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1 0.004%를 깬 사나이 (32/51)

chapter 31 0.004%를 깬 사나이

“과장님, 과장님!”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간호사의 목소리.

“이봐, 나간호사. 무슨 일인데 또 그리 호들갑이야?”

“208호 박수혁 환자가, 208호 박수혁 환자가… 헉… 헉!”

흰 바지에 민트색 상의를 입은 간호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호흡을 골랐다.

“아, 박수혁 환자가 뭐?”

신경외과 과장이자 일직근무자인 배정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박, 박수혁 환자가 깨어났습니다.”

“뭐? 나간호사, 방금 뭐라고 했어?”

배과장은 대기실의 공기를 다 빨아버릴 것처럼 입을 크게 벌렸다.

“체내 산소 수치 정상입니다.”

“EEG(뇌파검사) 결과가 정상 수준에 가깝게 나왔습니다.”

“혈압과 심전도 모두 정상수준입니다.”

계속되는 레지던트들과 간호사들의 보고에 배정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뭐 하고 있어… 어서 가족들에게 연락해야지… 세… 세상에… 이럴 수가…….”

응급실에 송장처럼 누워 있는 수혁의 싸늘한 육체를 바라보던 의료진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신경외과 전문의 경력만 14년인 배정호에게 뇌사 상태에서 스스로 깨어나는 환자를 목격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WHO(세계보건기구)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뇌사상태에 빠진 환자가 살아날 확률은 0.004%이다. 즉 10만 명 중에서 4명꼴인 것이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수혁아~! 아이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천지신명님, 감사합니다. 어허허허헝!”

결국 수혁의 어머니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빠의 뇌사 판정 소식을 듣고 귀국했던 여동생 박은주도 수혁을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렸다.

“오빠아… 엉엉엉!”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기쁨이 회한으로 탈바꿈하는 미묘한 울음이었다.

그 둘의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수혁의 아버지 박경호의 두 눈자락이 붉게 충혈되어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안경 안쪽으로 가져갔다.

자신을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아버지를 보며 수혁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무의 상태, 그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흰빛과 검은 터널이 교차하던 그 아수라장을 통과할 때의 메스꺼움과 울렁거림.

그로 인한 정신적 공황을 빠져나온 상태에서도 수혁은 가족이란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은주야…….”

“어허허헝! 그래, 수혁아! 말해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어머니는 벅찬 가슴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제가 얼마 만에 깨어난 거죠?”

“정확하게 382일 만에 깨어나신 겁니다.”

수혁 가족의 옆에서 눈시울을 훔쳐내던 간호사가 수혁의 질문에 답하고 나섰다.

“삼… 삼백팔십이 일?”

수혁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 그럼 제가 1년이 넘게 누워 있었단 말인가요?”

“그래, 이놈아. 이 어미가 속이 썩어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아이고… 어허헝.”

어머니는 드디어 극에 달한 울음을 넘어 웃음을 터뜨렸다.

1년 동안의 슬픔과 속병이 한순간 무너져 내려가는 웃음이었다.

“여… 여긴 어디죠?”

“여긴 광주 00대학병원 응급실이다.”

“예?”

광주라는 말에 수혁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분명 자신은 쓰러지기 전까지 서울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거늘…….

사정은 그러했다.

처음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는 수혁의 부모에게 접근해 자꾸 장기 기증을 권유했다.

미영이뿐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은주, 온 일가친척이 장기 기증을 반대하자 병원 측에서는 의료보험 규정을 내세우며 3개월 이상은 체류가 불가능하다며 퇴원을 권해왔다.

사람의 생명이 놓인 문제 앞에서 돈 문제를 꺼내는 그들에게 심한 분노를 느꼈으나 힘없는 서민으로서는 그들과 대항해 싸울 수 없었다.

하릴없이 아버지의 인맥을 통해 서울에 있는 다른 종합병원으로 병실을 옮겼으나 그쪽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세 번이나 병원을 옮겨야만 했던 수혁의 부모님은 마지막에 가서는 뇌사상태에 빠진 수혁을 데리고 호남고속도로를 타야만 했다.

“자, 그럼 수혁 군 부모님들, 아직까지는 몸 상태가 완벽한 것은 아니니까 수혁 군이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셨으면 합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과장님, 우리 아들 이제 건강한 거죠?”

수혁 어머니의 눈에 또다시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다.

“예, 걱정하지 마십쇼. 조금 불안정하긴 하지만 이제 거의 모든 기관들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으니까요… 내일부터는 정밀 검사를 해봐야 하니까 수혁 군이 푹 쉴 수 있도록 배려해주세요. 그간의 못 다한 이야기야 앞으로도 얼마든지 할 날이 있을 테니까요. 허허허.”

배정호는 사람 좋은 눈으로 수혁 일가족을 바라봤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가슴속 한편이 먹먹해져왔다.

“오빠 때문에 하던 공부도 중단하고 돌아왔어. 오빠가 이제 내 인생 책임져야 해.”

“와하하!”

“허허허!”

“호호호!”

병실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혁은 깊은 눈으로 동생을 바라봤다. 언제나 철부지 같았던 여동생, 항상 쏙만 썩여드려 미안했던 부모님들…….

‘다시 돌아온 건가?’

“참, 오늘 같은 날 여자 친구는 왜 안 보이죠?”

“……?”

옆에서 웃고 있던 간호사의 ‘여자친구’라는 단어에 수혁의 눈이 그쪽으로 획 돌아갔다.

“아, 그러고 보니 미영이 걔도 같이 있었으면 되게 기뻐했을 텐데.”

“미… 미영이? 강미영 말씀하시는 건가요?”

수혁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본다.

“그래, 강미영. 걔가 엄청 열녀더구나. 너 쓰러진 후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원엘 왔었다. 지금은 너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며 국정원과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야. 벌써 항고소송까지 갔단다.”

“뭐… 뭐라구요? 미영이가 국정원을 상대로 항고소송을요?”

수혁은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자,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고, 밤도 늦었고 하니 내일 또 이야기를 나누시도록 하시죠.”

배정호는 수혁의 가족들을 떠미는 시늉을 했다.

“그래, 엄마 머리 아픈 이야기는 내일 하고 오늘은 오빠도 푹 쉬어야 하니까…….”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어.”

“오늘은 그럼 내가 수혁이 옆에 남겠어.”

항상 묵묵하지만 자식들과 부인, 가족을 위해서 헌신해온 아버지가 선뜻 수혁의 곁을 지키겠다며 나섰다.

“안 돼요. 제가 남겠어요.”

“자… 가족사는 세 분이서 해결하시고 환자에게는 안정이 필요합니다. 협조해주세요.”

듣기에 따라 사무적일 수도 있었으나 배과장의 말에는 유난히 정이 묻어났다.

수혁의 의식이 돌아온 지 3일이 지났다.

수혁의 부모님과 여동생, 그리고 수혁은 병실에 있는 짐을 싸고 있는 중이다.

수혁은 그젯밤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지옥문이 열리고 원귀들에게 사로잡혀 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던 사부님의 이름을 부르며 수혁은 울부짖다가 깨어났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을 때 간호원들의 눈을 피해 병원 옥상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옥상에는 다른 환자들은 없었다.

수혁은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구천에서 배운 대로 단전으로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며 천마구령심법을 운용했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도록 단전은 열리지 않았다.

‘이… 이럴 리가…어떻게 된 거지? 왜 천마구령심법이 운용되지 않는 거지? 단전이 막힌 걸까?’

수혁은 한참 동안 고민을 거듭하다가 구천에서의 육체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이런 젠장, 천마구령심법의 심결들은 모두 기억이 난다마는 내력이 모이지가 않는구나.’

수혁은 장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두 손을 배꼽 아래쪽으로 가져갔다.

순간 수혁은 짧은 호흡을 내뱉었다. 정확하게 배꼽 아랫부분에 멍울이 만져지는 것이 아닌가.

수혁은 부리나케 환의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단전을 바라봤다. 배꼽 아래에는 자두만 한 혹이 부풀어 있었다.

“뭐… 뭐지? 설마 종양은 아니겠지?”

수혁은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그 종양처럼 부풀어 오른 피부는 겉으로 만지기에는 고무공처럼 말랑말랑했는데 자꾸 만질수록 뜨거운 기운이 명치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수혁은 덜컥 겁이 났다. 아버지 말로는 조상 대대로 암에 걸렸던 분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조화란 말인가.

수혁은 다음 날 종합검진 때 의사선생님께 꼭 보이겠노라 다짐하며 사라진 단전을 안타까워하며 옥상을 내려왔다.

단전의 폐위. 그것은 말 그대로 생명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

이미 구일행과 장삼병에게 무공을 배운 수혁은 거의 무림인이 다 되어 있었고 그 역시 내공을 잃는 것이 무림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천마구령심법의 소실은 그에게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수혁은 제2차 종합검진을 받았다.

혈액검사, 내시경검사, 초음파 검사, 심전도 검사, 뇌파 검사, 그리고 MRI까지. 모든 결과는 정상으로 나왔다.

“축하하네, 수혁 군. 장기뿐만 아니라 뼈나 인대, 근육 등이 모두 정상이네.”

원장의 말에 수혁은 전혀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니, 왜 그러나?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원장님, 이게 뭔지 한번 좀 봐주십시오. 제가 보기에는 종양 같은데요…….”

“뭐, 뭐라고?”

원장은 놀라며 수혁이 환의를 들어올리고 내보이는 배꼽 아래의 혹을 바라봤다.

“이… 이게 뭐지? 흠… 얼핏 봐서는 무슨 물혹 같기도 하고… 어디 보자.”

최원장은 수혁의 배 아래 있는 혹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글쎄, 이건 종양은 아닌 것 같고… 이게 도대체 뭘까? 이렇게 하면 통증이 있나?”

최원장은 수혁의 혹을 엄지로 꾹꾹 눌러봤다.

“아니요, 아프진 않습니다. 그런데 누를 때마다 아랫배가 뜨거워져요.”

“뜨거워진다… 흠… 도대체 이게 뭘까? 일단 복부 쪽으로 초음파 검사를 다시 해봐야겠네.”

최원장의 말에 수혁은 또다시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간호사는 수혁의 배 아래 혹에 오일을 바른 후 초음파 검사봉을 가져다 댔다.

검사봉을 통해 12-14MHz의 전자파가 수혁의 복부에 쏘였다.

후우웅.

그 순간 수혁은 단전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열기는 삽시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가면서 혈도를 뜨겁게 달구었다.

‘이… 이럴 수가… 단전이 열렸어. 게다가 임독맥이 완전 개방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수혁은 온몸으로 전해져 오는 천세보혈주의 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몸속에는 구천에서와 같은 어마어마한 힘이 온몸을 물결처럼 흘러 다니고 있는 중이다.

‘이상하다. 구천에서와는 달리 온몸이 불덩이처럼 끓어오르지 않아. 이건 좋은 징존가? 나쁜 징존가. 알 수 없군.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천세보혈주의 극기가 몸에 퍼지기 시작했다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구천에서 쌓은 천세보열주의 양기(陽氣)와 천마구령심법은 그 양놈의 몸에 쌓였을 텐데 이게 어떻게 내 몸에, 그것도 단전 아래 혹 모양으로 극양의 덩어리가 되어 쌓여 있던 거지?’

수혁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천하오절로 불리던 약선 가(家)의 보물. 천세보혈주.

그 천세보혈주의 양기는 구천에서 수혁이 빌린 색목인의 몸에 고스란히 흡수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단기(丹氣)가 시공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수혁의 아랫배에 응축된 채로 뭉쳐 있었던 것이다.

그 극양의 덩어리가 초음파가 쏘여지면서 깨지게 됐고 그 진기가 수혁의 몸을 휘감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공간과 시간의 지배자 카이버가 죽으면서 가능하게 된 것일까?’

수혁의 잔머리로는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불행하게도 수혁은 이 모든 일이 창조주이자 우주의 주신(主神)인 제우바의 인과율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수혁의 가족이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담당의 최수한 원장이 입을 열었다.

“내 의사 생활 20년 만에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허허허.”

“이게 다 의사 선생님 덕분입니다.”

수혁의 아버지 박경호는 최원장의 두 손을 잡으며 예를 갖춰 감사를 표시했다.

“뇌사 상태에서 깨어난 지 4일 만에 모든 장기와 뇌파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더구나 육체의 상태는 쓰러졌을 때보다 훨씬 좋아졌어요. 이건 말 그대로 기적입니다. 수혁 군, 나중에 시간이 나면 자네를 한번 연구해서 논문으로 써보고 싶네만…….”

“그러죠, 뭐. 시간이 나면 기꺼이 한 몸 빌려 드리겠습니다.”

“호호호. 오빠야 백수니까 항상 시간이 남겠지.”

“와하하하!”

은주의 농담 한마디가 병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수혁이 어제 천세보혈주의 진기가 몸에 흡수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일주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현세에서의 천마구령심법 연마는 그리 쉽지 않다. 아무래도 환경오염이 심한 이곳에서는 대자연의 기를 빨아들이고 몸속의 노쇠한 기를 배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천마구령심법을 완전하게 구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구천에 있을 때 천마구령심법을 11성까지 익힌 수혁이었지만 현재로는 6성 정도의 마공이 느껴지는 수혁이었다.

그러나 6성의 천마구령심법도 일반인들과 비교한다면 거의 신과 맞먹는 경지였다.

“원장선생님 그리고 간호사 여러분,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수혁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병원 의료진을 향해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그만큼 수혁의 부활은 그들에게 기쁜 일이었으리라.

집으로 돌아온 수혁은 어머니가 손수 장만해놓은 산해진미와 함께 몇 끼를 배불리 먹었다.

그의 기억에는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온 후로 처음 먹어보는 진귀한 음식들이었을 것이다.

“수혁아, 많이 먹어라.”

수혁은 입 안 가득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준 요리를 집어넣었다.

순간 목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기둥이 울컥 솟아 올라왔다.

‘사부님들…….’

불현듯 지옥문이 열리며 지옥으로 빨려 들어간 사부님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수혁은 어젯밤도 장삼병과 구일행이 나오는 악몽을 꿔야만 했다.

그들은 보랏빛 핏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수혁 앞에 나타나서 울고 있었다.

갑자기 수혁의 눈시울이 붉어지자 어머니와 아버지, 동생은 집에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1년여 만에 깨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리라 짐작했다.

“여보, 내일부터는 다시 출근하셔도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래야지. 그동안 회사 일을 너무 등한시해서 그렇지 않아도 눈치 보였는데…….”

“그래요, 아빠. 이제 오빠도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우리도 일상으로 돌아가야죠. 근데 오빠, 오빠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사실 그 말은 수혁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해야 할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뜩이나 심신이 피로할 아들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어 참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딸이 선뜻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혁을 빤히 바라봤다.

“우선 서울로 올라갈 겁니다.”

“서울?”

서울이라는 말에 어머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럴 것이다.

아들이 서울에 올라가 그 참사를 당했으니 ‘서울’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고도 남을 것이다.

“서울은 왜 가려고 하느냐?”

“우선 올라가서 정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수혁의 말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또, 강미영 팀장이 제 소송을 위해 분주히 뛰고 있다니 한 번 만나봐야 할 것 같고요.”

“그래그래, 그 미영이 걔 꼭 만나보거라. 아가씨가 참 참하더구나. 내가 연락한다는 것이 그만 경황이 없어 깜빡했구나.”

“어머니, 절대 강미영 팀장에게 먼저 연락하지 마세요.”

어머니. 수혁은 태어나서 두 번째로 ‘엄마’를 ‘어머니’라 불렀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서 큰 절을 올릴 때 한 후로 이번이 그 두 번째였던 것이다.

‘어머니’라는 단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니, 왜?”

“아, 그냥요. 저도 혼란스러워요. 미영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왜?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어? 그 아가씨는 너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게 아니냐?”

아버지가 수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수혁의 왼편에 앉아 있던 여동생 은주가 그런 아빠와 엄마에게 눈짓을 했다. 그만 꼬치꼬치 물어보라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래, 그럼 서울은 언제 올라갈 거냐?”

“내일 당장 올라가겠습니다.”

“뭐라고?”

수혁을 제외한 온 가족의 눈이 놀란 토끼눈마냥 부풀어 올랐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뇨, 저도 이제 나이가 찼는데 마냥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병원에서도 몸 상태는 아무 문제없다니까 잠시 서울 좀 다녀오겠습니다.”

“흠…….”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뇌에 찬 모습이고 동생은 아무 생각 없는 눈으로 수혁을 바라볼 뿐이다.

수혁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들을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구천에서 국가와 게임회사에게 버림받았던 이야기를 할 때면 수혁은 항상 어금니를 뿌득뿌득 갈고 두 눈을 뒤집었다.

그때마다 나차태자 장삼병 사부님은 그렇게 말했다.

지나간 것은 지난 일이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라고.

그것은 인생 경험이라고.

‘내 인생을 망쳐놓은 자들, 나를 구천으로 보내 두 사부님과 헤어지는 슬픔을 겪게 한 자들,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을 테야.’

수혁의 얼굴에 서릿발 같은 분노가 서렸다.

그런 수혁을 바라보며 박경호의 입이 열렸다.

“그래, 다녀오거라.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일 없어야 한다.”

“여보오!”

수혁의 어머니가 남편을 원망하듯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상경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는 두 분께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

너무도 확신에 차고 결연한 어조에 아버지는 수혁을 대견스럽게 바라봤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가슴을 졸이며 조마조마했는데 그 마음을 감추려 해도 감출 수가 없었다.

* * *

서울 강남구 강남역 6번 출구.

그 근처에 있는 모 제과점 뒤편으로는 고급 유흥주점들이 즐비해 있다.

밤이 되면 이곳은 현란한 네온사인과 홍등을 번쩍이며 술에 취한 손님들을 왕처럼 모시기 위해 혈안이 된다.

그 한가운데 목화(木花)라는 고급 룸살롱이 유독 그 화려한 네온사인을 뽐내고 있다.

룸살롱 VIP 룸에서 중년 사내의 맛깔스러운 노랫소리가 울려나왔다.

“까르르, 사장님 멋쟁이. 어쩜 그렇게 노래도 잘하실까?”

거의 옷을 벗다시피 한 여 종업원은 팔짝팔짝 뛰며 방정을 떨었다.

마치 동백기름을 바른 것처럼 온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사내는 시중드는 종업원들의 환호를 들으며 테이블로 다가와 폭탄주를 단번에 삼켜버렸다.

“호호호, 사장님 너무 멋지시다.”

그 모습을 보며 좀 전의 그 여자가 박수를 치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래, 기분이다. 자, 여기 팁!”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지 않은 이십대 초반의 여종업원들은 중년사내가 지갑 속에서 수표를 꺼내 원피스 앞가슴 안으로 찔러 넣어주자 그의 볼에 키스를 하며 사내의 목을 끌어안고 소파로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그의 몸 위로 올라가더니 유들거리는 허벅지를 박민규의 다리 안으로 포개어 넣으며 아첨을 떨었다.

“이래서 나는 박사장님이 좋더라. 까르르르!”

뽀송한 피부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비릿한 여인의 숨결이 박민규를 흥분시켰다.

착 달라붙는 원피스 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종업원의 치마 속으로 중년 사내의 손이 뱀처럼 파고들어갔다.

“어마, 사장님 엉큼하시다.”

여인은 매운 손으로 사내의 손길을 앙증맞게 후려쳤다.

“어허, 가만히 있어봐, 이년아.”

김씨소프트사의 대표이사인 박민규.

그는 팁으로 여종업원들을 유혹하며 한껏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그의 손이 집요하게 여인의 저항을 뿌리치며 허벅지 안으로 파고들어갔다.

그 맞은편에서는 김씨소프트사의 허상무가 입 안에 양주를 가득 머금은 여종업원이 입술을 통해 전해주는 술을 아기 새처럼 받아먹고 있었다.

박민규 사장의 손이 속옷을 입지 않은 여종업원의 치마를 서서히 걷어 올렸다.

“어맛, 사장님 조금 있다 2차 가실 거 아니에요?”

“그래그래, 2차는 2차고 좀 가만히 있어봐.”

박민규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여종업원의 허리를 두 손으로 거칠게 끌어안으며 자신의 몸을 그녀에게 밀착시켰다.

쿠당탕, 쿵쾅!

“웬 놈이야?”

“이런 미친 새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때 밖에서 요란스런 소동 소리가 들려왔다.

“어마, 밖에 무슨 일 났나 봐요?”

“이년아, 지금 네가 밖에 신경 쓸 때냐? 내버려두고 어디 서비스나 화끈하게 해봐.”

술이 꼭지까지 차오른 박민규는 연신 여인의 몸을 탐했다.

“으아악!”

그러나 룸 밖의 소리는 갈수록 거칠고 격렬해졌다.

“이… 이런 미…친 새끼… 애들 전부 불러와.”

누군가가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룸살롱 지배인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지자 그제야 두 여종업원들도 긴장하며 뱀 같은 몸을 허상무와 박사장에게서 빼냈다.

“이년들이 미쳤나.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사장님, 잠깐만요. 밖에 무슨 큰일이 난 것 같은데 잠깐 내다보고 올게요.”

“뭐 이런 년들이 다 있어? 야, 사장 오라고 그래!”

박민규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콰장창!

그의 언성이 높아질수록 문 밖의 소음은 커져만 갔다.

삐이익.

강력반 단속이 나온 것이 아닌가 짐작하던 여종업원은 슬그머니 룸의 문을 열어 밖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던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세… 세상에…….”

그녀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앞에 벌어진 광경은 지금껏 목화에서 일해오면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지배인을 비롯해 룸살롱의 기도들이 모두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들 코가 깨지고 광대뼈가 함몰되었다. 말 그대로 얼굴이 모두 뭉개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내가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표정한 얼굴에 구름처럼 분노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그 사내의 등 뒤로 회칼을 든 사내들이 주방 쪽에서 달려 나왔다.

“이 시팍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설치는 거야?”

“이 개새끼, 세나비가 보내서 온 거냐?”

등 뒤에서 서서히 좁혀오는 두 사내를 무표정한 얼굴의 사내가 흘깃 쳐다봤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그들에게는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가 보였다.

“이런 시팍새끼가 어른이 말하는데…….”

화난 사내가 회칼을 들고 무표정한 사내의 복부를 찌를 듯이 달려왔다.

그것은 말 그대로 찰라, 전광석화와 같았다.

번뜩거리는 회칼을 들고 덤벼들던 두 사내의 신형이 대포알처럼 허공으로 치솟더니 홀 천장에 머리가 부딪쳐 이내 목이 부러진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여종업원은 두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무표정한 사내의 주먹은 그의 허리춤에 그대로 있었는데 섬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두 사내가 뻗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삼응과 종수.

둘은 강남권 일대에서 알아주는 칼잡이였다.

그런 둘이 맨손의 사내에게 공격다운 공격, 방어다운 방어 한 번 못해보고 뻗어 버리는 모습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꺄아악~!”

여종업원의 비명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룸 곳곳에서 넥타이와 와이셔츠, 심지어는 바지춤을 풀어헤친 남자들이 룸 밖으로 기어 나왔다.

“무… 무슨 일이야?”

박민규와 허상무도 여종업원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자 술이 깬 사람처럼 놀라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 순간 룸의 문을 열고 한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조명 때문에 그의 얼굴을 금방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허상무는 마치 저승사자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굳어졌다.

그리고 무표정한 사내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던 박민규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가 서서히 커졌다.

“너… 너… 너는?”

“바… 박수혁!”

수혁의 두 눈에서 불같은 광채가 일렁거렸다.

수혁이 두 주먹을 불끈 거머쥐자 두 주먹에서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뽀가각.

“네… 네가 어떻게 여… 여기에…….”

허상무는 술이 완전히 깼는지 말을 더듬으며 탁자 위에 손을 가져가 더듬거렸다.

분명 좀 전의 소란은 수혁이 일으킨 것일 터. 허상무는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탁자 위에 있는 술병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런 허상무의 행동을 수혁의 시선이 서서히 따라갔다.

“이… 이 자식, 여기가 어딘지 알고 감히…….”

허상무는 수혁을 향해 양주병을 거꾸로 잡고 달려들었다.

슈슈슉.

그 순간 허상무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탁자 위로 곤두박질쳤다.

와장창!

“꺄아악!”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여종업원들은 흘러내린 원피스를 챙겨 입을 겨를도 없이 알몸을 드러낸 채로 룸 밖으로 총알처럼 뛰쳐나갔다.

허상무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박민규는 두 손으로 눈을 닦아보았다.

분명 눈앞의 사내는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는데 술병을 들고 설치던 허상무가 혼자서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취했나? 이게 꿈이야, 생시야?’

지풍(指風). 수혁은 손가락에서 일렁이는 바람을 이용해 허상무의 명천혈을 눌러버린 것이다.

“이… 이보게, 젊은이… 왜 이러나… 마… 말로 하지…그래…….”

박민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쓰레기, 바지춤이나 올려라.”

수혁의 입이 낮게 열렸다.

‘쓰레기’라는 단어에 박민규의 양미간이 주름과 함께 좁아졌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미국에서 MBA까지 받은 자신에게 여태껏 쓰레기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회사에서 고작 프로젝트 하나 하던 에이전트가 자신을 향해 그런 험한 말을 입에 담다니, 박민규는 모든 자존심이 일순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 자신을 향해 수혁은 저승사자처럼 걸음을 뗐다.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박민규의 가슴은 무저갱 밑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워… 원하는 게 뭐… 뭐냐? 도… 돈이냐?”

퍼억!

말 한마디 잘못한 덕에 박민규의 얼굴이 수평으로 강하게 일그러졌다.

“그래서 너는 쓰레기다. 세상이 돈이면 다인 줄 아는 놈.”

박민규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퉤… 퉤.”

그는 입 안에 뭔가가 고이는 것 같아 입을 우물거리며 침을 뱉었다.

탈그락.

그의 입 안에서 강냉이 같은 이빨이 대여섯 개 쏟아져 나왔다.

땅바닥을 구르는 자신의 이빨을 보며 박민규는 눈물을 쏟았다.

‘내… 내 이빨…….’

“이… 이…바… 저므니… 어… 어마면 되… 되게나? 일어? 아니, 이어? 아냐, 아냐. 사머글 주지. 내 사머글 주겠네.”(이봐, 젊은이. 얼마면 되겠나? 일억? 아니, 이억? 아니, 삼억을 주지.)

박민규는 이빨이 부러져 새는 발음으로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후웅.

뿌지직!

“이 개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잖아.”

수혁은 일갈하며 오른손 가운데손가락을 박민규의 콧잔등을 향해 튕겼다.

손가락 하나가 코를 스쳤을 뿐인데 박민규의 코뼈가 완전 부러져 나갔다.

코를 타고 통증이 뇌까지 전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온몸이 마비될 듯한 통증 때문에 박민규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제야 ‘돈’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될 것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워… 워하느 게 뭐가?”(원하는 게 뭔가?)

“강미영은 왜 해고했지?”

“내가… 해… 해고하 게 아니라 그…녀니 지 바로 나가서.”(내가 해고한 게 아니라 그년이 제 발로 나갔어.)

뿌가각.

박민규는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두 팔로 오른다리를 잡고 쓰러졌다.

수혁의 발이 살짝 스친 것 같은데 정강이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으아악! 여… 여보게… 저므니… 제바… 사려주게… 모수만 사려주게. 워하는 거슨 뭐드지 드러주 테니…….”(여보게, 젊은이. 목숨만 살려주게.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줄 테니.)

“다다음 주에 내 명예회복과 관련해 항소심이 열린다. 그 자리에 나가서 너와 국정원이 한통속이 되어 나를 이용해먹고 토사구팽했다는 사실을 증언해라. 그럴 수 있겠지?”

끄덕끄덕.

박민규는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뭐라 변명을 한다면 이번에는 어디가 부러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파파팟.

그때 수혁이 자신을 향해 두 손을 움직이는 것 같더니 바람이 일렁이며 뭔가가 자신의 몸을 바늘처럼 찌르는 것 같았다.

“이보게… 내 모메 무스 지슬 하거가?”(이보게,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건가?)

“혈도라고 들어봤나? 너는 혈도를 제압당했다. 무회혈과 오자혈로 2주 후 내가 혈도를 풀어주지 않으면 내장이 뒤틀려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그러니 다른 마음 먹지 말고 내가 시킨 대로 법정에 서도록 해라.”

박민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조금 있으면 대성통곡할 기세다.

“내 말을 못 믿겠지? 그럼 이걸 봐라.”

파앗!

수혁의 손가락에서 지풍 하나가 빠져나오더니 박민규의 어깨를 눌렀다.

그러자 채 2초도 안 돼서 박민규의 팔이 틀어지더니 등 뒤로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금사혈이라는 곳이다. 내가 다시 혈도를 풀지 않으면 어깨가 완전 돌아가 팔과 등이 달라붙게 되어 있다.”

“으으으으… 이… 이러지 마아… 제…바…….”

파팟!

수혁이 다시 지풍을 뿌리자 돌아가던 팔이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럼 2주 후에 보자.”

덜덜덜.

수혁이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자 박민규의 턱이 사시나무처럼 위아래로 떨렸다.

그의 열린 바지춤 사이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공포에 질려 오줌을 싸고 만 것이다.

정말이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내였다.

수혁은 박사장과 허상무를 뒤로하고 룸을 빠져나왔다.

“이 개자식,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X만 한 새끼, 뼈와 살을 발라주마.”

수혁이 박민규에게 빚을 갚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조직원을 동원한 모양이다.

서울 강남의 룸살롱들은 조직폭력배의 젖줄과도 같은 자금원.

그곳이 이방인에게 철저히 깨지자 그들은 거미줄 같은 연락체계를 통해 수십 명의 조직원을 동원시킨 것이다.

얼핏 눈에 보이는 수만도 족히 20명은 되어 보였다.

그들 중 선두에 서 있는 검정색 재킷을 입고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자가 회칼날을 혀로 핥았다.

“얘들아, 담가버려.”

“이야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좁은 통로로 깍두기들이 달려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불인 줄 알면서도 뛰어드는 불나방들과도 같은 처사.

짧은 머리에 회칼이 마저 박히지도 않을 것 같은 남산만 한 배를 치렁치렁 달고 다니는 조직원들의 몸이 다져진 밀가루 반죽처럼 심하게 찌그러졌다.

“뭐… 이… 이…런 무협지 같은 일이…….”

뇌천마공 권법 제2권 곡권 제6식 곡류구궁(曲流九穹)!

아홉 개의 곡류가 하늘까지 이른다는 그 권법으로 순식간에 다수의 적들을 해치울 때 효과적인 권술이다.

수혁은 채 1할의 내공도 불러오지 않았지만 조폭들은 이미 심각한 내상을 입고 쓰러졌다.

룸살롱의 통로 벽에 날아가 부딪혔던 그들의 사지가 축 늘어지는 것이 이미 숨을 거둔 것 같아 보였다.

“이… 이…런 개…새끼.”

쉬익쉬익.

규칙도 없고 초식도 없는 막무가내의 칼부림.

그 칼부림을 향해 수혁의 가운데손가락이 꿀밤 때리듯 튕겨져 나갔다.

팅강!

“……?”

깍두기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손가락 하나가 회칼을 두 동강 내버렸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서서히 한 놈, 두 놈이 겁을 집어먹었다.

이미 예닐곱 명의 동료들이 널브러진 탓도 있었지만 눈앞의 적은 악마 같은 능력을 지닌 놈.

동요하는 그들의 눈빛을 수혁이 간과하지 않았다.

그의 입이 나지막하게 열렸다.

“꿇어라.”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듯한 젊은 조폭은 형님들의 눈치를 살폈다. 어깨까지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놈이 중간보스로 보였다.

수혁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튕겨졌다.

그리고 투명 구슬 같은 물체가 헛바람을 삼키며 머리 긴 놈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으허억!”

그는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 입에서 두 번 꿇으라는 말이 나올 때면 나머지 놈들도 모두 허벅지가 저놈처럼 관통당할 것이다. 그래도 꿇지 않겠나?”

바바바박!

수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깍두기들은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이 잘 훈련받은 군인들처럼 보였다.

수혁은 그런 그들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착하게 살아라.”

어두운 밤길을 수혁은 홀로 걸었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차들의 경적음이 주의를 분산시켰다.

수혁은 자신이 룸살롱을 빠져나올 때부터 누군가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을 때부터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국정원 요원들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수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수혁이 잠시 멈칫거리자 50미터 뒤에서 그의 뒤를 밟던 검은 정장의 사내는 허리를 구부려 신발 끈을 묶는 척했다.

그리고 슬며시 고개를 들어 수혁 쪽을 바라봤다.

“응? 이 자식이 어디로 사라졌지?”

그는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수혁이 사라진 쪽을 향해 뛰어갔다.

“젠장,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도대체 저 녀석이 뇌사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국정원은 수혁이 삼합회의 테러에 당해 쓰러진 이후 지금까지 쭈욱 그를 감시해왔다.

때로는 병원의 간호사와 의사가 감시 역할을 대신했고 때로는 그들이 직접 감시를 했다.

1년이 넘도록 수혁이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서서히 감시 조직을 해체하려고 준비 중이던 국정원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재빨리 감시 조직을 재가동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강미영이 국정원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어서 원장의 입지가 여간 곤란해진 게 아니었다.

혹시라도 쉬쉬해왔던 광개토대왕 프로젝트에 국정원이 깊이 관여해 있었고 박수혁이라는 젊은이가 그 과정에서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이슈화된다면 국정원장의 사퇴는 불가피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수혁을 놓쳤다는 생각에 조직의 문책을 걱정한 요원은 더욱 걸음을 빨리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수혁이 사라진 골목으로 몸을 틀어 들어갔다.

파밧!

그때였다. 헛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거짓말처럼 다리가 풀려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이… 이게… 대체…….”

자신의 눈앞에는 수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멸시의 기운이 짙게 풍겼다.

“어… 어떻게?”

“‘어떻게’가 중요한 게 아냐. ‘무엇을’이 중요한 거지.”

“그…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지금 네놈의 몸에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그 말이야.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어디에’겠지.”

수혁의 말에 국정원 요원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냐?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지?”

“혈도라고 들어봤나? 아마 중고등학교 다닐 때 영웅문 같은 무협지를 읽어봤다면 대충은 알 게다. 지금 네 몸은 혈도를 제압당했어. 인슬혈(引膝血)이라고 하반신의 근육과 신경을 관장하는 혈도지. 한마디로 너는 내가 혈도를 풀어주기 전까지는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야 된다는 이야기지.”

“뭐… 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피식.

“그럼 한번 일어나 보든지.”

수혁의 입이 대각선으로 일그러졌다.

수혁의 말이 끝나자 국정원 직원은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양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두 다리가 다른 사람의 다리처럼 느껴졌다.

“워… 원하는 게 뭐냐?”

“역시 스파이라 그런지 머리 회전이 빠르군. 임승수는 어디 있지?”

“임승수? 그게 누구지?”

뻐억!

국정원 직원은 채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고개가 뒤로 직각에 가깝게 꺾여야만 했다.

울컥!

입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퉤에!”

입 안에 뭔가가 오물거리자 침을 뱉었다.

핏덩어리와 함께 부러진 이빨들이 튕겨 나왔다.

“조심하라구. 내가 힘 조절을 잘못했다면 목이 부러졌을 거야. 사실은 나도 내 몸 안의 힘을 주체할 수가 없거든. 자, 다시 물어보겠다. 임승수는 어디 있지?”

“아까 말했잖아, 개자식아. 임승수가 도대체 누구…….”

빠악!

이번에는 요원의 목이 오른쪽으로 매몰차게 돌아갔다.

국정원 요원은 눈알이 튀어나오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분명 놈은 손바닥으로 가볍게 따귀를 친 것 같았는데 자신은 마치 곤장으로 뺨을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코뼈가 부러져버렸다.

“이… 이런, 내가 힘 조절을 잘못했군. 살살 친다고 쳤는데 코뼈가 부러지다니… 쯔쯔… 그러게 내가 물어본 것에 똑바로 대답했어야지.”

국정원에 입사한 이래 국민들 위에 군림하면서 지금껏 이런 수모는 처음이었다.

더구나 알 수 없는 압박감이란.

수혁의 몸에서 풍겨져오는 알 수 없는 힘.

그 위압감에 국정원 요원은 주눅이 들었고 두려움에 떨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세상만사를 초월한 듯하고 말투에는 깊은 허무가 느껴진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놈에게는 태산 같은 위엄이 느껴졌다.

녀석이 처음 임승수의 거처를 물었을 때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말을 할 뻔했다.

그러나 숱한 훈련과 단련 덕에 상사의 소재를 불진 않을 수 있었다.

‘이… 이건 인간이 아니다.’

그는 두려움과 경외의 눈빛으로 수혁을 바라봤다.

역시나 냉소적인 눈으로 수혁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말을 하든 안 하든 나는 임승수를 찾아낼 거다. 그리고 임승수에게 전해라. 빚을 갚기 위해 내가 곧 찾아갈 거라고.”

“쿨럭, 네놈이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우리 조직을 상대로 혼자 싸울 순 없다. 쿨럭쿨럭! 포기해라. 지금이라도 포기한다면…….”

뻐어억!

그는 차라리 입을 닫았어야 했다. 모든 화는 입에서 나온다 했다.

국정원 요원은 말 한마디 잘못해서 결국은 모든 어금니가 부러지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파밧!

“네놈의 혈도를 다시 풀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팼으니 병원에 가서 빨리 치료해라. 그리고 내 말을 명심해라. 임승수, 그를 찾아갈 거라고.”

가볍게 하는 말 같지만 황제의 용언처럼 위엄이 있는 말투였다.

‘이런, 빠… 빨리 보고해야 해.’

네 개의 어금니가 부러져 나가고 코뼈가 분질러져 목 안으로 계속해서 피가 스며드는데도 국정원 요원은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또 스스로 놀랐다.

그는 허둥대며 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런 그를 놔두고 수혁의 신형이 네온사인 너머로 사라져갔다.

* * *

수원에 위치한 경기도 공무원 연수원은 비교적 인적이 드문 곳이다.

그 건물 옆에는 도립문화연구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국정원 직원들에게는 이른바 안전가옥으로 통하는 곳이다.

그 도립문화연구원 지하 벙커 안에는 실내지만 선글라스를 낀 사내들이 한 사람을 위주로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임금 같은 중년인, 그는 바로 국정원 외사 3과장 임승수였다.

광개토대왕 프로젝트로 잠시 낙마했던 그는 결국 6자회담을 앞두고 다시 외사 1과장으로 보직발령 받았다.

평소 인맥관리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조직에서 자신을 밀어준 선배들도 있었던 탓도 컸지만 무엇보다도 중국통이라는 이유가 한번 낙마된 그를 불러들일 수 있는 결정적 이유였다.

그런데 얼마 전에 자신이 스카우트해서 자신이 버렸던 그 아이가 깨어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가장 먼저 강미영을 찾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짐작을 깨버린 그 아이는 놀랍게도 김씨소프트사의 박민규를 찾아갔다고 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자신에게 빚을 갚겠다며 통첩까지 해오는 것이 아닌가.

임승수는 자신의 인맥과 사조직을 총동원해 박수혁의 동태를 살피며 주변 인물들, 정세를 관찰했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은 박수혁이 상경한 이유를 모르는 것 같았다.

더더구나 현재 국정원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준비 중인 강미영과 그의 변호인 역시 수혁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임승수는 부하들의 첩보를 들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머지않아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발탁 승진을 앞두고 있는 그에게 광개토대왕 프로젝트에 관한 비사가 터진다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뿐 아니라 조직의 수장인 원장의 지위도 불안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끝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수혁을 안전가옥으로 유인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의 주변 인물들이 그의 서울행의 진정한 의도를 알지 못한다면 민간인 하나쯤 실족사나 사고사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 네놈의 안타까운 처지를 내 모르는 것은 아니다. 허나 국가라는 기관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일개인의 희생은 불가결한 거야.’

임승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불현듯 취직을 시켜주겠다는 말에 기뻐하던 수혁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목에서 ‘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목을 비틀더니 입술을 비틀었다.

‘미친놈, 감히 혼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국정원을 상대하겠다고? 후후후!’

그는 생각을 정리한 사람처럼 날카롭게 눈을 번뜩이더니 가슴 속에 든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감촉이 뼛속까지 전해오는 것 같았다.

‘네놈이 과연 이곳 지하 안전가옥까지 무사히 들어올 수 있을까? 후후후.’

삐이익

[여기는 모자, 풀생이 방금 문화원 안으로 들어섰다.]

“알았다, 잠깐 기다려라.”

조직원의 보고를 받은 어깨 넓은 사내가 비화기를 홀드시킨 상태로 임승수를 바라봤다.

“어떻게 할까요?”

“우선 이목이 있을지 모르니까 가옥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풀생이 안전가옥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는 움직이지 말고 지시를 기다려라.]

[알았다.]

저벅저벅.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수혁이 돌길에 발을 내디뎠다.

초점을 잃은 듯한 눈은 그의 심정이 얼마나 착잡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감회가 새롭군. 처음 그를 만났을 때도 나주에 있는 안전가옥에서였던 것 같은데… 항상 음지를 쫓아다니는 이들… 후후, 우습군.’

옥상에 한 놈, 건물 양쪽 숲에 각각 한 놈씩.

틀림없이 총을 소지하고 있을 것이다.

수혁은 한 발짝, 한 발짝을 걸으며 채하영을 떠올렸다.

모든 이들이 자신을 배신했을 때, 심지어는 사랑하던 강미영마저 자신을 외면했을 때 끝까지 자기 곁에 남아주었던 채하영.

그녀는 항명했다는 이유로 경기도 이천으로 좌천되다시피 인사발령을 받고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마(coma)에 빠져 있는 동안 자신의 핸드폰은 정지되어버렸기 때문에 하영은 발신자 번호가 찍혔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전화를 건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접니다, 박수혁.”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하영은 진심으로 수혁의 부활을 기뻐했다.

그리고 수혁이 이천에 있는 그녀의 직장으로 찾아갔을 때 그녀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수혁을 향해 뛰어왔다.

마치 군에 간 애인이 백일휴가를 나왔을 때 맞아주는 여자 친구처럼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잘됐어요, 수혁 씨. 정말 잘됐어요.”

그녀가 곁에 있을 때는 조금 보이쉬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은 왠지 그녀가 여자로 보였다.

‘자세히 뜯어보니 예쁘구나, 채하영 씨도.’

수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흐를 때 임승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 자신을 보고 기뻐했던 하영은 수혁의 계획을 듣고 나서는 마음으로 걱정해주었다.

“꼭 그렇게 하셔야겠어요?”

수혁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수혁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뇌사가 아니라 정말 죽을 수도 있어요. 우리 조직은 그런 곳이에요. 수혁 씨께서 마음을 정리하신다면 제가 발 벗고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어요.”

수혁은 그때 말없이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그의 뜻이 얼마나 깊은지 알았기 때문일까?

“결국 복수를 위해 십만 명 중 4명이 될까 말까 한다는 그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신 거였군요.”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수혁의 안위를 걱정하며 임승수의 거처를 알려주었다.

인연이래야 감시자와 피감시자의 신분으로 만났던 것이 전부였는데 수혁은 채하영에게 마음으로 우러나는 감사를 전했다.

“강미영 씨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뜬금없는 말에 수혁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를 위해 뭔가를 한다고 들었소.”

“후후, 열녀도 그런 열녀가 없지요. 전 같은 여자로서 강미영 씨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고민했을 거예요. 하지만 결국은 깨달았죠. 자신의 비겁하고 나약한 행동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결국 수혁 씨의 명예를 위해 현재 행정소송을 준비하고 있죠. 벌써 항고까지 갔으니까요.”

거기까지는 수혁도 이미 부모님께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김씨소프트사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죠. 그래서 지금은 업계 2위인 주식회사 맥스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어요. 파이온에 필적할 만한 야심작을 개발 중이라며 기뻐하더군요. 하지만 그녀의 눈은 슬퍼 보였어요. 어찌 됐든 팀장에서 평직원으로 강등된 건 사실이니까요.”

현재 낙성대 쪽에 오피스텔을 얻어서 소송과 함께 프로그래밍에 몰두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였을 때 수혁은 슬슬 수원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몸조심하세요.”

“고맙소.”

하영은 딸랑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서는 수혁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쓰러지기 전과 비교해서 그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덤벙대고 수다스러운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과묵하고 알 수 없는 그늘이 얼굴에 드리워진 우수에 젖은 듯한 남자가 되었다.

하영은 그렇게 망부석처럼 선 채 수혁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철컹.

수혁은 문화원의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주말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물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몇 명의 숨은 쥐새끼들을 제외한다면.

[풀생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지상에서는 이목을 끌 수 있으니 지하 1층으로 내려오면 없애 버리도록. 오버.]

[알았다. 오버.]

수풀에 숨어 있던 요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혁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자동소총을 들고 그의 뒤를 쫓았다.

옥상에 있던 팀원들은 엘리베이터 문을 강제로 열고 엘리베이터 천장 위로 서서히 내려갔다.

철컹.

엘리베이터 위에 도달한 그들은 안전장치를 풀고 실탄을 장전했다.

다른 팀원이 엘리베이터의 전원을 차단하자 수혁이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 안이 칠흑같은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수혁은 이미 그들의 무전내용을 듣고 있었다.

천리경.

천마구령심법을 익히면 시력과 청력이 일반인들보다 몇십 배에서 몇백 배까지 발달된다.

이미 마계진마 구일행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아 동체시력과 동체청력을 발달시킨 수혁이었다.

실탄을 장전하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 안에서 콩 볶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파파파파팡.

하지만 그것은 총소리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연기가 치솟아 올랐고 엘리베이터 천장이 드릴로 구멍을 뚫은 것처럼 곳곳이 뚫려 있었다.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 수혁은 양손가락이 꽃봉오리처럼 활짝 펼쳐져 있었다.

탄지신탄.

열 개의 탄지신공은 국정원 요원이 기관총을 쏘기도 전에 수혁의 손가락 끝을 떠나 날아갔고 순식간에 국정원 요원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어버렸다.

[브라운이 당했다.]

[뭐… 뭐라고? 어떻게 된 거냐? 상황보고 해라.]

[현재로서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총성이 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운과의 교신이 끊겼다.]

“이런 멍청한 것들, 놈에게 총을 빼앗긴 거 아냐?”

“설마요, 놈은 행정병 출신이라 총 한번 제대로 쏴보지 않았을 텐데요.”

임승수는 부하들의 주고받는 무전내용을 들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얼마든지 덤벼라.’

수혁은 구멍 난 엘리베이터 천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뇌천마공 각법 한방에 엘리베이터 천장은 종잇장처럼 짓이겨졌다.

뻥 뚫린 엘리베이터 위로 수혁이 올라섰다.

그리고 내력을 두 눈으로 집중시키자 천마구령심법으로 단련된 동체시력이 빛을 발했다.

머리 위에 지하 2층의 엘리베이터 문이 보였다.

파앗!

수혁은 몸을 날려 뇌천 마공 각법 중 납천와슬을 시연했다.

콰아아앙!

파괴력에 있어서는 뇌천마공 권법중 최고라는 납천와슬 한방에 굵직한 엘리베이터용 출입문이 스티로폼처럼 부서져 내렸다.

[방금 위층에서 굉음이 울린 것 같은데 무슨 소린가?]

[우리가 지하 3층으로 내려가서 확인해보겠다. 오버.]

[빨리 확인하고 보고하라. 놈이 살아 있으면 즉각 사살해버려라.]

[알았다. 오버.]

지하 2층에 있던 요원들은 권총을 꺼내 들고 재빨리 비상계단을 이용해 지하 3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들이 3층에 도착했을 때 비산하는 먼지 속에서 한 사람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눈앞의 사내는 인간이건만 그의 뒤에는 엘리베이터용 문이 박살이 난 채 뭉개져 있는 것이 아닌가.

“주… 죽어라.”

국정원 요원이 권총을 들어올렸을 때 그의 이마를 향해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쐐애애액!

퍼억!

바람 소리가 멈추는가 싶더니 뭔가가 자신의 머리에 날아와 박혔다.

그리고 국정원 사내는 눈앞에 수혁의 검지가 자신을 향해 질책하듯 뻗어 있는 것을 보았다.

“마… 말도 안 돼.”

수혁의 손을 떠난 탄지신공은 국정원 요원의 머리를 꿰뚫어버렸다.

[찰리, 찰리! 응답하라.]

방금 쓰러진 요원의 허리춤에 있는 무전기가 울리자 수혁은 허리를 굽혀 무전기를 들어올렸다.

[찰리는 죽었다. 더 이상 살인을 하고 싶지 않다. 임승수를 만나게 해다오.]

[너는 누구냐? 이런 쌍놈의 새끼. 거기 가만히 있어. 죽여 버리겠다.]

무전기 너머에서는 듣기 거북한 욕설이 흘러 나왔다.

[아직도 잘 모르는가 보군. 너희들이 들고 있는 그 자동소총으로는 나를 죽일 수 없다.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으면 임승수를 내 앞으로 데리고 와라. 그렇지 않고 내 발로 그를 찾아가게 될 때는 뒷일은 책임질 수 없…….]

뚜우뚜우.

“훗, 이 자식들 간이 배 밖으로 기어 나왔군.”

수혁은 비웃음을 흘리며 무전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밟아버렸다. 그다지 힘을 주지도 않은 것 같은데 무전기는 박살이 났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임승수가 머무는 안전가옥 지하 4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는 마루, 풀생이 4층으로 내려갑니다. 엘리베이터 저지선이 완전 붕괴됐습니다.]

“이런 병신 같은 것들, 당장 출입문을 봉쇄해.”

“죄송합니다, 과장님.”

임승수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가 들고 있던 커피 캔이 어찌나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는지 움푹 패여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어찌 저딴 놈이 우리 정예요원들의 망을 뚫고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단 말이지? 끄응!’

그는 갑자기 심한 편두통을 느꼈다.

처처척!

임승수를 보호하고 있던 네 명의 사내들은 품속의 권총을 꺼내 들고 출입문을 겨누고 섰다.

그리고 한 사내가 문으로 다가가 3중 잠금장치를 걸어 잠갔다.

“놈이 들어오는 대로 벌집을 만들어버려라.”

“예.”

제법 직책이 있어 보이는 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요원들은 권총의 실탄을 재웠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이지만 목을 타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 밖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정적을 뚫고 들려왔다.

[놈이 문 앞에 거의 다 다가갔습니다.]

[알았다. 밖에서 계속 대기하라.]

[예.]

그들의 교신이 다 끝나갈 즈음 거친 굉음이 지하 4층에 울려 퍼졌다.

콰콰쾅1

태산거권(泰山祛拳).

주먹 하나가 태산도 들어올린다는 바로 그 뇌천마공의 권법.

수혁의 주먹이 일자로 뻗어 나갔고 8cm가 넘는 철문이 마분지처럼 짓이겨졌다.

철문이 부서지면서 일으킨 먼지와 연기 사이로 검은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이다. 사격 개시.”

누구랄 것도 없이 사격명령이 떨어졌다.

츠츠츠츠.

“헉!”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 실탄을 쟀고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그런데 그들의 총이 자석에 이끌리듯 출입문 쪽으로 빨려갔다.

요원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이… 이게 어떻게…….”

자신들이 들고 있던 총은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더니 수혁의 손에 지남철처럼 달라붙었다.

허공섭물(虛空攝物).

몸 안의 기를 이용해 손을 대지 않고도 원거리에 있는 물체를 끌어당기거나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절기. 이기어검술과 더불어 초절정의 고수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비기가 바로 허공섭물이다.

임승수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위아래로 벌어졌다.

투두둑.

수혁은 손 안으로 빨려 들어온 권총을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그의 입가가 약간 비틀어 올려졌다.

비웃음.

눈앞의 적들을 조롱하는 듯한 비웃음.

임승수는 반사적으로 가슴속에 품고 있던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그 시간은 박수혁의 치켜 올라간 입초리가 채 자리를 잡지도 못할 만큼 빠른 시간이었다.

타앙!

화약 냄새와 함께 총알이 수혁을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수혁의 오른발이 옆으로 두 번 미끄러져 갔다.

우이사(右移徙). 구일행은 천마지보 두 걸음이면 온 우주에 피하지 못할 공격이 없다 하였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수혁의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에 임승수는 입에 게거품을 물어가며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타타탕!

구급칠완(九急七緩)!

천마지보의 보법중 하나인 구급칠완이 펼쳐졌다.

아홉 번 급하게 뛰던 수혁이 일곱 번 완만하게 미끄러지자 임승수의 총구를 떠난 총알은 하릴없이 벽에 생채기를 낼 뿐이었다.

철컥, 철컥!

임승수는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실탄은 이미 바닥난 상태.

그는 분노로 어금니를 잘게 깨물며 수혁을 향해 권총을 내던졌다.

“이… 이 개자식아, 죽어라!”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권총을 향해 수혁의 발길질이 가해졌다.

허공을 가로질러 오던 권총은 수혁의 빠른 발길질에 맞아 반대편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뭐… 뭣들 하는 거냐? 저… 저 자식을 막아라! 어서!”

임승수는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이미 사기가 꺾이고 겁을 잔뜩 집어먹은 국정원 요원들은 마지못해 주먹을 걷어붙이고 수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번쩍!

그러나 수혁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네 사내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라 네 방향의 모퉁이로 날아가 곤두박질쳤다.

그들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것 같아 보이긴 했으나 이미 실신상태를 넘어선 듯 보였다.

“네… 네놈은 누구냐? 너… 너는 내가 아는 박수혁이 아니야. 도대체 너… 너는 누구냐? 쓰러져 있는 동안 네놈에게 무… 무슨 일이 일어 난거냐?”

임승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수혁의 몸은 저승사자처럼 한 발짝씩 다가왔다.

스윽.

임승수의 등이 어느새 벽에 닿아 있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 상황. 임승수의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심하게 떨렸다.

“이… 이보게, 수혁이… 내 자네에게 일부러 그런 것은 아… 아니네.”

슈우우우.

퍼어어엉!

임승수는 순간 수혁의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지하실의 공기를 모두 빨아들일 것 같은 주먹이 거칠게 날아들었다. 그 주먹은 간신히 자신의 얼굴을 피해 뒷벽을 강타했다.

벽에는 트럭 바퀴만 한 구멍이 뚫려 버렸다.

그리고 임승수의 뺨은 파공성으로 인해 일자로 찢겨 피가 흘러내렸다.

임승수는 두려움으로 온몸을 떨었다.

‘만약 저 주먹에 정통으로 맞았더라면 내 머리통이 박살났을 것이다.’

그랬다. 태산도 들어올린다는 태산거권에 맞았다면 임승수의 머리통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을 것이고 그의 머리통은 몸과 분리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이보게… 수혁… 아니, 박수혁 선생님. 이게 다 국가를 위한 것이었지… 어디…….”

철썩!

임승수는 할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수혁의 왼손이 그의 뺨을 올려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승수는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의 몸을 보았다. 그리고 그 몸은 이내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박수혁… 박수혁 선생님… 아니, 수혁이 형님… 제, 제발… 살려만…….”

임승수는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며 어렵게,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뻐어엉!

그런 임승수의 복부를 수혁의 발이 아래에서 위로 걷어차 올렸다. 그러자 임승수의 몸이 축구공처럼 허공으로 떠올라 천장에 부딪쳤다가 그길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크아악!”

내장이 끊어지는 것 같고 허리가 분질러지는 것 같았다.

“형님, 아니 삼촌, 제… 제발 살려만 주…시면… 뭐든지… 취직이 하고 싶댔지… 내 대기업에 취직을…….”

퍼억 퍽퍽

이번에는 수혁의 발길질이 임승수의 턱을 걷어차 버렸다. 그 순간 아래턱과 위턱이 부딪치면서 임승수는 혀를 깨물고 말았다. 극심한 통증과 함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을 때 그의 면상을 이번에는 수혁의 주먹이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와아악!”

바닥에는 핏물이 낭자했다.

살점이 뜯겨 나가고 광대뼈가 함몰했다.

“사… 살려… 쿨럭…….”

임승수는 피를 한 모금이나 토해냈다.

“어… 어버… 어버버…….”

이빨로 혀를 깨무는 바람에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임승수였다.

“잘 들어라, 임승수.”

임승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애처로운 눈으로 박수혁을 바라봤다.

“나뿐 아니라 알량한 프로젝트 하나 때문에 중국에서 공작하다가 죽어간 이들이 있다.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국가를 위해서니 어쩌니 하는 그런 개좆같은 소리는 집어 치우란 말이다.”

수혁의 육중한 발이 임승수의 얼굴을 짓밟았다.

콰직!

어찌나 강하게 내리찍었는지 그의 발에 밟힌 임승수의 얼굴이 대리석 바닥을 깨고 파묻혔다.

그런 그의 등을 향해 수혁의 손가락에서 지풍이 빠져나갔다.

파파파파.

“며칠 후면 나와 관련된 공판이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너는 방금 무회혈과 오자혈을 제압당했다. 믿지 않겠지만 2주 후면 너는 내장이 썩어가며 죽을 것이다. 물론 내가 혈도를 풀어준다면 살 수 있겠지. 나뿐 아니라 지금껏 애국이라는 대의 아래 희생되어간 원혼들을 위해서라도 그날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해라.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석고대죄하는 기분으로 지난날의 광개토대왕 프로젝트를 비롯해 국가기관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동류의 범죄들에 대해 증언해라. 알겠나?”

“읍… 으…흐읍.”

“알겠냐고?”

수혁은 더욱 거칠게 발에 힘을 주어 임승수의 얼굴을 밀어붙였다. 그의 머리가 살짝 끄덕거렸다.

“명심해라. 내가 누른 혈도는 의사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죽고 싶다면 내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 알겠냐?”

끄으덕.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임승수에게는 버거웠나 보다.

“다시는 제2의 박수혁, 최용석을 만들지 마라. 알겠냐?”

끄으…덕.

수혁은 드디어 발에서 힘을 풀었다. 그리고 서서히 안전가옥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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