방금 드래곤 뭐라고 한 것 같은데?”
수혁은 오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눈앞의 섬뜩한 안광을 번뜩이는 오크는 드래곤 어쩌고 하는 것 같았다.
눈앞의 오크는 등 뒤에 차고 있던 커다란 도끼를 꺼내 들었다.
‘놀랍다. 그냥 아무렇게나 서 있는 것 같지만 빈틈이 전혀 없어. 왜 열두 명의 돌격대 녀석들이 죽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저런 놈을 상대로 함부로 공격해 들어갔다가는 한순간에 끝나는 수가 있다.’
도끼 든 오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놈 봐라? 제법 신중한 놈이구나. 뭐 하고 있어? 어서 덤비지 않고.”
수혁 역시 몸이 지쳐가고 있음을 느꼈다.
200마리가 훨씬 넘는 오크들과 싸웠고 좀 전의 싸움에서는 진기까지 끌어 모았다.
더군다나 뒤에 폼 잡고 서 있는 놈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강자. 어서 빨리 눈앞의 오크를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조급해졌다.
도끼를 든 오크는 순간 수혁이 다급해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타앗!
순간 도끼 든 오크는 도약하며 육중한 도끼날을 수혁의 미간을 향해 날렸다.
“미노타우로스도 한방에 보내버린다는 사림 님의 배틀액스이니라.”
콰아아!
눈앞의 오크 역시 마나를 다룰 줄 아는 놈이었다.
보랏빛 광채는 허공에서 찌그러졌다.
그러자 수혁 또한 오크를 향해 곧바로 뻗어 들어갔다. 그의 주먹은 암흑을 찬란하게 비추는 한 줄기 빛처럼 곧고 바르게 뻗어 나갔다.
콰아아앙!
한 번의 충돌은 엄청난 파열음과 불꽃을 일으켰다. 하지만 사위는 이내 고요해졌다.
쩌저저저적.
유리조각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오크의 육중한 도끼는 거북등처럼 갈라졌다.
태산거권.
직권 하나가 태산도 들어 올린다고 했다.
도끼를 들고 달려들었던 오크의 머리는 뇌전 모양으로 벌어지더니 이내 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마, 말도 안 돼. 주, 주먹으로 배틀액스를 부, 부수다니…….”
오크는 머리가 부서져 바닥을 구르면서까지 억울함을 감추지 못했다.
“세, 세풀투라 님이 너를 죽, 죽일 것이다… 크윽!”
수혁은 오크들의 말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세풀투라’라는 단어는 분명히 귀에 들렸다.
‘세풀투라? 프란츠가 말했던 그림자인가 뭔가 하는 놈이 세풀투라였잖아! 그럼 저놈이 세풀투라인가?’
가온은 발 아래 거치적거리는 오크의 머리통을 발로 걷어내며 세풀투라라고 말하고 있는 녀석을 바라봤다.
“네놈이 세풀투라냐? 훗! 네놈이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료들이 죽어가는데도 팔짱 끼고 구경만 하는 걸로 봐서 인간성이 아주 더러운 놈이 틀림없구나.”
-그그그그, 넌 드래곤이 아니다. 넌 인간. 허나 인간의 손으로 오크의 무기를 박살낸 재주는 인정해주마. 허나 오늘 넌 이 자리에서 죽는다.
“뭐라는 거냐?”
괴물은 분명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있는 입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허리에 차고 있는 철갑 벨트에 달린 야수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강마의식의 제물로 쓰기에 괜찮은 걸 건졌군. 소드 마스터급의 인간이라니, 그그그.
철갑 벨트에 장식된 입이 음산하게 중얼거렸고 입이 옆으로 찢어지는 것이 수혁을 비웃는 게 틀림없었다.
“이 자식이 날 비웃어?”
수혁은 두 발에 힘을 주고는 도약하여 괴물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본능적으로 눈앞의 상대가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수혁의 양손의 자색의 강기는 수정구처럼 일렁거렸다.
“뇌천마공 곡권 제육식 곡류구궁.”
아홉 개의 곡류가 하늘까지 이른다 했으니, 어떠한 호신강기도 깨부숴버린다는 그 곡권이었다.
자주색 오러를 머금은 주먹 아홉 개가 구렁이처럼 세풀투라를 파고들었다.
-그그그그.
하지만 세풀투라는 수혁의 주먹을 보며 비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수혁의 권은 커다란 그의 몸집을 비껴가고 있었다.
‘이, 이럴 리가…….’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맹웅이십사로권!”
세풀투라의 몸을 휘감아 돌던 아홉 개의 권이 회수되고 마치 사나운 불곰이 먹잇감을 덮치듯 24개의 주먹이 섬광과 함께 번뜩였다.
콰콰콰콰콰.
그러자 폭발음과 불꽃이 튀고 연기가 비산했다.
‘뭐야? 별거 아니잖아.’
수혁은 주먹으로 전해져오는 묵직한 타격감에 흡족한 미소를 띠며 연기 사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푸시시시시.
그러나 피떡이 되어 있어야 할 세풀투라의 손에 사악한 악귀가 그려진 방패가 들려 있었다. 자신의 맹웅이십사로권은 방패에 의해 전부 차단된 것 같았다.
‘이, 이런. 태산 같은 바위도 부숴버린다는 붕권이 아니었던가.’
-그그그… 인간, 보기보다 위력이 약하구나. 조금 전 오크들을 박살낼 때는 제법 강한 체술 같았는데… 이제 놀이는 끝난 거냐?
세풀투라의 말이 끝나자 그의 다른 손으로 시뻘건 대기의 기운이 빨려 들어갔다.
츠츠츠츠츠.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오른손에는 뿔처럼 갈라진 두 개의 날이 앞뒤로 달린 스피어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 스피어 주위를 붉은 검기가 포위하듯 덮고 있는 게 보였다.
“이기섭혼술.”
수혁의 사부였던 나차태자 장삼병은 내공이 극성에 이르면 기를 운용해 병장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했다. 또한 초마의 경지를 넘어서면 손 자체가 검이 될 수도, 창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서, 설마 너 같은 괴물이 무공을 익혔을 리는 없고… 우웃.”
수혁이 눈앞의 세풀투라를 보며 감탄만 하고 있을 때 그의 날카로운 스피어가 맹렬한 기세로 대기를 갈랐다.
그러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수혁은 몸을 틀며 철계투합권으로 날아드는 스피어를 막으며 곧바로 반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세풀투라는 예상했다는 듯 보법을 바꾸며 왼손에 들린 방패로 수혁의 몸을 쳐냈다.
빠카앙.
“우욱!”
마치 쇠몽둥이로 온몸을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뼛속까지 전해져왔다.
‘가, 강하다… 마치 그놈을 만난 것 같아. 구천의 공간과 시간의 지배자라고 떠들던 놈…….’
수혁은 가랑잎처럼 허공으로 떠올랐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세풀투라는 수혁의 신형을 쫓으며 스피어에 적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때 수혁이 세풀투라를 향해 외쳤다.
“죽어 버려라, 개자식아! 뇌천마공 장법 제십칠식 천마한빙장.”
그러자 지옥화염도 순식간에 얼려버린다는 북해빙궁의 절기 천마 한빙장이 수혁을 덮치는 세풀투라를 휘감아 돌았다.
“됐어! 놈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그.
하지만 빙기는 폐 속까지 파고들지 못했고 세풀투라의 포효한 번에 살얼음은 무너져 내렸다.
쩌저저정.
‘이, 이런… 아무리 두 발을 대지에 지탱하지 않고 시전한 장력이라지만 천마한빙장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그 순간 세풀투라의 스피어가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태산거권.”
퍼퍼펑.
수혁은 놈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뇌천마공 직권 중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태산거권으로 맞불을 놓았다.
순간적으로 천마구령심법을 시전해 천세보혈주의 극기를 끌어내자 마치 포성이 울리는 듯했고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장관이 연출됐다.
“쿨럭.”
수혁은 이내 몸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는 기침과 함께 핏덩이를 게워냈다.
‘이, 이놈이 이렇게 강할 줄이야…….’
-그그그, 인간의 힘이란… 그그그.
허공에 뜬 세풀투라는 피를 토하는 수혁을 보더니 자신의 스피어를 뒤로 힘껏 젖혔다.
-죽어라, 인간! 블러드 라이트닝.
그의 스피어가 허공을 가르자 하늘에서 핏빛 번개가 생성되더니 수혁에게 내리꽂혔다.
‘끝장인가?’
순간 수혁의 두 눈이 번쩍였다.
목에 걸린 늑대의 갑주 에뮬릿이 갑자기 용트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우웃! 뭐냐? 이 전신을 휘감을 듯한 강렬한 느낌은…….’
수혁이 놀라며 헛바람을 집어삼킬 때였다.
그의 목에 걸린 붉은 늑대 갑주의 에뮬릿에서 핏물처럼 붉은 늑대의 갑주가 나타났다. 그것은 수혁의 전신을 휘감아 돌며 뻗쳐 나왔다.
콰콰콰콰콰!
난쟁이 감론 일가가 만들어준 붉은 늑대의 갑주 세트가 주인인 수혁이 위기에 빠지자 프란츠의 오토 웨어링 마법과 함께 그의 몸을 자동으로 감싼 것이다.
슈쿠쿠쿠쿠.
처처척.
눈과 입을 남겨두고 포효하는 붉은 늑대의 머리 모양으로 된 붉은 늑대의 갑주가 수혁의 머리를 감쌌고 질주하는 늑대의 휘날리는 깃털 같은 몸통갑주가 수혁의 온몸을 뒤덮었다.
날카로운 발톱 모양의 각반은 발에서부터 정강이까지를 뒤덮었고 손목부터 팔꿈치까지는 늑대의 앞발 모양으로 된 갑주가 뒤덮였다.
콰콰콰콰!
가공할 위력으로 뻗치며 나오는 세풀투라의 블러디 라이트닝은 순식간에 수혁을 덮쳤다.
그리고 수혁이 쓰러져 있던 땅에는 폭음과 함께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하하하, 하찮은 인간 같으니라고.
그러자 세풀투라는 수혁의 죽음을 확신하며 기괴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세풀투라의 두 눈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뭐, 뭐냐? 분명 폭사된 블러디 나이츠를 정통으로 맞았을 텐데?
“훗, 웃기지 마라. 그렇게 느린 공격으로 붉은 늑대의 갑옷을 걸친 날 잡을 수 없다.”
수혁은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져가는 것을 느꼈다.
이미 화경의 경지를 훌쩍 넘어선 수혁이지만 붉은 늑대의 갑주 세트는 그런 수혁의 경지를 한 단계 높여주고 있었다.
“좋았어, 이제부터 시작이다.”
쿠오오오오!
수혁은 온몸을 휘젓고 다니는 천세보혈주의 극양기를 하단전으로 빨아들였다.
쿠루루루루!
웅장한 폭포가 역류하듯 온몸을 들끓게 하던 천세보혈주의 극양기는 용천혈을 향해 솟구쳐 올라가더니 이내 폭포수처럼 떨어지며 단전으로 모였다.
땅 위에 지탱하고 있던 수혁의 두 발에서 강렬한 기운이 뻗쳐 나오자 그가 밟고 있던 땅이 분화구처럼 움푹 패버렸다.
‘이럴 수가… 소드 마스터급을 훨씬 상회하는 실력이구나. 하지만 아직은 어림없다.’
세풀투라는 수혁의 축기 과정을 지켜보다가 들고 있는 스피어를 힘껏 쥐고 수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봐라! 블러디 토네이도!
한 번 시전되면 기어이 피를 뿜어내고야 만다는 블러디 토네이도.
마계의 사람들은 그래서 세풀투라를 가리켜 피의 종사라 불렀다.
어둠의 왕 위리놈의 4대 가신 중 한 명인 세풀투라의 블러디 토네이도는 수혁을 회오리바람으로 쓸어버릴 기세로 짓쳐왔다.
“흥! 이건 어떠냐, 열풍각!”
열풍각. 승룡연타 십이각의 제삼식인 열풍각이 세풀투라를 향해 뻗어 나갔다.
일각이면 땅을 가르고 십이각이면 하늘을 찢는다는 구일행의 절기, 승룡연타 십이각이 블러디 토네이도에 맞서 들어갔다.
쿠콰콰쾅!
보아라, 무려 열두 개의 각권이 번개처럼 폭사되는 것을.
피의 회오리와 하늘을 찢는다는 각권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쿠르르, 쾅쾅!
강렬한 굉음과 함께 세풀투라의 몸은 뒤로 십여 보 밀려났다.
‘이, 이런 천하의 세풀투라의 공격이 뒤로 밀리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지금껏 나를 뒷걸음질 치게 만든 인간은 키나비를 제외하고 없었다. 이, 이놈 정말 큰일 낼 놈이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강마의식을 성사시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세풀투라가 뒤로 밀려나 신음성을 내뱉을 때 블러디 토네이도를 맞받아친 수혁은 무려 20여 장을 밀려 떨어졌다.
치잇.
울컥.
순간 기혈이 뒤틀렸는지 수혁의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아직 수련이 부족한 건가? 십성 정도의 천마구령심법으로는 저런 괴물을 쓰러뜨릴 수 없단 말인가?’
수혁은 머릿속으로 분주하게 계산했다.
‘강하다. 어쩌면 공간의 파수꾼 카이버와 버금가는 실력일지 모른다. 좀 전의 오크 무리들과는 레벨이 다르다.’
-그그그, 인간, 힘들어 보이는구나. 그만 목을 빼라.
눈앞의 적 세풀투라는 수혁을 향해 끝이 양갈래로 꼬부라진 스피어를 빙빙 돌렸다.
‘마지막 진기까지 끌어 모아 놈을 친다. 이 한 수에 모든 걸 걸었다.’
수혁은 뒤틀린 기혈을 바로잡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쿠쿠쿠쿠.
그러자 또다시 엄청난 양의 기운이 단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목을 빼야 하는 건 바로 너다!”
정신을 집중했던 수혁은 카이버를 향해 탄지신통을 날렸다.
-그그그, 그런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가.
세풀투라는 비웃기라도 하듯 가볍게 자신의 왼손에 들린 방패로 탄지신통을 퉁겨냈다.
그러자 수혁은 천마지보를 밟으며 세풀투라를 향해 날아왔다.
이번에는 세풀투라도 적잖이 긴장했던지 두 눈을 부릅뜨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죽어라, 이 괴물아! 뇌천마공 각권 일천사령각이다!”
파차차창!
십이성까지 연마할 경우 무려 천 개의 각강이 천지를 뒤흔든다는 일천사령각.
한 번 공격을 시작하면 결코 멈출 수 없고 한 번 각강을 뻗으면 반드시 죽음을 부른다는 일각일사의 상승 무공.
아직 천마구령심법을 극성까지 연마하지 못한 수혁이었지만 일천사령각을 시전하자 무려 700여 개의 각강이 세풀투라를 향해 뻗어 나갔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블러디 블레이드!
세풀투라는 뻗어 나오는 수혁의 각강을 방패를 이용해 빗겨내며 자신의 최강 절기인 블러디 블레이드를 폭사시켰다.
반달 모양의 자줏빛 오러 블레이드가 일천 사령각과 맞닥뜨리자 엄청난 폭발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쿠콰쾅!
“으악!”
-크으악!
수혁과 세풀투라의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세풀투라의 몸은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무려 100미터를 날아가 암벽에 처박히며 먼지를 피워 올렸다.
콰앙!
큰 부상을 입기는 수혁도 마찬가지였다.
두 개의 강렬한 기운이 허공에서 맞부딪치자 온몸의 혈도가 뒤틀리고 근육이 파혈되는 것 같았다.
뼈마디가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나마 그 충돌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붉은 늑대의 갑주의 위력 때문이었다.
수혁의 몸은 가랑잎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몇백 미터를 날아간 그의 몸은 골고다스 강으로 추락했다.
풍덩!
세풀투라의 블러드 블레이드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는 솟구쳐 오른 물기둥의 높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수혁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벼운 늑대의 갑주 덕분에 몸이 가라앉았다가 이내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메탈 플레이트를 입었다면 수혁은 그길로 익사해버렸을 것이다.
골고다스 폭포로부터 흘러나오는 빠른 물살은 기절한 수혁의 몸을 어디론가 흘려보냈다.
정신을 잃은 수혁은 물 위에 누워 있는 모양으로 정처 없이 흘러갔다.
-크으윽, 인간… 어디로 사라진 거냐!
한참이 지난 뒤에야 세풀투라는 부서진 바위틈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수혁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쿠울럭!
세풀투라가 기침과 함께 초록색 피를 게워냈다.
그 역시 강한 타격을 입었는지 그의 몸은 좀 전과 천양지차였다.
‘큭, 온몸이 쑤시는 게 뼈마디가 분질러진 것 같다. 도대체 그 자식은 누구란 말인가? 아직도 인간들 중에 저토록 강한 자가 있었단 말인가?’
세풀투라는 좀 전 수혁이 뻗은 일천사령각을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디로 사라진 거냐? 빨리 놈을 찾아야 한다. 놈을 죽여야 해.’
-하제든, 놈을 찾아라! 놈을 찾아서 내 앞에 놈의 심장을 바쳐라!
세풀투라가 미친 듯이 울부짖자 오크들의 요새 바로우에 있던 하제든이 복명했다.
“알겠습니다! 즉시 수색대를 골고다스 폭포로 파견하겠습니다.”
바로우의 요새에서 하제든은 세풀투라의 명대로 급하게 수색대를 편성했다.
“쫓아라. 붉은 늑대의 갑주를 걸친 인간을 쫓아라. 쫓아서 반드시 놈의 심장을 꺼내 피의 종사 세풀투라 님께 바쳐야 한다.”
“취이익, 알겠습니다.”
하제든의 명령이 떨어지자 100명으로 구성된 오크 수색대가 비오트 숲을 향해 재빠르게 전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