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 뇌천마공
수혁의 몸을 감싸 돌며 흐르던 자색 기운이 머리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내천혈로 모여든 자색 강기는 폭포수처럼 떨어지며 수혁의 몸을 타고 돌다가 단전으로 급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어떤가? 저 정도 경지면 벌써 화경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군. 역시 마도의 천마구령심법은 고금 최고의 속성심법일세.”
장삼병과 대화를 나누던 구일행은 일주천을 하고 있는 수혁에게 다가갔다.
“나의 무공은 철저히 힘을 바탕으로 한다. 하여 강력한 내공은 뇌천마공의 모체다. 노부의 마공은 각법(脚法), 권법(拳法), 수법(手法), 장법(掌法), 지법(指法), 내외공(內外功), 신법(身法)의 칠성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너는 벌써 천마구령심법을 통해 내공을 터득하였으니 앞으로는 모든 무공의 기초인 권법에서 시작해 각법, 수법, 장법, 지법, 외공을 익혀나가게 될 것이다.”
구일행은 잠시 숨을 돌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권법은 주먹과 손을 가지고 공격과 방어를 해나가는 무공이 되겠다. 주먹은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장 오래된 무기이며 가장 기초적인 병기이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기초적이라는 말은 그만큼 간단하지만 역설적으로 또 그만큼 강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역사가 긴 만큼 권법의 종류도 다양하다. 노부의 뇌천마공의 권법은 또다시 직, 곡, 붕, 합, 승, 와권의 여섯 갈래로 나뉜다. 검처럼 찌르듯이 들어가는 직권(直拳), 활처럼 휘어지는 곡권(曲拳), 단순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붕권(硼拳), 손을 올되게 사용하는 합권(合拳), 허공의 적을 치는 승권(乘拳), 마지막으로 손날을 사용하는 와권(臥拳)이 그것이다.”
수혁은 내공을 일주천하며 구일행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들었다.
“직권은 말 그대로 정직해야 한다.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과도 같다. 하여 직권은 여섯 개의 권법 중 가장 빠르며 가장 경쾌하고 가장 정직하다. 검과 비교하자면 찌르기와도 같은 것이다. 직권은 권법의 가장 기초이기에 주먹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직권을 정확하고 바르게, 완벽하게 연마해야 나머지 곡권을 비롯한 권법을 완성할 수 있느니라. 직권의 제일식은 수라분광권(蒐羅分光拳)이다. 수라분광권은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빛은 그 어떤 어둠도 뚫을 수 있다는 데서 착안한 권법이다. 수라분광권은 정직하지만 그만큼 빠르고 그만큼 상대를 정확하게 가격하는 주먹이다.”
파앗.
구일행은 물 흐르는 듯한 설명과 함께 수혁의 앞에서 직접 수라분광권을 시전해 보였다. 경쾌하면서도 빠른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파공성을 일으켰다.
천장단애의 하단인 구협곡으로 달빛이 기울어갈수록 구협폭포 주변으로 기합소리와 함께 파공성이 울려 퍼져나갔다. 그 경쾌한 주먹 내지르는 소리에 구일행의 설법이 섞여 들어 있었다.
“곡권 제일식은 맹합연환권(猛蛤連環拳)이다. 맹합연환권은 두꺼비의 혀가 허공의 파리를 쫓아 활처럼 휘어지며 낚아채는 동작에서 연유된 권법이니라. 수라분광권이 정직하고 빠른 데 주안점을 둔다면 맹합연환권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두꺼비처럼 변화무쌍한 공격과 방어가 그 핵을 이룬다. 능유제강(能柔制强)이라 했으니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함은, 강직한 송목이 비바람에 꺾이지만 유연한 대나무는 폭풍우에도 견뎌내는 이치와도 같은 것이다.”
“흐아암!”
달이 기울도록 권법을 연마 중인 사부와 제자를 보며 장삼병은 손바닥으로 터져 나오는 하품을 누르며 폭포수 옆에 놓인 바위에 등을 붙이고 누웠다.
“붕권 제일식 맹웅이십사로권(猛熊二十四擄拳). 맹웅이십사로권은 먹이를 노리는 곰이 먹잇감을 만났을 때 숭어 한 마리를 잡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연유된 붕권이다. 한 번의 타격으로 들소의 늑골을 부숴버리는 곰은 범 같은 맹수와 싸울 때 무려 두 개의 앞발을 스물네 번까지 휘두르며 가격한다. 맹호이십사로권을 12성까지 익힌다면 태산 같은 바위도 찰나의 순간에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강권이 된다.”
그 외에도 구일행은 수혁에게 나머지 합권, 승권, 와권의 일식을 차례대로 일러줬으니 똑똑한 닭은 지네와 싸울 때 발가락으로 지네의 머리를 누르고 부리로 지네의 몸통을 쪼아버리니 방어와 함께 치명적 공격을 가하는 합권이 되니 그것이 바로 철계투합권(哲鷄投合拳)이었다.
창룡승권(蒼龍昇拳)은 여의주를 물고 날아오르는 용의 모습에서 착안된 승권으로 한 번의 일격으로 허공에 뜬 백무리를 잡아내고도 남음이 있다 하였고, 분혼사권(紛混蛇拳)은 독을 문 뱀의 이빨과도 같은 와권이라 했으니 손날로 능히 태산을 도려내고도 남음이 있는 권술이라 하였다.
이중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철계투합권은 10성까지만 연마해도 세상의 모든 방어병기를 뚫음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공격병기를 막아낼 수 있다 했으니 모순되게 들릴지 모르나 가히 천하무적의 신권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분혼사권의 경우는 극성까지 익힐 경우 손날로 천하의 강검도 막아낼 수 있다 하였으니 이는 신체의 일부를 물체화시키는 마도의 극성 마권의 귀결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몇 번을 천장단애의 계곡 밑으로 달이 기울었다.
장삼병과 구일행의 초로 근처에 있는 폭포수에서는 젊은이의 기합소리가 폭포수의 낙하소리를 압도할 만큼 크게 울려 퍼졌다.
웃통을 벗어던진 청년의 몸에는 땀줄기가 송골송골 맺혀 있다.
항상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구일행은 무공을 전수해줄 때만큼은 비장하고 단호한 표정을 한다.
“노력 없인 결실 없다 하였다. 수혁이 네놈이 용케도 그간 뇌천마공의 권법을 모두 터득했다 하나 권법은 어디까지나 뇌천마공의 일 할도 되지 않는다. 오늘은 너에게 예정대로 뇌천마공의 각법을 사사해주마.”
새로운 무공을 배운다는 기대감에 수혁은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단전에 기를 불어넣었다.
“발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주먹보다 그 파괴력이 두 배에서 세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파괴력이 큰 만큼 주먹과 팔보다는 길이가 길어 동작이 커지게 되고 그만큼 적중률 면에서는 주먹에 뒤진다 할 수 있다. 하나 노부가 창안해낸 뇌천마공의 각법들은 여타의 각법에 비하여 속도와 파괴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게 해준다.”
구일행의 입에서 뇌천마공 각법에 대한 설명이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승룡연타십이각(乘龍連打十二脚). 이 각법은 노부가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열두 다리가 폭포를 치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만든 것으로 제9식까지 변초가 가능하다.”
그랬다. 승룡연타십이각은 구일행이 살아생전 화산논검에서 북해궁주 혈마흔을 일초에 무너뜨린 전설적인 각법으로 제9식까지 극성으로 익힐 경우 일각분지, 십이각파천이라 하여 한 개의 다리면 땅을 가르고 열두 개의 다리면 하늘을 찢어발길 수 있다 할 정도로 강력한 각술이다.
그 외에도 구일행은 자신의 각법들을 차례대로 전수해줬으니 일천사령각(一千蛇鈴脚)과 납천와슬(翋天臥膝)이 그것이었다.
일천사령각은 말 그대로 천 개의 발을 가진 뱀처럼 제6식의 극성까지 연마할 경우 무려 일식에 천개의 발이 적들을 찍어 내는 각술로 천마신공을 12성까지 연마하지 못할 경우 사용할 수 없는 뇌천마공의 최강 무공으로 분류된다.
납천와슬은 원숭이가 나무 위로 뛰어오를 때 무릎을 찍으며 올라가는 모습에서 연유된 슬권으로 자주 사용되진 않지만 그 파괴력은 발의 세 배에서 다섯 배로 구일행이 천축의 포달랍궁을 정복할 때 최초이자 최후로 사용했다고 전해왔다.
“각법 연마가 끝나면 이어서 지법, 장법, 수법, 신법을 전수해줄 테니 하루도 무공 수련에 게으름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수혁 역시 하루하루 늘어가는 아랫배의 기력과 무공에 대한 이해 때문에 그간의 경박스러움을 버리고 무공수련 시에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일관했으니 그를 지켜보던 장삼병도 그런 그의 변화에 놀랄 정도였다.
수혁이 뇌전마공의 권, 각, 지, 장, 수법을 익혔을 즈음 구천에서의 시간도 어느덧 1년이 지나갔다.
민둥산이 대머리였던 수혁의 머리도 어느새 어깨를 덮을 정도로 내려왔고 면도를 하지 않아서인지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했다.
얼핏 보면 원시인이나 유인원처럼 보이는 수혁이 구천의 천장단애를 오르고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절벽의 틈이나 돌출부위를 잡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절벽에 박아가며 오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천마구령심법을 십일성까지 터득한 데다가 천세보혈주의 진기가 체내에 거의 녹아들었고, 하루를 거르지 않고 근육을 강화시켰기에 천장단애의 절벽이 진흙처럼 쉽게 파일 수 있었다.
그 높이와 끝을 분간하기 힘든 천장단애의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 수혁의 몸에서 비 오듯 땀이 쏟아졌다.
천장단애의 상부에서는 상쾌하다 싶을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축축이 젖어 있던 수혁의 몸도 서서히 식어갔다.
수혁은 땀이 식어가자 절벽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절벽을 올라오며 힘을 써서인지 혈류의 움직임이 거칠고 투박했다.
그러나 수혁이 단전으로 구천 대자연의 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혈류의 움직임이 부드러워지며 혈도들이 안정을 되찾아갔다.
단전을 빠져나간 진기가 백회혈을 거쳐 명문혈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아주 멀리서도 또렷이 보일 만큼 수혁의 몸을 감싸 도는 자색 유형의 기가 이글거렸다.
수혁의 몸 주위로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넘실대더니 이내 자줏빛 불꽃으로 변모해갔다.
그리고 그 자색의 기가 점점 구체적인 형상을 이루어갔다.
인간의 몸에서 티 없이 맑은 순자색 화기가 뻗어 나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때문이다.
이윽고 수혁의 머리 위에서 형상화되기 시작하던 자색의 기운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꽃이었다.
티 없이 맑고 영롱한 자색의 연꽃.
한 송이.
두 송이.
그리고 세 송이.
삼화취정(三花聚頂)의 경지였다.
화경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아 수혁의 무공은 현경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세 송이의 꽃은 수혁의 머리 위에서 구름처럼 맴돌다가 일순 그의 육신을 뒤덮는가 싶더니 몸속으로 흡수되어갔다.
수혁은 지그시 눈을 떴다.
그의 두 눈에서 두 줄기의 강렬한 빛이 뻗어 나왔다.
현경의 경지에 접어들기 시작한 자가 내뿜는 안광(眼光).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성을 지르고도 남게 하였다.
수혁은 자신의 몸이 솜털, 아니 먼지보다 더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천마구령심법을 11성까지 터득했다. 이제 극성까지는 채 일주일도 남지 않은 기분이다.’
수혁은 몸을 날려 천장단애의 절벽을 날듯이 내려갔다.
낙하 속도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날 듯싶으면 어김없이 천마구령심법을 운용해 두 손으로 내공을 끌어 모아 절벽에 쑤셔 넣어 낙하 속도를 떨어뜨리는 식으로 천장단애를 내려가자 불과 5분이 안 되어 구협곡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짝짝짝.
“녀석, 대단하구나. 드디어 삼화취정의 경지에 이른 건가?”
“그렇군. 놈의 단전이 한결 묵직해졌어. 어제의 수혁이가 아니야.”
수혁은 서서히 구일행과 장삼병을 향해 걸어오더니 둘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껄껄껄, 선현께서 늘그막에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 만한 즐거움이 없다 하셨으니 그 말의 참뜻을 오늘에서야 알겠구나.”
“허허허, 그러게 말이시.”
수혁은 깎듯이 그들의 말을 받았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놈, 지나친 겸손은 오만이라 했으니.”
“좋다. 어디 그럼 네가 현경의 초입 경지에 이르렀다 하니 노부의 일식을 받아보겠느냐?”
“후후, 나차태자 사부님, 이제 연세도 있으신데 건강을 해치실까 염려되옵니다. 음무하하핫!”
수혁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실컷 웃었다.
“놈,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느니. 노부는 이 막대기 하나로 너와 싸우겠느니라.”
장삼병은 바닥에 버려진 가느다란 막가지를 하나 주워들었다.
“좋습니다. 나중에 봐달라고 하지나 마십시오. 자, 그럼 먼저 갑니다.”
타하압.
수혁이 왼발을 들어 거세게 지축을 밟으니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흙먼지 속으로 수혁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법이구나.”
“뇌천마공, 제일식 수라분광권(蒐羅分光拳)”
수라분광권.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빛은 그 어떤 어둠도 뚫을 수 있다 하였으니 수혁의 직권이 장삼병의 몸을 부숴버릴 기세로 파고 들어갔다.
‘실로 천마구령심법과 뇌천마공은 명불허전이로구나. 직권의 위력이 이 정도라니. 이 정도의 파괴력이면 능히 태산도 부수고 남음이 있겠구나. 허나 력(力)은 있으나 기(技)가 없고 기(氣)는 있으나 예(例)가 없는 것이 안타깝도다.’
“역시 젊음이 좋구나. 일식 하나하나에 힘이 넘쳐흐르는구나. 허나 아직은 노련미가 부족하도다.”
장삼병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막대기 하나로 수혁의 직권을 가벼이 흘려보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건 말도 안 돼. 지금 상황이라면 이미 장삼병 어르신은 절벽 끝까지 날아가 허리를 두드리고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이놈아,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게냐?”
“자, 노부의 공격을 받아봐라. 삼재검법 천어쾌단식(天於快斷式).”
능구렁이처럼 수혁의 공격을 빗껴내던 장삼병이 이제는 먹이를 향해 잽싸게 달려오는 뱀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수혁을 찔러왔다.
‘빠르다. 어찌 저런 노인이 이렇게 빠른 쾌검을 구사한단 말인가.’
수혁은 뒤로 물러서며 뇌천마공의 권법중 합권의 초식을 펼쳤다.
“뇌천마공 합권 제일식 철계투합권!”
닭이 지네를 공격할 때 발가락으로는 지네의 몸통을 누르며 부리로는 지네의 이마를 쪼는 모습을 형상화해 놓은 합권이니 능히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권법이 철계투합권이다.
“오호, 응용능력이 제법이구나. 허나 이것은 어떨까?”
수혁은 양손을 이용해 왼손으로는 장삼병의 막대기를 막아내고 오른손으로는 장삼병의 하복부를 가격하려 하였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눈앞에서 장삼병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저런 멍청한 놈.”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구일행이 마시고 있던 찻잔을 집어 던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장삼병의 손에 들린 막대기가 수혁의 턱 아래 놓여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어때, 패배를 인정하겠느냐? 이 막가지가 진검이었다면 너는 이미 머리와 몸통이 따로 놀고 있었을 것이다.”
수혁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자 파공성과 함께 돌멩이가 수혁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팅!
“이런, 얼마나 몸을 단련시켰으면 이제는 대가리가 완전 돌대가리가 됐구나. ‘퍽’ 소리가 아니리 ‘팅’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끌끌!”
구일행은 팔자걸음으로 엉기적엉기적 걸어 나왔다.
‘나차태자 저놈이 드디어 무공 수련에 끼어드는 것인가? 허나 맥은 아주 제대로 짚었구나. 그래, 지금쯤 놈에게 신법을 가르쳐줘야 할 때가 됐다고 나도 생각하고 있었던 터야.’
“수혁아, 이미 천마구령심법을 통해 화경의 경지를 넘어선 네가 어찌하여 이토록 쉽게 이 노부에게 무너졌다고 생각하느냐?”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움직임 때문인 것 같습니다. 태자 사부님의 신형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 장삼병과 구일행의 눈이 달걀처럼 동그래진다.
‘이놈 봐라. 이놈 이거 많이 발전했구나.’
‘허어,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안다더니 고스톱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이놈 맹물은 아니로구나.’
장삼병과 구일행은 한결 같았다.
“그렇다. 분명 수혁이 네놈의 내공은 나와 마계진마와 별반 차이가 없다.”
“거 무슨 서운한 소리야? 어떻게 생사경을 넘어선 나와 저놈의 내공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말인가?
장삼병의 말 한마디에 구일행은 버럭 성질을 낸다.
“껄껄, 알았네, 알았어. 어찌 됐든 수혁이 네가 괄목상대할 만한 성장을 거둔 건 사실이다. 허나 화경의 경지를 넘어선 네가 나의 조악한 막대기 하나를 막지 못하는 것은 바로 신법과 보법 때문이다. 격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수혁은 아무런 주저 없이 대답한다.
“힘입니다.”
“흠… 그것은 50점도 안 되는 대답이다.”
“무슨 소린가? 나차태자. 힘이라는 대답은 80점은 되는 대답일세.”
구일행이 퉁을 치고 나오자 장삼병이 지긋한 눈으로 구일행을 바라보더니 다시금 수혁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물론 어른과 아이의 싸움처럼 힘에서 월등한 차이를 보인다면야 힘이 전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내공 증진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인간은 신처럼 영원히 살 수 없기에 살아생전 인간이 쌓을 수 있는 내공은 대동소이하게 된다는 말이다. 필부(匹夫)라면 1갑자의 내공을 쌓는 데만도 60년이 걸린다. 허나 거리를 파악한다면 답은 달라진다. 일찍이 소림의 달마대사가 열두 수제자와의 대결에서 장포 하나 상하지 않고 제자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에게 거리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가감에 있어서는 밀물과 같고 물러남에 있어서는 썰물과 같다면 그 어떤 공격이 자신을 해할 수 있겠느냐?”
수혁은 알쏭달쏭한 장삼병의 말에 귀를 쫑긋 새운다.
“상대방과의 거리를 장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신법과 보법이다. 아무리 나약한 무공이라도 거리를 장악한다면 5할은 먹고 들어가게 된다.”
“질문 있습니다, 사부님.”
장삼병은 손을 번쩍 치켜 든 수혁을 미소 가득한 얼굴로 쳐다본다.
“하오면 보법과 신법이 그렇게 중요한데 두 사부님께서는 어찌하여 마지막에 가서야 보법과 신법을 가르쳐주시는 것이옵니까?”
“놈, 지금까지 한 질문 중에 가장 수준 높은 질문이구나.”
구일행이 탁배기를 마시고 난 사람처럼 껄껄거렸다.
“무공 증진에 있어 보법은 양날의 칼과 같다. 달마대사는 자신의 열두 제자들에게 그가 일생에 거쳐 완성한 불영십중보를 가장 마지막에서야 가르쳤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젠장, 그걸 알면 당신께 물어봤겠수?’
“모르겠습니다.”
“보법은 양날의 칼이라는 말은 보법을 익히면 무공의 파괴력이 갑절이 될 수도 있으나 무공 수련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보법이란 동(動)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무공의 위력을 결정지을 수 있는 열쇠다. 움직임이 빨라지고 움직임이 부드러워지면 무공의 위력은 배가된다. 허나 보법과 신법을 익히면 이미 무공의 5할을 터득하는 것이 되기에 나머지 무공 수련에 소홀해지기 십상이다. 움직임이 좋아지면 무공이 강해지는 것 같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법과 신법의 도움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속내를 보면 무공 증진은 제자리걸음에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불행한 결과를 낳지 않기 위해 진마나 나는 내공과 무공이 쌓였을 때에야 보법을 가르치는 것이니라.”
수혁은 장삼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천마구령심법에 바탕을 둔 천마지보(天魔地步)를 전수하겠노라. 태자의 말처럼 보법과 신법을 익힌다면 무공을 절반은 터득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 내 가르침을 한 귀도 빠뜨리지 말고 새겨듣도록 하여라.”
구일행이 유례없이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하자 수혁은 입시를 앞둔 수험생처럼 온 신경을 사부의 귀에 쏟았다.
“마교의 제일지존이신 천마께서는 천마지보를 창안하시면서 가장 먼저 보시어동(步始於動)이라 하였다. 걸음이란 모든 움직임의 시작이자 기초라는 말이다.”
천마지보(天魔地步). 소림의 대나이신법이나 금강부동신법, 무당파의 유유신법과 견주는 천하제일의 신법의 시작을 알리는 보시어동(步始於動)을 시작으로 구일행의 천마지보에 대한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천마지보는 사방위를 축으로 발이 나아갈 길을 24갈래로 쪼개 놓았다. 그 스물 네 개의 방위를 밟는 데 있어서의 움직임은 나비의 몸짓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현란하다.
마교지존 천마는 천마지보를 극성까지 완성하면 운중신보(雲中身步)라 하여 구름 위를 걸을 수 있다 했으며 꽃잎을 떨어뜨리지 않고 꽃 위에 설 수도 있다 했다.
전방속출(前房速出).
후방완퇴(後房緩退).
동방칠칠(東方七七).
좌우이사(左右二四).
구급칠완(九急七緩)
구일행은 천마지보의 구결을 읊조리며 이십사방위로 발을 움직였는데 그 동작이 어찌나 신속하고 기민하던지 수혁은 그의 발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것 같더니 순간에 뒤로 완만하게 물러났으며 동쪽으로 몇 걸음을 옮기는가 싶으면 또다시 서쪽으로 곱절 나아가 있고, 왼쪽과 오른쪽을 마치 게처럼 왔다 갔다 하고 아홉 걸음이 빠르면 일곱 걸음은 완만했다.
수혁은 구일행의 입에서 나오는 천마지보의 구결을 반복해서 따라하며 그의 몸놀림을 흉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세월은 구일행이 펼치는 천마신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어김없이 천장단애의 심곡을 오르내리는 신형이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깨를 덮던 금발은 이미 허리춤까지 버드나무처럼 늘어져 있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온몸의 근육은 천장단애의 절벽보다 더 탄탄해 보였다.
천마지보를 익혀 이제는 양 계곡 사이를 비상하듯 건너다니는 사내.
그는 바로 수혁이었다.
처음 이 절벽을 오르내릴 때만 해도 중턱까지 하루가 걸려도 오르지 못했거늘 이제는 상층의 꼭대기까지 오르는 데 일다경도 걸리지 않았다.
천장단애의 꼭대기에 이르러 운기조식을 마친 수혁은 하강하는 매처럼 절벽을 뛰어내렸다.
양 계곡 사이를 날듯이 뛰어내리던 그의 눈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쥐새끼들이 숨어 있구나… 도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수혁은 빠른 속도로 하강하며 절벽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눈에서 피어오르는 안광이 절벽을 뚫어버릴 기세였다.
이윽고 수혁의 양 주먹이 돌처럼 굳어져갔다.
슈우웃.
수라분광권(蒐羅分光拳).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빛은 어떤 어둠도 뚫는다는 뇌천마공 직권 제일식이 펼쳐졌다.
콰콰쾅!
그리고 수혁의 손이 무쇠처럼 절벽을 파고들어갔다.
수혁의 주먹이 번개처럼 절벽을 뚫고 들어갔다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암절벽 속에서 두 개의 신형이 드러났다.
“끄으윽… 가… 강하구나…….”
누르스름한 절벽과 같은 색을 띠던 두 신형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고 그 두 신형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들의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들의 가슴에는 팔뚝만 한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
잿빛 로브를 입고 사람, 키만 한 낫을 든 구천의 파수꾼들.
그들은 두 명의 동료가 수혁의 적수공권 한 방에 즉사하자 안개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두 노인네가 놈을 키워버렸구나.”
절벽을 등지고 서 있는 수혁을 향해 다섯 개의 낫이 사선으로 난도질해 들어왔다.
수혁의 몸이 동쪽으로 여덟 번 미끄러졌다.
팔괘보(八卦步).
구일행은 천마지보의 팔괘보면 십이 방위의 공격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세 개의 낫은 표적을 놓치고 허공에서 방황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수혁의 몸이 둥근 보름달처럼 휘어지며 양발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승룡연타십이각(乘龍連打十二脚).
그 순간 수혁의 발은 승천하는 용이 자신의 발로 폭포를 열두 번 차고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도 찢어발길 수 있다고 하는 그 위력에 수혁을 향해 낫을 들었던 다섯 사내의 몸은 종잇장처럼 찢어발겨졌다.
“이… 이놈… 도대체 무엇을 연마했기에 이렇게 강해진 거냐?”
파수꾼들의 눈에 당혹감이 짙게 배어났다. 그러나 구천 지대의 공간과 시간을 관리하는 그들이 예서 물러날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왜 나를 노리는 거냐?”
두 번에 걸친 거친 공격을 펼치고도 수혁의 호흡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평온해 보였다.
“네놈은 전능하신 제우바 님의 인과율에 벗어난 자. 신의 뜻대로 제우바 님의 섭리대로 그만 저승행 배에 올라야 한다.”
그들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수혁을 싸고 들어왔다.
파콰콰콰!
실로 빠져나갈 곳이 없어 보이는 매서운 협공.
“놈, 죽어라!”
파수꾼들의 낫이 수혁의 몸에 틀어박혔다.
콰직.
그러나 낫의 날이 살점에 박히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둔탁하다. 낫은 맞은편 절벽에 큼지막한 구멍을 냈다. 그들이 찌른 것은 수혁의 환영.
천마만변무영(天魔萬變無影).
수혁의 몸은 이미 절벽의 상단을 밟고 미동도 없이 서 있다.
‘보기에는 무식하게 생긴 낫이 파괴력도 무시무시하구나.’
수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느리다, 느려. 그렇게 느려서 파리 한 마리라도 잡겠나?”
수혁의 말 한마디가 파수꾼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서 놈을 죽여라.”
쐐애애!
그리고 또다시 수십 개의 신형이 수혁을 향해 솟구쳐 올라갔다.
수혁의 눈이 번뜩였다. 마치 십 수 년을 굶주린 한 마리 독사 같은 살광이었다.
승룡연타십이각 제이식 비연각(匕硏脚).
수혁의 발이 날을 세운 도끼처럼 파고드는 사내들을 찍어 들어갔다.
“미친놈, 이 많은 수를 상대로 정면대결이라니…….”
수혁을 비웃던 파수꾼들의 노란 안광이 횡으로 가늘게 찢어졌다.
“흐읍!”
뿌가각!
선두의 파수꾼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수혁의 돌덩어리 같은 발이 파수꾼의 면상에 틀어박혔다. 도끼가 두피를 뚫고 뇌수에 박힌 듯한 느낌. 골이 빠개진다는 표현은 지금에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발끝까지 전해 내려오는 통증으로 파수꾼은 눈물 한 방울 찔끔 흘릴 틈도 없이 즉사했다.
“죽엇!”
허공을 수놓는 수십 개의 낫의 향연.
“재밌군.”
수혁의 입초리가 눈 쪽으로 올라가고 그의 발끝이 절벽의 한 귀퉁이를 밟는 것 같더니 어느새 파수꾼의 면전에 이르러 있었다.
추앗!
수혁의 양 주먹이 마치 지네의 몸통을 밟고 선 채로 지네의 머리를 쪼아대는 닭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철계투합권(哲鷄投合拳).
10성까지만 연마해도 세상의 모든 방어병기를 뚫음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공격병기를 막아낼 수 있다 하였다.
닭의 부리 같은 공격 하나에 정확히 파수꾼 하나의 심장이 꿰뚫렸다.
지독한 혈향이 심곡에 드리워졌다. 순식간에 네 개의 파수꾼 신형이 천장단애로 끝없이 추락했다. 그들의 신형에서는 한결같이 검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푸카캉!
수혁을 에워싸고 들어오는 낫들이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그 섬뜩한 낫의 날들은 두 동강이 난 채 흩어졌다.
철계투합공의 위력이 발하는 순간이다.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뇌천마공의 상승 합공.
수혁의 무쇠 같은 양팔은 파수꾼들의 낫을 한쪽으로 비켜내고 그도 안 되면 아예 부러뜨려나갔다.
순식간에 파수꾼들의 피해가 속출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글라우베 님의 말대로라면 늙은이 두 명과 촌놈 하나가 있을 거랬는데…….”
“너무 강하다. 이놈이 사용하는 공격과 방어는 생전 처음 보는 거야… 마법도 아니고… 도대체 뭐지… 무슨 체술 같은데…….”
순식간에 20여 명의 파수꾼들이 쓰러지자 수혁을 만만하게 보던 그들이 보초병처럼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장삼병과 구일행에게 무참하게 무너졌던 글라우베와 프란시스코는 구천 내에서 발생하는 몇몇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처리한 후 곧바로 천장단애의 심곡을 노려왔다.
장삼병과 구일행을 구천의 신선으로 인정해주며 배려했던 과거와는 다른 과감하고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전 장삼병과 구일행은 단지 구천에 사는 돌연변이 같은 존재였다면 이제는 자신들의 성까지 침범하고 다른 망자들의 혼을 거두는 등의 행위로 구천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들로 변해간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장삼병과 구일행이 거둔 무지렁이 한 놈이 이렇게 강하게 변모해 있을 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디서 어쭙잖은 체술 하나 배워온 모양인데 너는 내가 상대해주마.”
잿빛 로브를 쓰고 기다란 낫을 든 한 파수꾼이 그림자처럼 수혁의 등 뒤로 나타났다.
칼브론.
보직이 없는 파수꾼들의 치프(Chief, 무림의 당주 급) 자리에 있는 자.
슈가각.
칼브론의 손에 들려 있던 낫이 수혁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다른 파수꾼들의 낫부림과는 확실히 속도와 정교함에서 차이가 나는 공격. 그러나 수혁의 몸은 어느새 우측의 절벽으로 사라지고 없었고 칼브론의 낫은 공기를 자를 뿐이었다.
칼브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의 눈에는 분명 수혁이 한 걸음으로 단방일경의 살수를 피한 것처럼 보였다.
겉보기엔 단순하고 나이브한 공격 같아 보였으나 칼브론은 그 안에 뼈를 발라낼 마나를 주입해 넣었었다. 한 번의 공격으로 지금껏 구천의 이물(異物)들의 뼈와 살을 발라냈던 살초가 어이없어 무너졌다.
호흡을 가다듬은 칼브론의 낫부림이 또다시 펼쳐진다.
좀 전의 공격이 섣불렀다면 이번의 공격에는 최선을 다한 일격필살의 초식. 사자가 토끼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듯이 칼브론 역시 이번 한 번의 공격에 모든 것을 걸었다.
스스스.
어찌 된 영문인가. 이번에도 수혁의 몸은 미꾸라지처럼 심곡을 훑고 돌았다.
미칠 노릇이다. 모든 것을 걸었을 때 실패한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
두 번의 공격을 양보한 것인가?
내리 연속 몸을 피하던 수혁의 주먹이 칼브론의 면전에 닿아 있었다.
빠아악!
골이 울리고 눈알이 튀어나갈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지만 칼브론은 어금니에 힘을 주고 견뎌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인내가 자신의 명줄을 재촉할 줄이야.
부러지고 갈라진 두개골 때문에 어금니에 힘을 주자 머리뼈의 균열이 가속화됐다. 이윽고 골수에 피가 찬 칼브론의 머리가 풍선처럼 터져버렸다.
“안 되겠다. 더 이상은 피해만 가중될 뿐이다. 씨클 서클(Sickle circle)로 놈을 끌어 들여라.”
파수꾼은 구천을 떠도는 억울한 원혼들 중 글라우베와 프란시스코에 의해 발탁된 구제된 영혼들이다. 그들은 총 36계로 된 생사극관(生死克關)을 거쳐 파수꾼으로 거듭난 자들이다. 하나같이 일당백이라 자부해오던 그들의 자존심이 철저히 뭉개졌다.
그들로 하여금 낫 진법(씨클 서클)을 펼치게 한 것은 수혁이 처음이었다.
한마디로 이번 일격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뜻이다.
수혁은 자신을 둘러싸고 오랏줄처럼 포위망을 좁혀 오는 40여 명의 파수꾼들을 굽어보았다. 지금까지 십 수 명의 파수꾼들을 쓰러뜨려 호흡이 거칠어질 만도 하지만 수혁의 숨소리는 밤바다처럼 고요했다.
슈슈슈.
맨 우측의 파수꾼의 낫이 수혁의 왼 목을 파고들었다.
낫날보다는 심곡의 대기가 밀려들어 왔는데 마나의 폭풍이었다.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 그들이 몸에 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우측 파수꾼의 낫부림을 신호로 40여 명의 파수꾼들이 들고 있는 낫들이 일제히 기를 발산했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낫 폭풍이 굉음과 함께 몰려왔다.
“그런 공격으로는 내 터럭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 뇌천마공 각권 일천사령각(一千蛇鈴脚).”
순간 수혁의 발이 수십 개, 아니 수백 개로 보였다. 천 개의 발을 가진 뱀이 천 개의 적들을 찍어낸다는 뇌천마공 각권의 최강 마공. 그러나 천마구령심법을 12성까지 연마했을 경우에라야 구현할 수 있는 절학.
“거, 거짓말.”
“네놈의 정체는 뭐냐? 이 정도 무위면 글라우베 님과 프란시스코… 아니 어쩌면 공간과 시간의 지배자 카이버 님을 능가할지도…….”
수혁의 몸이 허공에서 풍차처럼 급회전했다. 그리고 하나하나가 천근처럼 강단진 발들이 그를 포위한 수십 개의 낫들을 뚫고 들어가 파수꾼들의 급소를 파헤쳤다.
파카카캉!
“크아악!”
심곡에는 수십 개의 비명이 낫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오페라처럼 울려 퍼졌다.
“후우!”
이제 천마구령심법을 11성까지 터득한 수혁에게 일천사령각은 무리였던가. 그의 호흡이 잠시 어지러워졌다.
“쳇, 내공이 부족해서인가… 겨우 307개였어. 구일행 이 노인네가 나에게 뻥친 거 아냐? 정말 일천사령각을 마스터하면 천 개의 각법이 가능한 건가? 이미 나는 11성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하나의 차이가 이렇게 크단 말이야? 아무래도 그 노망든 할아버지에게 속은 것 같다는 생각이…….”
수혁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파수꾼들의 신형을 감상했다.
그리고 그의 입이 낮게 열렸다.
“이제 그만 모습을 드러내시지. 떨거지들은 다 떨어졌으니.”
“그하하하하!”
무겁고 육중한 소성(笑聲)이 심곡 안으로 메아리친다.
파츠츠츠.
그리고 두 개의 신형이 천장단애의 절벽을 투명인간처럼 뚫고 나타났다.
공간의 파수꾼 글라우베, 시간의 파수꾼 프란시스코. 그들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대단하구나.”
“그하핫, 그 노인네들에게 배운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