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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3 어둠의 씨앗은 위기를 넘기고(4권) (24/51)

chapter 23 어둠의 씨앗은 위기를 넘기고

하늘에 떠도는 눈부시도록 하얀 솜털 구름을 갈아 뿌려놓은 듯한 우시 산맥의 최고봉 마로드야산. 아직까지 그 누구도 밟지 않은 백지장 같은 길에 발자국들이 줄줄이 새겨져 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험난한 길을 두 인영들이 헤쳐 나가고 있는 중이다.

“헉, 헉, 할아버지… 힘들어요.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돼요?”

“프란츠, 그러기에 할아비가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너덜해진 로브-로브라고 하기에는 거의 넝마에 가까운-를 걸치고 설익은 고추 모양의 고깔모자를 쓴 데다, 배꼽까지 내려올 정도로 기다란 회색 수염이 얼굴을 뒤덮고 있어 주름과 눈, 코, 입이 간신히 보일까 말까 한 얼굴의 사내는 이제 열두어 살 돼 보이는 손자를 나무랐다.

“그럼 저보고 어쩌란 말이에요.”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는 프란츠를 오퍼도버는 가엾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오퍼도버, 파이오니아 대륙의 현자이자 마지막 남은 마법 인증서의 소유자. 가단의 오랜 벗이자 가단 못지않은 마법 서클과 영적 능력의 소유자.

과거 공간 여행을 하고 돌아와 경험담을 담은 여행기를 펴낸 것이 화근이 되어 현재는 미트라카 제국 이단 심문관들의 추적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파이오니아 대륙이 발전과 변모를 거듭해오면서 신앙 역시 변화와 발전을 해왔다.

미트라카 제국의 초대 법황청장 에이브러함이 제우베 유일신앙을 포교하면서 미트라카 제국과 법황청은 자신들의 속국과 파이오니아 대륙의 왕국, 공국들에게 제우베 유일신앙을 전파하고 제우베 외의 다른 신은 인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법황청과 미트라카 제국은 파이오니아, 헬벤타리아, 베리사드의 세 대륙으로 구성된 달라수아별 이외의 다른 우주, 다른 생명체들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다른 우주, 다른 공간, 다른 세계를 여행했다는 오퍼도버의 여행기는 파이오니아의 질서, 제우베 신의 이름 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대륙 현자의 오랜 벗인 오퍼도버는 대륙 최고의 실력자를 친구로 뒀음에도 불구하고 이단 심문관의 추적을 받게 된 것이다.

오퍼도버는 손자 프란츠를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젊었을 시절, 이계로의 공간 여행 도중 파수꾼들에게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후로 혼자서 손자 프란츠를 돌보았다.

부모 없이 할아비 밑에서 커온 손자였기에 더욱 손자 녀석이 안쓰러운 것이다.

“이곳에서 쉬면 발에 동상이 걸릴지 모른다.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인 히에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으니 조금만 더 참거라.”

“할아버지는 정말, 체력도 좋네. 나처럼 어린애도 이렇게 죽을 지경인데 어떻게 할아버지는 지치지도 않는 거야?”

“헐헐헐, 녀석… 프란츠, 조금만 더 힘내거라.”

“응, 알았어.”

마로드야산의 강한 바람 때문에 프란츠의 옷이 휘날렸다. 바람 때문에 옷이 펄럭거리자 프란츠의 왼손 소매가 헐렁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오퍼도버의 손자인 프란츠가 외팔이라는 의미였다.

“자, 이제 됐다. 마로드야산의 설원은 여기서 끝이란다.”

“에휴, 살았다. 헉헉… 할아버지, 나 추워.”

“그래, 알았다. 조금만 기다려보거라.”

오퍼도버는 등에 지고 있던 짐을 벗어놓은 후 주변 나무의 잔가지를 꺾어 쌓았다.

“할아버지, 뭐 하는 거예요?”

“우리 손자 춥다고 하니까 불 피워주려고 하는 거지. 조금만 기다려보거라.”

오퍼도버는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양손을 펼쳐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Й”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주문들이 끝나자 양손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그는 손에 있는 불길을 이용해 모닥불을 지폈다.

“와, 역시 우리 할아버지는 대단하다니까.”

설원을 벗어난 숲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며칠 전 미트라카 제국의 총사령관인 헤르라트 마틴과의 만남을 회상했다.

시나 왕국과 인접한 드로그바의 왕국 스타안. 해안국가로 동방의 이스트리와의 교역을 통해 파이오니아 7개 국가 중 미트라카 제국에게 가장 많은 공물을 바칠 정도로 부를 자랑하는 왕국이다. 반면 왕국 서북부에 위치한 차라 마을은 왕국의 부와는 거리가 먼 한가로운 농촌마을이다.

계단식으로 형성된 밭들 사이로 꿈틀대는 지렁이 같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한 떼의 인마가 한가롭게 여행 중이었다.

“쥐새끼들이 따라붙었습니다.”

“그냥 모르는 척 내버려둬.”

인자한 표정 속에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을 간직한 중년 사내는 바로 옆에서 그를 보좌하고 있는 사내에게 건조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두에 선 두 사내를 뒤따르는 수행 기사들은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검병을 쥐고 있던 손의 힘을 풀며 긴장을 풀었다.

오솔길을 병풍처럼 둘러싼 보리밭에서는 복면을 쓴 사내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까지 신경을 쓰며 인마들을 미행하고 있었다.

“저 노인이 진정 미트라카 제국의 총사령관이라는 말입니까?”

“그렇다.”

복면을 쓰고 있는 사내들 중 한 명이 고참 격으로 보이는 자에게 의아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좀 전부터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물었다. 그리고 단호한 그의 대답에 따지듯이 물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시골 노인처럼 보입니다. 진정 저자가 대륙의 유일한 소드 마스터란 말입니까?”

“무식한 놈, 옛말에 큰 뜻은 나약해 보이며 진정한 영웅은 겁쟁이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 옛날 미트라카 제국의 침략을 칼 하나로 막아냈던 파콰즈 장군은 큰 뜻을 위해 길거리 시정잡배들의 다리 밑을 기는 수모도 감수하셨다. 너처럼 자신의 기를 뽐내려는 듯 과시하는 녀석은 결국 적들의 타깃이 되어 집중 포화를 맞겠지. 하지만 저 제국의 발톱을 감춘 호랑이 헤르라트를 봐라. 저 은은한 미소 뒤에 전쟁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찬사가 부끄럽지 않은 가공할 만한 오러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럼…….”

헤르라트를 얕잡아 보던 사내는 그에 대한 찬사를 들으며 그를 응시했다.

“그렇다. 당초 계획을 변경한다. 지금 상태에선 저들을 공격하더라도 승산이 없다. 숲 어귀의 2진과 함께 기습으로 저들을 제압한다.”

“알겠습니다.”

두건 사이로 드러난 황색 피부와 검정색 눈동자, 그들이 주고받는 언어로 볼 때, 그들은 동방의 통일 제국 이스트리의 암살자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왜 스타안 왕국의 시골 마을까지 쫓아와서 미트라카 제국의 최고 사령관인 헤르라트 마틴을 노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솔길 옆의 보리밭에 숨어 있던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자취를 감추며 숲으로 사라졌다.

“놈들이 사라지는데, 쫓을까요?”

제국의 사령관 헤르라트의 충복이자 남작의 작위를 받은 타라키는 헤르라트의 명령만 떨어지면 곧장 암살자들의 뒤를 쫓을 기세로 그의 의중을 물었다.

“타라키, 자네는 매사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흠이야.”

“그… 그런가요?”

“이것 보라고. 이것도 농담인데 진지하게 반응하잖아.”

“아… 예.”

헤르라트 마틴은 자신을 노리는 암살집단의 추적이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되는 양 미소를 잃지 않은 채 한가로이 말을 몰아 오르막길을 올랐다.

산골 마을인 차라 마을 입구의 아담한 숲에서 이스트리의 자객들은 뱀처럼 휜 칼을 들고 곳곳에 숨어서 헤르라트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은 땅속에 숨고 또 몇몇은 쭉 뻗은 침염수의 나무기둥에 매달리고, 나머지는 아름드리나무 뒤에 몸을 감추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숲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던 이스트리의 암살자 중 한 명의 등 뒤에서 기다란 수염이 배까지 자란 노인이 얼굴을 자객의 귓가에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지금 뭣들 하고 있는 겐가? 이곳으로 누가 오는 모양이지?”

너무도 작고 조그맣게 소곤거리는 소리에 자객은 귀가 간지러웠는지 귀찮다는 듯 그 말을 무시하다가 기척도 없이 자신의 등 뒤에 사람이 다가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뒤를 바라봤다. 거기에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노인 한 명이 천진난만하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객에게 다가와 있었다.

“웬 놈이냐?”

자객은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다가 고요를 깨버렸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는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노인 때문이라는 표정으로 노인을 쏘아보며 칼을 빼 들었다.

츄킹!

“어허, 이런, 이런… 자네 고향에는 경로우대, 노인공경도 없는 모양이지?”

사람 좋은 얼굴을 한 노인은 여전히 실실거리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가우지, 뭐 하고 있는 거야? 곧 있으면 목표물이 다가온다. 빨리 그 노인을 해치워버려.”

이스트리의 암살자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는 가우지라 불리는 부하를 나무라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죄송합니다.”

가우지는 우두머리에게 고개를 숙인 후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칼을 돌려 바라본 곳에는 방금 전까지 있던 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나를 찾는 겐가?”

‘헉, 이 할아범은 도대체…….’

낌새도 없이 다가온 것도 놀라웠지만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자신의 등 뒤에 다시 나타난 노인을 발견하자, 암살자는 당황했다.

“이 노인네가 죽으려고 환장했나.”

암살자는 회색 수염을 가진 노인을 향해 검신이 뱀처럼 휘어진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칼은 파공성을 내며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정말 노인을 공경할 줄 모르는 놈이구나.”

노인은 땅바닥을 차고 오르며 한 손을 뒤로 뺀 뒤, 사내의 가슴까지 파고들어 손바닥을 암살자의 복부에 댔다가 뗐다.

노인이 무슨 마법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이스트리의 암살자들에게는 단순하게 손을 댔다 뗀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암살자의 몸은 허공으로 떠올라 5, 6미터를 날아가 떨어졌다.

“마법사?”

우두머리의 눈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마법사라는 말에 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니들이 복호장(伏虎掌)을 알아?”

‘복호장? 그게 뭐지? 요즘 같은 시대에도 마법사가 남아 있다니. 헤르라트를 치기도 전에 복병을 만났구나.’

우두머리는 속으로 생각하다가 그를 향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저놈을 먼저 쳐라.”

“허허, 제 죽을 줄 모르고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놈들이구나.”

노인이 혀를 한번 차자, 그의 손으로 숲의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가 싶더니 조금 전보다 더욱 강렬한 기운이 그의 손에서 뻗어 나왔다.

한낮의 박쥐처럼 숨어 있던 동방의 암살자들이 회색 수염의 노인을 향해 회오리처럼 달려들었다.

팔목부터 손가락까지 자색의 구형 기를 뿜어내던 노인은 파리를 낚아채는 두꺼비 혓바닥처럼 사방으로 손을 뻗치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암살자들을 향해 벌처럼 파고들었다.

우지끈.

퍼억!

암살자들의 복면과 입 주위가 붉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불에 탄 각다귀처럼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암살자들은 흰 눈동자를 위로 드러내며 선혈을 토한 채 즉사해버렸다.

“다… 당신의 정체가… 뭐요? 그 무시무시한 마법은… 또 뭐……?”

우두머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노인이 저승사자로 보였다.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라도 한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손을 툭툭 털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려 하기 전에 그대의 안부를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으이.”

“……?”

알 수 없는 말에 우두머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를 보게나.”

노인의 말에 우두머리는 그제야 자신의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를 파악하고 부리나케 칼을 꼬나들었다. 그러나 어느새 헤르라트 마틴의 충복이자 사령관의 경호원인 타라키의 검이 그의 어깨에 꽂혔다.

“크으윽.”

암살자는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스트리의 졸개들, 감히 네놈들이 대 미트라카 제국의 총사령관을 암살하려 들었단 말이냐?”

치익!

“무슨 이유로 우릴…….”

어깨를 찔러 누르던 검에 한껏 힘을 줘 우두머리를 짓누르던 타라키는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우두머리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제국의 기사들에게 사로잡혀 심문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 것이다.

숲의 입구에서는 눈부실 정도로 하얀 깃털을 가진 백마를 탄 헤르라트 마틴과 수행기사들이 숲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사령관님, 죄송합니다. 암살자의 두목이 자진했습니다.”

“타라키, 늘 말했지만 매사에 너무 진지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놈들은 나와 자네들을 노렸을 테고, 목적이야 뻔한 것 아니겠나?”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사과는 나중에 하고 우선 내 오랜 벗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일 듯하네.”

헤르라트 마틴은 맞은편에 서 있는, 회색 수염을 기르고 너저분한 초의를 입고 있는 시골 노인을 인자한 눈으로 바라봤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미트라카 제국의 남작 타라키 티버입니다.”

타라키가 한 팔을 정중하게 무릎 위에 올린 상태로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읍하자, 말에 타 있던 수행기사들도 부리나케 뛰어내려 시골 노인에게 예를 갖추었다.

“오퍼도버, 이 얼마 만인가?”

“글쎄, 하도 오래돼서 기억이 나지 않는군. 솔직히 자네가 내 친구라는 사실도 잊고 지냈을 정도니까. 그런데 자네, 내 벗이라는 사람이 친구를 보고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단 말인가? 귀족이 되더니 사람이 달라졌군. 그러니까 사람이 출세하면 건방져진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허허허, 이거 미안허이.”

헤르라트 마틴은 망토를 펄럭이며 테라랜드의 드워프들아 손수 만들었다는, 미트라카의 상징인 황금 사자가 각인된 등자를 밟고 백마에서 내렸다.

“헤르라트 마틴, 오퍼도버 님께 인사 올립니다.”

“그래그래, 친구라면 그렇게 예의를 갖춰야지. 미안하네만 나는 천한 몸이라 성은 없다네. 그저 오퍼도버라고 불러주게. 껄껄껄.”

오퍼도버는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헤르라트 마틴에게 다가갔다. 마틴 역시 오퍼도보에게 다가갔고, 둘은 중간 지점에서 만나 서로 손을 부둥켜 잡은 후 뜨겁게 포옹했다.

“이런 촌구석까지 오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나, 헤르라트.”

“아니야, 오래간만에 한적한 차라 마을에 오니 옛날 생각도 나고, 또 궁중의 어지러운 권력 암투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너무 만족스러울 뿐이네.”

“자, 모두 일어들 나시게. 오늘은 내 우리집에서 키우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파티를 벌어야 할 것 같네. 허허허, 어서들 가세나. 내 손자놈이 눈이 빠져라 할아비를 기다리고 있을 게야.”

그날 밤, 노릇노릇 익어가는 돼지 바비큐에 곁들인 샤프롱(차라 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붉은색 열매로 산딸기처럼 생겼다) 술 때문에 수행기사들은 곤드레만드레 뻗어버렸다. 그리고 오퍼도버와 헤르라트는 달빛 물든 차라 마을의 숲을 걷고 있었다.

“오퍼도버, 내 자네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왔네.”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으이.”

“그렇겠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침묵을 깨고 헤르라트 마틴이 말을 이어갔다.

“법왕청의 이단 심문관들이 자네를 쫓고 있다네. 각별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훗, 그런 앞뒤 꽉 막힌 놈들은 백 명, 천 명이 와도 무섭지 않아. 내가 두 눈으로 보고, 두 발로 걸으며 경험한 것을 책으로 쓰고 이야기했을 뿐인데 그것이 어째서 신성 모독이라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네. 그리고 제우바 신이 그렇게 전지전능하다면 내가 경험한 그 세계들 역시 제우바가 만들어놓은 세상이 아니겠나?”

거침없이 말하는 오퍼도버를 보며 헤르라트는 난감했다. 국가의 녹을 먹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마고우인 친구에게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심정. 헤르라트는 입 안이 씁쓸했다.

“그래, 그쯤 해두게. 나는 자네와 신앙 토론을 벌이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이 아니니까.”

“그쯤 해두라고? 시공을 초월한 여행을 다니면서 나는 내 아들과 며느리를 잃었네. 공간과 시간의 파수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들은 하나같이 제우바 신의 충복이라고 말했어. 그렇다면 그 이계들도 제우바 신의 인과율이 적용되는 곳이 아니겠나? 나를 잡아 가두려 하는 것은 신앙적인 문제가 아닐세.”

오퍼도버는 거침이 없었다.

“제우바교라는 비대해진 신앙의 이름을 뒤집어쓴 채 권력기관이 되어버린 법왕청과, 미트라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비대한 권력 덩어리가 만들어놓은 기득권과 헤게모니(Hegemony-지배권, 패권, 맹주권 등의 의미), 그런 것들에 나의 책이 방해가 되는 것이겠지. 나의 경험담들이 흐트러뜨리는 것은 안정과 질서가 아니라 그런 더러운 권력 덩어리들이네.”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급진적이며 혁명적으로 들리는 오퍼도버의 말에 헤르라트는 미트라카 제국 군부의 최고 실력자로서 약간은 마음이 상했다.

그러나 그런 신앙과 이데올로기의 차이는 우정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마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미안허이, 오퍼도버. 내 괜한 말을 꺼낸 것 같군. 돌아가서 샤프롱 술이나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보세.”

“헤르라트, 나보다 더욱 이 파이오니아 대륙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한차례의 신들의 전쟁, 그리고 염마대전에 이은 일곱 차례의 종족전쟁을 끝으로 파이오니아 대륙은 그 어떤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과 번영을 이루고 있네. 그런데 누가 이 대륙을 위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네. 내 사견이네만, 현재의 인간은 신 다음으로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어.”

헤르라트의 표정에서 자신감과 함께 비장함이 흘러나온다. 그런 헤르라트의 진지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퍼도버는 큰 소리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핫, 뭐라고? 신 다음으로 강한 군대? 이런, 자네 역시 법왕청의 조사를 좀 받아야겠군.”

“뭐?”

“아… 농담일세, 농담. 하지만 그 강하다는 인간의 군대도 위리놈 앞에서는 어린아이 수준도 안 되지.”

헤르라트 마틴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위리놈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경악하고도 남을 만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위리놈? 위리놈이라고 했나?”

“그렇다네, 위리놈.”

“그 무슨 개소린가?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듣기 거북하군. 위리놈이 어둠의 군단을 이끌고 악의 군주 벨제붑을 위폐시키고, 제우바 신과 그들의 사도들을 향해 더러운 칼끝을 빼 든 게 벌써 천 년 전이네. 그 잔인했던 염마대전에서 선왕이신 키나비께서 제1차 종족 동맹을 결성하고 위리놈의 어둠의 군단을 물리쳤다는 것은 시골 마을의 어린아이들도 아는 이야기일진대,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겐가?”

헤르라트 마틴은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오퍼도버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만 그 미소에 여유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멸협곡에 위폐된 위리놈이 그의 추종자인 섀도우들을 사주해 파이오니아 대륙에 어둠의 씨앗을 뿌렸네. 대륙의 최서단인 시나왕국에 어둠의 씨앗이 잉태된 후 무럭무럭 자란 지 벌써 9년이 되었네. 지금까지는 순박한 시골 마을 사람들 덕분에 마성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그 씨앗이 인간들의 본성을 깨닫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면 희망은 절망이 되고 어린 천사는 달루시아별을 열 번은 파괴하고도 남을 악마로 둔갑할 걸세.”

헤르라트는 차라 마을에 온 후 오퍼도버가 지금처럼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그가 쓴 소설들처럼 허구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법왕청에서 뭐라고 그를 명하든 간에 오퍼도버는 파이오니아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마법사이며 파이오니아 대륙 최고의 영적 능력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은 말게나, 친구. 머지않아 내가 직접 시나 왕국으로 가서 그 어둠의 씨앗을 찾을 것이니.”

“찾아서 어쩌려고?”

“빛의 성질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를 살려둘 것이고, 그 어둠의 마성을 드러내고 각성할 기미가 보이면 자라나기 전에 죽여 버려야지.”

오퍼도버는 ‘죽여 버려야지’라는 부분을 엄청 강조해서 말했다.

“큰일이네, 큰일이야. 제국 황제의 아들은 전쟁광, 머지않아 대륙을 전쟁터로 만들 것인데… 위리놈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니… 큰일이야, 큰일.”

* * *

초록의 나무 위에는 오색 산새들이 지저귀며 히에나 마을의 공동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나 왕국에서 가장 한적한 마을인 히에나 마을은 시나 왕국의 자작 홉킨스의 영지로, 그는 오늘도 아들 드와이트를 데리고 친히 관할 영지인 히에나 마을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 중이었다.

귀족과 천민의 계급 질서가 확연한 신분사회에서 영주인 자작이 일개 천민의 장례식에 참가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나, 영지를 덕으로 다스리겠다는 홉킨스 자작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영지인들의 경조사에 참석해왔다.

마을의 청년들이 수잔나의 관을 묶어둔 흰색 천을 들어 굴처럼 파놓은 무덤 안으로 집어넣자, 울부짖다가 지쳐 있던 일렉트라는 또다시 울음을 토했다.

“어머니, 어머니, 저도 데려가 주세요. 어허허헝!”

일렉트라는 하늘로 서럽게 울었다. 그녀의 맑고 깊은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보며 마을의 아낙들도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찍었다.

브루스의 장례식을 먼저 끝낸 사람들은 수잔나의 묘를 둘러싼 채 저마다 준비해온 국화꽃을 무덤 안으로 던지며 헌화했다.

몇 번이나 울부짖다가 실신한 일렉트라를 딜란은 헌신적으로 보살피며 그녀의 옆에서 떠나질 않았다. 딜란 역시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누구보다 컸으나 자신의 슬픔은 마음 한편에 묻어두고 일렉트라의 건강을 먼저 살폈다.

“시케르토, 저 여자애는 그럼 고아가 되는 건가?”

“그렇습니다, 드와이트 님. 혹 마음에 드십니까?”

홉킨스의 아들인 드와이트의 시종, 시케르토의 얼굴에는 비열함과 아첨 섞인 간신배의 표정이 가득했다. 그는 연신 손을 비벼대며 주인인 드와이크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시케르토, 그럼 저 일렉트라라는 여자애 옆에 있는 저놈은 누구야?”

“글쎄요, 하는 걸로 봐서는 오빠 같은데 제가 한번 조사해보겠습니다.”

“그래, 한번 조사해봐. 저 여자애, 보면 볼수록 예쁘게 생겼군.”

귀족의 거만함이 몸에 밴 드와이크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일렉트라를 쳐다봤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제우바시여, 여기 아버지께서 주신 생을 마감하고 이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한 마리 어린 양이 있습니다. 부디 자비로운 마음으로… 커헉.”

한참 기도문을 낭송하던 시골 마을의 목사는 목에 뭐라도 걸린 것처럼 갑자기 신음성을 토했다. 곧이어 그의 입 밖으로 진홍색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꺄아아악!”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던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마을의 공동묘지에서 터져 나오고 순식간에 공동묘지는 지옥으로 변했다.

“몬스터들의 습격이다! 기사들은 모두 전열을 정비해라.”

홉킨스 자작은 몸소 검을 꺼내 들고 숲에서 기어 나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숲 안에서 휴머노이드 몬스터들인 오튜들이 숲을 뚫고 짓쳐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무 등걸처럼 우둘투둘한 피부와 큰 머리에 어울리는 커다란 입, 제멋대로 생긴 눈, 흡반이 달린 2개의 커다란 손을 가지고 있는 오튜(Otyugh)들이었다.

그들은 흡반이 달린 촉수를 이용해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조그마한 손도끼를 이용해 중거리 공격을 하기도 하는 휴머노이드 몬스터였다.

키르륵.

“막아서라! 겁먹지 마라! 이런 시골 마을에 휴머노이드 몬스터라니…….”

영주 홉킨스는 오튜들이 던지는 손도끼를 맞고 쓰러지는 기사들을 보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휘하 기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오튜들의 뒤편 숲에는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몬스터가 팔짱을 낀 채 전투를 응시하고 있었다.

“키르륵, 계집아이만 살려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죽여 그들의 피를 만끽해라. 키르륵.”

일반 오튜들과는 달리 풀메탈 갑주를 걸친 치프 오튜는 커다란 입에서 타액을 흘리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저년이 장차 어둠의 세력 판도를 바꿀 계집이란 말이지. 키르륵.”

오튜는 호르수 궁의 술 시종 베에모트의 조종을 받는 몬스터이다. 베에모트는 얼마 전부터 일렉트라의 출생을 파악하고, 그녀가 폐위된 위리놈과 결합하기 전에 그녀를 취해 자신의 세력과 어둠의 힘을 강화하고자 계획을 세웠다. 그런 이유로 오튜들이 한가로운 히에나 마을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홉킨스와 그의 기사들은 근근이 오튜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히에나 마을의 무지렁이 여인들과 청장년들은 들고 있던 삽과 괭이를 내팽개치고 공동묘지 밖으로 달아나다가 날아드는 도끼에 맞아 즉사하고 오튜들의 촉수에 맞아 쓰러졌다.

눈앞의 살육을 보며 일렉트라는 벌벌 떨었고 그런 그녀를 딜란은 온몸으로 감싸며 자신 역시 잔뜩 겁먹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편 설원을 통과한 오퍼도버는 손자 프란츠와 함께 히에나 마을까지 들어와 일렉트라와 딜란의 불타버린 집을 살피고 있었다.

‘이 집인 것 같군. 사악한 기운이 타버린 잿더미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오퍼도버는 일렉트라가 불을 질러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집을 탐정처럼 둘러보고 있었다.

‘저… 저건!”

집을 살펴보던 오퍼도버의 눈에 수잔나 집의 문고리가 들어왔다. 그 문고리는 밖에서 누가 고정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양쪽 가운데만 그을려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잠갔던 모양이군. 그렇다면… 역시…….’

“프란츠, 집 주위를 꼼꼼히 살펴봐. 어딘가에 문을 고정시켜뒀던 쇠뭉치가 있을 게야.”

“예, 할아버지.”

그는 나름대로 추리를 하며 집 안팎을 살폈다.

그가 한참 집을 살펴보고 있을 때, 프란츠가 큰 소리로 자신을 부르며 달려왔다.

“할아버지, 여기 쇠꼬챙이가 있어요.”

“그래? 어디 보자.”

오퍼도버는 프란츠가 들고 온 쇠꼬챙이를 들고 문고리 사이에 끼워보았다. 거짓말처럼 쇠꼬챙이는 그을리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부분에 딱 들어맞았다.

“흠… 이건 의도적으로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불을 지른 거군. 그렇다면 역시 그 아이가…….”

자신의 추리를 일관성 있게 정리하던 오퍼도버는 순간 마을의 뒷산에서 미약한 몬스터들의 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이건 휴머노이드 몬스터들… 프란츠, 너는 여기 있거라.”

“할아버지, 어딜 가시려고?”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 쇠꼬챙이는 남들이 보지 못하게 천으로 싸서 가방에 넣어두고 기다리고 있거라.”

오퍼도버는 프란츠에게 당부한 후 동물 같은 몸짓으로 산비탈을 타고 올라갔다.

마치 하늘을 나는 새처럼 산을 오르던 오퍼도버는 천으로 싸뒀던 봇짐에서 기다란 검을 꺼내 들었다. 오퍼도버의 손에 들린 검이 푸른 검광을 발했다.

키르륵.

히에나 마을 사람들을 습격한 오튜들은 죽어가는 여인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즐거워했고, 홉킨스와 기사들 그리고 드와이트와 시케르토는 점점 좁혀오는 포위망 때문에 뒷걸음질 쳤다. 이내 그들은 일렉트라와 딜란이 벌벌 떨고 있는 수잔나의 묘 부근으로 모여 들었다.

“아버지… 무, 무서워요.”

“드와이트, 너는 귀족의 아들이다. 귀족은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영주민들을 보호하며 여자와 어린아이, 노약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바보처럼 징징대지 말고 검을 뽑아 들고 한 마리라도 더 죽여라. 저들을 살려둔다면 이런 무참한 학살을 또 저지를 것이다.”

“키르륵. 인간치고는 제법이구나.”

강철 갑옷을 입은 치프 오튜가 비웃으며 기다란 손잡이가 달린 배틀액스를 들고 서서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오튜들이 홉킨스의 검에 막혀 섣불리 전진을 못하고 있자 치프 오튜가 직접 병장기를 꺼내 들고 나선 것이다.

“키르륵! 죽어라, 인간!”

체엥!

홉킨스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치프 오튜의 배틀액스를 검으로 쳐낸 후 치프 오튜의 복부에 검을 쑤셔 넣었다.

“없어져버려, 더러운 몬스터 자식.”

“크르르르, 가소롭군. 이런 하찮은 검술로 베에모트 님의 수족인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치프 오튜는 배틀액스를 한껏 치켜든 후 자신의 복부에 검을 쑤셔 넣었던 홉킨스를 찍어 내렸다.

퍼억!

홉킨스의 목과 어깨를 잇는 곳에서 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아버지!”

“영주님!”

기사들과 드와이트가 목덜미를 찍힌 영주를 애타게 불렀다.

“크흐흐, 조무래기들. 모조리 죽여주마! 키르르.”

치프 오튜가 다시금 묵직한 도끼를 들어올렸다. 오튜의 우두머리가 겁에 질린 기사들을 향해 도끼를 내려찍으려 할 때였다.

번쩍.

숲 너머에서 한 인영이 쏜살같이 날아왔다. 곧이어 대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렸다.

얼마 되지 않아 치프 오튜의 몸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그 빛은 정확하게 치프 오튜의 왼쪽 눈에서 오른쪽 옆구리까지 새어 나왔고, 빛이 사라지자 치프 오튜의 몸이 사선으로 절단됐다. 마치 예리하고 커다란 면도날로 양단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츄아아악!

절단된 몸 사이로 피보라가 솟구쳤다.

키르륵, 키르륵.

우두머리가 절단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의 피를 빨던 오튜들이 성난 모습으로 달려들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검을 들고 서 있던 오퍼도버는 달려드는 오튜들을 바라보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팔을 휘저었다.

“노, 놀랍다… 지금까지 저런 검술을 구사하는 인간이 살아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

기사들과 아들에게 부축을 받은 홉킨스는 오튜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몬스터들의 목을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베는 오퍼도버를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꾸에엑.

끄어억.

자색빛을 뿜어내는 오퍼도버의 검은 예리한 검상을 오튜들에게 심어줬고, 검이 빛을 뿜어낼 때마다 오튜들은 목이 떨어져 나가고 몸이 절단됐다.

그 많던 오튜들이 시체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홉킨스가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헝겊으로 솟아나는 피를 지혈하고 있을 때쯤, 오퍼도버는 오튜들을 도륙한 후 홉킨스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 많은 오튜들과 싸웠음에도 그의 이마에서는 고작 땀 몇 방울만이 맺혀 있었고, 호흡과 보폭은 질서 정연하고 가지런했다.

“노, 놀랍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나는 토르의 영주 자작 홉킨스 조르지요. 나의 기사가 되어주시…….”

홉킨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에게 다가온다고 생각했던 오퍼도버가 그를 스쳐 지나가 무덤 쪽으로 다가가더니 일렉트라와 딜란 앞섰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디, 딜란입니다.”

오퍼도버는 딜란에게 오튜보다 더 무서운 존재로 보였다. 그가 마치 살아 있는 살인귀 같았다.

“너 말고 네 품속의 계집아이. 이름이 무엇이냐?”

일렉트라는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오퍼도버의 눈을 피하려 했다.

“나를 봐라, 꼬마야. 네 이름이 뭐지?”

“일렉트라, 평민이기에 성은 없고 일렉트라예요.”

딜란은 말 없는 동생을 대신해 일렉트라의 이름을 오퍼도버에게 가르쳐주었다.

“나를 봐라, 꼬마야. 내 눈을 똑똑히 봐.”

“이보시오, 노인장.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게요?”

영주인 자신은 무시한 채 꼬마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오퍼도버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홉킨스가 물었다.

그때 일렉트라가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불안한 표정으로 오퍼도버를 바라봤다.

‘오호 통재라! 이런 어린아이가 위리놈의 씨앗이라니… 더구나 저 깊은 눈 속에는 어둠의 힘이 꿈틀거리고 있구나. 느껴진다… 가공할 만한 힘의 원천이… 이를 어찌할까…….’

오퍼도버의 양 미간이 찌그러졌다. 그는 긴 탄식을 내뱉었다.

“후우.”

‘어쩔 수 없다. 지금은 한낱 어린아이에 불과하지만 장차 대륙과 이 달루시아를 파괴할 아이. 안타깝지만 여기서 죽여야 한다.’

오퍼도버는 속으로 뇌까리며 검에 기를 불어넣었다.

츠츠츠츠!

순간 검에 기를 불어넣고 있던 오퍼도버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결계(結界), 도대체 누가?”

오퍼도버의 질문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공동묘지를 둘러싸고 있는 숲에서 9명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십자가가 새겨진 모자에 비단 로브를 입고 손에는 제우바 교의 성서를 들고 있는 자들. 흰색 도포가 시릴 정도로 눈부신 아홉 명의 사내들. 법황청의 이단 심문관.

이단 심문관의 등장에 홉킨스와 그의 기사들, 그의 아들과 시종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너희들은……?”

“그렇다, 오퍼도버. 너를 법황청의 이름으로 체포한다.”

하지만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던 오퍼도버의 눈에는 다시금 여유가 돌아왔다.

“나를 체포해? 무슨 이유로?”

“네 이놈! 이계 여행 운운하며 혹세무민한 죄, 전지전능하신 제우바 님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신앙을 모독한 죄를 네놈이 더 잘 알지 않느냐?”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오퍼도버는 이단 심문관에게서 등을 돌리고 검을 들어 일렉트라의 목을 치려고 했다.

“제우바의 힘이여, 저 버림받은 불쌍한 양을 잠들게 하소서. 홀리 슬립(Holy sleep)!”

“미친놈들, 파이오니아 대륙에서 나를 잠재울 수 있는 마법은 없어!”

자신에게 걸려오는 신성 마법을 무시하며 오퍼도버의 검은 일렉트라의 목덜미까지 파고들었다.

“허억, 어떻게 이런 일이…….”

풀썩.

오퍼도버는 눈앞에서 일렉트라를 놔두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어떻게 하찮은 이단 심문관이 나를 잠재울 수 있단 말이냐?”

오퍼도버는 이단 심문관들을 매섭게 노려본 후 두 발에 힘을 주어 슬립 마법진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아깝다, 악의 씨앗을 처치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저런 멍청한 것들 때문에 기회를 놓치다니.’

오퍼도버는 입맛을 씁쓸하게 다시며 공동묘지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 그를 아홉 명의 이단 심문관들이 신성검을 꺼내 들고 뒤쫓았다.

“하찮은 것들이 어디서 까부는 게냐?”

오퍼도버는 자색 검광을 뿜어내며 그를 포위해 들어오는 이단 심문관들과 검을 맞부딪쳤다.

채챙!

허공에서 검들이 부딪치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아직 멀었어! 나를 잡으려면 십 년은 더 수련해야 하겠는걸.”

오퍼도버는 어린아이들과 장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을 중점적으로 파고드는 아홉 개의 검날을 가볍게 맞받아쳤다.

“이노옴! 오퍼도버, 그만 무릎을 꿇고 법황청의 칙명을 받들라.”

그렇게 오퍼도버가 이단 심문관들과 어울려 검무를 추고 있을 때, 갑작스레 하늘이 어두워지며 이단 심문관의 수관인 휘들리의 모습이 일순 라이베로스로 변했다.

신성 권력의 상징이자 미트라카 제국의 황제 마이어스를 능가하는 권력과 부를 거머쥔 자, 라이베로스는 제국의 대법황이자 제우바 교의 최고 신성이다.

오퍼도버의 실력을 아는 이단 심문관들은 그들의 힘으로는 오퍼도버를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여 이번에는 대법황 라이베로스의 권능을 빌려 그를 체포하려 하는 것이었다.

“크윽, 실로 놀라운 위력이다. 이 늙은이가 대법황 라이베로스인가?”

오퍼도버는 힘껏 검을 휘둘러 포위망을 뚫은 후 반대편으로 몸을 날려 대법황의 권능을 벗어나려 하였다.

“홀리 홀드!”

이단 심문관 수관 휘들리의 몸을 빌린 대법황은 신성 마법 주문을 걸어 오퍼도버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이런… 대법황의 마법의 위력은 실로 명불허전이로구나.”

“지금이다. 놈을 포박해라!”

이단 심문관들은 오퍼도버를 포위해 들어오며 대법황의 권능이 부여된 세인트 로프로 오퍼도버의 몸을 칡넝쿨처럼 휘감기 시작했다.

“제… 젠장!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저… 악의 씨를 이젠 어떻게 한다……?”

허공에 뜬 채 법황청의 성 포승줄에 감긴 오퍼도버는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놈을 법황청의 지하 감옥으로 이송해라.”

“예.”

준엄한 명령을 내린 대법황 라이베로스는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고 이단 심문관의 수관 휘들리가 다시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재빨리 오퍼도버에게 다가가 포박된 그를 미트라카 제국 방향으로 이송할 준비를 끝마쳤다.

그리고 휘들리는 전음을 통해 미트라카의 대법황 라이베로스와 교신했다.

“위리놈의 씨앗을 어떻게 할까요?”

“네놈이 손댈 문제가 아니다. 이단자를 데리고 법황청으로 철수하라.”

“예, 알겠습니다. 대법황님.”

이단 심문관들은 오퍼도버를 포박한 채 공동묘지에서 유유히 사라져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지켜보던 홉킨스와 그의 식솔들 그리고 딜란과 일렉트라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몸서리를 칠 뿐이었다.

한편 일렉트라의 집 앞에서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프란츠는 몇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 때문에 슬슬 화가 났다.

“우리 할아버지 또 시작이다. 이번에는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나는 어떡하라고. 에휴, 내가 정말 못살아.”

외팔이인 프란츠는 투덜거리면서 허공을 응시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 프란츠는 히에나 마을로 오던 중 할아버지가 했던 말씀을 떠올렸다.

‘프란츠, 이번 여행에서 할아버지가 사라지면 미트라카 제국의 사령관인 헤르라트 마틴을 찾아가거라.’

프란츠는 오퍼도버를 기다리며 하루가 지나도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의 말대로 헤르라트를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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