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 고수 불가
그것은 뭔가가 그을린 듯한 향만 있다면 안개라기보다는 연기에 가까울 정도로 농도가 짙었다.
머리를 숙여 바라보면 자신의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 숲을 두 인영이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날짐승들의 몸놀림에 가까웠다.
“진마, 자네의 기마천보(騎馬千步)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구먼.”
“허허… 나차태자, 이거 새삼스럽게 왜 이러시나. 자네의 청운신법(靑雲神法) 역시 입신의 경지에 이른 것 같으이.”
기마천보(騎馬千步)와 청운신법(靑雲神法).
기병들이 타는 말이 천 리를 달리는 것처럼 빠르다는, 마교 의 극성의 고수들이 펼치는 신법.
그리고 마음 가는 대로 바람 가는 대로 흘러가는 구름 같은 무당파의 청운신법.
나차태자 장삼병과 마계진마 구일행은 짙은 안개 숲을 날듯 달렸다.
수십 분이 지나자 칠흑 어둠 속에서도 송곳처럼 우뚝 솟아 있는 킵들이 있는 검은 성이 들어왔다.
탑은 마치 하늘과 연결하기 위한 통로라도 되는 것처럼 거만하게 솟구쳐 있었고, 장삼병과 구일행이 나아갈수록 그 외벽의 짙은 흑광(黑鑛)이 빛을 뿜어냈다.
와치 타워(Watch tower), 일명 파수꾼들의 탑.
구천을 떠도는 이들은 와치 타워를 파수꾼들의 탑이라고 불렀다.
시간과 공간의 인과율의 지배력이 느슨한 곳 구천. 그곳에서 주신(主神) 제우바의 인과율과 질서를 지키는 절대경계의 감시자들, 파수꾼.
그들은 이곳 와치 타워에서 경계를 허무는 자들을 감시하며 인과율을 파괴하려는 자들을 잡아들인 다음, 황천길을 건너 망자(亡者)들을 염라부로 이송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정말 무시무시한 성이로군.”
“그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귀신이 나올 것 같으이.”
“껄껄… 진마, 그 무슨 소린가. 자네나 나나 어차피 귀신 같은 존재 아닌가.”
“어허, 그 무슨 섭섭한 소리. 그래도 우리는 구천에 떠도는 망자들에게 신선으로 추앙 받는 존재 아닌가.”
지옥의 문을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와치 타워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구일행과 장삼병은 소풍이라도 가는 어린아이처럼 신나 있었다.
“저곳이 약선(藥仙) 화현이의 사체가 있는 곳이란 말이지?”
구일행의 물음에 장삼병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체는 없을 걸세. 이미 그의 사체는 천당으로 올라가지 않았겠나?”
“하긴, 그렇겠군.”
“이보게, 진마. 자네 말대로 저 성 안에 틀림없이 천세보혈주가 있는 거겠지?”
“우리가 약선과 함께 황삼영 개자식에게 속아 이승을 하직할 때, 약선 화현 그 친구가 틀림없이 천세보혈주를 들고 있었네. 우리 역시 수혁이처럼 억울하게 죽은 자들 아닌가. 약선 그 친구랑 자네랑 셋이서 구천을 헤맬 때였지. 약선이 파수꾼 우두머리의 낫에 꿰여갔을 때 틀림없이 약선이의 허리춤엔 천세보혈주가 달려 있었네. 끄응, 갑자기 황삼영 그 개자식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구쳐 오르는구먼.”
구일행의 얼굴은 노기를 띠며 시퍼렇게 변했다.
“어디 그게 황삼영만의 잘못이겠는가. 부패하고 무능력한 송나라의 황제와 썩은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은 다 같은 족속이지. 황삼영 그놈은 단지 송나라의 중서(中書)재상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불과했을 뿐이야.”
“나는 태자 그대의 인품을 존경하네. 그래서 모든 무림인들이 자네를 군자검이라며 칭송했겠지. 하지만 어쩔 때는 자네의 모든 것을 다 깨달은 듯한 도인 같은 말들이 짜증날 때가 있어.”
구일행은 자신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잊어버릴 때도 됐건만, 송나라 조정의 배신으로 죽게 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평상심을 잃어버리곤 했다.
천하오절이라 불리던 사람들 중 세 명이 한꺼번에 조정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고 구천을 헤매고 있을 때, 그들은 파수꾼의 추격을 받았다.
일반적인 파수꾼들이야 이미 장삼병과 구일행뿐만 아니라 약선(藥仙)의 적수가 될 수 없었으나, 공간의 파수꾼 글라우베와 시간의 파수꾼 프란시스코는 막강한 무공과 도술을 가진 자들이었다.
키가 장삼병과 구일행을 합친 것보다도 큰 공간의 글라우베의 낫.
길이가 2미터는 돼 보이는 그 무지막지한 낫을 회초리 휘두르듯 했다. 또한 일시적으로 공간 안의 시간을 멈추게 하는 듯한 프란시스코의 마법에 천하오절이라 칭송받던 장삼병과 구일행은 고전했다.
더구나 목숨을 잃게 되면서 장삼병 자신의 보검마저 사용할 수 없게 되어 글라우베의 낫은 장법에만 의지해 막아내야 했다.
그 혼란스러운 난전 속에서 약선 화현이 글라우베의 낫에 꿰뚫려 끌려갔고, 약선이 벌어준 마지막 시간과 틈 덕분에 장삼병과 구일행은 다행히 황천행을 택하지 않게 되어, 구천의 천장단애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구일행과 장삼병은 사연이 비슷한 제자-어쩌면 구일행과 장삼병은 그래서 더욱 수혁에게 무공을 전수해주고 싶었으리라- 수혁에게 천세보혈주를 구해주기 위해 약선이 끌려간 와치 타워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대장, 뭔가가 무서운 속도로 와치 타워로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구천의 마물들이겠지.”
“아닙니다, 인간들처럼 보입니다.”
“망자들을 잡아들이는 곳이 와치 타워인데, 감히 어떤 미친놈들이 이곳에 제 발로 찾아 들어온단 말이냐. 망자들 중에서 이곳에 올 수 있는 자들은 없다.”
“아닌데… 진짜 사람들 같은데… 지금 아웃워크의 벌판까지 와 있습니다. 아, 아니 벌써 도개교를 건넜습니다.”
그제야 긴 손톱을 손질하고 있던 파수꾼들의 야전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삐딱하게 앉아 있던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뭐시라? 벌판에서 도개교까지 무려 200미터가 넘는데 좀 전에 벌판에 있던 자들이 벌써 도개교를 건넜다고? 지금 장난하는 거야?”
“대… 대장… 벌써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이런 미친… 빨리 도르레문을 내리라고 해.”
그제야 야전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허겁지겁 망루로 나와 밖을 내다봤다. 부하의 말대로 두 명의 인영이 벌써 도개교를 지나 성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빠르고 신묘한지 파수꾼의 야전대장인 그도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잡는 데 애를 먹었다.
“창살문을 닫아라.”
끼기기깅.
망루에서의 외침이 떨어지자 문지기가 부리나케 도르레를 감아 내렸다.
“이보게, 마계진마. 성문을 내리고 있는데?”
“껄껄, 저 정도 쇳조각 창살문으로 우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보지?”
구일행은 기마천보를 밟으면서 동시에 두 손으로 주색(朱色)의 기공을 끌어 모았다.
급속도로 몰리는 붉은색의 기는 구체를 형성하며 구일행의 손에 쌓여갔다.
“천마분혼주사장(天魔分魂朱獅掌).”
퍼어엉.
창살문을 향해 달려들던 구일행의 손에서 붉은빛을 띠는 유형의 구체가 폭탄처럼 철문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쇠기둥으로 만들어진 와치 타워의 창살문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거… 거짓말… 저런 인간들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어. 더군다나 꼬부랑 할아버지들 아냐…….”
파수꾼들의 야전대장인 스터첵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막아라! 저 늙은이들을 막아!”
뿌우뿌우.
기분 나쁜 나팔 소리가 와치 타워에 울려 퍼졌다.
천마분혼주사장에 맞아 스멀스멀 녹아내리는 쇠창살문을 장삼병과 구일행은 귀찮은 각다귀 떼라도 쫓아내듯 가볍게 손으로 쳐내며 타워 안으로 들어섰다.
“이 노망든 할아범들아, 죽어랏!”
장삼병과 구일행이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성안을 지키고 있던 파수꾼들이 무시무시한 낫을 들고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팅강! 팅강!
“헉, 이… 이럴 수가… 도대체 네놈들은…….”
검은 로브 안의 눈동자가 드러나지 않는 파수꾼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했다.
강철로 만든 낫의 날은 노인의 몸에 부딪치는가 싶더니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동강났다. 그 모습을 보며 뒷걸음질하지 않을 이는 없었다.
“역시 태자, 그대의 금강불괴는 명불허전이야.”
“중원 최고의 대장장이인 천자공(天子工)이 만들었다는 보검도 내 금강불괴를 뚫지 못하는데, 하물며 저런 허접한 낫 쪼가리쯤이야…….”
“자, 시간이 없으니 빨리 끝내자고. 탄지신통!”
구일행은 뒷걸음질하는 수십 명의 파수꾼들을 향해 검지를 치켜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끝에서 무형의 기가 발산되었다.
동시에 수십 명의 파수꾼들의 이마에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뚫렸다.
“처… 처음 보는 마법이도다.”
머리에 구멍이 뚫려 죽어가는 파수꾼들은 그때까지도 구일행의 무공을 마법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기어물(理氣於物)!”
장삼병이 부러진 낫을 향해 손을 뻗자 자석에 쇠붙이가 끌려가듯 그의 손 안으로 낫 조각이 빨려 들어갔다.
“진마, 이런 조무래기들에게 굳이 탄지신통 같은 상승 무공을 펼칠 필요까지 있겠나?”
장삼병은 구일행을 나무라듯 말하며 부러진 낫을 움켜쥐고 적진으로 달려들었다.
그 모습은 나비 한 마리가 꽃을 향해 달려드는 것처럼 우아하면서도 가벼웠다.
“풍검(風劍)!”
“운검(雲劍)!”
운검은 태극검 계열의 검법으로, 구름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것이 특징이다. 풍검은 대라검 계열의 검법으로 폭풍처럼 몰아치는 검법이다.
구름이 흘러가듯 부드러우면서도 때로는 폭풍우가 몰아치듯 매서운 검법에 탑 안의 파수꾼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겁먹지 마라. 놈들은 고작 둘뿐이다. 놈들을 몰아쳐라!”
파수꾼의 야전대장인 타우트는 고래고래 악을 질렀다. 하지만 정작 그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끄응, 하필 글라우베 님과 프란시스코 님이 없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끄아악!”
그 와중에도 장삼병과 구일행은 주머니에서 구슬 빼듯이 쉬파수꾼의 목을 베었다.
“이… 이런… 제길! 죽, 죽어랏!”
야전대장 타우트는 장낫을 들고 구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세는 좋다만…….”
구일행은 타우트를 향해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순식간에 마주 달려오는 타우트의 몸속으로 구일행의 상체가 파고들었다.
동시에 구일행은 손을 뻗어 타우트의 안면을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순간 타우트는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몸 안의 모든 진기가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북명신공(北冥神功).
생명체들의 혈도를 통하여 상대방의 진기를 빨아들이는 마공인 북명신공 때문에 타우트의 몸은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진마, 놈을 죽이면 안 돼!”
“참, 그렇지.”
구일행은 쥐고 있던 파수꾼 야전대장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타우트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잃어버린 친구의 물건을 찾으러 왔다. 묻는 말에 대답해라.”
“으으으… 으으으… 제발… 더 이상… 고통만은…….”
“예전에 네놈들이 잡아간 우리의 벗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다. 호리병 안에 든 술인데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느냐?”
“잘… 모르옵니다.”
타우트의 대답에 날아드는 것은 구일행의 발길질이었다. 그는 타우트의 얼굴을 거세게 밟아 으깨며 거듭 물었다.
“다시 묻겠다. 그 물건이 어디 있느냐?”
“잘…은 모르오나, 대개 이계의 물건들은 지하 창고에…….”
“흠… 지하 창고라…….”
“어서 가세나, 진마.”
장삼병은 지하 창고라는 답을 얻기 무섭게 성 안으로 들어갔다.
구일행 역시 다 죽어가는 타우트를 내버려둔 채 장삼병을 뒤따라갔다.
그들의 족적 뒤에는 60개가 넘는 파수꾼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성문으로 들어간 그들은 희미한 횃불 몇 개에 의존한 채 지하 통로로 내려갔다. 간신히 사람 두 명이 나란히 걸을 정도로 좁은 계단 아래로는 심연 같은 천장단애가 펼쳐져 있는 듯했다.
“이거 원, 박쥐 새끼들이라도 나오겠는걸.”
찌지지익.
구일행의 말이 화근이 됐을까. 몇 마리의 박쥐들이 날갯짓을 하며 비상했다.
“어이쿠, 새끼들… 놀라라.”
호들갑을 떠는 구일행의 목소리가 굴뚝 같은 통로에 울려 퍼졌다.
장삼병은 대조적으로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지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하여튼 삼병이 저놈은 재미가 없어. 사람이 어찌 저리 재미가 없을꼬. 저놈은 필시 마누라하고 그 짓거리 할 때도 부인, 의관을 벗으시오, 이 지랄했을 거야.’
“자네의 안광이 뒤통수에 박히는 것이, 또 내 흉을 보고 있는 게로군.”
‘늙은 여우같은 놈, 도대체 저놈의 속은 알 수가 없어. 처음 정사 연합으로 송나라 왕실을 돕자고 했을 때부터 저놈의 속을 알 수 없었단 말이야.’
구일행은 어둠 속에서도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장삼병을 쏘아봤다.
몇 번의 침묵이 흐르고 지하 깊은 곳에서 유독 불빛이 강한 곳이 보였다.
“저곳인가 보구먼.”
“태자, 자네도 그리 보이나?”
구일행은 장삼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어깨를 타고 뛰어올라 지하 창고의 문을 걷어찼다.
철퍼엉.
육중한 철문이 구일행의 발차기에 종잇장처럼 펼쳐졌다.
지하 창고 안은 대낮처럼은 아니어도 지하 몇십 미터 안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구먼, 이것저것 잔뜩 쌓여 있는 것이.”
“태자, 이것 좀 보게. 여기 진귀한 병장기들이 있구먼, 허허.”
병장기라는 말에 장삼병의 귀가 번쩍 열렸다. 검술을 주로 쓰는 장삼병은 이곳 구천에서는 가뜩이나 쇠를 구하기 힘들고 자신 또한 철을 제련할 수 있는 기술이 없기에 검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디 보세나.”
장삼병은 재빨리 구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곧 그의 동공은 어둠 속에서 커다랗게 열렸다.
“검병만 보아도 천하의 보검이 틀림없구나. 중원의 검과는 뭔가 다르게 생겼다마는…….”
장삼병은 검집에 들어 있어 검신이 보이지 않는 검을 집어 들어 검집에서 날을 빼었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은 지하 창고에서 썩어 있었던지, 장삼병이 검을 들어올리자 검집에서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쿨럭쿨럭, 살살 좀 다루시게.”
스르릉.
장삼병은 구일행의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우우웅! 우우웅!
검을 뽑아 드는 순간, 검집에서 귀신의 울음소리 같은 울림이 퍼져 나오며 검신은 푸른빛을 발했다.
그 푸른 빛 때문인지 검을 보고 있는 장삼병의 얼굴에 푸른빛이 반사되었다.
빛을 받은 장삼병의 두 눈이 활짝 열렸다.
“노… 놀랍다. 마치 검이 살아 숨 쉬는 듯하구나. 어찌하여 이런 훌륭한 검이 이깟 지하 창고에서 썩고 있더란 말이냐.”
우우웅! 우우웅!
검은 계속해서 울음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허허… 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보기에도 탐이 나는구먼. 그 검이 자네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허허, 그런가?”
“어때, 맘에 들면 자네가 취하지 그러나?”
구일행은 슬쩍 장삼병의 마음을 떠보았다.
‘거절하겠지. 또 짐짓 잘난 척을 해야 할 터이니.’
“진마, 그 무슨 소린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내 어찌 이런 보검을 취할 수 있단 말인가. 무슨 내력이 있는 검인지도 모르거늘… 내 어찌…….”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말 꼬리를 내리는 것을 보니 싫진 않은 모양이군. 하긴… 그 어떤 무림인이 저런 보검을 마다하겠나. 아무리 죽은 자라도 말이야.’
“그러지 말고 자네가 취하시게. 여기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유품 같은데 말이야. 어? 저건 또 뭐지?”
구일행은 장삼병이 보검을 취할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러 딴청을 피우며 다른 물건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행동했다.
“희한하게 생긴 물건이로구먼.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구일행이 든 물건은 길이는 사람의 손바닥보다 조금 크고 높이는 사람 손의 반 뼘이 조금 더 되어 보였다.
강한 철로 만들어졌고, 쇠 상자 같은 곳의 앞부분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손잡이 앞에는 손가락을 걸 수 있는 날카로운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권총이었다.
“거참, 희한하게 생긴 물건이로구먼. 이 구멍은 뭐 하는 것이며 이 바늘 같은 것은 또 무슨 용도란 말인가. 별의별 것이 다 있는 곳이구먼, 허허.”
구일행이 권총을 보며 신기해하고 있을 때 장삼병이 다가왔다.
“지금 그런 것들 구경할 때가 아니잖나… 약선의 물건을 찾아 돌아가야지.”
“아… 그래, 미안하네. 내가 잠깐 넋 놓고 있었구먼.”
그제야 구일행은 장삼병과 함께 지하 창고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중원 천하오절로 불리던 약선의 천세보혈주는 천하 영물들의 진기를 담아 만든, 약선의 장인정신이 깃든 보혈주다.
약선가의 선대들이 만든 것으로, 응달과 양달에서 5백여 년 동안 중원의 만년설삼, 곰의 쓸개, 호랑이의 간, 녹용, 거북의 부레 등 각종 보약재와 독을 수십, 수백 번 말리고 찌기를 반복해 누룩으로 빚어낸 술! 그것이 천세 보혈주였다.
중원에서는 이미 죽은 자도 살려낸다는 과장된 이야기가 입소문을 타고 번질 정도로 영약이었다. 일반인들은 구경도 못해본 것이다.
인체의 진기를 극대화시키는 음양의 조화를 이룬 각종 재료들이 들어간 천세보혈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영물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인지 지하 창고 안에서 천세보혈주는 나름의 기(氣)를 풍기고 있었다.
때문에 천세보혈주가 들어 있는 호리병 주위에는 각종 벌레와 독충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저것이 바로 약선의 천세보혈주로구먼.”
“오… 천세보혈주!”
구일행은 약선의 호리병을 들며 군침을 삼켰다.
“이보게, 진마. 뭐 하는 건가… 어서 이곳을 나가도록 하세. 천세보혈주는 내가 챙기도록 하지.”
장삼병은 구일행이 군침을 삼키고 있는 천세보혈주를 빼앗아 자신의 허리춤에 단단히 묶고 지하 창고를 빠져나갔다.
“이보게, 보검 안 가져갈 건가?”
장삼병이 그 길로 창고를 나가버리자 구일행은 좀 전 장삼병이 뚫어져라 바라보던 보검을 챙겨 지하 창고를 빠져나왔다.
한참을 올라왔을까.
어둠 속에 적응되었던 동공이 바깥의 빛을 보자 닫히기 시작하면서 잠시 동안 눈앞이 컴컴해졌다.
그 순간 강력한 파공성이 장삼병과 구일행의 귓전을 때렸다.
쐐애액!
“피햇.”
앞서 가던 장삼병은 구일행에게 고함을 질러 위험을 알렸다.
그는 목을 향해 날아드는 사슬낫의 옆 날을 기공을 실은 손등으로 비껴내며 신법을 이용해 측면으로 피했다.
“너희들은 인간이 아니로구나. 내 사슬낫을 막아내는 걸 보니.”
장삼병과 구일행의 눈앞에 길이가 2미터는 되어 보이는 시퍼런 사슬낫을 든, 붉은 인광을 발하는 파수꾼이 서 있었다.
그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붉은 인광을 발하는 파수꾼이 회색로브를 걸친 채 허리춤에 검을 차고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공간의 파수꾼 글라우베와 시간의 파수꾼 프란시스코였다.
“아무래도 저놈들이 우리 부하들을 이 모양으로 만든 것 같은데.”
“당연한 소리! 프란시스코, 너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너만 아는 것처럼 말하는 버릇이 가장 나빠.”
“후후, 그런가? 어때, 내가 좀 도와줄까?”
“인간들을 상대하는 데 너까지 나설 필요 있겠어? 후후후.”
글라우베와 프란시스코가 장삼병과 구일행을 앞에 두고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 구일행이 장삼병에게 다가갔다.
“저 새끼들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빙신들이 구천의 신선으로 불리는 우리를 잘 몰라보는 모양인데… 가만, 그러고 보니 저 새끼들은……?”
“그래, 맞아. 일전에 우리들이 죽어 구천을 해매고 다닐 때 약선을 꿰어 간 그놈들이다.”
츠츠츠츠츠!
장삼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일행의 온몸이 자색빛을 띠기 시작했다.
자귀사후공(紫鬼死後功).
천마구령심법을 7성 이상 소화한 자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기공법으로 자색의 빛을 발하는 것이 특징인 상승 기공법이다.
구일행은 온몸을 일주천시킨 후 금방이라도 파수꾼들을 향해 튀어나갈 기세였다.
“진마, 잠깐 기다려.”
“이거 놔!”
성미 급한 구일행은 나차태자의 손을 뿌리치며 몸을 날리려 했다.
“진마, 저 뒤에 있는 놈, 지난번에 이상한 도술을 쓰던 놈이야. 섣불리 행동했다간 저번처럼 낭패를 당하는 수가 있어.”
“마… 맞아. 그걸 미처 생각 못했군.”
장삼병이 말하는 도술이란 시간의 파수꾼 프란시스코가 사용하는 시간의 마법이었다.
공간의 파수꾼 글라우베와 시간의 파수꾼 프란시스코는 어떻게 말하면 주신(主神) 제우바의 행동대장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제우바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그들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강함을 지녔다.
글라우베가 외공 위주의 강기 섞인 공격을 주로 한다면, 시간의 파수꾼 프란시스코는 시간을 역전시키거나 정지시키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전시킬 수 있는 시간은 신처럼 무한정한 것은 아니고,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 최대 5분까지만 역전시키거나 정지시킬 수 있다.
장삼병이 말하는 이상한 도술이라는 것도 바로 프란시스코의 시간 마법을 말하는 것이었다.
“저번처럼 공격했는데 놈이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 우리가 당하는 수가 있으니 신중을 기해야 해.”
“그, 그래. 알았어. 그럼?”
구일행의 질문에 장삼병은 그의 손을 넌지시 쳐다봤다.
“아… 내 그럴 줄 알고 이 보검을 챙겨왔지. 자, 나차태자의 그 유명한 삼재검법(三才劍法)을 구경해볼까?”
구일행은 장삼병에게 보물창고에서 훔쳐온 보검을 내밀었다.
“구일행, 내가 앞의 사슬낫을 든 놈을 해치우면 지난번 일을 상기해서 행동하도록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미… 미안… 잘 모르겠는데.”
구일행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장삼병은 입초리가 심하게 비틀렸다.
장삼병은 구일행을 한번 노려본 후 삼재검법의 기수식을 취하며 보검을 뽑아 들었다.
시릴 정도로 푸른빛을 발하는 보검의 검신이 잿빛 하늘과 대조를 이루며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후후, 잘도 우리 창고를 털어왔군. 더더구나 칼을 보는 눈은 있어서 최초로 하늘의 별자리를 얻었던 인간들의 신이자 검의 귀재 키나비의 보검을 들고 오다니… 네놈들이 스스로 명줄을 재촉하는구나.”
글라우베는 장삼병이 기수식을 취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란시스코를 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랬다.
글라우베가 말하는 키나비의 검이란 지금의 파이오니아 대륙을 탄생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간들의 선왕 키나비가 사용했던 검을 말하는 것이다.
죽음의 왕 위리놈이 어둠의 군단을 이끌고 악의 군주 벨제붑을 위폐시키고 제우바 신과 그들의 사도들을 향해 염마대전을 일으켰을 때, 인간들의 선왕이던 키나비는 대장장이의 신, 발카누스가 만들어준 보검을 들고 신들의 편에서 어둠의 군단과 맞서 싸웠다.
염마대전 후 키나비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을 인정받아 인간 중 최초로 신들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죽었을 때 주신 제우바는 그에게 신들의 특권인 오라이언의 별자리를 내줬던 것이다.
인간이기에 수명이 다할 수밖에 없었던 키나비가 죽었을 때 후세들은 그의 보검을 키나비의 검이라 부르며 키나비의 시신과 함께 매장했다.
그 후로 그 보검의 가치를 안 도굴꾼들이 검을 노리고 키나비의 무덤을 도굴하려 한다는 소문은 끊임없이 들려왔으나 그 키나비의 검이 구천의 파수꾼들의 손에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천어쾌단식(天於快斷式)!”
“드디어 나왔구나! 놈들, 어디 천하오절 중 검제(劍帝)로 불리던 나차태자 장삼병의 삼재검법 중 일초 천식(天式-세로베기)을 받아봐라.”
삼재검법은 무당파의 선대 사숙이었던 장삼풍이 음양(陰陽)의 조화인 태극(太極)을 운용하는 것을 중시한 도교문파를 창설하며 생긴 검법이다.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중요시 여기는 도교문파의 노장사상중 중 삼재(三才)라 불리는 자연의 이치, 즉 하늘(天), 땅(地), 사람(人)의 사상을 받아들여 하늘을 상징하는 ㅣ와 땅을 상징하는 ㅡ, 사람을 상징하는 ㆍ를 기본으로 만든 검법을 말한다.
천어쾌단식은 그 삼재검법의 일초인 천초 중 제4식에 해당하는 초식이다.
“미친놈… 감히 글라우베 님을 상대로 인간의 검을 들고 덤비려 하다…….”
“위험해, 글라우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청운신법의 절묘한 속도가 붙은 장삼병의 일초는 상단에서 하단으로 순식간에 그어져 내려왔다.
방심하고 있던 공간의 파수꾼 글라우베는 뒤늦게 낫을 들어 장삼병의 검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장삼병의 손끝을 타고 8성 이상의 내공이 키나비의 검에 흘러 들어갔다.
푸른빛을 뿜는 키나비의 검은 글라우베의 낫을 위에서 아래로 정확하게 이등분해버렸다.
동시에 공간의 파수꾼 글라우베의 머리에서부터 사타구니 끝 부분까지 얇은 사선이 그어졌다.
사선에서 초록색 선혈이 베어나기 시작하더니 분수 같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푸하학!
“우아악!”
공간의 파수꾼이자 제우바 신의 은총을 입은 글라우베에가 처음 맛보는 고통이었다.
“이… 이런… 리버스 타임!”
그제야 프란시스코는 시간을 역전시키기 위해 시간 마법인 리버스 타임을 시연했다.
그 틈을 타고 장삼병은 신법을 밟아 프란시스코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제야 구일행은 장삼병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귀사후공으로 내공을 끌어올린 구일행의 손에서 수십 개의 탄지신통이 글라우베와 프란시스코를 향해 쏟아졌다.
장삼병이 자신을 향해 검을 번뜩이며 날아들자 프란시스코는 급한 나머지 5분을 채 역전시키지 못하고 몇 초만을 역전시켰다.
그러나 몇 초는 상황을 반전시키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시간의 역전을 넘어선 장삼병의 검이 방금 전처럼 자신을 향해 다시 날아왔다.
그뿐 아니라 수십 개의 내공이 실린 구슬 모양의 탄지신통들이 글라우베의 몸을 뚫고 자신을 향해 날아왔다.
퍼퍼퍼퍽.
순식간에 글라우베와 프란시스코의 몸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온몸에 구멍이 뚫렸고 그 구멍에서 초록색의 피가 쉼 없이 뿜어져 나왔다.
“크아악!”
“이… 이럴 수가. 인간들이 우리 파수꾼을… 도대체… 네놈들은 인간이냐? 신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프란시스코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쓰러져가는 자신의 몸이 장삼병의 검에 의해 사등분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대단해. 정말 36갑자의 내공을 지녔다는 나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쾌검이었어.”
“뭘… 마계진마 구일행의 탄지신통 역시 천하무적이지. 그 위력이 새삼 놀랍네.”
구일행은 장삼병의 말에 능구렁이처럼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것 봐. 내가 검을 훔쳐 오길 잘했지?”
“…….”
“껄껄껄.”
구일행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안개 숲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휘리릭.
스르릉.
장삼병에 손에 들린 보검이 허공에서 몇 바퀴 돌더니 검집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보게, 진마. 같이 가자고.”
“빨리 와. 수혁이 자식, 우리 기다리다 눈알 빠진 건 아닌지 모르겠군.”
“설마… 또 혈도 외우는 법을 고스톱인가 뭔가 하는 것처럼 외우고 있겠지. 내 생전 그런 놈은 처음일세. 혈도를 외우라고 했더니 종잇장에 그려놓고 모슨 마작 같은 잡기하듯이 외우다니 말이야. 하여간 특이한 놈이야.”
“그래도 처음엔 좀처럼 못 외우더니 그렇게 즐기면서 하니까 3일 만에 365개의 혈도를 다 외우지 않던가. 보면 볼수록 신비한 놈이야.”
“껄껄껄.”
두 노인의 웃음소리가 짙은 안개 속으로 점점 사라졌다.
츠츠츠츠.
그들이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을 때, 와치 타워 안에서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장삼병의 검에 절단이 나고 구일행의 탄지신통에 너덜너덜해졌던, 이미 시체가 된 글라우베와 프란시스코의 상처가 아물더니 원래의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은 처음의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우두둑, 뚜둑.
“이런…….”
“후후… 글라우베, 꼴이 말이 아니군.”
“프란시스코, 너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저런 늙어빠진 인간에게 우리가 당할 수 있는 거지?”
“후후, 처음부터 저놈들은 제우바 님의 인과율을 벗어난 자들이었단 말인가?”
“후후후, 그건 오직 제우바 님만 아시겠지. 그나저나 저놈들을 이곳 구천에 머물게 해선 안 되겠는데.”
“후후, 그래. 대책을 마련해봐야겠군.”
공간과 시간의 파수꾼인 그들의 안광이 소름 끼칠 정도로 매섭게 빛났다.
폭포수 아래에서 수혁은 옷을 발가벗고 단전에 기를 모으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이상하다. 도대체 왜 기가 느껴지지 않는 걸까? 벌써 수일이 지났건만 아무런 느낌의 변화가 없어. 분명 스승님들의 가르침대로 운기조식을 펼치고 있건만…….’
수혁은 가슴 한쪽이 답답해오는 것을 느꼈다.
구일행과 장삼병이 일러준 대로 대자연의 기를 빨아들이기 위한 초보적 내가기공을 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단전으로 무형의 묵직한 기운이 차는 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집중력이다, 집중력. 집중해야 해! 그렇지 않아도 학교 다닐 때 주의가 산만하다고 지적을 많이 당했잖아. 집중하자, 박수혁.’
수혁은 어금니를 악물며 온 신경을 몸의 혈류와 단전에 쏟았다.
짹짹, 째잭.
“썅, 저런 거지같은 새끼들이, 집중해야 한다니까.”
수혁은 단전에 기가 들어오지 않자 물속에 있는 조약돌을 꺼내 나무 위에 앉아 지저귀고 있는 새들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썅, 그 노인네들이 나한테 잘못 가르쳐준 거 아냐? 젠장.”
퍽.
“어떤 새끼야! 지금 기분 최악인…….”
퍼퍽.
“사… 사부님들…….”
수혁은 머리에 커다란 혹이 난 상태로 폭포 앞에 서 있는 장삼병과 구일행을 쳐다보았다.
“이놈, 자신의 재능이 모자라다는 소리는 않고 이 노부들을 씹고 있더란 말이냐!”
“그것이 아니오라…….”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오고 난리야…….’
“수혁아, 그러기에 내가 뭐라 했더냐. 너는 무공을 익히기에는 나이를 많이 먹었다 하지 않았느냐.”
장삼병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윽한 눈으로 수혁에게 말했다.
“어디 나이만 문젠가? 저놈의 썩은 육신, 담배와 술에 찌든 저 육신으로는 고수 불가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저 영감탱이는 만날 저 소리야. 전생에 담배 한 갑, 술 한 잔 안 사줬으면서.’
수혁은 가뜩이나 무공 수련이 진도가 나가지 않는데 구일행이 핀잔을 주자 투덜거리며 떨어지는 폭포수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쯔쯔, 저런 발길질로 쥐새끼라도 한 마리 잡을 수 있으려나…….”
“가… 가만… 그러고 보니…….”
장삼병은 구일행이 혀를 차고 있을 때 몸을 날려 수혁에게 다가갔다.
‘캬, 멋지다. 나도 어서 나차태자 사부님처럼 저렇게 훨훨 날아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려나… 저건 사람이 아니라 새다, 새.”
수혁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장삼병을 바라보며 양팔을 벌리고 허리를 숙여 어느 대중가수의 춤 동작을 흉내 냈다.
그때 장삼병은 수혁의 손을 잡고 한의사가 병자를 진맥하듯 그의 몸을 살폈다.
“이런, 무당의 태극기공을 전수해줬거늘 달포가 되도록 아무런 진기의 변화가 없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이냐? 정녕 수혁이 네 육신은 진마의 말대로 썩을 대로 썩었단 말이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태극기공을 수련한다면 사흘이면 단전에 진기가 쌓이기 시작하거늘…….”
“이보게, 나차태자. 설마 농담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저놈이 썩은 육신이래도 아직까지 진기의 흐름도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이가 환갑이 넘은 노인들도 태극기공을 익히면 이삼 일이면 단전이 열리거늘… 어디 나도 한번 보세나.”
구일행도 신법을 이용해 몸을 날려 수혁의 남은 한 팔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수혁을 향해 연방 구일행의 꿀밤세례가 쏟아졌다.
따닥따닥.
“아, 그만 좀 때려요.”
“보다보다 너처럼 무공에 재능이 없는 놈은 처음이다. 구천에서 그만 헤매고 어서 빨리 지옥에나 가라. 너 같은 놈에게 무공이 애초부터 가당키나 하더란 말이냐. 지옥에 가서 염라대왕, 악귀들과 함께 고스톱인가 고도린가 하는 거나 해. 염라대왕한테는 광 팔라고 하면 되겠네. 너는 노름의 귀재니 거기 가서 염라대왕한테 노름 가르쳐주면 여기서보다는 훨씬 예쁨 받을 것 같구나.”
‘이 노인네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마계진마 사부님, 그 무슨 서운한 말씀이십니까? 사부님이 저를 내치시겠다니 불초 제자 눈물이 앞을 가리나이다.”
수혁은 정말 울기라도 할 기세로 눈에 침을 찍어 발랐다.
“허허… 그랬구나, 그랬어. 그런 연유 때문이었어, 끌끌.”
장삼병이 돌연 혀를 찼다.
그의 눈빛은 수혁의 내공수련이 더딘 연유를 알겠다는 눈빛이었기에 구일행과 수혁은 그의 입을 주시했다.
“수혁이 네가 무공 수련이 더딘 연유를 알겠구나.”
“아니, 영세제일존(永世第一尊)이자 고금제일고수(古今第一高手)로 불리던 천하마도의 지존인 나 구일행도 모르는 사실을 자네가 어찌 안단 말인가?”
자신이 여태껏 몰랐던 사실을 장삼병이 파악하자 자존심이 상한 탓에 구일행은 나차태자에게 존칭을 쓰는 것도 잊은 채 그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며 흥분했다.
“이보게, 진마. 너무 흥분한 거 아닌가?”
“말해보게. 도대체 이놈의 썩은 육신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인가?”
장삼병은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서서히 입을 열었다.
“수혁, 너의 무공 수련이 더딘 것은 온전한 육체가 없기 때문이야. 아마도 네 육신은 살아 있고, 혼은 죽은 상태기에 이승에 남겨진 육신 때문에 무공 수련이 안 되는 것 같구나.”
“그, 그렇군. 어쩐지 이놈이 두 발로 온전히 구천을 걸어 다닌다 했더니.”
수혁은 장삼병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기공수련이 더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글쎄, 어떻게 해야 좋을지…….”
‘휴우, 하마터면 육신도 없는 저놈에게 약선 집안의 가보인 천세보혈주를 줄 뻔했구나.’
구일행은 폭포로 오기 전 지하 창고에서 훔쳐온 보검과 천세보혈주를 초로에 놔두고 온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지금 당장 도솔천으로 가서 저승행 배에 오르는 어수룩한 놈 한 놈 골라서 시신을 훔쳐 와야지.”
“그렇군요.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끄응.”
장삼병은 정말 죽이 잘 맞는 구일행과 박수혁을 보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정말 그 스승에 그 제자로구나.’
“마계진마 사부님, 그럼 시체는 언제 빼앗으러 갈까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내 그렇지 않아도 이곳 구천에서 어리벙벙하게 죽은 사람들 시신을 노리며 사는 놈을 알고 있으니 그놈과 동행하면 쉽게 육신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사부님. 근데 혹시 죽은 사람 시신 노린다는 놈이 혹시 왼쪽 눈에 큰 점이 박힌 똥개 새끼를 말씀하시는 건 아니신지…….”
수혁의 말에 뒤돌아가던 장삼병과 옆에 서 있던 구일행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둘은 똑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는데 ‘네가 어떻게 그놈을 아느냐?’란 표정이었다.
“아…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리벙벙한 시신 중에 저도 포함되지 않겠습니까, 헤헤헤.”
‘그 똥개 새끼… 무공을 익히면 가장 먼저 손봐주마.’
구천을 흐르는 망자들의 강에서 걸어서 반 시진 떨어진 곳에는 깊은 계곡을 따라 어두컴컴한 동굴이 하나 있었다. 금방이라도 야수가 튀어나올 것 같은 동굴은 안개를 헤치고 나아가면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동굴 안에는 말라붙은 해골에 살점이라곤 몇 점 되지도 않는 좀비들이 오뉴월 소불알처럼 늘어진 채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폭염 속의 일꾼들처럼 축 늘어져 쉬고 있었다.
“키르륵, 키르륵.”
“무슨 일이야?”
“키륵,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어.”
“뭐?”
한쪽 눈에 커다란 점이 박힌 강아지 한 마리가 팔자 좋게 늘어져 자고 있다가 네 다리를 동시에 곧추세우며 발딱 일어섰다.
“누가 온다는 거지? 혹시 파수꾼들은 아닐 테지?”
“키르륵, 인간이다. 간만에 포식하겠는걸. 키륵.”
좀비들이 서서히 앙상한 뼈마디로 힘겹게 일어서기 시작했다.
안개를 뚫고 세 명의 신형이 모습을 드러내자 좀비들은 그들을 향해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런 그들을 바둑이가 말리고 나섰다.
“아서, 저분들은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시다. 구천에서 신선으로 불리는 분들이야.”
바둑이는 그들을 만류하고 동굴 밖으로 나가 장삼병과 구일행을 맞이했다.
“어이쿠, 신선 어르신들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로…….”
강아지는 앞발을 들어 비볐다.
인간의 동작과 비슷한 강아지의 몸짓을 보며 수혁은 웃음을 터뜨렸다.
“견자야, 어째 잘살고 있느냐?”
장삼병이 바둑이의 안부를 묻는다.
“뭐, 신선 어르신들의 보살핌 덕분에… 헤헤헤.”
잽싸게 내려놨던 앞발을 다시 들어 비비는 모습이 한두 번 비벼본 솜씨가 아니었다.
“견자야, 각설하고 말하겠다. 망자의 강에 가서 어수룩한 시신 하나 건져 와야겠다.”
“예?”
“뭐가 예야? 잘 알면서. 장사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구일행은 그런 바둑이를 호되게 나무랐다.
“그것이, 요즘은 통…….”
“네 이놈!”
구일행의 일갈에 동굴 천장의 먼지가 무너져 내렸다.
“아, 알겠습니다. 어떤 시신을 원하십니까? 혼이 살아 있는 시신은 부활이 가능하굽쇼, 혼이 죽은 시신은 부활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이곳 구천에서 헤맬 몸뚱이만 필요한 경우에는 굳이 혼이 살아 있는 시신까진 필요 없습죠. 헤헤헤.”
“영혼은 살아 있으니 필요 없다. 몸뚱이만 있으면 돼.”
“그렇다면 어렵지 않죠. 그런 시신들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그런데 누가 쓰실 건데요?”
바둑이는 눈을 굴리며 구일행과 장삼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젊은이의 혼백이 들어갈 육신이 필요하네.”
“아… 예. 알겠습니다요. 그럼 제가 급히 가서 구해 오겠습니다요.”
바둑이는 지금 당장이라도 망자의 강을 향해 떠날 기세였다.
“그러지 말고 네가 쓸 몸뚱이니 수혁이 네가 따라가서 직접 고르는 게 어떻겠느냐?”
“예?”
‘무슨 일로 노인네들이 내 생각을 이렇게 끔찍이 해주지? 암튼 일리 있는 말이군. 내가 쓸 몸뚱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죠.”
“그럼 젊은이, 나를 따라오시게.”
수혁은 바둑이를 따라 망자의 강으로 향했다.
그러자 바둑이가 촐싹거리며 앞장서서는 붙임성 있게 말을 걸었다.
“근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우리 어디서 만났지?”
“글쎄다, 나도 너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아… 맞다! 몇 년 전에 삼선교 근처 쌍다리 보신탕에서 먹었던 똥개 얼굴이 너하고 똑 닮았던 것 같기도 하고… 하도 많은 멍멍이를 먹어서 누가 누군지 통…….”
“깨갱.”
수혁은 자신의 혼을 훔치려 했던 똥개를 보자 쌍심지를 켜고 으름장을 놓으며 말했다.
보신탕이라는 말에 바둑이는 수혁을 종족의 원수 보듯 쳐다보았다.
“견자야, 시간이 없다. 서둘러라.”
바둑이가 금방이라도 수혁의 얼굴을 향해 뛰어들 기세를 보이자, 구일행이 일갈하며 뒷짐을 진 채 따라 나섰다.
“같이 가시게요?”
“그래, 내 제자의 육신이니 같이 가서 봐줘야지.”
“그럼 나는 먼저 진채로 돌아가 있겠네.”
“그래, 그렇게 하시게.”
“나차태자 사부님,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장삼병은 구일행이 수혁의 뒤를 봐준다니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자신까지 같이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진채로 돌아갔다.
바둑이의 안내를 받은 수혁과 구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망자의 강둑에 다다랐다.
“헤헤헤… 총각, 맘에 드는 걸로 하나 골라봐.”
바둑이의 말이 끝나자 수혁은 강둑에 숨어 죽은 자들의 몸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끄응, 도대체 어떤 시체를 골라야 하는 건지…….”
수혁은 강 주위를 돌아다니는 무수한 망자들을 바라보며 누굴 골라야 할지 고민했다.
“사부님, 저 시체는 어떻습니까?”
“누, 누구? 설마 저 노랑머리 여자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라뇨? 바로 보셨습니다. 저 여자는 어떨지요?”
따악.
“이놈. 하고 많은 시체 중에 왜 하필 여자의 시체란 말이냐?”
“우씨, 왜 때려요? 여자 육체를 빌리면 가슴도 맘껏 보고 또… 흐흐흐흐.”
“이런 썩을 놈!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썩을 대로 썩었구나. 허튼 소리 말고 다른 육체를 찾아봐.”
수혁은 머리에 난 혹을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래, 저 사람이다.’
그의 눈에 들어온 사내는 키가 185센티미터 정도에 딱 벌어진 어깨, 건장한 골격을 가진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서양인이었다.
“사부님, 그럼 저기 저 망토를 걸친 사내로 하겠습니다.”
“이놈, 하필이면 색목인이냐! 같은 동양인으로 하면 안 되겠느냐?”
“싫습니다. 저 사람으로 하겠습니다. 얼마나 신체 건강하고 인물도 훤칠합니까?”
“이놈아, 남자는 인물 아무 소용없다. 능력이 있으면 나머지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게야.”
“이봐, 멍멍아. 저 사람으로 하겠다. 저 사람을 꼬드겨줘.”
수혁은 구일행의 말을 철저히 무시하며 바둑이에게 훤칠한 서양 남자를 꼬드기라 일렀다.
“오케,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바둑이는 망자의 강을 서성거리던 백인 남자의 뒤로 잽싸게 달려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뭘 그렇게 방황하고 있나?”
“헉, 어, 어떻게 강아지가 말을?”
“흐흐, 다들 똑같은 반응이군. 이보게, 이곳은 구천이라는 곳이야. 이승에서 원한에 사무친 자들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떠도는 곳이지.”
“뭐라구요? 구천? 그런 말 처음 들어보는데.”
“내 자네의 억울한 혼을 달래줄 테니 나를 따라오게.”
“억울한 혼을 달래주다니요?”
푸른 눈을 가진 백인 남자는 강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런 답답한 사람! 자네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하겠다는 거야. 어때? 나를 따라올 텐가?”
“그… 그러죠…….”
“자, 빨리 이쪽으로 오시게.”
바둑이는 총총걸음으로 구일행과 수혁이 숨어 있는 쪽으로 왔고 그의 뒤를 따라 백인 남자가 멍한 표정으로 따라왔다.
강아지가 강의 둔덕을 넘고 백인 남자가 바둑이의 뒤를 따라 강 둔덕을 넘으려 할 때 구일행이 백인 남자를 향해 왼손을 쭉 뻗었다.
백인 남자는 둔덕 너머에 있던 구일행과 수혁을 발견하고 놀란 토끼눈을 하다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구일행을 보고 더더욱 놀랐다.
“당신들은 누구……?”
그때 구일행의 손가락 끝에서 세 가락의 지풍이 뿜어져 나가더니 백인 남자의 앞가슴에 있는 세 곳의 혈도를 빠르게 눌렀다.
“사부님? 그, 그것은?”
“왜? 신기하냐? 지금 내가 보여준 기술은 직접 손가락으로 혈도를 찍는 피접타혈이 아니라 대기를 가격하여 혈도를 폐해(閉解)하는 원공타혈이라는 상승 절기니라.”
혈도(血途).
그곳은 인체의 치명적인 급소이기에 티끌만큼이라도 잘못 건드릴 경우 치명상을 입거나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불러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다.
때문에 초절정 고수가 아니면 손끝으로 직접 접촉하여 해혈하거나 점혈하는 경우가 많았다.
구일행의 원공타혈은 먼 거리에서 지풍을 쏘아 폐해하기 때문에 절정의 고수가 아니면 시전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기술이었다.
“어… 억!”
구일행의 원공타혈에 혈도를 제압당한 백인 남자는 머리를 앞으로 한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오, 바로 이 육체다. 근자에 보기 드문 육체를 가졌구나. 얼핏 보면 태양신골지체(太陽神骨之體)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음학천맥(陰鶴天脈) 같기도 하도다. 허나 중원의 골격은 아닌 듯하구나. 어쨌든 이놈의 몸을 빌리도록 하자꾸나.”
사내의 몸을 살피던 구일행의 만면에 흡족한 미소가 가득 찼다.
“자, 놈을 바둑이네 동굴로 옮겨라.”
“예?”
“그 백인을 바둑이네 동굴로 옮기라고.”
“저 혼자서요?”
“그럼, 이 늙은 노부가 할까?”
“허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