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6 가자! 미드랜드로! (17/51)

chapter 16 가자! 미드랜드로!

흰색과 검정색 대리석이 대비를 이루고 있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일식집 룸에서 강미영과 나는 등받이 의자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회가 나오기 전에 나오는 애피타이저를 먹고 있었다.

“이 집 분위기 괜찮죠?”

“응, 솔직히 이렇게 고급스러운 일식집은 처음이라.”

나는 애피타이저로 나온 요리(일명 스키다시)를 집어먹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몇 번의 음식을 먹고 나자 정식으로 모듬회가 나왔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도미 한 점을 집어 넘칠 정도로 담아 놓은 초장에 잠수시키듯이 넣었다가 입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강미영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왜? 왜 웃어?”

“오빠, 혹시 회 먹을 때 초장 맛으로 먹어요?”

무슨 그런 걸 물어보지? 그거야 당근 빠따 아냐?

모름지기 회는 초장에 푹 담가서 질겅질겅 씹다가 꼴깍 삼키는 그 맛으로 먹는 거지. 특히 전라도 홍어는 특유의 쏘는 맛 때문에 초장을 많이 묻히지 않으면 먹기 힘들다.

“그럼 미영은 무슨 맛으로 먹는데?”

“회 먹을 때 초장 맛이나 와사비 맛으로 먹는 사람은 회 맛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일식 요리에 보면 이런 생강들이 같이 나오잖아요.”

미영은 접시 위에 예쁘게 잘라 놓은 붉은색의 생강을 가리켰다.

“그래, 그런 거야 항상 같이 나오는 거지.”

“그럼 이게 왜 나오는 건지 알아요?”

내가 그걸 알면 일식 요리사 하지 게임 하고 있겠냐?

“아니, 모르겠는데.”

“이런 생강은 여러 가지 회 요리를 먹을 때 전에 먹은 회의 잔맛을 없애주기 위해서 먹는 거예요. 입 안 청소를 해서 다음 회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말이에요.”

“그래?”

그렇구나. 아, 촌놈 또 박 터졌다. 그래도 나는 일편단심 초장 맛이다.

나는 미영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초장을 찍어 먹었다. 사람은 모름지기 지조가 있어야 한다.

“제가 유심히 관찰해보니까요, 수혁 오라버니는 잔머리를 잘 쓰시는 것 같아요.”

‘허허, 서울 사람들 말본새 봐라. 오빠한테 잔머리라는 불경한 용어를 사용하다니.’

“왜?”

“그냥 아까 고요의 협곡으로 중국인들을 몰아넣는 것도 그렇고, 게임 하는 것도 그렇고.”

“미영아, 너는 오락신동, 게임의 제왕의 천재적인 전략 전술을 잔머리라는 무례한 보케블러리로 잔인하게 폄하하는데 그건 나를 두 번 죽이는 짓이야.”

“호호호, 정말 오빠 어휘 한번 거창하군요. 오빠 같은 사람이 왜 아직도 백수인지 모르겠어요.”

“맞아. 나도 내가 왜 백수건달인지 모르겠어.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면 항상 미스터리가 있는 법이더라구. 내가 백수인 이유를 모르겠는 것처럼, 미영이 너도 꼭 있을 것 같은데 남자친구가 없잖아. 나는 미영이 네가 남자친구가 없는 이유를 모르겠어.”

“호호호호.”

이번에는 미영도 입을 가리지 않고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오빠, 프로젝트 끝나면 임과장한테 어느 회사 취직시켜 달라고 할 거예요?”

“뭐, 아직 프로젝트가 끝난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세 사람 중 수혁 오빠가 최고의 성과를 거두고 있잖아요.”

“글쎄, 나는 얽매이지 않고 편한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어. 만약 미영이 내 위치라면 어느 회사 취직 부탁할 거야?”

“막상 물어보니까 어려운 문제다. 국정원이나 사이버 수사대 같은 회사는 싫어요. 왠지 위험할 것 같아요.”

얘가 튕길 때는 언제고 또 내 신상까지 걱정해주는 애매모호한 발언을 퍼붓는 거야? 사람 마음 싱숭생숭하게시리.

“그럼 어떤 회사가?”

“뭐 그냥 돈 많이 주면서 편한 회사가 좋겠죠. 호호호.”

그때 일식집 천장 모서리에 매달린 TV에서 저녁뉴스가 흘러나왔다.

“제7차 6자회담이 결렬된 후 제8차 6자회담의 돌파구를 찾기 위한 한반도 주변국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저놈의 회담은 언제 끝나는 거지?’

나는 뉴스를 들으며 횐지 초장인지 구분이 안 가는 회 한 덩어리를 입에 집어넣었다.

수혁과 미영이 두 번째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사이, 파이온 안에서는 선동적인 대자보 같은 글이 중국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서버 게시판에 올라와 있었다.

‘중원 대륙의 힘을 보여주자. 한족(漢族)이여, 파이온에서 한국인을 응징하자’ 라는 제하의 게시판 글의 내용은 이랬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한국 게이머들의 무차별한 중국 게이머 PK를 우리는 그동안 단순한 게임으로 치부하며 애써 참아왔다. 그러나 최근의 한국인들의 PK는 적정선을 넘어섰고, 우리 중국 게이머들을 짱깨, 짱꼴라 등의 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해 조롱하며 파이온 공간 안에서 마주치기만 하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다. 요즘 임파젤 성이나 호다드 성 같은 공성전에서는 해커로 보이는 한국인들이 공성전에 참가하여 중국 게이머 소유의 성을 빼앗아갔다. 이는 명백한 중국에 대한 도발이며 가상공간에서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이다.

중국 수천, 수만 명의 게이머들이 한국인 게이머들에게 아이템과 보유하고 있던 성을 빼앗겼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작태를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궐기하라, 대륙의 동포들이여. 파이온 게임을 즐기고 있는 이들은 파이온 최대의 대륙 라마바담으로 집결하라. 또한 주변 친구들에게 파이온 게임에 가입시켜 이번 라마바담에서 중국인들의 무서운 힘을 보여주자.

사랑하는 대륙의 아들딸들아, 파이온 게임에 접속해라. 파이온 천하에 중국인들의 붉은 기가 펄럭이도록 하자. 더 이상 그들에게 당하고만 살 수는 없다. 모여라, 라마바담으로. 나가자, 미드랜드로.]

각종 서버 및 파이온 전체 게시판에까지 도배가 된 그 글의 조회 수는 무려 170만을 넘겨 당일 조회수 최고를 차지했으며 댓글 역시 수천 개가 달려 있었다.

[그래, 한꾸어 개쇄이들을 죽여야 해.]

같은 동조성 댓글들이 부지기수였으며…….

[짱깨들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또다시 공한증을 느끼게 해주마]

와 같은 반박성 글들도 상당수를 차지했다.

물론 수천 개의 댓글 중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어휘는 단연코 ‘랏사드’였다.

닉네임 치오타의 글로 올라온 이 글은 중국의 CCTV 뉴스로 방영될 만큼 이슈가 되고 있었고, 중국의 인터넷 뉴스, 심지어는 신문에까지 게시판의 글과 파이온 게임에 관한 기사거리가 핫이슈로 떠올랐다.

* * *

서울 김씨소프트사 빌딩 안에서 김씨소프트 상의 분석팀장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사장님, 중국 내에서 파이온 게임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입니다.”

“그래, 내가 뭐라고 했어. 중국 내 반한 감정을 적절하게 이용하라고 했잖은가.”

“예, 역시 사장님은 현명하십니다. 지금 인터넷 가능하시면 중국 포털 사이트에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포털 사이트마다 대서특필하고 있습니다.”

“사장님, 이제 수백만 중국인들이 파이온에 가입하겠죠?”

“잘했어, 이팀장. 아주 잘했어.”

일본에 출장 중인 박민규 사장은 김씨소프트 사의 시장 분석팀장인 이팀장과 통화를 하며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지난 회의에서 중국 내 반한 기류를 조장하라는 박민규 사장의 지시를 받은 이팀장은 중국 지사에 비밀리에 지령을 내려 중국인의 아이디로 그런 선동성 글을 올리게 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게시판의 글은 계속되는 공성전 패배와 중국 게이머 PK에 열 받아 있던 중국 게이머들에게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고, 온라인상에서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그들의 조직은 우후죽순 격으로 파이온 게임에 가입하거나 접속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게시물이 파이온 대륙에 몰고 올 바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 * *

로타카 대륙으로 가는 또 다른 길목인 망각의 분지에 있는 망각의 마을에 미스릴 풀 플레이트에 황금빛 투구를 걸친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망각의 마을은 사냥터로 알려진 곳이나 언제부턴가 고수들 간의 일대일 결투가 잦아지면서 사냥터보다는 비밀스러운 결투장으로 변모해갔다.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들이 없잖아.’

엘리트PK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망각의 마을을 거닐며 게이머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는 파이온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중국 게이머 치오타의 게시물을 읽지 못한 듯했다.

“쿠쿠쿠, 손님이 없어서 나도 이제 이곳을 뜰까 했는데 다행히 네놈이 왔구나.”

망각의 마을을 걷고 있는 엘리트PK 앞에서 오크 파이터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흥, 아무도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 엘리트 님의 고수 PK 기록을 보탤 놈이 하나 있었네.”

“크크크, 미친놈.”

찢어진 눈 아래로 삼각형 모양의 문신이 새겨진 오크 라이더 싸이프레스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엘리트PK를 비웃었다.

“요즘 망각의 마을 인기가 많이 떨어졌네. 너 같은 하수가 이런 곳에 남아 있는 걸 보니.”

엘리트PK는 싸이프레스의 비위를 건드리며 서서히 그의 샤이닝 소드를 끄집어냈다.

“하수? 이 새끼가. 네 눈에는 내가 하수로 보이냐? 3단계 전직을 끝낸 오크 라이더가 하수면 도대체 고수는 누구라는 거야, 이 미친놈아.”

“흥, 파이온의 진정한 고수는 오직 하나, 바로 이 엘리트PK 님뿐이지.”

스르릉.

“엘리트PK, 네놈 명성은 우리 노블레스 사이에서도 자자하지. 실력은 쥐뿔도 없는 새끼가 아템발만 세우고 다닌다고. 킥킥.”

“뭐, 이런 개자식이!”

엘리트PK는 아템발이라는 말에 마치 도둑이 제발이라도 저리는 것처럼 화를 내며 샤이닝 소드로 땅을 찍었다.

“덤벼, 이 개자식아!”

“킥킥, 미들랜드 성을 친다기에 간만에 라마바담으로 갈까 했는데 그 전에 몸 풀 기회가 생길 줄이야. 놀아 주마, 꼬마야.”

스르릉.

‘헛, 외관만 보고 허접한 자식인 줄 알았는데 저것은 드래곤 크러셔(Dragon crusher)!’

엘리트PK는 싸이프레스가 꺼내는 파이온 아이템 둔기 중에서 최고의 클래스를 자랑하는 드래곤 크러셔를 보며 적잖이 놀랐다.

<드래곤 크러셔>

종류: 둔기 / 착용: 양손 / 등급: S / 물리공격력: 370 / 공격범위: 39

양 도끼날에 스파이크가 촘촘히 박힌 드래곤 크러셔는 외관만으로도 주눅이 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크 파이터 중 최고의 무위를 자랑하는 오크 라이더의 양손에 들린 그 무식한 둔기는 거만한 엘리트PK를 조금은 긴장하게 했다.

“어울리지 않는 무기를 들었구나, 돼지코 자식아.”

“킥킥, 오크에게 도끼가 어울리지 않다니? 그보다는 네놈이 입고 있는 미스릴 갑옷이나 황금 투구가 더 어울리지 않아.”

그는 마지막 단어에 힘을 주며 드래곤 크러셔를 휘둘렀다.

빠카앙!

갑작스런 선제공격에 엘리트PK는 황제의 방랑자 방패를 들어 육중한 드래곤 크러셔의 공격을 막아냈다.

‘무시무시한 힘이다. 황제의 방패가 밀리다니…….’

엘리트PK는 뒤로 물러서면서 다시 한 번 드래곤 크러셔의 위력에 놀랐다.

“키키, 맛이 어떠냐? 아마 컨트롤러가 바르르 떨렸을 테지. 황제의 방패가 아니었으면 너는 이미 가루가 됐을걸?”

싸이프레스는 엘리트PK에게 쉴 틈조차 주지도 않고 두 손으로 거머쥔 크러셔를 휘둘러왔다.

파창!

엘리트PK는 백스텝을 밟으며 방패와 검을 이용해 크러셔를 막아내며 공격할 타이밍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육중한 둔기를 휘두르는 싸이프레스는 어찌나 힘이 좋았는지 커다란 스윙을 하면서도 좀처럼 빈틈을 내주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황제의 방패가 남아나지 않겠는걸.’

“상승 스킬, 실드 스피어.”

엘리트PK는 황제의 방랑자 방패를 이용해 사용할 수 있는 상승 스킬인 실드 시피어를 이용해, 좌우로 찔러 오는 싸이프레스를 향해 마치 방패를 창처럼 찔러 넣으며 싸이프레스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곧 S등급의 아이템들이 부딪치자 마을 주변에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피어올랐다.

“제법이구나. 뒤로 밀려나면서 방패로 공격을 할 생각을 하다니”

‘돼지 같은 놈이 힘만 좋은 게 아니라 스피드도 제법이잖아.’

“어디 이것도 막아봐라. 상승 스킬, 세븐 스트레이트.”

엘리트PK가 실드 스피어에 이어 세븐 스트레이트로 거대한 바위처럼 움직이는 싸이프레스를 향해 7번의 찌르기를 집어넣으며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샤이닝 소드라야만 시전이 가능한 일곱 번 찌르기는 황금 용이 석양을 머금고 비상하는 듯한 형체를 풍기며 싸이프레스를 압도해 들어갔다.

촤촤창!

싸이프레스는 발목에서부터 왼쪽 어깨 상단으로 찔러 들어오는 엘리트PK의 세븐 스트레이트를 양손으로 쥔 크러셔를 장난감 휘두르듯, 하나의 찌르기도 놓치지 않고 모두 막아냈다.

‘이런, 전혀 공격이 먹히질 않아.’

“왜? 뜻대로 공격이 안 되냐? 그럴 테지. 지금까지 진정한 적수를 못 만나봤을 테니까. 캬캬.”

회심의 일격이 빗나가자 엘리트PK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서면서 균형을 잡았다. 그런 그를 향해 싸이프레스는 맹호처럼 달려들었다.

“슬슬 끝내 볼까? 오크 라이더 상승 스킬 크러셔 크래쉬.”

[크러셔 크래쉬: 물리 공격력 - 254]

크러셔 크래쉬는 적에게 강력한 데미지를 가함과 동시에 방어력과 마법저항력을 대폭 삭감시켜버리며 상대를 쇼크 상태에 빠트리는 상승 스킬이다.

파캉.

“우왓.”

그때 싸이프레스의 크러셔 크래쉬를 받아낸 황제의 방랑자 방패가 내구성이 다해 유리창처럼 조각나버렸다.

그 틈을 뚫고 육중한 크러셔의 날이 엘리트PK의 오른쪽 어깨를 찍고 들어왔다. 방패가 박살나자 급하게 회피 동작을 취했으나 엘리트PK의 오른쪽 어깨에 박힌 크러셔의 날은 기어이 뼈를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엘리트PK는 곧바로 후진 스텝을 밟으며 헬스와 힐링을 이용해 감소된 HP를 복구시키면서 인벤토리에서 강화 미스릴 방패를 꺼내 들었다.

“GG다. 너를 진정한 아템발로 인정하노라.”

싸이프레스는 황제의 방랑자 방패에 이어 호화 아이템인 강화 미스릴 방패를 꺼내드는 엘리트PK를 보면서 감탄성을 터뜨렸다.

“기왕이면 아템발보다는 명품족이라고 해주지 그래?”

엘리트PK는 자신의 아이템을 보며 혀를 내두르는 싸이프레스를 향해 드로우 나이프를 연속적으로 던졌다.

채챙.

그러나 싸이프레스는 엘리트PK가 던진 단검들을 야구공 쳐내듯이 쳐버렸다.

“왜? 밑천이 바닥났냐? 나 지금 라마바담으로 가봐야 하니까 그만 끝내자.”

“꺼져!”

엘리트PK는 샤이닝 소드에 공격력을 배가시키는 스킬인 마스터리를 불어넣은 후, 파워 스트라이크와 페이탈 블로우를 섞어 싸이프레스의 크러셔를 뚫고 들어갔다.

“캬캬, 멍청한 놈. 리버스 포지션.”

“……?”

파워를 배가시킨 엘리트PK의 연타 공격을 싸이프레스는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버리는 리버스 포지션을 이용해 엘리트PK의 등 뒤로 이동한 후, 그의 무방비 상태인 등을 향해 크러셔를 휘둘렀다.

퍼퍼퍽.

“……!”

선명한 진홍빛 선혈이 미스릴 풀 플레이트를 뚫고 뿜어져 나왔다.

HP가 급감하는 엘리트PK를 향해 싸이프레스의 크러셔가 미친 듯이 날아들었다. 엘리트PK는 날아드는 크러셔에 대한 적절한 방어보다도 닳아지고 있는 HP를 회복시키기 위해 엘리멘탈 힐과 헬스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미 탄력을 받은 싸이프레스의 둔기에는 양손 둔기의 공격력과 크리티컬을 강화하는 상승 시킬이 걸려 있었다.

“FUCK.”

싸이프레스의 공격력을 다 감당해내기에는 엘리트의 회복 스킬이 역부족이었다.

“크러쉬 프롬 헬.”

오크 라이더 최강의 공격 스킬 크러쉬 프롬 헬이 엘리트PK의 머리에 작렬했다. 곧 엘리트PK의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던 황금빛 투구가 두 조각나면서 엘리트PK의 머리에서 분수처럼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싸이프레스, 다시 한 판 붙자. 이 개새끼야.”

엘리트PK는 일대일 대결에서 패배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싸이프레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엘리트PK 님의 아이템 크리스, 황제의 투구, 인피니티 디바이더가 드롭되었습니다.]

“케케, 미친놈. 다시 덤벼도 소용없어. 너는 이미 내 상대가 아냐. 다른 데 가서 알아봐. 나는 라마바담으로 갈 거야. 그럼 잘 놀았다. 꼬마야, 빠빠이.”

싸이프레스는 엘리트PK의 쓰러진 시체를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 유유히 드롭된 아이템을 챙겨 망각의 마을을 떠나버렸다.

철퍼덕.

분을 참지 못한 김민우는 차고 있던 파이온 컨트롤러와 헤드셋을 집어 던졌다. 애꿎은 기기가 책상 밑으로 떨어져 굴렀다.

“Shit, Fuck.”

지금까지의 차분한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욕설을 거침없이 토해내며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김민우는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기 위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우.

왈칵.

“누구세요?”

“나야, 박만호.”

‘젠장!’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왜 시키지 않는 짓 하고 다니면서 아이템 떨구고 그러는 거야?”

“쯧.”

불쾌함이 역력하게 배어 있는 혀 차는 소리.

“이런 버릇없는 자식, 그 아이템들이 얼마짜린 줄 알아?”

“얼마짜린데요?”

박만호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자신의 실수와 과오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꾸하는 김민우의 얼굴을 보면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 이런… 싸가지 없는 자식, 어쩌다가 너 같은 놈이…….”

“얼마짜리냐구요? 변상하면 될 것 아닙니까.”

“뭐? 이… 이…….”

박만호는 손을 들어 김민우의 뺨을 후려치려다가 분노를 누르고 꾹 참았다. 오랜 사회생활을 해온 사람답게 참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쳇, 용기도 없으면서. 그간 고마웠수다. 아이템 값은 우리 아버지 비서 시켜서 갚아드리죠. 여기 아니면 게임 할 곳이 없는 줄 아세요? 젠장, 간만에 편안한 환경에서 게임에만 몰두하나 했더니.”

“너 이 자식, 회사에서 지급한 아이템은 모조리 압수야!”

그는 방문을 걷어차며 나가버렸다. 김민우가 나가자 박만호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민우가 둥지를 떠났습니다.”

“뭐요? 최상조야 그렇다 치지만 김민우까지 빠져서야 프로젝트가 잘되겠습니까?”

“어차피, 뭐 그 두 놈은 있으나 마나였으니까요. 나름대로 김민우가 중국, 일본, 미국의 고수들을 자극해서 회원 가입과 파이온 홍보에 기폭제가 되길 바랐는데 실력도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허어, 박수혁은 어떻습니까?”

“그는 잘해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김민우가 프로젝트를 다 알고 있는데 저대로 내버려둬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요.”

박만호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의 입을 막아둘 비책이 있으니까요.”

“어떤?”

박만호가 궁금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민우 집안의 범법 행위들에 대해서 이미 정보들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것을 미끼로 그를 묶어두면 되겠죠. 김민우 아버지의 조세 포탈이라든가, 김민우에 대한편법 증여, 그의 대학 입학 비리라든가…….”

박만호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프로젝트는 이제 어떻게 할까요?”

“현재 우리 기관 분위기도 썩 좋지는 않습니다. 국장님뿐만 아니라 원장님까지 궁지에 몰려 있어요. 어찌됐든 초심을 잃지 말고 박수혁 한 명으로라도 프로젝트를 이어가세요. 임과장님께서도 나름대로 히든카드를 준비 중이시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딸깍.

세 명의 에이전트로 시작했던 광개토 대왕 프로젝트는 삼각 편대의 두 축이 무너지면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최상조를 이용해 내국인 작업장을 색출하려는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으나, 중국의 고수들을 제압해가면서 파이온 최고의 자랑인 듀얼리스트 시스템을 홍보하고 동시에 중국 아이디 도용 및 해킹 세력까지 색출하려 했던 김민우 카드는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박수혁만은 프로젝트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김씨소프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었다.

특히 박민규 사장의 반한 감정을 이용해서 공격적 마케팅을 펼치겠다는 생각은 사태를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

파이온 가상공간 최고의 대륙 라마바담은 연일 뜨거운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큰일 났어. 중국의 동맹 놈들이 미드랜드 성을 상대로 공성전을 선포했어.”

“동맹 규모가 엄청나다면서?”

“하여튼 짱깨 새끼들은 무조건 쪽수로 밀어붙이려고 한다니까.”

라마바담 대륙에는 게시판에 올라온 선동글 이후, 미드랜드 성을 상대로 중국 게이머들이 선전 포고를 한 것에 대한 논란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뿐이 아냐. 일본 동맹과 미국 동맹도 이번 공성전에 가담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뭐? 뻥까지 마. 지금까지 관망만 하던 그 자식들이 왜 공성전에 가담해?”

“분위기가 그렇다니까. 최근 여기저기 돌아다녀봤는데 그 자식들끼리 뭔가 우호적인 분위기더라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전국의 고수들을 미드랜드로 끌어 모아야 돼.”

“미드랜드 성주는 뭐 하는 거야? 전 서버의 고수들을 미드랜드로 끌어 모아야지.”

“당근이지. 미드랜드가 무너진다면 파이온 대륙을 중국 놈들에게 내주는 거나 마찬가지야.”

“헤이샤르의 초청이 있기 전에 먼저 미드랜드로 가는 건 어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파이온 최고의 성, 미드랜드.

파이온 게임에서 동시 접속자 수, 아이템 거래 규모 등을 포함해 가장 큰 성인 미드랜드는 현재 한국의 게이머인 헤이샤르가 성주로 있는 성이었다.

파이온 게임 최초로 영웅의 자리에 오른 헤이샤르는 명실 공히 파이온 최고의 마법사였다.

파이온 공간의 중심에 자리 잡은 라마바담 대륙의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미드랜드 성.

헬모어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은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도개교가 있고, 방어를 위한 거점만도 12곳이나 되며 성 밖의 아웃워크만 해도 24개다.

세 겹의 아웃워크를 뚫고 들어오면 내성이 있었는데 이 역시 층별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어지간한 대군으로는 성을 점령하기 어렵게 설계되어 있었다.

지금 그 미드랜드 성의 킵 안에서 성주 헤이샤르를 비롯한 혈맹군주들이 중국의 대장정 동맹이 선포한 공성전에 대비해 회의를 하고 있었다.

“결코 짱깨들은 미드랜드 성을 뚫을 수 없어.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그렇지만 게시판에 글이 올라온 후로 짱깨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다잖아. 규모도 장난 아니래.”

“그래 봐야 우리 상대가 안 돼. 더구나 여긴 호다드나 쿠엔 같은 허접한 성이 아냐.”

미드랜드 성주 헤이샤르를 중심으로 그를 둘러싸고 앉은 성의 혈맹 군주들은 저마다 소견을 이야기하며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파이온 최고의 성답게 혈맹 군주들 역시 파이온 안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이름 있는 혈맹의 군주들이었는데, 람세스 혈의 헤르미온, 연금술사 혈맹의 바하츠, 드림캐쳐의 테아나, 라스트 히어로의 매칼파인 등 파이오 서버의 커뮤니티를 항상 뜨겁게 달구는 고수들이었다.

미드랜드 성의 성주이자 파이온 공간의 최초의 영웅인 헤이샤르는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때 연금술사 혈맹의 바하츠가 각 대륙과 서버의 영웅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해서 피력했다.

“우리로는 안 된다니까, 각지의 영웅들을 불러 모아야 해.”

“참, 짱깨들이 와봐야 몇 명이나 오겠어. 미드랜드 성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방어벽이야. 놈들은 제1아웃워크도 넘지 못할 걸.”

람세스 혈맹의 헤르미온은 자신 있는 어투로 미드랜드 성의 높은 성채를 자랑했다.

“문제는 짱깨들만이 아냐. 만에 하나 일본, 미국까지 공성전에 연합군으로 가담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떠도는 루머일 뿐이야. 놈들이 중국에 붙는다는 구체적 정황은 하나도 없어.”

“그만, 그만. 우리들끼리 떠들어봤자 무슨 소용이야. 헤이샤르, 네 뜻은 어때?”

기다란 탁자의 한 끝에 앉아 있는 헤이샤르는 드림캐쳐 혈맹군주 테아나의 질문에 오랫동안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각 서버, 각 대륙의 게시판을 이용해 격문을 띄워 파이온의 모든 영웅들을 미드랜드로 집결시켜. 이번 미드랜드 수성전은 파이온 최고의 대전이 될 거야.”

“역시 헤이샤르야. 그래, 잘 생각했어.”

“꼭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지만 우리야 뭐 성주가 하라는 대로…….”

람세스의 헤르미온은 한발 더 나가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헤이샤르 성주, 성주가 직접 영웅들을 초대한다면 각 서버와 대륙에서 짱깨들과 싸우고 있는 영웅들이 우리 미드랜드 성으로 달려올 거야.”

“야, 헤이샤르가 나서서 초대할 필요까지 있을까? 또 초대한다면 누구를 초대해야 하는 건데?”

“그거야 지금부터 인터넷을 뒤져서 찾아내면 되는 거고. 내 생각에는 요즘 파이온에서 슈퍼 루키로 급부상하고 있는 랏사드를 초대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헤르미온의 제안에 몇몇 군주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랏사드? 그거 괜찮겠다. 최근 유명세도 타고 있으니까 그가 참전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많이 몰려들지 몰라.”

“그래, 그거 좋겠다. 랏사드를 불러라.”

“랏사드? 그게 누군데?”

미드랜드의 성주인 헤이샤르는 랏사드의 이름을 처음 들었는지 헤르미온을 쳐다보며 물었다.

“랏사드라고, 최근에 짱깨들 PK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게이머야. 레벨은 좀 처지지만 실력은 굉장하다더라.”

“이 기회에 쥬다스 혈맹의 쥬다스 프리스트도 부르자.”

혈맹군주 중 누군가가 최상조의 혈맹인 쥬다스 동맹의 이름을 꺼냈다.

“쥬다스 프리스트 그 자식은 안 돼.”

“왜?”

“그 자식 플레이에는 팀워크가 없어. 돈에 환장한 놈이야, 그 자식은.”

“그래도 그만큼 다크엘프 마법사를 잘 운용하는 플레이어도 드물지.”

“파라오 혈맹의 헤라클레스나 사자 혈맹의 크리스도 있잖아.”

“이러다가 이거 쟁쟁한 실력자들이 미드랜드로 다 모이는 거 아냐?”

“하하하, 짱깨들하고 한바탕해볼 만하겠는데. 이름난 선수들 다 구경할 수 있겠어.”

“왜 그런데 아무도 엘리트 혈맹 이야기는 안 하냐?”

“엘리트PK? 그 개자식 이야기는 하지도 마. 저번에 용의 비늘 퀘스트 잠깐 같이했는데, 완전 싸가지 없는 새끼야. 그런 자식은 와봐야 사기나 떨어뜨릴걸.”

“하하하하!”

“자, 같은 이야기 그만들 하고 어서 그럼 초대할 사람들 초대장 보내고 서버 게시판에 빨리 빨리 격문을 띄우자. 이제 미드랜드 공성전도 며칠 남지 않았어.”

“좋았어. 한번 가보자고.”

미드랜드 성의 킵 안에서 성주와 기사들은 파이팅을 외치며 중국의 대장정 동맹을 비롯한 대군이 신청한 공성전에 대해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라마바담과는 로타카를 가운데 끼고 제법 떨어져 있는 대륙인 디부아르 대륙에 한 떼의 인마가 성을 빠져나왔다.

핏빛 깃발을 든 기수가 선두에 서서 성문을 빠져나오자 수천의 군사들이 그 뒤를 따라 음식물을 나르는 개미 떼처럼 열병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블러디 나이츠 동맹의 상징인 핏빛 깃발이 바람의 방향을 알린다.

“메드니스, 이건 옳지 않아.”

“무슨 소리야, 선젝터. 지금 파이온의 모든 게이머들이 미드랜드를 지키기 위해 라마바담으로 가고 있는데 우리 블러디 나이츠 동맹이 가만히 있어야 되겠어?”

“끄응.”

선젝터. 블러디 나이츠의 동맹군주인 그는 어제 올라온 ‘가자~ 미드랜드로’라는 제하의 격문을 보고 달려온 혈맹 군주들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었다.

중국인이 올린 게시물이 화근이 되어 파이온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가고 두 집단 간의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자 임파젤 성에서 돈벌이나 하고 있던 선젝터에게 혈맹 군주들이 미드랜드 수성전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성주가 된 후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던 그에게 기사들의 수성전 참여 제안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돈이 굴러 들어오는데, 굳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놔두고 모험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혈맹인 에버라스트의 좌장이자 자신의 부장인 에스엔에게 임파젤 성을 맡긴 후 블러디 나이츠 동맹을 이끌고 라마바담으로의 장정 길에 올랐다.

‘제길, 아무래도 이건 아냐.’

라마바담으로 가기 위해 그들은 뮤호 마을의 워프 비콘으로 이동했다. 수천의 기사들이 말에 탄 채 워프 비콘을 이용하자 뮤호 마을에는 순식간의 섬광이 가득 찼다.

번쩍.

블러디 나이츠 동맹은 다른 동맹에 비해서 빠르게 이동해서인지, 라마바담 대륙 미드랜드 성 북쪽인 저주의 늪지대에 있는 워프 비콘으로 나왔을 때에는 블러디 나이츠를 제외한 다른 동맹군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가장 빨리 미드랜드에 초대된 것 같은데.”

그러나 중상급 레벨의 동맹인 블러디 나이츠가 미드랜드에 가장 먼저 초대되었을 리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선젝터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자, 단숨에 미드랜드 성까지 달려가자.”

“이리얏!”

두두두두두.

“선젝터, 역시 라마바담이야. 규모나 그래픽이 우리 디부아르와는 비교가 안 되는데.”

“뭐 내가 보기에는 큰 차이 없어 보이는데.”

메드니스와 선젝터는 서로 선두 자리를 놓고 겯고틀며 앞 다퉈 말을 몰아갔다.

선젝터와 메드니스가 선봉을 달리며 블러디 나이츠 동맹을 이끌고 있을 때 늪지대의 고요를 깨뜨리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피리릭, 피리릭.

“웬 놈들이야?”

퍼퍼퍽.

갑자기 블러디 나이츠의 동맹군이 늪지대의 호수를 절반 정도 지났을 때, 갑작스럽게 날아온 암기들에 의해 말에 타고 있던 기사들이 암기에 맞아 쓰러졌다.

그리고 저주의 늪지대를 뒤덮고 있는 썩은 호수 안에서 검은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닌자 길드?”

“쿠쿠쿠.”

선젝터를 비롯한 블러디 나이츠 동맹의 군주들은 호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닌자 길드들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닌자 길드가?”

“쿠쿠쿠, 곧 뒈질 놈이 궁금한 것도 많구나.”

피리릭, 피리릭.

별모양의 표창들이 검은 복면을 쓴 닌자들의 손에서 쉴 새 없이 날아왔다.

퍼퍼퍽.

“끄악!”

“밀집 대형으로 전열을 정비햇!”

선젝터는 방패를 꺼내 들고 날아드는 표창을 막으며 동맹군들을 진두지휘했다.

거리를 두고 끊임없이 날아드는 표창은 방패에 막혀 떨어지기도 했으나, 상당수가 방어막을 뚫고 블러디 나이츠의 기사들의 갑주를 파고들어갔다.

‘일본 놈들이 중국한테 붙었다더니 사실인가?’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서 미드랜드로 입성해야 해. 궁수들은 뭐 해? 놈들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어줘야지.”

밀집 대형을 이룬 방패 뒤로 궁수들이 자리를 잡고 화살을 메기고 있을 때, 호수 위에 있던 닌자들의 모습이 일제히 사라졌다.

“블링크?”

“위험해. 대형을 깨고 흩어져.”

슈슉.

퍼퍼엉.

허공 속에서 몸을 감춘 닌자들은 밀집 대형을 이룬 블러디 나이츠 동맹군의 사방에서 솟구쳐 오르며, 그들을 향해 허리춤에 차고 있는 폭탄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퍼펑, 퍼퍼펑.

“꾸아악.”

그리고 저주의 늪에는 뜯겨 나간 기사들의 살점과 갑주들이 넘쳐 나기 시작했다.

폭탄의 파편에 맞아 찢어진 기사들의 팔다리가 주인을 잃고 늪지대의 호수 안으로 잠기기 시작했다.

“당황하지 마라. 맞서 싸워라.”

레이젠 혈맹의 군주인 메드니스는 프로텍션 실드로 몸을 방어한 후, 자신의 휘하 기사들과 함께 닌자들과 맞서 싸워나갔다.

“일본 최고의 암살 길드인 닌자와 맞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산 사람들이라도 빨리 빨리 미드랜드로 도망쳐야 해.”

반면에 선젝터는 부하들을 이끌고 미드랜드를 향해 내빼기 시작했다.

“뭐야? 선적테. 도망치면 어떡해? 우리와 같이 싸우자.”

“내가 먼저 미드랜드로 가서 지원군을 불러올게. 조금만 기다려, 메드니스.”

“야 이 개자식아, 저런 게 동맹 군주라니.”

“파워 블로우.”

메드니스는 도망치는 선젝터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닌자들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메드니스를 호위하는 기사들은 폭탄과 표창을 던지며 공격하는 닌자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맞서 싸웠다. 찌고 베고 자르는 검들이 저주의 늪을 어지럽게 장식하고 있었다.

죽고 죽이는 처참한 살육전으로 저주의 늪을 싸고 흐르는 망각의 호수는 핏물로 붉게 물들어갔다.

“저항이 만만찮다. 다시 흩어져서 게릴라 전술을 펼치자.”

스스스.

닌자들은 메드니스가 이끄는 레이젠 혈맹의 저항이 상상외로 완강하자 모습을 감추고 호수 너머로 사라졌다.

닌자들이 호수 너머로 사라지자 메드니스는 피 묻은 검을 닦으며 살아남은 기사들을 독려했다.

“가자, 여기서 지체하다가는 쫑날 것 같다. 빨리 빨리 미드랜드로 가자.”

“어쩌다가 일본 놈들까지 미드랜드에 나타난 거야?”

“이 개쇄이들이 완전 작당을 한 것 같은데.”

그들은 저마다 불평을 터뜨리며 늪지대를 빠져나가기 위해 말을 몰았다.

스스스스.

그들이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눈앞에 황색 가루로 된 연기들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슬립 스킬이다. 모두 안티 매직을 사용해.”

“나는 안티 매직이 없는데?”

호수 너머로 사라진 닌자들은 블러디 나이츠의 기병들을 잠재울 슬립 스킬을 사용했다. 마법을 막을 수 있는 안티 매직 스킬을 보유한 자들은 슬립 상태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스킬이 없는 자들은 속절없이 몸이 마비되고 말았다.

피리리링.

또다시 쏟아지는 닌자들의 표창 공격. 그것들은 쉴 틈 없이 레이젠의 기사들을 덮쳐왔다.

“닝기리, 미드랜드에 가기도 전에 다 사망하는 거 아냐?”

촤창.

메드니스는 날아오는 표창들을 걷어내며 혼신의 힘을 쏟았다.

“끌끌끌. 명색이 동맹의 군주라는 자식이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는 꼴이라니.”

“누구냐?”

저주의 늪지대를 벗어나 울지 않는 숲으로 들어선 선젝터의 기병들을 향해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무사의 명예를 모르는 놈이다.”

“무사의 명예 운운하는 놈이 숨어서 모습도 안 나타내냐? 모습을 드러내라.”

선젝터가 들려오는 목소리의 방향을 향해 고함을 치고 있을 때 숲의 끝 쪽에서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무라이?”

투구에 초승달을 달고 있는 이누야마 갑주를 걸치고 반달 모양의 일본도를 들고 있는 사무라이 기사들이 숲의 반대편에서 여유 있게 모습을 드러냈다.

“끌끌끌, 용케 우리 사무라이 혈맹을 알아보는군.”

그동안 일본인들만의 서버에서 주로 플레이하던 사무라이 혈맹이 라마바담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선텍터를 비롯한 동맹원들을 놀라게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앞길을 막는 자는 죽음뿐이다, 이 쪽발이들아.”

선젝터의 부장이 휘하들을 이끌고 말을 달려 사무라이들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갔다. 그러나 빽빽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울지 않는 숲의 침엽수림은 기병대에게는 훨씬 불리하게 작용했다. 좁은 틈에서 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기에는 말의 몸집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슈갓.

쩌어억.

말을 몰아 달려 나가던 에버라스트의 기사들의 몸이 날카로운 일본도에 의해 반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헉, 고수들.”

“케케케, 오늘 네놈들은 여기서 뼈를 묻게 될 것이다.”

사무라이들은 도를 좌우로 빙글빙글 돌리며 기병들을 둘러싸고 있는 포위망을 좁혀 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냥 임파젤 성에 남아 있고 싶더라니.”

선젝터는 무시무시한 사무라이들의 일본도에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며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동맹의 군주가 그렇게 심약해서 어떻게 하냐? 그동안 너를 믿고 게임을 즐겨왔던 동료들을 생각해봐.”

블러디 나이츠의 기사들은 몰아치는 사무라이들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에움을 뚫기 위해 노력했다.

“포커스 블로우.”

말에 올라탄 채로 좁은 침엽수림 사이를 움직이는 블러디 나이츠의 기사들은 다가오는 사무라이들을 향해 포커스 블로우를 날렸다.

여러 명의 적중 한 명만 집중적으로 패는 포커스 블로우가 선두에 선 사무라이의 몸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퍼퍼퍽.

“블러디 나이츠의 기사들아, 명예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자.”

동맹 군주는 이미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전의를 상실했지만 블러디 나이츠 동맹은 끝까지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사무라이 혈맹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블러디 나이츠 동맹은 중수부터 고수까지 골고루 섞여 있는 집단이었고 사무라이 혈맹은 고수들로만 구성된 정예집단이었다. 아무리 용감하게 싸우더라도 지형의 불리함과 실력 차 때문에 블러디 나이츠의 기사들은 하나 둘씩 생명을 잃어갔다.

자신의 부하들이 포위망을 뚫고 싸우고 있는 동안 선젝터는 말에서 내려 숲을 빠져나오기 위해 도망치고 있었다.

“크크크. 그게 동맹 군주의 모습이냐?”

“헉.”

선젝터는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사무라이를 보고 기겁했다.

챙.

그는 검을 빼어 들고 사무라이와 대적했다.

“크크. 가소롭군.”

“닥쳐, 왜놈들이 왜 우리 일에 참견이야?”

선젝터는 마지막 말 꼬리를 높이며 사무라이를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갔다.

파캉.

선젝터의 공격을 막아낸 사무라이가 제비처럼 선젝터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파악.

양손으로 일본도를 들고 정지해 있는 사무라이의 등 뒤로 옆구리에서 피보라가 터져 나오는 선젝터의 모습이 보였다.

철퍼덕.

선젝터는 들고 있던 장검을 버리고 이도류를 꺼내 들었다.

“켈켈, 사무라이를 상대로 이도류라… 후후, 웃기는군.”

“타합.”

숲의 한편에서 날카로운 금속 무기들이 충돌하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후후, 한국의 동맹 군주 실력이 이 정도뿐이냐?”

이도류를 피하며 선젝터의 몸을 사분해버린 사무라이는 피 묻은 자신의 도를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선젝터의 육중한 몸이 선혈을 뿜어내며 산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자, 한국의 동맹군들을 싹 쓸어버려라.”

챙. 챙.

침엽수들이 기둥처럼 솟아 있는 숲 속에서 병장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무했다.

슈슈슈슛.

블러디 나이츠 동맹군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무라이들의 포위망이 점점 좁히자, 숲 사이로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화살들이 날아왔다.

퍼퍼퍽.

“아악!”

“누구냐?”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동료 사무라이들을 부축하며 사무라이 혈맹은 블러디 나이츠에 대한 포위망을 풀며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닌자들에게 쫓기던 메드니스의 레이젠 혈맹의 기사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저 자식들 아직 안 죽었어? 어떻게 닌자들의 사술망을 뚫었지?”

“닌자 새끼들, 뭣도 아니더만.”

“헤헤헤, 그러게. 니들 동료 닌자들은 이미 호수에 대가리 처박고 물고기 밥이 되어 있지.”

레이젠 혈맹 기사들의 등 뒤로 장궁을 메고 있는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휴먼 궁수들로 구성된 사자 혈맹이, 포효하는 사자의 깃발을 들고 웃고 있었다.

“저 자식들은 또 뭐야?”

“어허, 파이온 게임 하면서 아직까지 우리 사자 혈맹을 모른단 말이야?”

“이거 서운한데. 자, 놈들한테 우리 사자 혈맹을 뼛속까지 각인시켜주자고.”

크리스의 지시가 끝나자 사자 혈맹의 전사들은 일제히 활시위에 활을 메겼다.

“이… 이런…….”

“지금이다. 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쓸어버리자.”

사자 혈맹과 레이젠 혈맹의 등장으로 위기를 모면한 블러디 나이츠의 기사들은 그간의 억눌림을 깨고 사무라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그들의 용맹을 지원이라도 하듯이 사자 혈맹의 화살촉은 사무라이들의 갑옷을 꿰뚫고 들어갔다.

퍼퍽.

슈슈슈슈.

울지 않는 숲에서 사무라이, 레이젠, 에버라스트, 사자 혈맹이 뒤섞여 어지러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의 고수들로 구성된 사무라이도 사자 혈맹의 등장으로 조금은 당황하긴 했지만 금세 전열을 정비하고 블러디 나이츠 동맹과 사자 혈맹을 맞아 호각을 이뤄나갔다.

“켈켈, 활을 주무기로 쓰니 접근전은 불리하겠지?”

사무라이 한 명이 갑주를 걸친 채 도를 휘두르며 사자 혈맹의 맹주인 크리스를 향해 파고들었다.

“과연 그럴까?”

크리스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살을 뽑아 적들에게 날리다가 자신의 가슴 안으로 파고드는 사무라이를 보자 들고 있던 화살로 그 사무라이의 목을 쑤셔버렸다.

“커헉!”

목을 파고드는 화살촉 때문에 힘이 빠져 무릎을 꿇는 그의 정수리를 향해 크리스는 두 개의 화살을 메긴 후 그대로 발사했다.

콰지직.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사무라이의 투구를 뚫고 들어간 두 개의 화살은 놈의 머리를 관통해버렸다. 화살이 박힌 사무라이의 모습은 마치 꼬치에 꿰인 음식 같아 보였다.

크리스는 사무라이의 대갈통에 화살을 박아 넣은 후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또 다른 사무라이들을 향해 뒤로 물러서면서 연거푸 화살을 쏘았다.

피링, 피링.

그러자 눈앞까지 다가오던 사무라이들은 재빠르게 화살을 쏘는 크리스 때문에, 지척에서 그를 놓친 채 화살에 관통된 채로 죽어갔다.

“대단하다. 일찍이 저처럼 활을 자유자재로 쓰는 자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자, 할 수 있다. 사무라이들을 때려죽이고 빨리 미드랜드로 가자.”

어지러운 난전 속에서 누군가가 파이팅을 외치자 블러디 나이츠와 사자 혈맹원들의 사기가 올랐다.

사자 혈맹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메드니스도 사력을 다해 사무라이들을 베어갔다.

그가 들고 있는 헤비 레기온은 광채를 발산하며 사무라이들의 일본도를 제압해 들어갔고, 그가 밀릴 듯싶으면 어김없이 사자 혈맹의 화살이 그를 지원해줬다.

“이런 어이없는… 후퇴해야 될 것 같아.”

사무라이들은 협공을 받자 점점 뒤로 밀리면서 쫓기기 시작했다.

“사무라이에게 후퇴는 없어. 여기서 명예롭게 죽는다.”

“그래, 빨리 뒈져라.”

그런 사무라이들을 향해 블러디 나이츠 동맹의 거침없는 공격이 이어졌다.

전선을 구축하고 싸우는 사무라이들과 기사들이었지만 그 싸움은 사무라이들에게 훨씬 불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닌자들을 잃은 그들은 원거리 지원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무하는 동맹군의 검날을 미처 막아내지 못한 사무라이들은 하나 둘씩 생명을 잃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몇몇의 사무라이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동맹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오래지 않아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사자 혈맹의 화살이 그들의 온몸을 밤송이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끄응, 분하다.”

무릎을 꿇고 신음성을 흘리는 사무라이의 머리채를 잡은 메드니스는 자신의 헤비 레기온으로 목을 내쳤다.

댕강.

초승달 모양의 투구를 쓰고 있던 사무라이의 머리가 울지 않는 숲에 떨어졌다.

“휴, 힘겨운 싸움이었어.”

“그나저나 피해가 너무 컸어. 도대체 몇 명이 죽은 거야?”

“사자 혈맹의 크리스 님, 너무 고맙습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모두 전멸했을 거예요.”

메드니스의 인사에 크리스는 혈원들을 통솔하며 그에게 답했다.

“아직은 끝난 게 아닙니다. 어서 빨리 미드랜드로 들어가죠. 지금 북쪽뿐만 아니라 각 지에서 미드랜드로 들어오는 길이 막혀 있을 겁니다. 그들을 도와줘야 해요.”

“그래, 어서 미드랜드로 가서 체력을 회복시키고 병장기를 손질하자. 머지않아 공성전이 시작될 거야. 전열을 정비해야 해.”

“가자, 미드랜드로.”

블러디 나이츠 동맹과 사자 혈맹은 고함을 지르며 미드랜드 성을 향해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각, 아시리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아시리아의 영웅 질리언 혈맹의 세라줄루도 미드랜드 수성전에 동참하라는 격문을 보고 동료들을 이끌고 미드랜드의 남쪽인 플로렝스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왜 이리 조용해? 진짜 여기가 머지않아 대단위의 공성전이 열린다는 미드랜드의 남성 지역이 맞아?”

“그러게. 희한하네.”

“잠깐, 세라줄루. 뭔가가 있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

쿠쿵, 쿠쿵.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대한 물체가 땅을 밟는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그리고 플로렝스 마을의 지붕 너머로 10미터가 넘는 크기의 소환수인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골렘이다. 피햇!”

엄청난 크기의 소환수인 골렘은 육중한 몸이 시뻘건 화염으로 뒤덮인 파이어 골렘이었다.

“내가 소환수를 불러낼 동안 놈을 좀 막아줘.”

질리언 혈맹의 군주인 세라줄루는 소환수를 불러내기 위해 주문서를 외웠다.

그동안 질리언 혈맹의 전사들은 화염을 토해내는 골렘의 공격을 피하면서 마을 곳곳 담벼락으로 숨어 다니며 간헐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퍼억.

“우왓.”

크기만 어지간한 말보다 큰 골렘의 불타는 팔에 맞은 질리언 혈맹의 전사는 허공에 뜬 채 몇십 미터를 날아가 마을에 있는 나무에 부딪혀 즉사했다.

“세라줄루, 아직 멀었어? 피해가 너무 커.”

“조금만 더 버텨줘.”

퍼퍽.

위에서 내려다보며 공격을 퍼붓는 파이오 골렘은 발밑을 피해 다니는 질리언의 전사들을 그 무식한 발로 밟아버렸다.

골렘의 발에 깔린 전사는 뼈마디가 부러져 피범벅이 된 채로 죽어버렸다.

“물의 정령이여, 워터 골렘을 불러다오.”

스스스스.

세라줄루가 주문서를 다 끝마치자 땅바닥에서 물기둥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파이어 골렘과 맞먹는 크기의 워터 골렘이 소환되었다.

“가라, 워터 골렘, 저 화염 덩어리를 박살내버려.”

콰쾅.

마을의 한복판에서 거인 같은 두 골렘이 서로의 몸통을 부여잡으며 충돌했다.

동작이 조금 느리긴 하지만 워낙 힘이 센 소환수들이었기에 그들의 충돌만으로도 마을이 들썩거렸다.

“크워어.”

포크레인 삽이 내리찍듯이 세라줄루의 소환수인 워터 골렘이 파이오 골렘을 내리찍었다.

치지지직.

불과 물의 맞대결.

워터 골렘의 펀치에 파이어 골렘의 몸을 감싸고 있는 화염이 급속도로 식어갔다.

“잘한다, 워터 골렘.”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냐.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자.”

탁탁탁.

질리언의 용사들은 세라줄루의 소환수가 골렘을 막고 있는 사이, 마을을 벗어나 미드랜드 성의 남쪽 평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앞에 한 무리의 인마가 나타났다.

“이것들은 또 뭐야?”

“흐흐, 우리는 일찍부터 대장정 동맹의 사주를 받고 미드랜드의 남쪽을 지키고 있었다. 한 놈도 통과시키지 말라는 분부가 있었다.”

질리언 혈맹의 눈앞에는 켈티르를 타고 있는 중국의 기병대들이 오와 열을 맞춰 정렬한 채로 미드랜드의 남쪽 방향을 틀어막고 있었다. 늑대처럼 생겼지만 덩치는 호랑이만 한 켈티르를 탄 기병대의 한가운데에 오크 서머너로 보이는 자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저 자식이 방금 파이오 골렘을 소환한 서머너인 것 같은데.”

“흐흐흐, 너의 소환수도 제법이더군. 하지만 네놈들은 오늘 여기서 뼈를 묻게 될 게다. 가라, 혈마대의 전사들아.”

“이라호.”

자신들을 혈마대라 소개한 켈티르 기병대는 두목의 지시가 떨어지자 쏜살같이 켈티르를 몰아 질리언 혈맹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하필 세라줄루가 소환수를 불러내 MP가 부족한 상황에서…….”

“휴먼 메이지들의 파워를 보여주자. 놈들을 싹 쓸어버려.”

“파이어 플레임.”

질리언 혈맹의 부군주인 바비 소울은 MP가 부족한 세라줄루 옆에서 그를 호위하며 달려오는 켈티르 기병들을 향해 파이어 플레임을 발사했다.

그러자 미드랜드 남부 평원에는 난데없이 하늘에서 불꽃 덩어리들이 소나기처럼 내리치기 시작했다.

퍼엉.

퍼엉.

화르르륵.

“께게.”

바비 소울이 시전한 파이어 플레임 화염 덩어리들은 대포알처럼 켈티르 일행을 찍어버렸고, 물밀듯이 달려오는 기병들은 화염덩어리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보석의 정령들아, 무식한 늑대 새끼들에게 에메랄드 송곳을 내려다오. 블리자드.”

계속되는 바비 소울의 마법.

하늘에서는 불꽃 덩어리에 이어 기다란 수정 모양의 보석들이 마치 창과 얼음송곳처럼 쏟아져 나왔다.

“으아악.”

“겁먹지 마라. 놈들은 몇 안 되고 우리는 수천의 기병대다. 계속해서 달려라.”

동료들이 블리자드의 보석 송곳에 찔려 죽어가고 불꽃 덩어리에 죽어가도 켈티르 기병은 속력을 늦추지 않고 달려 나왔다.

“수적으로 너무 불리해. 바비 소울, 그러지 말고 일단 후퇴해야겠어.”

“제길, 뭣들 하고 있어. 놈들이 다가온다. 겁먹지 말고 싸우자구.”

채채챙.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적들을 향해 질리언 혈맹의 전사들은 칼과 창을 꺼내 들었다. 켈티르의 발굽에 평원의 흙들이 파헤쳐졌다.

질리언 전사들의 눈에 켈티르 일행이 내달리며 뿌려대는 흙먼지가 선명히 들어왔다. 지축을 흔드는 소리마저도 긴장으로 두근대는 심장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질리언의 기사들은 손에 쥔 검과 창을 바투 잡았다.

“쓸어버려.”

“와아아아.”

질리언의 기사 중 누군가가 함성을 지르며 창을 들고 달려 나간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수많은 전사들이 켈티르 기병을 향해 달려들었다.

퍼퍼퍼퍽.

질리언의 기사는 기다란 창을 아래에서 위쪽으로 사선으로 그어 올렸고, 그를 향해 달려오는 켈티르와 기사들의 몸이 창날에 감겨 찢겨 나갔다.

그러나 처음부터 보병은 기병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박력 넘치던 기세도 시속 6,70이 넘는 가속도가 붙은 기병대의 공격을 막아낼 순 없었다.

“크악!”

“제길, 소환수만 불러내질 않았어도.”

“이대로 미드랜드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건가?”

푸루루.

그때 남쪽 평원 우측에서 선명히 들려오는 말들의 투레질 소리.

“세라줄루, 이거 꼴이 말이 아닌데?”

“헤라클레스! 이거 완전 지옥의 문턱에서 구세주를 만난 기분인데!”

“킥킥, 명색이 질리언씩이나 되가지고 그깟 조무래기들에게 그게 뭐냐? 그게.”

다…각, 다…각, 다각, 다각다각, 다가각.

조금씩 좁혀 들어오는 말발굽의 소리는 어느새 천지를 뒤엎어 놓을 고동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가자, 파라오의 기병대들아. 늑대 새끼들이나 타고 돌아다니는 저 허접한 자식들을 단숨에 쓸어버리자.”

파라오 혈맹의 헤라클레스는 등 뒤에서 자신의 헬 비스트를 꺼내 들고 적진을 향해 치켜들었다.

성난 파도와 같은 기병대의 물결은 산을 삼키고 하늘을 찌를 기세로 켈티르 기병대를 측면에서 덮쳐 들어갔다.

콰콰콰콰.

“깨개갱.”

“이거 원 늑대 새끼들이 아니라 개새끼들이네.”

“닥치는 대로 죽여라. 후군을 위해 남쪽 길을 터야 한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켈티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서 찍어 내리는 파라오 기병대의 창은 어부가 물고기를 꼬챙이로 꿰듯 찍어 넘겼다. 파라오 혈맹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전황이 역전되어버렸던 것이다.

평원의 한복판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혈마단의 오크 서머너는 그제야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감을 직감하고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마나를 끌어 모았다.

“웃기는군. 너는 내 차지야. 플레이밍 서클!”

마나를 끌어 모으는 오크 서머너를 향해 MP를 회복하고 있던 헤이샤르가 플레이밍 서클을 발사했다. 서커스에 나오는 불 고리 같은 것들이 오크 서머너를 감싸고 돌았다.

“이런…….”

상대방의 마법 능력치를 떨어뜨림과 동시에 적을 불태워버리는 플레이밍 서클 때문에 오크 서머너는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보았다.

“크크, 저기 불 고리에 휩싸인 놈이 우두머리인가?”

파라오의 군주인 헤라클레스는 말머리를 돌려 불 고리 안에서 괴로워하는 오크 서머너를 향해 달려갔다.

“여기 파라오 기병대의 헤라클레스가 간다.”

두두두두두.

싹둑.

헤라클레스는 헬 비스트를 휘두르며 오크 서머너의 목을 두 동강이 내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적진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적군들을 유린해나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질리언의 전사들은 파라오 기병대의 등장으로 위기를 모면해가며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켈티르 기병대를 요절내기 시작했다.

미드랜드의 남쪽 평원에 켈티르의 깨갱거리는 소리와 중국 전사들의 비명이 넘쳐났다.

북쪽에서는 크리스의 사자 혈맹과 블러디 나이츠 동맹이 길을 트고, 남쪽에서는 파라오 혈맹과 질리언이 활로를 열어 미드랜드로 향하는 한국의 게이머들은 속속들이 미드랜드 성을 향해 집결해 나갔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쎄미트리는 혈원들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여보세요?”

“나야, 쎄미트리. 도대체 뭐 하고 있노?”

“왜 또 무슨 일인데 그래?”

“무슨 일? 지금 한가하게 잠이나 퍼 잘 때가? 지금 라마바담에 난리가 났으니까 우리도 빨리 라마바담으로 가야지. 지금이야말로 혈의 눈물의 깃발을 펄럭일 때 아이가.”

“그래? 무슨 일인데.”

“지금 중국 놈들이 미드랜드 성을 상대로 공성전을 선포해서 모든 대륙의 전사들이 미드랜드로 모이고 있다니까.”

“아… 알았어. 나 지금 접속할게. 근데 랏사드랑 다른 혈원들한 테는 연락했어?”

“기래. 랏사드가 라마바담 동쪽으로 가 있으래더라. 거기서 가드리안 혈맹과 만나기로 했대. 내가 세나한테는 연락할 테니까 로만이는 니가 연락하그라.”

“알았어. 그럼 나 지금 파이온에 접속할게.”

로큰롤메이지는 다급하게 전화를 끊고 자신의 컴퓨터 앞에 앉았다.

파이온 컨트롤러와 전용 헤드셋을 장착하는 그의 마음이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랏사드 인마는 또 뭐 할라고 늦는다는 기고?”

쎄미트리는 투덜거리면서 병장기를 챙기고 인근 NPC에 가서 무기를 수리하고 있었다.

* * *

“수혁 오빠, 빨리요.”

“알았어. 어떻게 하라고?”

“라마바담의 국경선에 심포니 하우스가 있어요. 빨리 그곳으로 이동하세요.”

“그래, 알았어.”

게시판의 글을 읽은 나 역시 극도로 긴장하며 파이온 게임에 접속하고 있었다. 파이오닉 레버를 거머쥔 내 손에는 물기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나 역시 이번 미드랜드 수성전이 긴장이 되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우선 심포니 하우스로 가서 NPC에게 암호를 대세요.”

“암호가?”

“가자 미드랜드로, 오라 미드랜드로.”

최상조와 김민우의 이탈로 인해 다급해진 김씨소프트는 박수혁의 작업실에 강미영의 웹서버 관리팀을 배치하고, 강미영으로 하여금 옆에 앉아 그의 플레이를 보조하게 했다.

“이번에도 암호 까먹는 건 아니겠죠?”

“알았어. 내가 무슨 붕언 줄 알아? 걱정 말라고.”

나는 파이온 게임에 접속한 후 라마바담의 동쪽마을에 있는 심포니 하우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최고의 대접전을 앞에 두고 있어서인지 심장 박동소리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머 오빠, 긴장하는 거예요?”

“아냐, 니가 옆에 앉아 있어서 그러는 거야.”

나는 손에 흥건한 물기를 허벅지에 닦으며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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