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5 무너지는 삼각 편대(3권) (16/51)

chapter 15 무너지는 삼각 편대

“지금이다! 놈들을 고슴도치로 만들어버리자!”

쐐애액.

그것은 화살이라기보다는 소나기였다. 먼지 자욱한 협곡 안으로 마치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화살비가 쏟아졌다. 그러나 소나기와는 달리 화살비는 더욱 많은 흙먼지를 일으켰다.

“크악!”

“어디서 날아오는 거… 으윽!”

철퍼덕.

화살에 맞아 타 죽어가던 켈티르가 넘어지는 바람에 낙마해서 부상당하고, 바르하 성을 빠져나온 중국의 지원군은 고요의 협곡 입구에서 방어다운 방어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죽어갔다.

“이런, 이건 또 웬 날벼락이야?”

“협곡 위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진다. 아무래도 매복이 있는 것 같아.”

“이런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있나. 어쩔 수 없다.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대로 돌파해라.”

켈티르에 탄 적병들은 폭포수 같은 화살비를 뚫고 전진, 또 전진했다.

“미친놈들, 지들이 무슨 ‘비 사이로 막가’인 줄 아나. 어디 죽어봐라.”

슈슈슉.

끊길 때가 될 법도 하건만 화살비는 계속해서 켈티르에 탄 기사들을 쓰러뜨려갔다.

화살에 맞아 켈티르 위에서 떨어지는 기사들과 협곡을 구르는 켈티르 일행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협곡을 메웠다.

화살비 속을 가르는 파공성.

큐큐웅!

퍼펑!

“으아악!”

“이런. 데이론! 멜티!”

사자 혈맹의 크리스는 자신의 바로 옆에서 터진 화염계 마법에 쓰러지는 동료를 보며 그들에게 달려갔다.

“벌써 후진이 도착한 거야?”

“여기 다친 사람들 힐링 좀 걸어주고, 나머지는 이곳을 빠져나가자. 빨리 빨리 서둘러. 씨앗 평원으로 가서 전열을 재정비해야 해!”

켈티르에 탄 기병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할 즈음에 후진을 형성하고 있는 보병들과 마법사들이 협곡 안으로 진입하면서, 화살을 쏘는 사자 혈맹을 향해 마법 공격을 퍼부었다.

“시걸, 저기 입구 쪽에 다크엘프 소서러 보이냐? 저 자식이 가장 강한 것 같다. 놈의 방어력을 무력화시켜줄 수 있겠어?”

“당근이지! 커타일 오브 디펜스.”

잿빛 오러가 시걸이라는 네크로맨서의 손을 떠나더니, 협곡에서 사자 혈맹을 향해 파이어 볼을 속사포처럼 쏘고 있는 자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 잿빛 오러가 그를 휘감기 무섭게, 비탈진 협곡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던 크리스가 활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피링.

피링, 피리링.

크리스의 손을 떠난 세 개의 화살은 정확하게 마법사의 머리에 수직으로 꽂혔다.

화살이 박힌 머리에서 불꽃이 인 마법사는 더 이상 마법 공격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녹아버렸다.

사자 혈맹의 화살 폭우를 견뎌낸 켈티르 기병들은 협곡의 중앙 부분을 돌파해 거의 협곡의 끝부분을 통과하고 있었다.

“스타리스, 로큰롤, 세나,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

“자, 간다. 체인 라이트닝.”

빠지지직.

총알 피하다 대포에 맞는다는 말처럼 어렵사리 화살 세례를 벗어난 중국의 켈티르 기병들은, 이제는 눈앞에 떡하고 버티고 있는 가드리안과 혈의 눈물 혈맹원들이 퍼붓는 마법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었다.

“끄으윽!”

스타리스뿐만 아니라 가드리안의 마법사들이 내뿜는 대규모의 마법공격은 운집해 달려오던 병진을 강타해 섬광, 폭음과 함께 지표면이 터져 나가며 피와 살점들이 비산하게 만들었다. 곧 불꽃, 뇌성 번개, 물기둥에 휩싸인 적병들은 여기저기서 켈티르에 탄 채로 약 먹은 병아리처럼 맥없이 쓰러져갔다.

가드리안의 마법사들이 진을 형성해 전개한 마법공격의 위력은 전율에 가까웠다.

잽에 맞아 정신 못 차리는 선수에게 라이트 훅과 어퍼컷이 날아오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법 공격은 세팅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켈티르를 타고 맹렬한 기세로 돌격해오는 적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몇 남지 않은 켈티르 기병들은 돌격 태세를 갖추고 우리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왔다.

거침없이 달려오는 그들을 향해 검이라기보다는 커다란 기둥에 가까운 파괴자의 검을 꺼내들고 앞으로 내달렸다.

“랏사드 님, 저들은 기병, 당신은 보병, 위험합니다.”

“그래, 랏사드. 그런 무모한…….”

놈들이 쥔 검이 시야에 들어왔다.

번쩍.

슈카캉.

병장기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휘둘린 나의 파괴자의 검은, 켈티르 위에서 내리찍던 기사의 검을 두 동강이 내고 파고들어가 기사의 몸을 머리에서부터 양분하고 마저 뚫고 들어가서 켈티르까지도 두 조각으로 갈라버렸다.

푸아악.

양분된 켈티르는 가속도 때문에 양쪽으로 갈라진 상태로 내 몸을 스쳐 지나가 한참 앞에서 갈라져 나뒹굴었다.

“저런 무지막지한 검이… 저게 검이야? 몽둥이야?”

나는 두 손으로 파괴자의 검을 부여잡고 앞뒤 가릴 것 없이 사정없이 휘둘렀다.

기세등등하던 켈티르 기병들은 협곡의 한복판에 버틴 한 명의 기사 때문에 주춤하더니 점점 속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협곡을 빠져나가던 사자 혈맹의 궁수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또다시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그렇게 그나마 몇 남지 않았던 켈티르 기병들은 협곡을 채 통과하지도 못하고 전장의 사자가 되어 사라져갔다.

“죽여라, 저 자식을 죽여! 저 앞에 선 놈이 랏사드다. 랏사드 저 개자식을 죽여라!”

중국게이머들의 말투에 나에 대한 강한 반감과 분노가 묻어 있었다.

어느새 우리가 있는 곳까지 달려온 바르하 성의 병사들은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마법을 캐스팅하는 모습이 보였다.

“방어구를 꺼내 들고 뒤로 물러섯! 놈들이 겁나게 대단위 마법 공격을 캐스팅하고 있다.”

나는 파괴자의 검을 등에 꽂고 윈드 워크 보법을 거꾸로 밟으며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콰콰콰콰!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폭음이 협곡 안에서 요동쳤다.

“프로텍션 실드.”

가드리안의 마법사들은 적의 메이지들이 마법 공격을 감행하자, 광범위한 실드를 형성해 마법공격을 막아내며 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후퇴해. 쪽수가 너무 많다.”

적군이 마법 공격을 재캐스팅하는 동안 우리는 고요의 협곡을 뒤로하고 씨앗 평원을 향해 도망쳤다.

“크하하하, 애송이 같은 자식들. 그 정도 숫자로 감히 우리를 막으려고? 쉴 틈 없이 몰아쳐. 놈들을 모조리 도륙해라. 특히 랏사드 저 개자식은 껍질을 벗겨버리자.”

적들의 무리에서 내 이름을 거론하며 큰소리 치고 있는 놈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로카나이였다.

‘짜식, 리스타트한 모양이군.’

우리가 등을 보이고 달아나자 놈들은 경신 보법을 이용해 더 빠르게 우리를 추적해 왔다.

“저 협곡을 지나 언덕만 넘으면 씨앗 평원이야. X 나게 빨리 빨리 달아나.”

“엄마얏!”

협곡을 다 빠져나와 언덕배기를 향해 뛸 무렵 등 뒤에서 익숙한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랏사드 님, 헤엘~프.”

등 뒤에서는 체력이 떨어지자 뛰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진, 적들에게 뒷덜미를 잡힐 위기에 처한 세나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쎄미트리, 나를 좀 도와줘.”

나는 몸을 180도 돌려 뒤쫓는 적들을 향해 광폭한 파괴자의 검을 휘둘렀다.

“파워 스트라이크!”

대기를 가르고 지표면을 두 쪽 낼 것 같은 파괴자의 검의 위력에 쫓아오던 적병들이 움츠러들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이야, 쎄미트리. 세나를 구해.”

세나를 에워싸고 있는 적들을 향해 쎄미트리와 병장기를 휘두르며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세나를 구출했다.

“죄송해요, 랏사드 님. 쎄미트리 님.”

“죄송하기는. 어려울 때 도와주지 않으면 어디 우리가 혈맹인가!”

“맞다. 세나, 조금만 더 힘내라. 저 언덕만 넘으면 되는 기다.”

내가 적들을 막고 쎄미트리가 세나를 부축하는 사이 놈들은 우리를 둥그렇게 에워쌌다.

“뒈지고 싶어 안달 난 놈들만 덤벼.”

파워 스트라이크 앤 페이탈 블로우(Fatal blow).

나는 마나를 불어넣은 파워 스트라이크와 페이탈 블로우를 종과 횡으로 연거푸 휘둘렀다.

후두둑.

강력한 오러를 발산하는 파괴자의 검은 평원 쪽 방향을 가로막고 선 적군을 허수아비 쓰러뜨리듯 베어 넘겼다.

우리는 사력을 다해 적들의 에워싼 포위망을 뚫고 가드리안을 뒤쫓아 씨앗 평원이 나오는 언덕배기를 넘어섰다.

“랏사드, 엎드려!”

언덕을 넘어섰을 때 눈앞에 사자 동맹이 활에 화살을 장전한 채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쎄미트리와 나는 세나를 붙들고 엎드리며 언덕 아래로 굴렀다.

슈슈슈슈.

자기 죽을 날 모르고 언덕을 오르던 바르하의 병사들은 언덕을 넘자마자 날아드는 화살 공격에 또다시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져갔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화살 공격에 씨앗 평원 입구는 죽거나 부상당한 적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계속 거침없는 화살 세례가 이어졌고, 개떼처럼 밀려오는 바르하의 군사들을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슴도치가 되어가면서도 어느새 그들은 방패를 꺼내들고 병진을 갖추었다.

뿌우뿌우.

적병들이 병진을 갖추기 시작할 때 사자 혈맹의 궁수들이 양쪽에서 병풍 걷히듯 나왔고, 파라오 혈맹의 파라오 기병들 또한 위용을 드러냈다.

“가자, 파라오의 전사들아. 적들 가슴에, 피의 불벼락을 내리자.”

두두두두두.

가속도가 붙은 파라오 혈맹의 기병들은 탄력이 붙자 성난 파도처럼 적진을 향해 몰려갔는데, 태산 같은 바위도 삼켜버릴 듯한 과감하고 거침없는 돌격이었다.

“기병이다! 마법사, 마법사들은 뭐 하고 있어? 놈들을 막아.”

응답 없는 외침이 적진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기병대를 막기 위한 마법을 캐스팅하기에는 기병들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퍼퍼퍼퍽.

파죽지세.

말 그대로 대쪽을 절단 낼 것 같은 기병들의 기세는 적들의 보병들을 가차 없이 종잇장 짓이기듯 꿰뚫고 들어갔다.

바르하의 군사들은 기병들의 검에 꿰이고 말발굽에 밟혀 무참하게 죽어갔는데, 수만의 군사들이 순식간에 사분오열 될 정도로 그 위력은 가공할 만했다.

전후좌우로 적진을 유린하며 찔러대는 기병들의 검에, 바르하의 군사들은 속절없이 죽어갔다.

나는 자세를 일으켜 기병들을 따라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타합!”

그러자 파괴자의 검에 적병들 예닐곱 명의 목이 짚단처럼 넘어갔다.

내 손에서 섬광이 번쩍할 때마다 예외 없이 십여 명의 병사들의 목이 떨어졌는데,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낫을 든 농부의 손놀림에 옥수수단이 쓰러지는 것 같았다.

“랏사드, 이 개새끼!”

뒤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시뻘건 검을 찔러 들어왔다. 눈앞의 군사들을 상대하느라 미처 뒤는 신경 쓰지 못했는데 뒤돌아보니 로카나이의 검이 나를 노리고 있었다.

놈의 검날은 이미 내 등 뒤 지척까지 와 있었다.

‘아뿔싸!’

퍼억.

검을 밀어 넣던 로카나이의 몸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뒤를 조심해야지, 혈의 눈물의 군주.”

씨앗 평원 쪽에서 깃털 장식을 한, 창이 넓은 모자를 쓴 사내가 화살을 메기며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땡큐, 크리스.”

슈슈슛.

나의 감사 인사에 크리스는 메긴 화살을 다시 날렸다.

퍼퍽.

그러자 곧 내 등 뒤에서 또 다른 병사들이 크리스의 화살에 맞고 나가 떨어졌다.

“뒤를 조심하라고 했잖아!”

크리스가 내게 소리쳤지만 그에게 감사의 표시를 한 후, 파괴자의 검을 들고 기병대에 의해 흩어진 잔병들의 목을 베어 나갔다.

“저놈들을 쫓아라, 나의 귀여운 은빛 늑대들아!”

컹컹컹.

나는 은빛 늑대 다섯 마리를 차례대로 소환해 도주하는 적들을 추적하게 했다.

꽁지 빠져라 달아나는 적들을 향해 처음 출발한 두 마리의 늑대들은 매섭게 달려들어 그들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졌다. 재빠른 동물적 몸놀림을 자랑하는 은빛 늑대들은 도주하는 적들이 간헐적으로 찔러대는 공격을 피하며 목덜미를 물고 늘어졌다.

“랏사드, 이 개새끼!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이런, 이런, 개새끼가 아니라 늑대새끼잖아. 잘 보라구.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두 마리에 세 마리 보너스를 더 드립니다. 믿을 수 없는 가격, 거기에 후불제 혜택까지. 가라, 은빛 늑대들아!”

홈쇼핑 광고 말투를 흉내 내며 놈들을 희롱하고는 늑대 세 마리를 마저 방출했다.

간혹 오크 유저처럼 몸집이 큰 적들에게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물어뜯자, 은빛 늑대의 합동 공격을 받은 적은 순식간에 체력이 떨어졌는지 사망했다.

그리고 저쪽 한편에서는 괴성을 지르며 신난 어린아이처럼 도끼를 휘두르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쎄미트리였다.

일전에 어쌔시네이트의 형가에게서 빼앗은 헤비 워 배틀액스로 도주하는 바르하의 군사들을 썩은 짚단 베듯 일방적으로 찍어 넘겼다.

“튀어, 열나게 튀어라. 모두 바르하 성으로 도망쳐라!”

호다드 성을 구원하러 나오던 바르하 성의 대군은 협곡과 평원에서 참패를 당하자 꽁지 빠진 새처럼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원에 자리 잡고 있던 가드리안의 마법사들은 도망가는 적들을 향해 공격 마법을 캐스팅했다.

“친구들, 집중 포화 준비됐나?”

스타리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패주하는 바르하의 진영을 향해 각종 마법공격이 꼬리를 물고 퍼부어졌다.

콰콰쾅.

협곡을 울리는 대폭발이 다시 이어졌고, 집중 포화를 맞은 수백 명의 바르하 군사들은 체력이 급격히 소진되어 죽고 말았다.

게다가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패주하는 그들을 파라오의 기병대가 확인사살하며 뒤쫓았다.

고요의 협곡은 때 아닌 병사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무너져버린 성벽 위로 형형색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쓰러진 시체들을 밟고 엘리트 혈맹, 쥬다스 혈맹을 비롯한 동맹군들이 호다드 성안으로 전공을 올리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처럼 진입하고 있었다.

바르하 성으로 지원군을 보냈던 호다드 성은 너무도 쉽게 성을 내어주고 말았다.

“한국 개새끼들아,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이 지랄이냐, 지랄이. 니들이 이러고도 무사히 게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쥬다스 프리스트, 저 자식 주둥이를 공업용 재봉틀로 박아버리지.”

“킥킥, 엘리트야. 저놈은 내가 맡을 테니까 니는 구경이나 하고 있그라.”

“어림없는 소리, 저 자식 죽이고 내가 성주가 될 겁니다.”

최상조와 김민우는 함락된 성안에서 호다드 성의 성주인 고틴을 눈앞에 두고 서로 목을 치겠노라고 싸우고 있었다.

“이런 씨방새들, 나를 만만하게 보는 모양인데 둘 다 덤벼 이 개쇄이들아.”

“허허, 그 자식 정말 입이 거치네.”

엘리트PK는 샤이닝 소드를 번쩍이며 호다드 성의 성주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엘리트! 뭐 하는 기고. 놈은 내 차지라니까.”

최상조와 김민우가 성주 자리를 놔두고 싸우고 있을 때 박만호는 그 둘에게 동시에 메시지를 보냈다.

[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 지금 한가하게 성주 자리 놓고 싸울 때야? 두 사람은 우리가 고용한 요원이야, 요원. 제발 정신 차리고 다음 목표나 정해. 성주는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박만호의 메시지에 최상조는 헤드셋을 집어 던지며 버럭 화를 냈다.

“씨파, 이제는 게임까지 감시하고 지랄이가?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상조 아저씨, 어떻게 하죠?”

김민우가 최상조에게 귓속말로 물어왔다.

“시바, 우짜기는. 시키는 대로 해야제. 호다드 성은 다른 혈맹 놈들한테 넘겨주야지. 재주는 누가 부리고 돈은 누가 챙긴다 카드만.”

최상조는 울분을 삭이며 다시 헤드셋을 집어 들었다.

아직까지 화가 덜 풀렸는지 파이온 컨트롤러를 힘을 주어 조작하자 쥬다스 프리스트의 양손에서 거대한 구체에 스파크가 피어올랐다.

“짱깨 시탱아, 뒈지뿌라! 썬더 라이트닝!”

빠지지직.

호다드 성의 군주는 방패를 들고 쥬다스 프리스트의 썬더 라이트닝을 막아냈다. 그러나 방패 하나로 엄청난 마나가 섞인 전격계 마법을 전부 감당해낼 수는 없었다.

“끄응.”

호다드 성주의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져갔다.

“아쿠아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쥬다스 프리스트의 양손에서 거대한 물기둥이 뿜어져 나갔는데 연타를 얻어맞은 호다드 성주는 허공으로 몸이 떠올라 십여 미터를 날아가 성벽에 부딪히며 쓰러졌다.

다 죽어가는 그를 향해 쥬다스 프리스트는 실성한 사람처럼 팔을 휘저으며 쉴 새 없이 아쿠아 스트라이크를 쏟아 부었다.

“커헉, 한국 새끼들… 어디 두고 보자… 우리가 이렇게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호다드 성의 성주 고틴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저주를 토해냈다.

성주는 죽었고 이제 호다드 성의 성물만 취하면 되는 상황에 엘리트PK와 쥬다스 프리스트는 돌연 성 밖으로 향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러게. 공성전에서 수훈을 거둔 두 사람이 그냥 사라지다니.”

“이게 웬 떡이냐? 그럼 먼저 주운 사람이 임자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성안에서 호다드 성주와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각 혈맹의 군주들이 성물을 차지하기 위해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뭐야? 이 자식이. 이건 내 차지야, 비켜!”

“무슨 개소리야. 지금까지 구경만 하고 있던 자식이. 공성전 때도 제일 후미에서 구경만 하고 있더니만.”

“뭐? 이런 XX, 너 말 다 했냐? 결투다!”

“오냐, 누가 무서워할까 봐?”

그들은 난데없이 성물을 앞에 두고 결투를 벌였다.

“저거 봐라, 이 무슨 한심한 짓거리고.”

쥬다스 프리스트는 엘리트PK와 함께 유유히 호다드 성을 빠져나오며 성물을 놓고 싸우는 게이머들을 비웃었다.

“민우야, 니 작업실로 갈 테니까 커피나 한잔하자.”

“그러세요.”

호다드 성 앞을 걸어 나오던 쥬다스 프리스트와 엘리트PK의 발밑에 원형의 빛 무리가 일어나더니 그들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 * *

최상조는 파이온 전용 컨트롤러와 헤드셋을 벗어 던지고 작업실을 빠져나와 김민우의 방으로 건너갔다.

“어서 와요.”

“이런 닝기리 씨바, 이 짓거리도 짜증나서 못해먹겠다.”

“참으세요. 이만큼 좋은 환경도 없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만날 감시당하는 분위기에서는 도저히 게임 못하겠다.”

최상조는 김민우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그때 김민우의 방문을 열고 박만호 부장이 들어왔다.

“최상조, 뭐 불만 있어?”

“아뇨… 뭐… 그래도 그렇지예. 그렇게 날마다 감시하는 게 어디 있습니꺼?”

“너희들이 똑바로 해봐. 지금 이 프로젝트가 장난인 줄 아나? 박수혁 봐, 얼마나 착실하게 요구대로 잘해주고 있어? 그런데 너희들은 뭐야? 걸핏하면 고수들 찾아서 결투나 벌이고, 아덴에 환장해서 몹사냥이나 퀘스트만 하러 다니고. 그러라고 비싼 돈 주고 너희들을 고용한 게 아니란 말이야.”

최상조의 성질도 알아줬지만 성격이라면 박만호 부장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언제부턴가 하대조로 그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 호다드 성은 우리가 빼앗은 거 아입니까?”

“그래그래, 알았어. 오늘은 수고했어. 그러니 다른 생각 말고 프로젝트에 열중해.”

박만호는 그들을 타이른 후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김민우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컴퓨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 짱나네, 씨팔. 더러워서 이 짓 못해먹겠다. 민우야, 내는 술이나 한잔하고 올란다.”

“그러세요. 쩝, 저는 잠시 쉬렵니다.”

김민우는 자신의 방에 있는 침대에 가 드러누워 버렸다.

“같이 안 마실래?”

“아뇨, 저는 됐어요.”

최상조는 물끄러미 김민우를 바라보다가 그의 작업실을 나와 담배를 피우다가 가래침을 뱉고는 엉기적엉기적 김씨소프트 빌딩을 빠져나왔다.

“이 동네는 어떻게 된 게 술집이 없노?”

그는 혼잣말로 구시렁거리며 길가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최상조가 택시를 타고 사라지자 빌딩 맞은편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이 택시를 따라 유턴하며 그 뒤를 따라갔다.

“여기는 K, C가 처음으로 둥지 밖으로 나왔다.”

“알았다. 잘 감시하도록.”

차 안에 있던 사내는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택시를 뒤쫓아 갔다.

* * *

바르하 앞까지 적들을 뒤쫓았던 파라오 기병대는 평원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남아 있는 잔병들을 소탕했다.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그들이 흘린 피가 평원을 붉게 물들인 곳에서 나는 가드리안 혈맹, 사자 혈맹과 함께 헤라클레스의 파라오 혈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전원이 휴먼 나이츠로 구성된 파라오 기병대가 우리 쪽을 향해 말을 몰아 그 용용한 위용을 드러냈다.

“뭐라고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지.”

“뭘요, 덕분에 우리도 재미있게 게임 했습니다.”

파라오 혈맹의 군주인 스피드 헤라클레스는 사람 좋은 웃음을 하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혈의 눈물, 레벨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실력들이 대단하더군요.”

“아, 그런 과찬의 말씀을… 흐흐.”

“자,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도 파이온 안에서 좋은 만남을 가져보도록 하죠.”

혼돈의 활을 멘 크리스가 말하자 프레드릭이 진일보한 제안을 내놓았다.

“그럼, 이참에 동맹을 결성해버릴까요?”

“동맹이라고요?”

프레드릭의 제안에 헤라클레스는 조금 멈칫했다.

나 역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 다른 혈의 눈물 멤버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요, 이번 계기로 동맹을 결성해서 짱깨들만 전문적으로 소탕하는 동맹을 만드는 겁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평상시에는 자기 게임 하다가 연락되면 모여서 짱깨 소탕하고, 짱깨들 성 빼앗고 그러면 재밌을 것 같은데…….”

“랏사드 님 생각은 어떠신지?”

“글쎄요… 좋은 생각인 것 같은데…….”

[머뭇거리지 마시고 제안 받아들이세요. 프로젝트에도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미영에게서 날아온 메시지.

[그래? 그래도 되겠어?]

[네, 좋아요. 멤버 구성도 훌륭해요. 파라오의 기병대와, 프레드릭의 마법사들, 크리스의 궁병들, 그리고 전천후 만능 게이머 랏사드.]

‘전천후 만능 게이머? 얘가 또 사람 비행기 태우네.’

“좋습니다. 그럼 동맹을 구성하도록 하죠.”

“그럼 제가 동맹을 제안했으니 동맹군 이름과 동맹의 깃발, 문장은 제가 고안하도록 하겠습니다.”

프레드릭은 자신이 귀찮은 일을 떠맡겠다며 나섰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럼 서로 우호 혈로 등록을 해놓도록 하죠.”

“전 벌써 등록해놨는데.”

“자, 그럼 연락은 프레드릭이 맡아서 하도록 하고, 오늘은 피곤할 테니 이만 접도록 하죠.”

사자 혈맹의 크리스는 게임을 잠시 쉬겠다는 뜻을 비쳐왔다.

“이런 크리스, 체력이 엉망인걸. 그럼 우리 파라오 혈맹은 다른 곳으로 떠나겠습니다. 나중에 프레드릭 통해서 연락되면 다시 만나도록 하죠.”

“예, 크리스, 헤라클레스. 모두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헤헤.”

“아뇨, 아뇨. 오히려 우리가 랏사드 님 덕분에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자구요.”

사자 혈맹과 파라오 혈맹이 떠나자 프레드릭의 가드리안도 우리에게 인사를 해왔다.

“우리도 오늘 혈맹 모임이 있어서 오늘은 여기서 그만…….”

“네, 나중에 또 봬요.”

인사를 끝낸 가드리안 혈맹도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이야, 랏사드. 이제는 완전히 전국구로 노네.”

“그러게요. 이젠 우리 같은 초보들은 눈에도 안 들어오시겠어요.”

쎄미트리와 세나가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 나는 항상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해. 만약 혈의 눈물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야. 모두들 너무 고마워.”

“에이, 랏사드. 그건 아니지. 오히려 우리가 고마워해야지.”

로큰롤은 웃으며 정겹게 이야기했다.

“게임에 너무 몰입했더니 눈이 빠질 것 같아요. 저는 그만 쉴래요.”

“그래, 내도 배고프데이. 내도 그만 쉴란다.”

[수혁 오빠, 그럼 오빠도 쉬세요. 어제는 제가 얻어먹었으니 오늘은 제가 대접할게요.]

미영의 메시지가 뜨자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정말? 뭐 사줄 거야?]

[간만에 신선한 요리 먹으러 갈까요?]

[신선한 요리?]

[회요. 제가 잘 가는 일식집 있는데 오늘 회나 한 사라 하시죠.]

[회? 오, 나 날것으로 먹는 것 되게 좋아하는데. 좋았어.]

“저기, 그럼 나도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서 이만 …….”

“그래그래, 오늘은 로만이도 없는데 다들 그만 접고 다음에 또 보재이.”

쎄미트리와 세나가 로그아웃하자 로큰롤도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나도 슬슬 파이온 게임에서 빠져나왔다.

* * *

똑똑.

“들어와.”

“호호. 저예요, 미영이.”

“알고 있었어. 같이 저녁 먹기로 해놓고 새삼스럽게 노크는.”

“오빠 방에 들어올 때는 항상 노크를 먼저 해야겠더라구요.”

헉.

“그건 진짜 오해라니까.”

“알아요, 알아. 농담으로 그냥 해본 소리예요.”

우우웅, 우우웅.

미영이가 웃으면서 나를 갈구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액정을 보니 요왕(로만)이라고 적혀 있었다.

‘로만이가 무슨 일이지?’

“여보세요.”

“형, 저 요왕이요.”

“그래,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시험공부 하다가 너무 지겨워서요. 한 게임 하자고 전화 드렸는데요.”

“이런, 어쩐다? 나 지금 저녁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는데. 그리고 다른 멤버들도 방금 전에 다 로그아웃 했어. 오늘 너 없는 동안에 멋지게 한판 했거든. 그래서 다들 피곤하다고…….”

갑자기 전화기 안쪽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정말 자기들끼리만 재미 보면 어떡해요. 진짜 서운하네. 도대체 저는 언제 끼워주실 건데요?”

“알았어, 알았어. 진짜 오늘은 약속 있으니까 나중에 시간 내서 제대로 전수해줄게.”

“진짜죠? 약속 꼭 지키세요. 자꾸 이러면 혈맹 탈퇴하는 수가 있어요.”

로만이 녀석은 항상 혈맹을 무기로 나를 협박해왔지만 나는 그런 로만이를 슬슬 달랬다.

“알았어. 진짜 미안하다. 형이 오늘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나중에 꼭 가르쳐줄게. 로만아, 그럼 나 바빠서 전화 끊을게.”

“알았어요. 혼자서라도 즐겨야죠, 뭐. 나중에 봐요. 재밌게 노시구요.”

딸깍.

“원, 자식도.”

“누구예요?”

“응, 우리 혈맹 중에 초딩이 하나 있는데…….”

내 말에 미영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깔깔거렸다.

“아, 그 애? 만날 자기만 키워달라고 졸라대는 그 허접한 실력의 아이.”

“응… 배고픈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내 말에 미영은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저랑 외출하는 건데, 그렇게 입고 나갈 건 아니죠?”

허걱.

그러고 보니 나는 운동복 바지에 티셔츠 하나 달랑 입고 있었다.

“아, 그래그래. 알았어. 그럼 조금만 기다려.”

* * *

중국 전통 복장을 입은 사내를 따라 몇 명의 정장 차림의 어깨들이 란저우 PC방으로 들어갔다.

“헉, 혀, 형님. 이런 누추한 곳까지 웬일로.”

로카나이의 잘못된 정보 때문에 호다드 성까지 빼앗기고 졸지에 수천의 아이템까지 빼앗겨버린 란저우의 책임자는 무자비하게 로카나이를 구타하다가, 란저우 지부 삼합회 조직원들이 PC방으로 들어오자 내시처럼 그의 앞에 달려가 엎드려 절을 했다.

“병신 같은 새끼들아,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둥그런 선글라스를 끼고 가느다란 수염을 단 중국 전통 의상인 치파오를 입은 사내는 엎드려 있는 PC방의 책임자의 가슴팍을 걷어차 버렸다.

“아이쿠!”

엎드려 있던 PC방의 총책은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형님,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실수를 만회하겠습니다.”

“이번에도 랏사드라는 자식에게 당했다고?”

“…….”

“왜 대답이 없어?”

“그… 그렇습니다.”

치파오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미국에서 건너오신 분이 있다. 앞으로 우리 삼합회 부회장님이 하시는 사업에 우호적으로 협력하기로 하신 분이야.”

선글라스의 사내는 뒤에 서 있는 금발의 미국인을 PC방에 있는 이들에게 소개했다.

“하이, 나는 스미스 잡스라고 해요. 게임 하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도와드릴 테니까요.”

옆에 있는 중국인들에 비해서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미국인은 자신을 스미스 잡스라고 소개했다.

도쿄에서 CONY와 불리자드가 조우한 후, 그 회의의 결과물로 일본은 삼합회의 부회장인 찐용이 최근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게임 아이템 사업에 협조하기로 했다.

또한 삼합회 부회장인 찐용이 최근 들어 합법적인 조직자금 마련을 위해 시작하는 게임 개발 사업에 CONY사의 기술력을 지원해주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물론 그 조건으로 중국의 거대한 시장에 CONY의 차세대 게임인 플레이 스테이션 3시리즈를 암묵적으로 지원해주고, 한국의 게임들에 대해서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고 한국 게임의 시장 확대를 저지하기로 합의해줬다.

또한 미국의 불리자드사는 중국 내 시장 교두보를 보장 받는 조건으로, 현재 중국 내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한국의 파이온 게임을 비롯한 여타 한국의 게임들에 대해서 소비자들의 불만족도를 높이는 네거티브 전략의 일환으로, 불리자드사의 해킹 전문가를 파견하여 한국의 게임들에 대한 악의적인 해킹을 시도하기로 야합했다.

“기회는 두 번 다시 없다. 한 번만 더 우리의 자금줄에 악영향을 준다면 여기 있는 모든 놈들을 소리 소문 없이 죽여 버릴 거야.”

“예, 형님.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란저우 PC방의 총책은 손이 발이 되도록 선글라스 사내에게 빌고 또 빌었다.

“도대체 랏사드라는 자가 누구입니까?”

스미스 잡스라는 사내는 어설픈 중국어로 빌고 있는 총책에게 물어왔다.

“저희도 놈이 누군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국 사람이라고 잠정적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에요. 몇 달 전부터 갑자기 나타나 무차별적으로 우리 중국 게이머들을 PK하고 중국인 소유의 성들을 빼앗고 다니고 있습니다. 오늘만 해도 놈의 얍삽한 사기에 말려들어 수천 명이 아이템을 빼앗기고 게임 내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후후, 그럼 놈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부터 확인해보죠.”

“예?”

스미스 잡스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컴퓨터로 향하자 PC방 총책과 덩화(로카나이를 운용하는 게이머)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스미스 잡스는 빈 컴퓨터에 앉아 자신이 가지고 온 시디를 컴퓨터에 집어넣고 한참 동안 작업을 했다.

“저기, 아까 그 게이머 닉네임이 뭐라고 했죠?”

“랏사드, 랏사드입니다.”

스미스는 덩화의 설명에 그의 닉네임으로 IP주소를 해킹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컴퓨터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작업이나 스미스는 그가 준비해 온 별도의 프로그램을 이용해 ‘랏사드’의 IP를 추적했다.

“갓 댐 잇(God Damn it)!”

“왜 그러나, 스미스?”

갑자기 스미스가 욕설을 퍼부으며 컴퓨터를 주먹으로 치자 선글라스의 사내는 궁금해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누군가가 놈의 계정에 파이어 월(fire wall-방화벽)을 쳐 놓았어요.”

“파이어 뭐? 그게 뭐야?”

“일종의 보안장치죠. 정보 보안을 위해 정보통신망의 불법접근을 차단하는 시스템이에요. 그것도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쳐 놓았군요. 아무래도 놈은 해커 수준의 컴퓨팅 능력을 가진 자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도 아니라면 그의 주위에 그를 도와주는 전문가들이 있다고 봐야겠죠.”

“뭐, 뭐라고? 게이머 한 명이 해커 수준이라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선글라스 사내는 분통을 터뜨리며 애꿎은 스미스에게 화를 버럭 냈다.

“그럼 놈이 누군지 알아낼 수 없단 말인가?”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그때 한쪽에 쪽치고 서 있던 덩화가 슬며시 몸을 내밀며 선글라스 사내에게 말했다.

“저기, 제가 랏사드라는 자의 정보를 조금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너 이 개자식, 허튼 수작 부리지 마. 네놈이 알려준 허위 정보 때문에 오늘 이 모양이 된 거 아냐?”

덩화가 나서자 PC방의 총책인 사내는 욕설을 퍼부었다.

“아닙니다. 정말 이번에는 틀림없이 알아낼 방법이 있습니다.”

“너 이 개새끼, 이번에도 잘못된 정보면 가만두지 않겠어.”

“예, 믿어주십시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덩화는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이 앉아 있던 컴퓨터로 달려가 앉았다. 그리고 쉴 틈 없이 파이온에 접속했다.

* * *

스스스스.

수혁이 옷을 갈아입고 있을 시간에 비탄의 마을에 로만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쩝, 혼자 무슨 재미로 게임 한다? 배울 사람도 없고, 실력은 안 되고. 쩝.”

로만은 비탄의 마을을 거닐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금 전까지 큰 전쟁이 있었던 탓인지 비탄의 마을에는 그리 많은 게이머들이 접속해 있지는 않았다.

“여어, 로만21 오랜만이구나.”

“누구?”

로만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임에 접속하면서 쎄미트리, 로큰롤, 세나의 아이디를 클릭해봤으나 그들은 게임에 접속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랏사드 역시 약속이 있다고 했고, 지금 상황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올 사람은 없었다.

“나야, 나. 벌써 잊어버렸어? 나야, 로카나이.”

로만의 시선에 다크엘프의 실리엔 나이츠 로카나이가 들어왔다.

“아, 로카나이 형. 반가워요. 나는 또 누군가 했네. 사실 게임 안에서 나 알아볼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그래? 그럼 앞으로는 형이 놀아줄게.”

“정말요? 아싸~ 근데 형, 혈의 눈물에는 가입하셨어요?”

로만의 말에 로카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예? 왜요? 군주가 안 받아줬어요?”

“어, 뭐 그냥 그렇게 됐어. 그 이야기는 그만 하고 로만아, 나랑 몬스터 사냥할래? 내가 발록 오크 쉽게 사냥하는 방법 가르쳐줄게.”

“진짜요?”

로만은 그동안 랏사드가 자신을 키워주지 않아 내심 서운했는데, 뜻밖에 로카나이가 친절하게 먼저 사냥법을 가르쳐준다고 하자 신이 나서 속내를 드러냈다.

“그래, 몬스터 사냥도 하고 나랑 같이 가면 내가 고급 아이템도 너한테 선물해줄게.”

“와, 진짜요?”

“그래그래, 우리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거든.”

“좋아요. 그럼 지금 당장 오크 때려잡으러 가요.”

“그래그래, 후후후후.”

로만과 로카나이는 비탄의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루돌프 사원으로 발록 오크를 사냥하기 위해 이동했다.

좀 전 대단위 규모의 전투가 있어서인지 사원에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저기, 발록 오크가 보인다.”

“그러네요.”

“발록 오크는 말이야. 일반 오크들과는 달리 스피드가 빠르고 담벼락도 기어 다닐 수 있거든. 그러니까 일반적인 무기보다는 원거리 무기로 사냥하는 게 좋아. 일종의 게릴라 전술처럼 치고 빠지면서 공격해야지.”

“하지만 전 궁수가 아닌걸요. 저는 평범한 기사타입인데.”

“괜찮아. 기사들도 단검(Dagger) 던지기 같은 중거리 공격이 가능하니까, 그런 방법으로 하나씩 요리하면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오크들도 조금씩 체력이 빠져 죽게 되지.”

“그렇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지금까지 무식하게 인파이트로만 붙었으니.”

로만은 큰 교훈을 얻기라도 한 양 신나했다.

“그럼 내가 가지고 있는 메인 단검을 줄 테니까 이걸 사용해봐. 이래 봬도 B급 그레이드에 물리공격력 80, 마법공격력이 64라구.”

“정말요? 와, 진짜 저 주시는 거예요?”

로카나이는 아이템 선물하기를 클릭했다.

[로카나이 님께서 메인 단검을 선물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로만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예’를 클릭했다.

[로만21 님께서 로카나이 님의 선물 ‘메인 단검’을 수락하셨습니다.]

로만은 뜻밖에 횡재라도 한 사람처럼 감격해했다. 그런 로만을 지켜보면서 로카나이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진짜 주실 줄 몰랐어요. 고마워요. 근데 이거 받아도 되는 건가요?”

“그럼, 당연하지. 발록 오크 무사히 잡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검도 선물해줄게.”

“지, 진짜요?”

“나는 실없는 소리나 하는 그런 사람이 아냐.”

“와, 내 파이온 인생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우리 랏사드 군주는 말로만 키워준다고 하고 키워주지도 않던데. 내가 로만이가 아니라 우리 랏사드 형이 로만이라니까. 말로만.”

“하하하, 랏사드라는 혈의 눈물 군주가 너 키워주기로 했나 보네?”

“예, 처음에 저 보고 혈맹 가입하라고 할 때부터 키워주기로 약속하고 혈맹 가입시켰거든요.”

게임을 하고 있던 덩화(로카나이)는 로만의 말에 눈을 번뜩였다.

“그래? 네가 혈의 눈물에 가입한 게 아니라 랏사드가 가입하라고 했어?”

“그렇다니까요. 시시하게 몬스터나 사냥할 게 아니라 공성전을 하자면서. 공성전 하려면 혈맹을 조직해야 하는데 자기 레벨이 초보여서 누가 혈맹 가입을 안 할 것 같으니까, 저보고 하자고 했어요. 저는 그냥 몬스터나 사냥하고 아이템이나 주우면서 레벨업하고 가끔씩 파티원들끼리 몬스터 사냥하고 그러는 게 더 재밌는데, 우리 수혁이 형은 지금은 파이온이 전시 상태니까 해킹과 계정 도용을 일삼는 짱깨들을 혼내주자면서 저보고 혈맹에 가입해달라고 했어요.”

덩화는 로만이 무심결에 말한 랏사드의 본명 ‘수혁’이라는 대목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수혁? 랏사드 군주 본명이 수혁인가 보지?”

“예. 수혁요, 박수혁. 우리는 오프라인에서 파티 모임도 했어요. 근데 웃긴 건 우리 혈맹에 세나라는 누나가 있는데 본명이 송세원이거든요. 근데 엄청 못생겼어요. 근데 이 누나가 수혁이 형 보고 반했는지 노골적으로 찝쩍거리더라니까요. 그래도 세원이 누나 돈은 많은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이더라구요.”

덩화는 다른 멤버들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지만 일부러 로만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척하면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정보를 캐내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래? 세나5 님이 송세원인가 보지? 하긴 원래 온라인에서 강자가 오프라인에서 강자는 아니더라고. 원래 채팅 같은 거 해보면 엄청 캠발 받는 애들이 많아서 번개 했다가 돈만 날리는 경우 허다하잖아.”

덩화(로카나이)는 변죽을 두드릴 줄도 알았다.

그는 지능 있게 인내심을 가지고 로만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쎄미트리는 경상도 사람인데 성격이 아주 더러워요. 술 마시다가 싸움도 할 뻔했어요.”

“경상도? 거기가…….”

덩화(로카나이)는 하마터면 자신이 경상도라는 지명을 모른다는 것을 들킬 뻔했다. 그는 재빨리 말을 끊고 순발력 있게 대척했다.

“아, 쎄미트리는 경상도 사람인가보구나. 그럼 랏사드나 세나, 쎄미트리 모두 한국 사람들인가보구나.”

“예? 그럼요. 당연하죠. 저도 한국 사람인걸요. 참고로 저는 초딩입니다.”

“초딩? 초글링이었어? 하하하, 그랬구나. 어쩐지 말하는 게 귀엽더라구.”

“근데 로카나이 형님은 한국 사람 아닌가봐요?”

“아. 나는 미국 유저야. 미국 사람도 꽤 파이온 게임을 즐기거든.”

“그렇구나. 이거 반가운걸요. Nice meet you.”

로만은 로카나이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에 되지도 않는 영어를 구사했다.

“얘는 갑자기 웬 반갑다는 인사야. 우리 알게 된 게 오늘이 처음도 아닌데.”

“헤~ 그냥 외국사람 만나면 괜히 영어가 하고 싶어지더라구요. 히히.”

덩화(로카나이)는 슬슬 마수를 드러냈다.

“로만아, 나 랏사드 군주한테 혈맹 가입한다고 했다가 퇴짜 맞았거든. 그래서 말인데… 나 랏사드 군주한테 직접 혈맹 가입시켜달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혹시 랏사드 군주 연락처 알면 좀 가르쳐줄래?”

로만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혹시라도 자기가 수혁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로카나이가 주기로 한 검을 주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번호 부를 테니까 받아 적으세요.”

“그래, 잠깐만.”

“010-****-****.”

“로만아, 고맙다. 로만이 너는 어디 살아? 나는 한국 하면 서울하고 강남만 아는데. 거기 땅값이 되게 비싸다면서?”

덩화(로카나이)는 박수혁이 사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 우선 의심받지 않으려고 로만의 거주지를 먼저 물었다.

“저요? 저는 안양 사는데 혹시 아세요?”

“안양? 글쎄,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잘은 모르겠다. 한국에 몇 번 가본 적은 있는데 안양은 잘 모르겠네.”

“그래요? 에이 참, 세나 누나가 강남 사는데.”

“그래? 와, 그럼 세나 되게 부자야?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명품족이라고.”

“명품, 그게 뭐야?”

“아, 말하자면 긴데. 그냥 그런 거 있어요.”

“혹시 로만아, 랏사드 군주님 어디 사는지는 모르니?”

“글쎄요, 저번에 가리봉 어디 산다고 하는 것 같던데 잘은 모르겠어요. 왜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참, 이러다 발록 오크 사냥은 언제 하냐. 우선 내가 가르쳐준 대로 단검을 이용해서 오크를 사냥해봐. 위험하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예썰, 그렇지 않아도 기다렸습니다. 헤헤.”

로만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발록 오크를 향해 달려가 로카나이에게서 선물 받은 메인 단검을 던졌다.

푸욱!

“케게겍.”

단검이 날아와 자신의 가슴에 박히자 성난 발록 오크는 로만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로카나이 형, 이제는 어떡하죠?”

“우선 서서히 뒤로 빠지면서 검을 꺼내. 위험하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예.”

로만은 로카나이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슬슬 뒷걸음질 쳤다. 그런 로만을 향해 발록 오크가 무섭게 덮쳐왔다.

“안 되겠어요. 놈이 너무 빨라요.”

푸슉.

로만이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자 뒤에 서 있던 로카나이는 자신의 검을 꺼내들고 백마 탄 왕자처럼 나타나 발록 오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광채가 뿜어져 나오더니 발록 오크는 몸뚱이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와, 대단해요. 그건 무슨 검인데 그렇게 위력이 세죠?”

“이거? 많이 봤을 텐데. 엘리멘탈 소드야. 갖고 싶어?”

“예에?”

너무 뜻밖의 말에 로만은 어쩔 줄 몰랐다. 마음속으로는 ‘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속보이는 것 같아 머뭇거리고 있었다.

“갖고 싶구나? 그럼 줄게.”

[로카나이 님께서 엘리멘탈 소드를 선물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로만은 이번에는 조금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예’를 클릭했다.

[로만21 님께서 로카나이 님의 선물 ‘엘리멘탈 소드’를 수락하셨습니다.]

“로카나이 형,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은혜는 무슨. 나는 한번 키워주기로 한 캐릭은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거든. 그리고 나중에 혈의 눈물 오프라인 파티 모임 하면 나한테 연락 좀 줄래? 나도 직접 박수혁 씨랑 세원 씨랑 만나보고 싶거든.”

“그래요? 와, 재밌겠다. 오늘부터 영어회화 연습해야겠네요. 히히. 근데 세원이 누나 보면 실망할 텐데. 토할지도 몰라요. 멀미약 드시고 오세요. 헤헤.”

“그래, 암튼 모임 있으면 나한테 꼭 연락 줘야 돼.”

“형, 연락처 가르쳐주세요.”

“나는 미국에 있어서 연락이 안 될 거야. 그냥 모임 정해지면 미리 나한테 쪽지나 귓속말 남겨줄래?”

“그렇구나. 미국이라 핸드폰은 안 되겠구나. 그럼 제가 모임 정해지면 미리 연락 줄게요.”

“그래. 고맙다, 로만아. 그럼 계속해서 발록 오크나 사냥해볼까?”

“예. 정말 재밌겠다. 야호!”

로만은 어린이날 공원에 놀러가는 아이처럼 신나했다. 자신이 방금 한 짓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서는 로만뿐만 아니라 아무도 알지 못했다.

* * *

화려한 고층건물들 너머로 도로만 건너면 7, 80년대 풍의 낡은 건물들이 마천루와 대조적인 동거를 하고 있는 곳, 영등포.

최상조는 그곳에서 택시를 세웠다.

현대식 건물들과 화려한 네온사인 이면에는 어두운 사창가가 있는 곳이다. 최상조는 인근 술집에 들어가서 간단한 찌개 안주에 소주를 시켰다. 그의 머릿속에는 좀 전 박만호에게 들은 훈계가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씨팔놈, 지가 몇 살 더 많다고 반말지거리고. 재수 없게시리.”

술을 마신다기보다는 소주를 털어 넣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최상조는 소주 한 잔을 한 번에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었다.

쓰디쓴 소주 맛이 느껴졌는지 잠시 최상조의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캬아!”

쾌감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장탄성.

그는 찌개가 나오기 전에 나오는 기본 안주를 주섬주섬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내 X도 쪽팔려가 더는 이 짓 못하겠다. 이래 봬도 내가 울 동네에서 작업장 운영하면서 돈 좀 만지고 있었는데 괜히 김씨소프트 박만호 그 자식한테 속아가 이리 올라온 기다. 내 무신 영화를 보겠다고 이 지랄을 하고 있는지 몰겠네.’

그랬다.

박수혁과는 달리 최상조를 섭외하러 가는 자리에 국정원과 사이버 수사대는 끼어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봉화로 최상조를 찾아온 사람은 영업부장 혼자였다. 후일에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야 그는 이 일이 국가적인 프로젝트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그때 그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발을 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최상조는 국내에서 작업장을 돌리는데 인건비 등의 문제로 채산성이 떨어지자 같이 작업장을 동업하던 친구를 중국으로 보내 중국 내에서 싼 인건비와 저렴한 물가를 이용해 대단위의 파이온 작업장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비싼 물가에 위험성을 감안하면서 굳이 작업장을 돌리느니 차라리 중국에서 저렴한 원가에 안전하게 캐릭터를 키우고, 아이템을 거래하는 게 훨씬 낫겠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국정원과 사이버 수사대가 가미된 프로젝트는 꺼림칙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시가 몇천만 원 대의 고급 아이템을 장착시켜주고 수당과 별도의 월급, 인센티브까지 주겠다는 게임회사의 제안에, 봉화에 있는 PC방은 아르바이트생들과 친구에게 맡겨두고 상경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아이템 습득 같은 것은 자꾸 게임회사의 태클 때문에 저지당하고, 하고 싶지 않은 공성전만 강요당하자 최상조는 맡은 일에 점점 짜증이 났다.

게다가 오늘은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박만호에게 반말과 훈계까지 들으니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요참에 확 아이템 팔아치우고 날라버리까?’

프로젝트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자 그의 머릿속에는 점점 나쁜 생각들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아이다, 도망치면 사이버 수사대나 국정원 자식들이 쫓아올 기다. 그라믄 우짜지… 음…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네.’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킨 생태찌개가 나왔다.

그는 얼큰한 국물에 살짝 담겨 있는 생태의 하얀 속살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선술집에 혼자 앉아 소주 두 병을 비운 최상조는 술값을 계산하고 영등포 근처를 거닐다가 인근 PC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검은 그림자가 멀리서 미행하고 있었다.

“C가 영등포 인근에서 PC방으로 들어간다. 지시를 기다리겠다.”

검은 그림자는 누군가와 교신을 하더니 최상조를 따라 PC방으로 들어갔다.

“여기 파이온 게임 되는 자리로 두 자리 주이소.”

“두 자리요?”

게임방 알바생은 이상한 눈빛으로 최상조를 바라보다가 그에게 자리를 내줬다.

“거기 16번, 17번에 앉으세요.”

“아, 여기에?”

“예, 예.”

최상조는 16번 컴퓨터에 앉아 파이온 게임에 접속했다.

“최상조가 파이온 게임에 접속했습니다.”

“알았다. 계속 감시하도록. 이쪽에서는 놈의 IP와 경로를 추적하겠다.”

최상조는 16번 컴퓨터에서 쥬다스 프리스트로 로그인을 한 후, 17번 컴퓨터를 다시 켜달라고 한 후 17번 컴퓨터에 앉아 옵 캘포드라는 닉네임을 가진 또 다른 아이디로 로그인을 했다. 그는 경북 봉화에서 PC방 겸 작업장을 운영하면서 친인척이 아닌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가지고 여러 개의 계정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16번 컴퓨터로 돌아간 최상조는 로타카 대륙에 있던 쥬다스 프리스트를 라마바담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다시 17번 컴퓨터에 간 후 자신의 또 다른 캐릭터인 옵 캘포드를 라마바담으로 이동시켰다.

두 개의 캐릭터를 가지고 한 장소로 이동시킨 최상조는 쥬다스 프리스트가 가지고 있는 최고급 아이템들을 옵 캘포드에게 양도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템 중에는 김씨소프트에서 프로젝트를 위해 지급한 ‘이교도의 복음서’, ‘악마의 뿔피리’, ‘테베의 눈물’, ‘드라고닉 미스릴 풀 플레이트’, ‘쉐르반의 황금 로브’, ‘마제스터의 로브 세트’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씨소프트에서 지급한 아이템만 해도 현금 거래로 2억 원을 호가하는 장비였다.

김씨소프트에서 그에게 프로젝트를 제의해왔을 때부터 언젠가는 지급받은 아이템을 팔아치우고 잠적할 계획을 세우던 최상조에게 박만호의 자극은 도화선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옵 캘포드에게 쥬다스 프리스트의 고급 아이템들을 양도한 후, 17번 컴퓨터에 앉아 선물 받기를 수락한 후 옵 캘포드의 계정으로 친구 찾기를 시도했다.

[로그인한 친구 찾기: 페이탈 비트레이어 - 검색.]

[페이탈 비트레이어 님이 세바스티앙 서버에 접속해 있습니다.]

‘후후후, 경문이 이 짜식 세바스티앙에서 놀고 있구나.’

[친구에게 귓속말하기.]

딸깍.

최상조는 세바스티앙을 클릭한 후 키보드를 두드렸다. 파이온 전용 헤드셋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장소가 오픈되어 있는 PC방이라 비밀을 기하기 위해 일부러 키보드를 이용하는 그였다.

[페이탈 비트레이어, 경문아. 내다, 행님이다. 상조 행님.]

오래지 않아 대화창이 번쩍였다.

[이 누꼬? 상조 아이가. 을마 만에 연락하는 기고? 그간 우째 지냈노?]

최상조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며 귀에 걸린 입을 연신 방긋거리며 그에게 답글을 썼다.

[내사 마 말도 못하게 바빴다 아이가. 무슨 광개토 대왕인가 뭐신가 하는 프로젝트 맡아가 억수로 바빴다. 와, 요새 그 중국 놈들이랑 우리 같은 놈들이 한국 사람 주민등록번호 도용하고 해킹하고 그런다 아이가. 그것 때문에 김씨소프트하고 사이버 수사대하고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안 카나.]

[그렇나? 그런 이야기를 와 인자 하노?]

[마, 그렇게 됐다. 그동안 그 자슥들 눈치 보느라고 니한테 연락할 겨를도 없었다. 또 감시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나? 그라믄 지금은 와 뜬금없이 연락했노?]

최상조는 그가 작업장을 굴리면서 알게 된 친구인 나경문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실은 내가 그 프로젝트에 참가하면서 억쑤로 비싼 아이템들을 게임회사에서 받았거든.]

비싼 아이템이라는 말에 나경문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무슨 아이템들이고?]

[마제스터의 로브 세트, 이교도의 복음서, 테베의 눈물, 드라고닉 미스릴 풀 플레이트, 쉐르반의 황금 로브, 뭐 기타 등등 말도 못하게 비싼 것들 억수로 받았다.]

[뭐라꼬? 마제스터의 로브세트랑 뭐시기라고? 그게 도대체 얼마 어치고? 어림잡아 2억 정도 하겠는데?]

[그 정도 될 끼다.]

[근데 그래서 우쨌다는 기고?]

최상조는 나경문의 물음에 주위를 한번 살핀 후 더욱더 조심스럽게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도 줄여가면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이거 니한테 빼돌리고 사이버 수사대랑 김씨소프트 배신 땡긴 뒤에 내도 니 따라 중국으로 건너갈 기다.]

[뭐라꼬? 니 미친나? 한국은 니가 맡고, 중국에서 작업장 굴리는 것은 내가 하기로 안 했나?]

최상조와 나경문은 한국에서 작업장을 돌리다가 채산성 문제를 비롯한 제반 문제들 때문에 나경문이 중국으로 건너갔다. 나경문은 중국에서 값싼 인건비를 이용해 여러 개의 작업장을 돌리면서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미국, 일본, 유럽 등 세계 각지의 게이머들에게 키워 놓은 캐릭터를 판매하고 고급 아이템을 거래하면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고, 최상조는 국내에서 그런 그와 은밀하게 내통하고 있었다.

최근에 문제가 되었던 파이온 게임에 대한 계정 도용문제도 사실 중국인과 삼합회가 벌인 것도 많았지만, 국내에서 건너간 한국인들이 현지인을 고용해 벌인 건수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일이 그렇게 됐다. 지금 쥬다스 프리스트 앞으로 되어 있는 것하고 옵 캘포드 앞으로 되어 있는 것, 전부 니한테 양도하고 내 중국으로 건너가서 그것 팔아치우고 봉화에 있는 작업장 정리하고 하면 중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 못 잡겠나?]

[무신 소리고. 지금 쥬다스 프리스트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만 팔아도 환전하면 큰돈 만질 수 있을 기다. 그라믄 어여 내한테 선물하기 눌러라.]

[알았다. 잠깐만 기다리그래이.]

그때 최상조를 등지고 앉아 있던 국정원 직원의 핸드폰이 심하게 울렸다.

“빨리 최상조를 검거하도록 해. 어서.”

“예.”

등지고 있던 의자를 박차고 국정원 요원 K가 방금 막 아이템을 선물하려던 최상조의 팔을 비틀어 결박했다.

“뭐고? 니는 누꼬?”

“최상조, 너를 주민등록법 및 전자상거래법 위반혐의로 체포한다.”

“뭐? 뭐고, 이 개새끼. 이거 몬 놓나?”

요원을 향해 욕설을 퍼붓던 최상조는 더욱더 강하게 옥죄어 오는 힘 때문에 신음을 지르며 컴퓨터에 몸을 처박고 찌그러졌다.

갑작스런 소동에 놀란 PC방 알바생이 국정원 요원 K를 제지하려고 다가왔으나, 그는 안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인 후 최상조를 결박한 상태로 밖으로 끌고 나갔다.

같은 시각 김씨소프트사 빌딩 인근의 지하실에서는 최상조의 또 다른 계정인 옵 캘포드의 경로를 분석해 그의 친구로 등록되어 있는 페이탈 비트레이어 나경문의 IP를 추적하고 있었다.

“놈의 주소가 파악되었습니다. 아마 북경 쪽인 것 같군요.”

“어서 중국 요원들에게 놈의 위치를 알려주고 놈을 검거하라고 해. 놈이 눈치 채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고.”

“예. 서둘러. 빨리 북경에서 가장 빠른 곳에 있는 요원들에게 연락해. 놈의 위치가 파악됐다고.”

사건은 이렇게 된 것이었다.

광개토 대왕 프로젝트를 준비해오던 국정원과 사이버 수사대, 김씨소프트는 3명의 에이전트를 섭외하면서 일부러 최상조를 집어넣었다. 사이버 수사대에서는 일찍부터 최상조와 나경문을 주시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경문이 국내에서 작업장을 굴리다가 중국으로 건너간 후 최상조가 자신의 주민등록 번호로 가입한 쥬다스 프리스트를 통하지 않고 자꾸 다른 계정을 이용해 나경문과 연락을 취했고, 그 또한 비밀리에 하는 바람에 나경문의 소재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정원과 사이버 수사대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범죄행위들이 중국인들만의 소행이 아니라 국내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한국 사람들의 범행도 상당수라는 것을 파악하고, 이런 조직들을 소탕하기 위해 다각도로 작전을 펼쳐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최상조와 나경문의 관계를 바탕으로 최상조를 프로젝트에 끌어들여 그에게 고급 아이템을 주면서 그를 관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나경문의 소재지를 파악할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중국 내에서 범법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내국인들을 소탕할 단초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계산한 것이다.

그러나 최상조는 국정원의 계산대로 그렇게 빨리 미끼를 물지 않았고, 국정원은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그의 꼬리를 물 수 있게 된 것이다.

최상조를 자신의 차에 수갑을 이용해 묶어둔 국정원 요원은 급히 PC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최상조가 사용하던 옵 캘포드를 이용해 나경문에게 말을 남겼다.

[경문아, 미안하다. 화장실 갔다 오느라. 그라고 내 지금 김씨소프트사에서 호출 왔거든.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 줄 테니까 기다려라.]

[뭐꼬? 내는 또 지금 당장 아이템 준다고 하는 건 줄 알고 엄청 기대했다 아이가. 알았다. 짜석, 싱겁기는. 괜히 바쁜 사람 불러가… 나중에 보자. 잘 가그라.]

[그래그래, 알았다. 또 연락할게.]

요원은 급히 컴퓨터를 끈 후 밖으로 나와 최상조를 연행해 어딘가로 차를 몰았다.

한편 호다드 성을 빼앗아 김씨소프트사에게 나름대로 할 일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 김민우는 또다시 파이온 게임에 접속했다.

한 번의 폭풍우 같은 공성전을 끝낸 그는 제 버릇 개 못준다는 속담이 있듯이 또다시 각지의 고수들을 찾아 PK를 하거나 일대일 대결을 신청할 계획이었다.

‘어디 간만에 짱깨들 중 노블리스에 오른 자식들 좀 죽이러 다녀 볼까나?’

김민우는 최상조가 국정원 측에 연행되어 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파이온 대륙의 짱깨 노블리스를 찾아 파이온 가상공간을 헤매고 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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