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8 전란은 운명을 바꾸고 (29/51)

chapter 28 전란은 운명을 바꾸고

마부의 정성이 닿았는지 풀밭을 거니는 말의 갈기가 한 올, 한 올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완장에는 금칠이 된 세인트 크로스가 양각되어 있었고 등자에는 보석을 박아둔 것이 누가 봐도 귀족의 준마였다.

“일렉트라, 다 왔다. 어때? 멋지지?”

“…….”

‘휴, 도대체가 웃질 않는구나. 웃기만 한다면 더없이 섹시할 텐데. 오늘은 기필코 네년을 정복하고 말겠어.’

말에 타고 있는 사내는 히에나 마을의 영주 홉킨스 자작의 아들 드와이트 조르지였다. 드와이트의 종자이자 홉킨스가의 시종인 시케르토는 드와이트가 탄 말 뒤에서 일렉트라가 탄 말의 고삐를 쥔 채 주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일렉트라. 갈색 머릿결은 그 색이 강해 거의 흙빛을 띠고 있었으며 그 끝자락은 허리까지 늘어 있었다.

홉킨스가의 제단사들이 손수 빚어낸 실크로 된 블라우스 너머로 하얀 속살이 마치 솜구름처럼 티끌 하나 없이 희다. 이제는 제법 소녀티를 벗었는지 가슴은 적당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으며 말에 타고 있어서인지 잘록한 허리가 유난히 강조되어 보였다.

오퍼도버에게 죽을 뻔한 이후 몇 년이 지났는지 어느덧 그녀의 나이 16세가 되어 있었고 잘록한 허리를 떠받친 발달된 골반은 이제 더 이상 일렉트라가 소녀가 아님을 나타내고 있는 듯했다.

드와이트의 소원대로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만 그려진다면 미의 여신 히레나도 질투하고 나을 정도로 아름다운, 아니 아름답다는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는 일렉트라였다.

일렉트라의 친오빠나 다름없는 딜란도 가끔 히레나 여신과 일렉트라를 비교하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너는 히에나 마을에서 썩을 외모가 아니야’라고 하곤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녀의 표정은 오뚝한 콧날만큼이나 고집스럽게 무표정했다.

“일렉트라, 오라버니가 너를 위해 친히 망도른 숲까지 모시고 왔는데 좀 웃을 수 없겠니?”

망도른 숲. 홉킨스의 영지 중 가장 산세가 깊고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로 불리는 곳이다. 히나 왕국의 시인들은 홉킨스 영지의 망도른 숲을 엘프들의 나라 우드스탁의 글렌부르크 산과 비교하곤 하였는데 그만큼 망도른 숲의 경치는 장관이었다.

“드와이트 공자님, 정말 멋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오두막 하나 지어놓고 살면 소원이 없겠는뎁쇼.”

“하하하, 그런가? 어때, 일렉트라. 시케르토 말대로 이곳에 오두막 하나 지어놓고 사는 것이? 내 너만 허락해준다면 자작의 지위건 영지건 다 버리고 이곳에서 초로 한 칸 지어놓고 살 의향이 있다만. 하하하!”

진심이 없어서일까? 드와이트의 웃음에는 과장이 섞여 있었다.

“드와이트 공자님, 지금은 전시지 않습니까? 철없는 소리는 이제 그만 하시죠.”

오래간만에 입을 연 일렉트라의 말은 표정만큼이나 싸늘했다.

“하하하, 일렉트라. 네가 대륙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걸.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다 했더니… 그래서였구나. 하지만 걱정 마라. 머지않아 파이오니아 연합군이 저 남방 마턴즈 베크의 야만인들인 호라리언들을 깡그리 토벌하고 개선 행진곡과 함께 돌아올 테니. 물론 그 선봉에는 나의 아버님이자 히나 왕국의 백작이신 홉킨스 조르지께서 서 계실 테지.”

그랬다. 마턴즈 베크의 야만족들인 호라리언들이 왓슨리버를 타고 라마바담을 또다시 침공하자 라마바담의 기사들은 정예군들을 모아 트리드산의 마지막 지류에 위치해 있는 라마바담의 남작 그레브 령까지 병력을 파견했다.

하지만 이번 침공은 이전에 있었던 수차례 침공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컸기에 라마바담의 토벌군은 싸움다운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그레브 령을 내주고 만다.

그 과정에서 라마바담의 남작이었던 그레브를 비롯해 숱한 귀족들과 기사들이 목숨을 잃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물론 그 전사자 속에는 라마바담의 토벌군 대장이었던 후작 보로베이도 끼어 있었다.

쉽게 끝날 거라 생각했던 호라리언들의 침략이 몇 년째 계속되자 라마바담 왕국의 소심한 왕 마우리시오 왕은 보로베이 후작의 죽음과 토벌군의 무참한 패배에 겁을 먹고 파이오니아 대륙의 대제국인 미트라카의 황제 헬무트 마이어스에게 지원군을 요청한다.

대륙의 황제 헬무트 마이어스는 야만족의 침략이 전선의 확대에 있지 않고 단순히 남방의 열악한 지형에 기인한 식량과 물자의 확보에 있는 약탈이라고 규정하고 각 왕국과 공국의 지원군을 모집하기를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헬무트 황제의 둘째 아들인 게오르그 마이어스는 황제에게 남방의 야만족의 침공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주청을 수차례에 걸쳐 올린다.

헬무트 황제에게는 두 명의 황태자가 있었으니 큰 아들은 테오도오 마이어스였고, 둘째 아들은 게오르그 마이어스였다.

“아바마마, 남방의 야만족들이 침략해 온 것이 이번이 82번째라 하옵니다. 저들의 계속되는 침략을 좌시한다면 일곱 왕국과 다섯 공국들 앞에 대국으로서의 위신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이미 라마바담의 인접국인 치오키아 왕국과 팜파스 왕국에서는 앞장서서 지원군을 모집해야 할 제국이 움직이지 않는다며 불평을 터뜨리고 있다고 합니다. 차제에 대륙의 큰 아버지인 미트라카 제국이 앞장서서 라마바담을 침략해온 야만족들을 토벌함에 그치지 않고 대규모 원정군을 결성하여 남쪽의 대륙인 마턴즈베크를 정벌하여 사후에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함이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당시 황실의 세력 분포도는 여름철 불나방을 노리는 거미줄만큼이나 복잡했다. 가장 큰 세력은 역시나 큰 아들 테오도어의 직계들이었고 두 번째 세력이 차남 게오르그의 인맥들이었다.

또 하나의 세력은 황녀이자 헬무트 황제의 유일한 딸인 비오템 마이어스 계열의 가신들이었고 가시권에 들지는 않았으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분포를 가진 것이 황후 다이안 론 뮐러계였다.

황태자 테오도어의 세력이 양적인 면에서 나머지 넷을 압도하고 있었으나 군부의 실세들을 장악하고 있는 차남 게오르그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중 제국의 기사 양성소 나이츠 아카데미의 교육원장인 하라고네스가 게오르그 마이어스에게 줄을 선 자였으니 차남의 주청에 이어 그의 상소가 헬무트 마이어스 황제를 꿈틀거리게 했다.

“종족전쟁 이래 100여 년간 대륙에는 평화가 지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혹자들은 지금의 상황을 위대한 키나비가 대륙에 인간들의 왕국을 세운 이래 최고의 태평성태라 칭송한다 하옵니다. 하지만 동쪽으로는 이단의 제국 이스트리가 똬리를 틀고 있고 북쪽의 헬벤타리아 대륙에는 여전히 종족전쟁에서 추방당한 몬스터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선현들이 이르기를 편안할 때 위험을 준비하지 않으면 화가 미쳤을 때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제국을 비롯해 일곱 왕국과 다섯 공국의 군사들은 별도의 훈련 이외에는 병장기를 사용하지 않아 창끝이 무뎌지고 방패가 녹슬고 있다 하옵니다.”

그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영웅은 두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다고 했듯이 언젠가는 파이오니아 대륙에서 이단인의 나라 이스트리를 몰아내야 하기에 지금부터라도 무뎌진 창끝을 갈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를 놓치면 후회가 남는 법입니다. 황제폐하께서 군령장을 발부하시어 왕국과 공국들을 규합해 원정군을 파견하시어 마턴즈 베크의 야만인들을 복속하신다면 그 덕이 북방의 베리사드까지 미칠 것이며 그 공로가 널리 후대까지 회자될 것이옵니다.”

하라고네스의 상소 후 대제국 미트라카의 황제 헬무트 마이어스는 군령장을 발부해 각 왕국과 공국에게 마턴즈 베크 정벌군을 결성할 것을 선포하고 영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황제의 칙령에 따라 작위를 올려주고 봉토를 늘려주니 때는 키나비력 866년, 일렉트라의 나이 열다섯이었을 때였다.

히에나 마을의 영주 홉킨스 역시 그날의 칙령으로 자작에서 백작으로 작위가 올라갔으며 평소 왕과 공왕들에게 뇌물을 주지 못하는 성격이라 히나 왕국의 눈에서 멀어져 이번 정벌군에 제일 먼저 뽑히는 영광(?)을 안고 말았다.

“시케르토, 저기 월망꽃을 좀 꺾어 오거라.”

“예, 조금만 기다리십쇼.”

키가 작은 드와이트의 종자 시케르토는 신난 어린아이처럼 송림 아래 피어 있는 월망(月望)꽃을 꺾으러 달려가더니 이내 월망꽃 송이를 한 아름 꺾어 달려왔다.

“그 꽃을 일렉트라에게 주거라.”

“키키키, 일렉트라 님. 드와이트 공자님께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꽃이 일렉트라 님만큼이나 아름답군요. 키키키.”

키가 작은 데다가 허리까지 구부정한 시케르토는 남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웃어도 이상하게 웃음소리가 괴기스럽게 들렸다.

“이놈, 어찌 그깟 꽃을 일렉트라에게 비교한단 말이냐. 일렉트라는 미의 여신인 히레나를 능가하는 미모를 가지지 않았더냐.”

“키키키, 그렇고 말굽쇼.”

일렉트라는 자신과 히레나 여신을 비교하는 드와이트의 말에 또다시 딜란을 떠올렸다.

‘딜란 오빠, 보고 싶어… 보고 싶단 말이야.’

그런 일렉트라의 속도 모르고 드와이트는 잘난 척하며 월망꽃에 대한 자신의 상식을 늘어놓았다.

“월망꽃, 달을 소망한다는 꽃의 이름답게 낮에는 봉오리를 오므리고 있다가 달이 떠오르는 밤이 되면 양 봉오리를 활짝 열며 달의 정령을 빨아들인다는 꽃.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서 미트라카 제국의 황후인 다이안 님께도 진상되는 꽃이지.”

월망꽃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던 드와이트는 일렉트라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 쪽을 쳐다보았다.

‘저. 저런, 또 그놈 생각을 하고 있구나. 틀림없어, 저 표정. 딜란인가 하는 그 천한 놈을 생각할 때마다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곤 했어. 정말이지 미치겠구나…….’

“험, 험.”

드와이트는 멍한 표정의 일렉트라를 깨우기라도 하려는 듯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해댔다.

“또 그놈 생각 중이냐?”

“그놈이 아니라 딜란 오빠예요.”

“그래, 안다. 그 잘난 딜란인가 뭔가 하는 놈은 이미 죽었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더냐. 이제 그만 잊어버려라! 성도 없는 천한 놈보다야 가문, 인물, 능력, 모든 면에서 내가 낫지 않느냐? 도대체 왜 나에게는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야?”

드와이트는 아무런 보잘 것도 없는, 얼굴이 조금 잘생긴 것은 인정한다 치더라도, 그런 평민 놈 때문에 자신이 화를 내고 그딴 천한 놈에게 질투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화가 났다.

그러나 순간 드와이트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버럭 화를 내버리자 무표정하던 일렉트라의 얼굴에 수심과 함께 두려움이 서렸기 때문이다.

“이… 일렉트라… 그… 그게 아니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그치만 내 마음을 왜 몰라주는 거냐? 제발 내 진심을 파악해다오. 딜란, 친오빠보다 더 잘해줬다는 딜란, 그 녀석은 너의 어미와 그 녀석의 아버지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용병으로 팔려갔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도 알다시피 용병이란, 그것도 급이 낮은 딜란 같은 용병들의 목숨이란 파리 목숨만도 못한 것이다. 각종 전투에서 화살받이나 방패병으로 소모품처럼 사라지는 것 그것이 용병의 인생이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딜란 오빠는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나를 지켜준다고 했단 말이야!”

일렉트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암고양이만큼이나 사나웠다.

한껏 괴성을 지르던 그녀의 눈에서 이내 눈물이 쏟아진다.

일렉트라의 양어머니 수잔나와 딜란의 아버지 브루스가 일렉트라의 방화로 죽고 공동묘지에서 휴머노이드 몬스터들이 습격해 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드와이트는 시종인 시케르토에게 지시해 딜란을 용병단에 팔아넘겼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한낱 평민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케르토는 용병 알선업자에게 돈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금화를 듬뿍 쥐어주며 딜란을 용병단에 팔아넘기게 했고, 촌장의 집에서 거주하던 일렉트라는 졸지에 생고아가 되었다.

그 후 자연스럽게 촌장을 회유하고 협박한 드와이트는 일렉트라를 자신의 성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 후로 수십 번, 아니 어쩌면 수백 번 드와이트는 일렉트라를 겁탈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 앞에 서면 일렉트라를 범하려던 만용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드와이트는 그런 감정이 기분 탓이라 생각하며 ‘가장 맛있는 음식을 가장 늦게 먹는다’라는 불고의 진리를 갖다 붙이며 스스로 위안해왔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일렉트라를 갖고 말겠다고 굳은 결의를 하고 애써 어머님의 재가를 받아 이곳 망도른 숲까지 그녀를 유인해 왔다.

물론 히나 왕국까지 전쟁의 여파가 미칠 리는 없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근위 기사 다섯 명을 멀리서 호위케 했으며 시종 시케르토는 지근에서 자신을 따라 다니게 만들어뒀다.

“이… 일렉트라, 그만 울고 눈물을 닦아라.”

드와이트는 홉킨스 가문의 상징인 화봉 십자가가 수놓아진 손수건을 그녀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일렉트라, 내가 소리 질러서 많이 놀랐지? 그치만 나를 봐서, 지금껏 몇 년 동안 너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나를 봐서라도 이제 조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줘야 하지 않겠니?”

그것은 너무도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일렉트라에게 접근했다가 좌절하고 돌아올 때면 드와이트는 번번이 집안의 시녀들을 방으로 데리고 가 강제로 추행했다.

“자, 이곳을 봐라.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냐? 저 음산하리만치 그늘을 드리운 망고른 숲을 봐라. 짙은 숲에 대조적인 화사한 꽃들. 정말이지 이곳에서 초로 하나 지어놓고 너랑 평생 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 말에서 내려 좀 걷자꾸나.”

눈물을 훔치던 일렉트라는 드와이트가 말하는 대로 망고른 숲을 훑어봤다.

망고른 숲, 파이오니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빛의 산맥의 주봉인 동명봉에 있다는 용지(龍池)와 더불어 파이오니아의 쌍경으로 불리는 곳.

깊고 푸른 숲들 사이로 보이는 붉고 샛노란 꽃들이 너무도 선명해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천하 절경을 보자 일렉트라의 마음도 조금씩 풀렸다.

이윽고 그녀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말에서 내려섰다.

“자,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자연을 완상하자꾸나.”

일렉트라는 망고른 숲을 향해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던 드와이트는 시케르토를 향해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신호를 교환했다.

시케르토의 얼굴에 알겠다는 표정과 함께 비열한 웃음이 걸렸다.

일렉트라는 정신없이 숲 사이를 거닐었다.

그리고 숲의 맞은편에 있는 나무 사이로 인영(人影)이 하나 지나갔다.

샛별을 머금은 듯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토끼 한 쌍이 일렉트라에게 다가와서 그녀가 내미는 손을 핥다가 드와이트가 나타나자 사냥꾼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겁을 먹고 달아났다.

토끼가 놀라 달아나자 일렉트라가 고개를 돌려 드와이트를 바라봤다.

‘이… 일렉트라, 눈부시다. 정말이지… 형언할 수 없구나… 하늘은 어찌하여 너를 천민으로 낳았더란 말이냐…….’

“일렉트라, 나와 결혼해주겠니?”

“드와이트 님, 당신은 여전히 공상에 사로잡혀 있군요. 매일매일 당신의 어머님께서 저에게 뭐라고 하시는지 잘 아시잖아요. 말씀만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드와이트는 또다시 일렉트라의 눈빛을 보며 공포에 가까운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아… 안 돼. 오늘은 기필코 네년을…….’

그리고 드와이트는 일렉트라의 두 손을 잡고 위에서 짓누르듯이 그녀를 상체를 덮쳤다.

“꺄악!”

일렉트라의 비명 소리가 망고른 숲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도와달라는 그녀의 외침에 대한 답은 숲의 골짜기를 타고 반사되어오는 메아리뿐이었다.

드와이트는 일렉트라가 비명을 지르자 반사적으로 일렉트라의 복부를 주먹으로 강타했다.

“어헉!”

하복부에서 강한 통증이 밀려오자 일렉트라는 신음성을 토했다. 그리고 강하게 힘을 주고 있던 양다리가 맥없이 풀려버렸다.

드와이트는 여전히 일렉트라의 두 손을 땅바닥에 잡아 결박시킨 채 일렉트라의 얼굴을 혀로 핥아댔다.

“천한 년 주제에 감히 자작 앞에서 건방을 떨어? 흐흐흐, 이제 오늘부로 네년은 헌 계집애가 될 것이다. 흐흐흐.”

그동안 억눌렸던 욕정이 폭발하자 드와이트의 몸이 일렉트라를 향해 사악한 뱀처럼 파고들었다. 무릎을 올려 일렉트라의 두 팔을 눌러버린 드와이트는 두 손으로 일렉트라의 비단 옷을 양옆으로 찢어 발겼다.

두 겹의 블라우스가 찢기자 설익은 탐스러운 복숭앗빛의 가슴이 애처롭게 드러났다. 순간 드와이트의 마음속에 뜨거운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드와이트는 굶주린 포식자처럼 일렉트라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아찔한 여인의 살 냄새가 흐드러진 월망꽃 숲의 꽃향기를 무색케 했다.

드와이트의 눈은 이미 광기로 가득 차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흐흐흐, 역시 마지막까지 남겨두길 잘했어. 바로 이 맛이야.”

그가 미친 듯이 일렉트라의 가슴에 파묻혀 있을 때 눈앞에 회초리 모양으로 된 식물의 촉수 같은 것이 타액을 흘리며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이… 이게 뭐…지? 허…억!”

드와이트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미 정신을 잃은 일렉트라의 입과 귀에서 끈적끈적한 타액을 흘리는 시커먼 촉수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이게 도… 도대체…….”

퍼억!

퍼어억!

뱀처럼 꿈틀대던 촉수들은 허공의 파리를 낚아채는 두꺼비의 혓바닥처럼 순식간에 드와이트의 몸을 꿰뚫었다.

“큭…….”

폐부를 찌르고 살갗을 찢어버리는 고통 때문에 드와이트는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스스스스.

촉수에 꼬치처럼 꿰인 드와이트의 시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흰 자위만이 가득 찬 눈을 광기 서린 듯 번뜩이며 여러 개의 촉수를 가진 일렉트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익은 복숭앗빛이던 살결은 어느새 검게 변했고 일렉트라의 몸에서는 안개 같은 독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드와이트 공자님!”

타다다닥.

외침 소리와 함께 드와이트의 근위기사 다섯 명이 월망꽃을 밟으며 날듯이 뛰어왔다.

홉킨스 가의 근위기사단.

미트라카 제국의 라이온스 기사단이나 법황청의 성기사단 같은 초일류 기사단은 아니나 홉킨스 백작의 그림자와도 같은 기사들로서, 백작이 전장으로 떠나자 가문의 수문장 역할을 위해 남겨진 그들을 드와이트가 사적인 용무로 데리고 온 것이다.

드와이트의 욕망을 위해 동원되긴 했으나 모두들 일당백의 쟁쟁한 기사들이었다. 그들이 밟고 뛰어오는 월망꽃들의 꽃잎들이 전혀 상하지 않는 걸로 봐서 그들이 구사하는 신법이 운공답보로 보였다.

일렉트라를 겁탈하려는 주인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시케르토는 일렉트라의 변신한 모습과 주인 드와이트가 죽는 광경을 보자 겁을 집어먹고 말에 올라타 달아나 버렸고, 드와이트의 근위기사들만이 검을 뽑아 든 채 일렉트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악마, 공자님을 내려놓아라.”

촤아악!

손바닥만큼이나 될까 말까 한 광채가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걸로 봐서 그들은 모두 오러를 다룰 수 있는 익스퍼트 급의 기사들이 틀림없었다.

기사들이 검이 광포하게 일렉트라를 찌르고 들어갔다.

빠져나갈 곳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빈틈없는 공격에 일렉트라의 몸이 난도질당할 분위기였다.

그 순간 일렉트라의 몸에서 뻗어 나온 촉수들이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더니 광채를 뿜으며 각각의 촉수들이 다섯 개의 빛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그 다섯 갈래로 찢어진 각각의 빛무리들은 화살처럼 정확하게 다섯 기사들의 몸통을 꿰뚫어버렸다.

“으아악!”

허공에 뜬 채 촉수에 꿰뚫린 기사들이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들이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촉수들은 두 겹, 세 겹으로 갈라지며 그들의 몸을 칭칭 감았다.

그리고 일순 촉수에 힘이 가해지는가 싶더니 기사들의 몸에서 뼈 분질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지끈.

이윽고 먹이를 완전히 감싸버린 뱀처럼 촉수들은 여유롭게 꿈틀거리며 기사들의 귓속으로 스멀스멀 기어 들어가더니 맞은편 귀를 통해 나왔다.

뇌가 관통 당해버린 기사들의 몸이 땅바닥을 향해 축 늘어졌다.

다섯 명의 기사들 중 아직 머리를 관통당하지 않은 기사가 마지막 오러를 검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어검기술을 이용해 일렉트라의 몸을 향해 검을 던지려 하였다.

그때 좀 전부터 나무 뒤에 숨어서 상황을 주시하던 인영이 재빠르게 오러를 주입하고 있는 기사를 향해 달려왔다. 기사들의 운공답보만 한 실력은 아니었지만 제법 빠른 신법이었다.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던 신형은 사람의 머리만 한 돌을 들어 마지막 힘을 짜내던 기사의 머리를 내리쳤다.

빠각!

머리가 깨지는 소린지 돌이 깨지는 소린지 뭔가 둔탁한 소리가 났고 기사가 들고 있던 검에서 검기가 사라져갔다. 그리고 검을 들고 있던 손이 축 늘어졌다.

챙그랑.

기사의 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쇳소리를 냈다.

동공이 완전 풀려버린 듯한 일렉트라의 눈이 자신을 구해준 자를 보자 급속도로 팽창했다. 그리고 하얗게 덮여 있던 눈동자에 검은자위가 돌아오더니 몸을 뚫고 나온 촉수들이 거짓말처럼 일렉트라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풀썩.

그리고 일렉트라의 다리가 풀렸고 그녀는 땅바닥에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일렉트라!”

나무숲에서 뛰쳐나왔던 사내가 그녀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그는 일렉트라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일렉트라, 정신 차려. 오빠야, 딜란 오빠가 너를 지켜주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어.”

갑자기 나타나 일렉트라를 구해준 자. 그의 정체는 바로 일렉트라의 친오빠보다 더 자상한 딜란이었다. 그는 일렉트라를 부축해 그녀를 들쳐 업었다.

열여덟 살의 성숙한 청년으로 성장한 딜란은 일렉트라를 업고 망고른 숲을 뛰듯이 걸었다. 드와이트의 몸종 시케르토가 살아서 달아난 것이 아무래도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딜란의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일렉트라, 도대체 놈들이 네 몸에 무슨 장난을 친 거지?”

딜란은 천사 같은 일렉트라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멀리서 지켜본 일렉트라의 신체 변화가 어둠의 군주이자 죽음의 왕인 위리놈의 씨앗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